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87화
황제의 어가가 단폐 아래 놓였다. 황제가 편히 내려올 수 있도록 학평관이 손을 뻗었다. 무관 출신인 황제는 그런 행동을 싫어해 본체만체 무시하는데도 학평관은 매번 똑같이 행동했다. 낙숫물이 댓돌을 뚫는다고 하던가, 황제는 점차 제왕이 갖춰야 할 겉치레에 익숙해져 갔다.
때로는 막강한 권력이 행동을 구속하는 법이다. 까마득히 높은 곳에 서 있는 그를 많은 사람들이 우러러보는 듯하지만, 동시에 일거수일투족을 지켜보고 있지 않은가. 그의 사사로운 행동마저 눈에 담고 있으니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황제는 가끔 자신을 되돌아보다 슬픔에 잠기곤 했다. 어느새 자신은 그가 가장 싫어하던 부류의 사람이 되고 말았다. 권력의 중심에 서고 나니 손바닥 뒤집듯 변덕이 죽 끓는 사람, 조정에서는 대신들과 각을 세우고 자신의 공간으로 돌아온 뒤에는 하인들을 겁에 질리게 하는 그런 사람으로.
우울한 기분에 잠긴 그는 반짝이는 금빛 옥좌에 앉아 문무백관들이 절을 올리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그들은 대전이 떠나가라 우렁찬 목소리로 황제 폐하 만세를 외쳤다. 황권과 천위가 여지없이 드러나는 순간이었다. 그러나 이 순간, 그는 세상 사람들의 존경보다도 자신을 향해 흉포하게 소리치던 그 목소리가 그리웠다.
“말 안 들으면 저한테 맞을 줄 알아요!”
이 세상에서 유일하게, 그녀만이 그에게 손을 댈 수 있었다. 그때만큼은 그도 다른 이들과 별다른 바 없는 평범한 사람이었다. 육신에 피가 흐르고 숨을 쉬는 사람. 쉽게 웃고 사소한 행동에 즐거워하며 행복을 알던 사람. 하지만 지금은 까마득히 높은 곳에 홀로 서서 모든 이에게 추대를 받고 있다. 그런 그의 공허함과 쓸쓸함은 누가 알아줄까?
그는 자신에게 손찌검을 하던 그녀가 필요했다. 설령 그녀에게 맞아 상처투성이가 된다 해도 좋았다. 그저 그에게 돌아오기만 하면, 더는 바랄 게 없었다. 그는 짙게 피어오르는 슬픔을 숨기기 위해 눈을 내리깔았다.
천범, 꿈에라도 나타나 주오. 한 번이라도 좋으니, 내게 얼굴 좀 보여 달란 말이오. 이제 그대의 모습마저 잊을 것 같소.
대전의 신하들은 마치 넋이 나간 듯한 황제를 힐끔거리며 두 눈을 끔벅였다. 무슨 반응이라도 보이는 게 인지상정인 것을……. 감히 황제를 재촉할 수 없었던 신하들은 서로 눈치만 주고받을 뿐이었다.
호부 상서 양원송梁元松이 잠시 망설이더니 대열 앞으로 나와 예를 올렸다.
“폐하, 세수 개혁에 대해 신은 식구 수와 밭에 따라 균등히 할당하는 게 옳다고 생각합니다. 강남 지역뿐만 아니라 전국적으로 그 수치를 은냥으로 환산하면 부자들의 탈세를 막을 수 있으리라 사료됩니다. 무엇보다 식구 수대로 세금을 내는 것은 지속할 수 있는 근본이자…….”
차분하게 말을 이어가고 있는데 황제가 갑작스레 말을 끊었다.
“오히려 가난한 백성들에게 부담을 주지 않겠는가? 식구를 숨기려 할 수도 있을 테고, 그리되면 세수 유실은 물론이고 부역이 가능한 장정들을 논밭에 보내야 하네. 각종 농지세, 부역세, 잡세 등도 한데 섞일 테지. 전국적으로 시행한다면 혼선을 빚을 테니 적당한 지역을 찾아 시범으로 운영해 보고 문제가 없을 시 확장해 보도록.
세수는 국맥國脈의 근간이네. 국고가 가득 차야 건장한 병사들을 유지할 수 있고 천하가 태평하지. 내우외환이 없어야 나라가 태평하고, 백성들이 잘살아야 세금을 걷을 수 있네. 다들 짐의 뜻을 이해하겠는가?”
대신들은 다들 경악했다. 아무리 봐도 딴생각을 하는 것처럼 보였는데, 황제는 신하들의 말을 한 글자도 빠짐없이 듣고 있었다. 게다가 정곡을 찌르는 견해까지 내놓았다.
