제488화
남문우는 화가 난 척 그녀에게 쏘아붙였다.
“후회하지 마.”
그는 두 팔을 벌리고 가벼운 발걸음으로 무리 속에 뛰어 들어갔다.
그가 들어가자마자 곧장 한 여인이 달려들었다. 여인은 빠르게 팔을 뻗어 그의 머리에 꽂힌 자색 깃을 가져가려 했다. 남문우는 몸을 비틀어 가볍게 피했다. 하지만 여인은 포기하지 않고 두 팔을 허우적댔다.
그를 거의 품에 안을 것 같은 기세였다. 남문우는 그녀가 이토록 저돌적일 줄은 몰랐는지 황급히 뒷걸음질 치다 다른 사람과 부딪히고 말았다.
백천범과 관중들이 웃음을 터뜨렸다. 여인은 어디서 그런 힘이 나는지, 더 맹렬히 그를 뒤쫓았다. 남문우는 하는 수 없이 걸음을 재촉하며 무대를 빙빙 돌았다. 그를 뒤쫓는 여인은 춤 솜씨가 매우 뛰어났다. 사뿐거리는 춤사위로 그에게 따라붙었고, 아름답게 허공을 수놓는 선에 관중들은 연신 박수를 보냈다.
웃고 있던 백천범은 어딘가 익숙한 느낌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얼굴을 가리고 있어서 자세히 볼 수는 없었지만 공작 깃을 유심히 살펴보니 그녀는 남농화였다. 두 사람의 머리에 꽂고 있는 깃은 여제가 상으로 내린 것이었다.
비취색, 녹색, 자색, 분홍색, 노란색이 섞인 깃으로, 누구도 차별하지 않는다는 걸 보여 주기 위해 여제가 똑같은 걸로 준비했다. 남원 전체를 통틀어서 이들과 똑같은 모양의 깃은 단 두 개뿐이었다.
남문우도 그녀가 남농화인 걸 모를 리 없었다. 그녀는 작년보다 춤 실력이 부쩍 늘었기에, 남문우는 허둥지둥 도망쳐야만 했다. 그 또한 도망치는 게 전부라면 손쉽게 자리를 뜰 수 있었지만 전통을 무시할 수 없었다. 많은 군중이 지켜보고 있으니 규율대로 쫓고 쫓기기만을 반복했다. 남농화가 다시 손을 뻗자 그가 덥석 낚아채며 조용히 속삭였다.
“그만해.”
얼굴을 가린 면사를 사이에 두고, 남농화가 그를 향해 활짝 웃었다. 그의 말에는 신경도 쓰지 않는 듯했다. 어차피 그녀가 남문우를 좋아하는 건 딱히 비밀도 아니었다. 그녀는 그를 처음 본 그날부터 사랑에 빠졌다. 그를 위해서라면 뭐든지 할 수 있었다. 황위를 포기하는 것마저도, 기꺼이.
남문우는 탕자였다. 여인들과 사이가 좋아 늘 어여쁜 여인들을 한 무리씩 이끌고 다녔다. 그는 모든 여인들과 가깝게 지냈지만, 그녀는 그가 마음에 둔 여인이 아무도 없다는 걸 알아차릴 수 있었다.
그렇기에 그의 곁에 어떤 여인이 머무르든, 그간 신경쓰지 않았다. 남농화는 그녀가 남문우에게 얼마나 중요한 사람인지 그 또한 알 거라고 믿었다. 감정을 떠나, 남제화에게 맞서려면 그녀와 손을 잡아야 승산이 있었다. 그러니 남문우가 자신을 인정하고 있다고 믿었다. 그래, 백천범이 나타나기 전까진.
여제가 백천범을 위해 열어 준 연회에서부터, 남농화는 한 가지 사실을 깨달았다. 남문우는 자신보다 백천범에게 흥미를 느끼고 있었다. 그녀를 바라보는 남문우의 시선이 어찌나 의미심장하던지. 남농화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모습이었다.
어찌 아이까지 낳은 여인에게 관심을 둔단 말인가? 남원의 개방적인 분위기가 정조에 별다른 의미를 두진 않는다고 해도, 남씨 성을 가진 황족들은 자신의 배필이 정조를 지키길 바랐다. 그 때문에 남농화는 남문우의 관심이 일시적이리라 여겼다. 혹은 장난을 치고 있는 것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를수록, 심상치 않은 기류를 느낄 수 있었다.
아이를 낳은 과부가 사랑하는 남자를 빼앗아가다니, 가당키나 한 일인가? 남농화에게는 참을 수 없는 일이었다. 남문우는 그녀의 남자였다. 그녀 말고는 아무도 그와 어깨를 맞댈 수 없었다.
그래서 오늘, 그녀는 남문우의 깃을 빼앗아야만 했다. 모든 사람 앞에서 그녀와 남문우가 진정한 한 쌍이라는 걸 보여 줄 생각이었다.
