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86화
서 태후는 수원상에게 기회를 만들어 주기 위해 온갖 궁리를 다 짜냈다. 마침 황유도가 다가와 올해 꾸민 꽃배가 유독 예쁘다며 배를 탈 것인지 물었다.
이는 다시없는 좋은 기회였다. 서 태후는 황유도에게 황제에게도 청할 것을 분부했다.
궁에는 배를 타고 달을 감상하는 오랜 풍습이 있었다. 황제는 매년 태명호에서 비빈들을 데리고 꽃으로 장식한 배를 탔다. 잔잔하게 흔들리는 배에서 감상하는 달은 우아하고 고상한 정취가 있었다.
서 태후가 배를 타고 싶다는 말에 황제는 자연스레 그녀를 따라나섰다. 두 모자만 타기에는 조금 적막할까 싶어, 진왕과 몇몇 종친 형제들을 함께 불렀다. 거기에 학평관과 기홍, 월규까지 대동한 후 호숫가로 향했다.
나루터에 도착하니 서 태후가 이미 도착해 있었다. 옆에는 수원상이 단아하게 서 있었다. 그들은 법도에 따라 순서를 기다리고 있었다. 배에 탈 땐, 황제가 먼저 오른 뒤 서 태후가, 그 뒤에 나머지 사람들이 신분과 서열에 따라 승선하는 게 관례였다.
올해 새로 만든 꽃배는 더욱더 커진 선체와 우뚝 솟은 돛대를 자랑했다. 각종 등불이 배 위를 길게 수놓았고 등불 안에는 수수께끼가 들어 있었다. 선수와 선미에는 서서 구경할 수 있는 커다란 공간이 있었고 옆에는 둥근 의자가 놓여 있었다. 선실에는 탁자와 의자를 마련하고, 탁자 위에는 차와 간식이 준비해 두었다. 문 옆에 선 소태감이 시중을 들 준비를 했다.
배에 오른 황제가 몸을 돌리더니 서 태후에게 손을 건넸다. 서 태후가 무사히 탄 뒤, 수원상이 조심스레 뒤를 따랐다. 그녀도 황제를 향해 손을 뻗었지만 황제는 곧장 서 태후를 이끌고 선실로 들어가 버렸다. 어둠 속에서 희게 빛나는 그녀의 손은 허공에 우뚝 멈춰 갈피를 잃었다.
수원상의 얼굴은 걷잡을 수 없이 붉어졌다. 당장 호수에 뛰어들고만 싶었다. 다행히 문 옆에 서 있던 소태감이 재빨리 그녀를 끌어당겼고 그녀는 아슬아슬하게 난처한 상황을 벗어날 수 있었다.
궁에 그녀의 하인을 데려올 수 없었기에, 홀로 선미에 앉은 그녀가 쓸쓸한 모습을 자아냈다.
학평관과 기홍은 인사라도 건네고 싶었지만 황제의 마음을 알 도리가 없으니 멀리서 동정이 담긴 눈빛을 보낼 뿐이었다. 다행히 수원상은 감정을 잘 억누를 수 있었다. 설령 쓸쓸히 앉아 있다 하더라도 태연하고 다소곳한 자세를 흐트러트리지 않았다.
몰래 그녀를 관찰하던 진왕이 속으로 감탄을 내뱉었다. 이런 사람이야말로 궁에 있어야 할 여인이었다.
그는 겉치레를 중시하는 만큼 이런 날이면 시를 읊곤 했다. 그가 먼저 운을 떼자 사람들이 뒤이어 시를 읊었다. 진왕은 수원상에게 다가가 인사를 건넸고 함께하지 않겠냐고 물었다. 수원상은 스스럼없이 행동했다. 그녀는 어릴 때부터 각종 문예에 능했기 때문에 시를 짓고 읊는 것쯤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고개를 든 그녀의 눈에 밝고 둥그런 보름달이 비쳤다. 괜스레 마음을 흔드는 자태였다.
“이 밤 밝은 달이 강물을 비추니 가을을 그리는 마음만 간절하구나.”
그녀가 말을 마치자마자 다들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우며 그녀를 칭찬했다.
자신의 감정이 불쑥 튀어나왔다는 생각에 수원상의 얼굴이 붉어졌다. 다행히 어둠이 그녀의 붉어진 얼굴을 숨겨 주었다. 그녀는 적당한 미소로 화답하며 얼굴을 갈무리했다.
그 소리는 선실에 앉아 있던 서 태후의 귀에도 들렸다. 그녀가 황제를 쏘아보았다.
“들으셨습니까, 황상. 이 얼마나 모진 행동입니까? 애가는 그간 측비를 보지 못해 어떤 여인인지도 알지 못했습니다. 이제 만나 보고 나니 이보다 훌륭할 수 없더군요. 다른 건 몰라도 수 대학사 같은 사람이 모난 여식으로 길렀겠습니까?”
황제는 찻잔 속에 떠 있는 작은 국화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축 처진 꽃송이는 옅지만 쓰디쓴 향을 풍겼다.