문무백관들 중 무관들은 황제를 존경해 마지않았지만 문관들은 암암리에 비평을 늘어놓곤 했다. 과하게 냉정하고 독단적인 성격은 군대를 이끄는 데 적합할지 몰라도 나라를 다스리기엔 조금 부족하다는 평가를 내리곤 했다. 그러나 이제 보니 그들의 생각이 틀렸다. 지금 옥좌에 앉아 있는 그는 대황자와 태자보다 군주의 미덕을 잘 갖추고 있었다.
대전 밖에서 붉은 해가 힘차게 떠올랐다. 영구는 붉게 타오르는 햇살을 받으며 꼿곳이서 있었다.
막 순시를 돌고 온 가동이 여유롭게 영구 곁으로 다가오더니 웃으며 예를 갖췄다.
“영 대인, 일찍 나오셨습니다.”
영구가 그를 힐끔 바라보았다.
“가 대인께서도 늦진 않으셨군요.”
가동이 손을 허리에 얹으며 말했다.
“나한테 잘 좀 대해 줄 수 없어? 관직이 높다고 억압할 수 있단 생각은 하지 말고.”
영구의 태도는 여전히 담담했다.
“관직이 일급만 더 높아도 죽일 수 있다고들 하지 않습니까.”
“됐다, 됐어. 너랑 입씨름 안 할란다.”
가동은 서글픈 목소리로 말했다.
“예전엔 우리 둘이 같이 먹고 자고 바지도 나눠 입었잖아. 한데 일 년 사이에 나한테 이렇게 거리를 두다니.”
영구가 곧바로 답했다.
“형님은 몸이 워낙 튼실해서 제 바지 못 입습니다.”
“나한테 구박을 안 하면 네가 죽기라도 하냐?”
가동이 코웃음을 쳤다.
“안 알려 줬다고 날 원망이나 하지 마. 기홍이 곧 임자를 찾을 것 같으니까.”
영구는 조용히 앞만 바라보았다. 아무것도 들리지 않는다는 얼굴이었다.
“그래, 말 안 한 걸로 치자.”
가동은 성이 난 얼굴로 고개를 젓더니 이내 몸을 돌려세웠다.
막 발걸음을 떼려는데 영구의 팔이 그의 앞을 막아섰다.
“누굽니까?”
“뭐가 누구야?”
“임자가 누구냐고요.”
가동이 어처구니없다는 얼굴로 픽 웃었다.
“하, 정말 대수롭지 않게 여기나 했네.”
그가 영구 주변을 돌며 히죽거리기 시작했따.
“쯧쯧, 기홍이 누구한테 시집가는지가 왜 궁금한데? 어쨌든 좋은 사람이야. 이미 폐하께 혼사를 청한 것 같으니 내게 물어보지 마. 말 안 해 줄 테니까. 폐하께서 허락하시면 알 수 있을 테니 기다리고 있으라고.”
그는 영구의 어두운 얼굴을 바라보며 의기양양한 기세로 뒷짐을 졌다. 어찌나 속이 후련한지 어깨까지 절로 들썩였다. 그가 몸을 돌려세운 순간, 허리춤에서 극심한 고통이 밀려오더니 팔이 뒤로 휙 꺾였다. 통증을 느낀 가동이 곧장 소리를 질렀다.
“너 이 자식, 감히 대전 앞에서 방만하게 굴다니. 폐하께서 죄를 물으실지 겁도 나질 않아?”
영구는 아무 말도 없이 손에 힘을 줄 뿐이었다. 가동은 숨을 헉헉 들이켜다 지켜보기만 하는 호위병들에게 욕을 퍼부었다.
“뭣들 하는 것이냐, 어서 도와주지 않고! 난 너희의 상관도 아니란 말이냐?”
한 호위병이 난처한 얼굴로 말했다.
“영 대인께서도 소인들의 상관이십니다. 직위도 가 대인보다 더 높으신데…….”
가동은 거의 피를 토할 것처럼 성을 냈다.
“이런 망할 놈들, 너희 두고 보자. 본 대인이……!”
영구가 더욱더 힘을 실으며 말했다.
“그렇게 높으신 분이 꼭 사달을 내셔야겠습니까? 참 대단하십니다.”
“아오, 너 정말 부러뜨릴 작정이야? 어서 놔. 임자가 누구인지 알려 주면 되잖아!”
영구는 그제야 손을 놓고 차가운 눈빛으로 주변을 훑었다. 어느새 삼삼오오 몰려 구경하던 호위병들은 곧장 순시를 도는 척 자리를 떴다.
가동은 팔을 문지르며 투덜댔다.