두 사람이 실랑이를 벌이는 동안, 백천범은 열정적으로 춤을 추던 한 여인의 손에 이끌려 무리 안으로 들어왔다. 백천범은 춤을 잘 추지 못했지만 제법 그럴싸한 흉내를 내었다.
그녀도 다른 귀족 여인들처럼 얼굴을 면사로 가린 상태였다. 구애에 실패하면 난처한 상황이 벌어질 테니 얼굴을 가리는 게 보통이었다. 때문에 다른 이들은 그녀가 그저 남문우를 따라다니는 많은 구애자 중 한 명이라 생각했다.
무릇 화령절에는 신분을 떠나 누구든 행복을 좇을 권리가 있지 않던가. 백천범이 무리 안으로 들어오자 많은 사내의 시선이 그녀에게 쏠렸다. 아무래도 그녀의 재미난 춤사위 때문이리라. 한 청년이 천천히 그녀 곁으로 걸어왔다.
백천범은 누가 다가오는지도 모른 채 그저 즐겁게 춤을 추고 있었다. 남농화처럼 어려운 동작은 하지 못했기에 왼쪽으로 세 발짝, 오른쪽으로 세 발짝 움직이는 기본적인 동작만 했다. 단순하긴 해도 박자를 맞춰야 하니 그녀는 춤에 잔뜩 심취한 상태였다.
신이 난 그녀가 활짝 웃었다. 면사 너머로 희미하게 보이는 미소에 그 청년은 심장이 쿵 내려앉는 기분을 느꼈다. 청년이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그녀의 깃에 손을 뻗었다. 그제야 청년을 알아차린 백천범이 서둘러 머리를 감싸며 도망치려 했다.
그러나 쉽게 도망칠 수 없었다. 앞뒤로 많은 이들이 그녀를 에워싸고 있었으므로. 규칙에 맞지 않는 춤사위 때문에 도망치지 못하도록 벌칙을 주는 것이었다.
멀리서 그 모습을 알아차린 남문우의 얼굴이 대번에 굳어지더니 남농화를 저 멀리 밀쳤다. 자신도 모르게 힘을 쓸 정도로 다급한 터였다. 바닥에 넘어진 남농화는 믿을 수 없다는 얼굴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그들은 신앙을 가진 사람들이건만, 어찌 신의 규율을 파괴할 수 있단 말인가?
남문우는 규율 따위를 신경 쓸 여유가 없었다. 그는 재빨리 백천범에게 달려가 사람들 틈에서 그녀를 이끌고 나왔다. 그녀에게 꽂혀 있던 깃은 이미 사라진 후였다. 그러나 남문우는 그녀를 보호하는 데 급급했다. 깃을 누가 가져갔는진 몰라도 상관없었다. 그가 곁에 있는 한 그따위 꼴사나운 규칙은 없느니만 못했으니까!
남문우는 백천범을 끌고 미친 듯 달렸다. 열 명 남짓의 젊은 사내들이 포기할 줄도 모르고 그들 뒤를 쫓았다. 화령절은 짝을 찾는 날이었기에 공정함과 공평함이 무엇보다 우선시되었다. 설령 귀하디귀한 남 장군이라도 규율을 깨뜨릴 수는 없었다. 불상 앞에서는 모든 이가 평등한 존재였다.
그들은 남 장군을 대제사大祭司에게 데려가 이치를 따져 물을 심산이었다. 여인을 데리고 도망친다는 건 뒤가 켕긴다는 의미가 아닌가? 뒤를 쫓던 청년들은 더욱더 의기양양해졌다. 비록 저 여인이 귀족이라 성혼이 이루어질 수 없다 해도, 깃을 갖게 된 이상 쉽게 포기할 수는 없었다.
남문우는 백천범이 뒤처질까 싶어 빨리 뛰지 못했다. 여인이라 잘 뛰지 못할 것이라 여긴 그의 생각은 오산이었다. 그녀의 달리기 실력은 결코 그에 뒤지지 않았다. 심지어 더 빠른 것 같기도 했다. 바람에 면사가 뒤집힌 순간, 활짝 피어난 꽃처럼 붉게 벌어진 그녀의 입술이 드러났다.
정신없이 달리던 두 사람은 비좁은 골목으로 뛰어 들어갔다. 담장 양옆으로 물건이 가득 쌓여 있는 걸 보니 평소엔 인적이 드문 모양이었다. 두 사람을 쫓는 이들의 발소리가 가까워지자 백천범은 남문우의 손을 놓고 담장에 기대 세워진 얇은 대나무 장대를 힘껏 넘어뜨렸다. 장대들이 와르르 무너지며 뒤쫓던 청년들의 길을 가로막았다.