침묵만이 이어지자 서 태후가 다시 입을 열었다.
“황상, 너무 과했습니다. 어쨌든 손님으로 왔으니 다른 이들도 지켜보지 않았습니까? 측비야 그렇다 한들 대학사는 뭐라고 생각하겠습니까?”
아무 말이 없는 황제는 태평하게 보이기까지 했다.
결국 서 태후는 조금 성이 났다.
“좀 더 생각해 보겠다기에 애가도 언급하지 않았습니다. 하나 어찌 봄부터 시작한 생각이 가을이 되어도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는단 말입니까? 황상, 애가는 곧 갈 사람입니다. 남은 소원이라고는 눈 감기 전 손자 한 번 보는 것뿐인데, 그리도 과분한 욕심이란 말입니까?”
서 태후의 얼굴과는 다르게 황제는 침착하기 그지없었다. 그가 찻잔을 내려놓으며 담담하게 말했다.
“조급해 마십시오, 태후. 이 아들도 다 알고 있습니다.”
“알긴 뭘 안다는 것입니까?”
서 태후의 목소리가 더욱 커졌다. 지난번 진왕이 벌였던 일을 꺼내고 싶었지만, 그녀는 문득 난처해질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머뭇거렸다. 만약 여기서 일을 그르친다면 더 큰일이 아닌가.
마음을 달랜 그녀가 한층 온화해진 어조로 말했다.
“측비는 애가의 초대로 왔습니다. 애가의 면을 봐서라도 몇 마디만 나눠 보세요. 황상을 이렇게나 오래 기다렸는데 얼마나 힘들었겠습니까? 황상, 처지를 바꾸어 생각해 보세요. 정말 아무렇지도 않단 말입니까?”
황제가 고개를 들어 창밖의 보름달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수원상이 술을 권해 함께 마신 것만으로도 이미 태후와 수민의 체면을 봐준 게 아닌가. 그는 원칙을 중시하는 사람이었기에 그가 허락한 사람만 입궁이 가능했다.
그의 반응을 보며 기회를 노리고 싶었겠지. 그러나 뻔히 보이는 그 속이 싫었다. 어차피 조금 더 기다릴 수 있지 않은가. 삼 년이나 기다렸는데 이제 와서 더 못 기다릴까?
“늦었습니다. 태후께서도 그만 들어가 쉬시지요.”
몸을 일으킨 황제가 배를 정박하라고 분부했다. 그가 이내 허리를 숙여 서 태후를 부축했다.
“짐이 부축해 드릴 테니, 내리십시오.”
그는 스스로를 짐이라 칭하며 거리를 두었다. 서 태후도 더는 그의 심기를 건드리지 않고 순순히 응했다.
“그래요. 오늘은 애가도 피곤하니 그만 쉬어야겠습니다. 황상도 어서 들어가 주무세요.”
황제는 그녀를 부축해 선실 밖으로 향했다. 배가 정박하자 황제는 먼저 배에서 내린 뒤, 서 태후를 끌어 주었다. 이내 서 태후의 시종들에게 몇 마디 분부를 내린 황제는 성큼성큼 대신들에게 향했다.
그동안 황제는 수원상과 말을 섞지도, 눈길 한번 건네지도 않았다. 그 모습에 마음이 쓰인 서 태후가 그녀를 위로했다.
“황제가 워낙 차가운 성격이라는 건 이미 알고 있지 않았습니까? 그러니 너무 마음 쓰지 마세요. 우선 이곳에 묵으면서 천천히 가까워지는 게 좋겠습니다.”
그러나 수원상의 얼굴엔 근심이 가득했다. 그녀는 서 태후처럼 낙관적으로 생각할 수도 없었다. 황제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그의 태도는 백 마디 말보다 명확했다. 그녀는 오늘 밤 이곳을 찾지 말았어야 했다.
불길한 예감을 안고 있었지만, 그녀는 서 태후의 청을 거절할 수 없었다. 수원상은 서 태후를 따라 경수궁으로 향했다. 서 태후가 자리를 비운 사이에 짐을 정리하려는데 영구가 찾아와 그녀에게 예를 갖췄다.
“폐하께서 신에게 측왕비를 저택까지 모셔다드리란 명을 내리셨습니다.”
수원상의 표정이 살짝 일그러졌다. 서 태후는 그녀를 곁에 둘 계획으로 시중을 들 인원까지 배정해 주었다. 그들과 막 인사를 나누던 참인데 돌아가라니? 엉덩이가 땅에 닿자마자 일어나라는 꼴이 아닌가.
황제가 그녀를 궁에 그리 오래 두지 않을 줄은 알았지만, 이렇게나 빠를 줄은 몰랐다. 수원상이 아무리 감정을 잘 다스리는 여인이라고 해도, 이번만큼은 화가 울컥 치밀었다. 그녀는 꼿꼿이 선 채로 차가운 목소리를 흘렸다.
“태후 마마의 초청으로 온 것이니 황상과는 상관없는 일입니다.”
황제라 한들 태후의 손님을 쫓아낼 수는 없다는 의미였다.