“영구야, 내가 말했지. 폐하의 성정이 변하시는 건 원인이 있어서라고. 근데 너는? 어떻게 이 형님한테까지 손을 쓸 정도로 악독해질 수 있어? 우선 너한테 물어봐야겠어. 정말 기홍한테 장가 안 갈 거야? 안 갈 거라면 뭐 하러 남 일에 그렇게 신경 써?”
영구가 미간을 살짝 찌푸리자 가동은 곧장 한 걸음 물러났다.
“말할게, 말할게. 예친왕이야. 너도 알지? 저택에서 지낼 때도 그분이 기홍을 마음에 들어 하셨잖아. 그땐 폐하께서 안 된다고 하셨지만, 지금은 달라. 기홍도 나이가 찼잖아. 비록 첩이긴 해도 친왕에게 시집을 가는 거니깐 좋은 일이지. 폐하와의 각별한 사이를 봐서라도 억울한 일을 당하진 않을 거야. 네가 걱정할 필요…….”
“기홍도 승낙했답니까?”
“안 할 이유가 뭐가 있겠어?”
가동이 또 한 걸음 뒤로 물러나며 말을 이었다.
“예친왕께서 나이가 좀 많긴 하지만, 원래 나이 차이가 있으면 여인을 더 아껴 주는 법이래. 이건 폐하께서 하신 말씀이잖아.”
폐하라는 말에 영구의 얼굴이 더욱더 어두워졌다. 그러나 그뿐이었다. 다시 제 위치로 돌아간 영구는 그 자리에 꼿꼿이 서 있을 따름이었다.
가동은 그런 영구의 모습을 보더니 한숨을 푹 내쉬었다.
“영구야, 네가 이럴 때마다 참 낯설다. 사람이 바뀐 건 아닌가 의심스러워. 내 팔을 꺾으면서까지 듣고 싶어 하더니, 반응이 고작 이게 다야?”
* * *
수확의 계절답게, 가을이 오니 꽃이 만발하고 열매가 맺혔다. 남원 백성들에게 가을은 사랑을 수확하는 계절이기도 했다.
팔월 스무사흘째 되는 날은 남원의 화령절花翎節이었다.
이날 여인들은 머리에 화려한 색의 화령(공작 등의 깃)을 꽂았다. 대부분 아버지나 오라버니가 구해온 꿩의 깃을 꽂았고, 귀족 여인들은 공작 깃 장식을 달았다. 청년들도 깃을 꽂았는데 단색이 주를 이루었다.
색이 단순할수록 더 좋은 의미였다. 그중에서도 검은색이나 자색을 최고로 쳤다. 검은색은 힘을, 자색은 기량을 뜻했다.
황궁 앞 광장에서는 종일 고금과 북소리가 울려 퍼졌는데, 음악에 맞춰 젊은 남녀가 전통춤을 추었다. 만약 마음에 드는 이가 생기면 상대의 머리에 꽂힌 깃을 뽑았다. 마음에 들지 않는 상대가 깃을 뽑았을 경우, 온갖 방법을 써서 자신의 깃을 지켜야 했다. 쫓고, 쫓기는 와중에 춤도 제대로 춰야 하니 주변을 둘러싼 관중들은 연신 박수를 치며 청년들을 응원했다.
만약 마음이 통하면 자리를 빠져나가 으슥한 곳에서 정을 나누거나 사랑의 증표를 주고받았다. 관계가 분명해지면 중매인에게 부탁해 각자의 집에 혼담을 넣었고, 길일을 택해 백년해로를 맺었다.
남문우와 백천범이 도착했을 때, 광장은 이미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었다. 각양각색의 화려한 옷이 바람에 나부꼈고 젊은 남녀들이 음악에 맞춰 흥겹게 춤을 추고 있었다.
남문우는 화령절에 가장 환영받는 사람이었다. 수려한 그가 눈썹을 치켜세우며 살짝 건드러진 태도를 보일 때면 여인들은 한눈에 반하곤 했다.
흰 장포를 입은 남문우의 깨끗한 얼굴이 더욱 도드라졌다. 봉황을 닮은 길쭉한 눈과 높은 콧대, 웃음기 없는 얇은 입술에 여인들의 시선이 내내 머물렀다.
백천범은 여인들이 춤을 추면서도 그를 빤히 바라보는 걸 알아차리고 조금 우스웠다.
“다들 널 쳐다보는데, 안 가 봐도 돼?”
남문우가 눈썹을 살짝 치켜세웠다.
“날 잡아먹으려 들걸.”
백천범이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그럴 리가. 하여튼 잘난 척은.”
“안 믿겨?”
백천범은 자신의 공작 깃을 만지더니 헤헤 웃었다.
“저들이 얼마나 대단한지 그럼 한번 보여 줘 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