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85화
황제는 승덕전에 방 한 칸을 별도로 마련하여 토끼를 돌보도록 했다. 월규 뿐만 아니라 몇몇 궁녀들이 함께 토끼를 돌보았다. 황제가 끔찍이 아끼는 토끼가 아프니 다들 초조해하며 눈물을 흘렸다. 궁녀들은 위중청이 들어오자 서둘러 한쪽으로 물러났다.
위중청은 회색 토끼가 엎드려 있는 모습을 빤히 바라보았다. 두 귀는 축 처져 있었고 이채가 사라진 두 눈은 멍하니 허공을 응시하고 있었다. 틀림없이 죽기 직전의 모습이었다. 간담이 서늘해진 그는 서둘러 토끼의 배를 쓰다듬었다. 아직 온기가 남아 있고 희미하게 들썩이는 게 가늘게나마 숨이 붙어 있었다.
그는 고민에 빠졌지만, 곧 이를 악물었다. 가망이 없더라도 끝까지 노력은 해 봐야 했다. 사람의 숨을 잇기 위해서는 보통 오래된 인삼이 효능이 좋았다. 토끼도 비슷할 테니 그는 삼을 가져와 먹여 본 뒤, 상태를 지켜보는 게 좋겠다고 말했다.
토끼의 목숨만 구할 수 있다면야 천년 묵은 인삼, 아니 만년 묵은 영지라도 구해 올 수 있었다. 황제의 곳간에는 진귀한 약재가 가득했다. 월규는 학평관에게 위중청의 말을 전했고, 학평관은 서둘러 진귀한 삼을 꺼내 왔다.
토끼에게 무슨 일이 생기는 건 그 누구도 원치 않는 일이었다. 그간 황제는 토끼를 보며 백천범을 향한 그리움을 달래지 않았던가. 만약 이 토끼마저 사라진다면 황제의 상심은 감히 헤아릴 수도 없을 터였다.
위중청은 삼을 편으로 잘라 먹이려 했지만 쓴맛 때문인지 도통 먹으려 하지 않았다. 결국 위중청은 탕으로 달여 먹여 보기로 했고, 너무 쓸지도 모르니 꿀을 타 달라고 부탁했다.
위중청은 토끼 앞에 쪼그려 앉은 월규를 걱정스러운 얼굴로 바라보았다.
다행히 토끼는 준비한 탕을 몇 모금 들이켰다. 그리고 몇 분 후, 고개를 흔들며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월규의 얼굴에 밝은 빛이 서렸다. 그녀가 기뻐하며 소리쳤다.
“되었습니다!”
그러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토끼의 몸이 옆으로 기울어지더니 이내 천장을 보고 누워 버렸다. 다들 멍하니 그 자리에서 굳고 말았다. 한참 뒤, 위중청이 떨리는 손으로 토끼의 배를 쓰다듬었다. 이제는 아무런 움직임도, 전과 같은 온기도 느껴지지 않았다…….
황제에게 소식을 전하러 갔을 때, 그는 상주서를 확인하고 있었다. 월규는 아무 말도 꺼낼 수가 없어 곧장 무릎을 꿇어앉았다.
황제는 월규가 먼저 입을 열 때까지 기다렸다. 이윽고 그녀가 어렵게 소식을 전하자, 황제의 손에서 붓이 툭 떨어졌다. 가슴이 저릿해 숨을 쉬기도 어려웠다. 바닥을 또르르 구르는 붓처럼, 그의 슬픔도 바닥에 내동댕이쳐진 듯했다.
그날 밤, 그는 오랜 시간 우두커니 앉아 있었다. 늘 이런 식이었다. 그가 잡으려고만 하면, 그게 무엇이든 늘 그에게서 멀어져 갔다. 마지막 남은 토끼마저 떠났으니 대체 무엇으로 그리움을 달랜단 말인가. 백천범이 돌아온다고 해도, 고개를 들 수가 없을 터였다.
그는 서랍을 열어 호랑이 얼굴 장식이 달린 세자의 신발과 왕비의 비녀를 꺼냈다. 번갈아 바라보며 어떻게든 기억을 떠올리려 애썼지만… 그가 붙들려고 하는 기억은 먼지처럼 덧없이 흩어지고 있었다.
이제 그녀의 얼굴조차도 안개가 낀 듯 뿌옇기만 했다. 갑작스레 분노가 치솟은 그는 책상 위에 있던 보병을 힘껏 내리쳤다.
둔탁한 소리와 함께 보병이 산산이 부서져 바닥을 뒹굴었다. 반짝이는 자기 조각은 등불 아래에서 피처럼 붉은빛을 뿜어내며 점점 그의 시야를 뒤덮었다.
* * *
여름의 열기가 가시고 나니 금세 중추가 되었다. 황제는 계화원에서 연회를 열고 대신들과 즐거움을 나눴다.
예년과 마찬가지로 커다란 연회장에 병풍을 쳐서 공간을 분리했다. 곳곳에 백하 유리 등불을 걸고, 기둥마다 커다란 등을 놓아두니 장내는 대낮처럼 훤했다. 병풍의 왼편에는 황제와 신하들이, 오른편에는 태후와 부녀자들이 자리를 지켰다. 궁녀와 태감은 끊임없이 연회장을 오가며 분주히 일했다.
존엄한 신분인 황제는 관례대로 홀로 상석에 앉았다. 연회를 지켜보는 황제의 얼굴은 무덤덤했지만, 그의 마음속은 망망대해를 표류하는 조각배처럼 위태롭기만 했다. 명절이 올 때마다, 특히 날씨도 좋고 밤하늘의 달도 밝아 아름다운 날이면 그녀에 대한 그리움이 커져만 갔다.