영구는 아무런 고저가 느껴지지 않는 목소리로 답했다.
“측왕비께서 궁에 드신 것은 천위天威에 대한 도발이었습니다. 소인이 보기엔 여기에서 멈추시는 게 좋을 듯합니다.”
영구의 말에 수원상은 속으로 숨을 집어삼켰다. 자신이 잘못 생각하고 있었다. 묵용감은 그녀를 보는 게 싫은 게 아니었다. 그녀가 천위에 범접했기 때문에 심기가 불편해진 것이다. 궁 안에는 두 명의 주인이 살 수 없었다.
황제가 이곳의 주인이라는 건 그녀가 마땅히 생각했어야 할 문제였다. 상황을 알아차린 그녀는 잘못을 만회하고 싶었지만 황제는 그럴 기회조차 주지 않을 생각인 듯했다.
그때, 서 태후가 다시 경수궁에 들었다. 마음이 놓이지 않아 사람을 붙여 놓은 덕에 빠르게 소식을 접할 수 있었다. 하마터면 측왕비를 그대로 보낼 뻔했다.
서 태후는 가뜩이나 영구에게 불만이 가득하던 차였다. 황제도 날마다 얼굴을 굳히고 다니는데, 호위 대인이란 자는 황제보다 더 냉랭한 얼굴을 하지 않는가. 호위 대인이 아니라 군신이라는 이름이 어울린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영구는 예를 갖추긴 해도 도통 말이 통하지 않았다. 서 태후가 아무리 얘기해도 수원상을 꼭 데려가야 한다며 물러나지 않았다.
결국 화가 난 서 태후가 손가락질을 하며 소리쳤다.
“감히 애가에게 불경을 저지르다니, 고얀 놈 같으니. 여봐라, 영구를 끌고 가 곤장 서른 대를 내리치거라!”
호위병들이 곧장 안으로 들어오긴 했지만 영구는 그들의 직속상관이었다. 감히 손을 댈 수 없었던 그들은 머뭇거릴 따름이었다.
더욱 화가 난 서 태후가 호위병들에게 욕을 퍼부었다.
“이놈들! 애가의 명을 듣지 않는 것이란 말이냐? 내일 황상에게 고해 너희의 목을 전부 베고 말 것이다!”
호위병들은 황급히 허리를 숙이더니 입을 꾹 다물었다. 감히 어떻게 입을 열었는가. 그때 영구가 조금 성가시다는 듯 호위병에게 명을 내렸다.
“태후께서는 그만 쉬셔야 하니 자안궁으로 모시거라.”
이번에도 호위병들은 차마 움직이지 못하고 눈치만 살펴야 했다.
서 태후는 치솟는 분노에 몸이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다. 영구를 가리키는 손가락마저 잘게 떨렸다.
“네, 네 이놈. 간이 배 밖으로 나온 것이란 말이냐? 애가가 당장 황상에게…….”
“태후 마마, 황상께서는 이미 침소에 드셨습니다. 그만 돌아가시지요.”
영구의 태도는 흔들림이 없었다.
그때 수원상이 서둘러 사태를 수습했다.
“태후 마마, 노여움을 푸시옵소서. 영 대인은 공무를 집행하는 것일 뿐, 마마께 불경을 저지르는 게 아닙니다. 모든 게 소첩의 잘못입니다. 황상의 심기를 불편하게 해선 안 되었는데…….
소첩은 이만 돌아가 보겠습니다. 황상께서 노여움을 푸시거든 그때 찾아와 죄를 고하겠습니다. 마마, 부디 이 일로 폐하와 언쟁을 벌이지 마시어요. 그럴 만한 일이 못 됩니다.”
수원상의 목소리는 한없이 나긋했다. 한편으로는 서 태후에게 몰래 눈짓을 보내는 것도 잊지 않았다.
서 태후는 그제야 수원상의 의도를 알아차렸다. 영구가 저리 오만하게 나오는 것은 황제의 신임을 등에 업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대로 소란을 피운다면 더욱더 수습이 어려워지리라. 무엇보다 모자간의 관계가 겨우 회복됐는데 이런 일로 다시 멀어질 순 없었다. 생각을 정리한 그녀가 노기를 가라앉히고 수원상의 손을 토닥였다.
“많이 서운하겠지만, 걱정 놓으세요. 애가가 황상에게 잘 얘기해 놓겠습니다. 이 궁은 측비를 위해 비워 둘 것이니 조만간 이곳에서 지내게 될 겁니다.”
* * *
황제는 이미 침소에 든 뒤였다. 월규가 조심스레 장막을 내렸다. 그때, 황제의 나직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간 왕비의 꿈을 꾼 적이 있느냐?”
월규가 놀란 얼굴로 대꾸했다.
“폐하께 아룁니다. 소인, 왕비 마마의 꿈은 한 번도 꾼 적 없사옵니다.”
황제가 기괴하게 웃더니 몸을 틀어 안쪽을 바라보았다. 이윽고 들릴락 말락 한 작은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짐도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