가장 앞서던 청년의 손에는 오색 빛 공작 깃이 들려 있었다. 우르르 무너지는 장대 앞에서 황급히 걸음을 멈춘 그가 고개를 들었다. 때마침 앞서가던 여인이 뒤를 돌아보고 있었다. 바람에 면사가 휘날린 순간, 빼어난 용모가 그의 시야를 가득 메웠다. 여인은 빠르게 멀어져 갔지만, 청년은 그 자리에 붙들린 듯 멍하니 서 있었다. 귓가에는 어여쁜 웃음소리만이 가득했다.
뒤따라오던 청년들이 호들갑을 떨며 소리쳤다.
“왜 보고만 있는 거야? 쫓아야지. 남 장군이 규율을 어겼는데 내버려 둘 거야?”
깃을 잡은 청년은 아무 말도 들리지 않는 듯 가만히 서 있더니 한참 후에야 천천히 몸을 돌려세웠다. 그가 공작 깃을 옷깃 안에 소중히 찔러 넣었다.
“됐어. 귀족 가문 아가씨인데, 뭐. 어차피 올려다보지도 못할 분이야.”
“네가 화령을 가져왔잖아. 원치 않으면 다른 것과 맞바꿔야 한다고.”
청년이 고개를 저었다.
“화령을 가진 것만으로도 충분해.”
“화령이 밥을 먹여 주는 것도 아니고. 쌀 세 가마니는 달라고 해야지.”
청년은 빙그레 웃기만 했다. 함께 온 이들은 시시함을 느낀 듯 곧 제각기 흩어져 갔다.
백천범은 그를 쏜살같이 앞질러 갔다. 바람결에 그녀의 낭랑한 목소리가 섞여 들려왔다.
“어디 쫓아와 봐!”
뒤를 돌아보며 환하게 웃는 그녀의 모습은 애교가 넘치면서도 기세등등했다. 남문우는 빠르게 멀어지는 그녀를 한참이나 바라보았다.
그의 온몸이 북이라도 된 것처럼 쿵쿵 울리고 있었다. 그는 씩 웃고는 눈부신 햇살을 맞으며 빠르게 달려 나갔다. 그의 앞길을 막을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는 전속력을 다해 그녀에게 향했다.
백천범은 빠르게 달려가는 느낌이 좋았다. 어떤 것에도 구속되지 않는 자유로운 기분을 느낄 수 있었다. 그러다 무심코 뒤를 돌아보니 한 사내가 그녀를 쫓아오고 있었다. 어쩐지 낯이 익은 광경이었다. 예전에도 누군가 이렇게 그녀를 쫓아오지 않았던가? 커다란 체구에 흐릿한 얼굴… 그러나 그 사내가 남문우인지 아닌지, 확신이 들지 않았다.
마침내 남문우가 그녀의 팔을 덥석 붙잡았다.
“그만 뛰어, 힘들지도 않아?”
백천범이 그의 손을 뿌리쳤다. 이상하게도 그가 그녀에게 손을 대면 어렴풋한 기억이 훅 꺼져 버리며 기이한 기분이 샘솟았다.
조금 굳은 그녀의 표정을 본 남문우가 물었다.
“왜 그래? 너무 힘들어?”
백천범이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예전에도 날 뒤쫓느라 이렇게 뛰어온 적 있어?”
남문우가 코웃음을 치며 눈썹을 치켜올렸다.
“아니, 네가 매번 내 뒤를 쫓아왔지.”
“내가 왜 널 뒤쫓아?”
“내가 너무 잘생겼나 보지, 뭐.”
백천범이 그를 위아래로 훑어보더니 픽 웃었다.
“잘생기긴 했어. 여장을 하면 분명 나보다 예쁠 거야.”
“…….”
두 사람의 발길이 닿은 곳은 성호城壕 근처였다. 수면은 금을 한 겹 뿌려 놓은 듯 눈부시게 반짝였다. 백천범이 아치교에 올랐다. 면사는 이미 벗어 버린 뒤라, 삐져나온 잔머리가 약한 바람에 가늘게 흩날렸다. 그녀가 아득한 눈망울로 멍하니 수면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꼭 갈 곳을 잃은 듯했다. 괜스레 가슴이 미어진 남문우가 입을 열었다.
“닙닙아, 잠시만 기다려. 금방 돌아올게.”
“어디 가는데?”
“중요한 걸 가져와야 할 것 같아.”
백천범이 눈썹을 치켜올렸다.
“여인들 머리에 꽂힌 화령? 난 알아서 돌아가면 되니깐 어서 가 봐.”
남문우가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화령은 그렇게 함부로 가져오는 게 아니거든. 가져가는 순간 책임을 져야 한다고. 난 네가 생각하는 것처럼 이리저리 마음을 주는 사람이 아니야.”
백천범은 그저 빙그레 웃더니 다시 수면을 바라보았다.
남문우는 좀 더 변명하고 싶었지만 그만두었다. 좌우를 훑어보니 그가 배치해 둔 호위병들이 곳곳에 숨어 있었다. 그는 묵용감과 달랐다. 그가 곁에 있는 한, 백천범에게는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으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