이미 황제의 반응에 익숙해진 신하들은 자신들끼리 떠들썩하게 술을 즐겼다. 다만 병풍 건너편은 매우 조용했다. 입궁이 허락된 고명 부인은 많지 않았기 때문에 탁자 두 개도 다 채우지 못했다. 이토록 조용한 걸 보니, 서 태후가 아직 도착하지 않은 모양이었다.
황제가 자그마한 옥잔을 만지작거렸다. 저 멀리 수변대에서는 콸콸 물이 흐르는 소리가 들려왔고 머리 위로는 휘영청 밝은 달이 떠 있었다. 공기 중에 섞여든 옅은 계화꽃 향이 달콤하게 머릿속을 적시는 듯했다. 그러나 이 아름다운 광경이 그와 무슨 상관이랴. 활기가 넘치는 사람들마저도 멀리 강 건너에 있는 듯, 아스라이 다가왔다.
그때,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태후께서 오셨습니다. 어서 인사를 드립시다.”
황제도 희미하게나마 그 소리를 들었다. 고개를 돌려보니, 오른쪽 연회장에서 분주한 움직임이 느껴졌다. 부녀자들이 서 태후에게 인사를 올리려는 듯했다.
무료했던 그도 술잔을 들고 서 태후를 찾았다. 그녀는 자색과 붉은색이 섞인 봉포를 입고 장신구를 꽂은 머리를 단정하게 빗어 넘긴 채였다. 한 무리의 부녀자들에게 둘러싸인 그녀의 표정은 더없이 자애로웠다.
황제가 다가오자 부녀자들이 곧장 무릎을 굽혀 예를 갖췄다. 황제는 손을 내저으며 편히 행동하라고 일렀다. 문득 부녀자들 사이에서 어여쁜 여인이 눈에 띄었다. 제법 익숙한 얼굴이었지만 순간 생각이 나지 않았다.
황제의 시선이 닿으니, 화려하게 꾸민 여인의 얼굴이 붉게 피어났다. 차마 얼굴도 들지 못하는 여인을 바라보며 서 태후가 장난스럽게 말했다.
“날마다 황상을 그리워하지 않았습니까. 이리 어렵사리 만났는데 아무 말도 하지 않으니, 이런 부부가 어디 있단 말입니까?”
그제야 황제는 여인이 수원상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몇 년 만에 만났지만 그녀는 조금도 변하지 않았다. 다만 화려하게 치장한 탓에 하마터면 못 알아볼 뻔했다.
한편 수원상은 가슴이 어찌나 요동을 치는지 숨을 쉬기도 힘겨웠다. 황제가 그녀를 알아보지 못한 것에 실망할 겨를도 없었다. 그저 초대도 받지 않고 무작정 찾아온 저를 황제가 꾸짖을까 봐 불안하기만 했다.
엄연히 말하면 그녀도 무작정 찾아올 만큼 대담하진 않았다. 이는 그녀와 서 태후가 한 달 넘게 상의한 끝에 내린 결정이었다.
한 달여 전, 서 태후는 저택으로 사람을 보냈다. 황제는 수원상을 궁에 들이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폐위를 하지도 않았다. 미묘한 처지에 놓이긴 했어도 엄연히 며느리이니, 서 태후는 종종 수하를 보내 그녀의 상황을 확인했다. 시어머니로서 충분히 할 수 있는 일이었다.
명문가 규수인 수원상은 언행에 한 치의 부족함도 없었다. 비록 입궁할 수는 없었지만 서 태후가 사람을 보낼 때마다 태후의 상태를 세심히 물으며 관심을 가졌다. 태후가 밤마다 기침을 한다는 소식을 듣자, 처방전을 받아 직접 기침에 좋은 약제를 만들었다. 약한 불에 약재를 곤 후 우물에 넣어 열기를 식히기를 보름간 반복한 끝에 완성된 약제를 전해 줄 수 있었다.
서 태후는 그녀가 만든 약을 복용하고 상태가 많이 호전되었다. 몹시 흡족했던 서 태후는 그녀의 효심을 칭찬하며 궁에 들라고 요청했다. 그러나 수원상은 쉽게 결정을 내리지 못했다. 허락 없이 궁에 들었다가 황제의 분노를 사기라도 하면 어찌한단 말인가? 결국 서 태후와 오랜 시간 이야기를 나눈 끝에 중추 연회에 얼굴을 보여 황제의 반응을 살피기로 결정했다.
막상 그의 앞에 서니 심장이 절로 옥죄었다. 그녀는 체면을 중시하는 사람이었다. 만약 이 많은 사람들 앞에서 황제가 욕을 퍼붓고 쫓아낸다면……? 그녀는 망설임 없이 죽음으로 체면을 지킬 터였다.
서 태후는 슬쩍 황제의 안색을 살폈다. 사실 그녀도 확신이 서지 않았다. 다만 수원상이 그녀의 마음에 쏙 들었다. 수민의 장녀인 만큼 높은 평가를 주고 있었는데, 한번 살펴보니 그녀의 효심이며 깊은 마음 씀씀이까지 나무랄 데가 없었다. 더욱이 오늘의 수원상은 무척 아리땁고 단아한 자태를 자랑하지 않았는가.
이보다 더 만족스러울 수 없는 며느리였다. 그녀가 보기에 수원상은 당장 중궁에 들여도 손색이 없었다. 서 태후는 일이 잘 풀리길 바라며 황제의 반응을 기다렸다. 주변에 모여 있던 부녀자들도 숨을 죽인 채 분위기를 살폈다.
수원상의 민망한 신분은 딱히 비밀도 아니었다. 조정 관리는 말할 것도 없고 임안성의 모든 백성들이 초왕의 저택에 측왕비 홀로 머물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황제는 속을 알 수 없는 무표정한 얼굴로 서 태후에게 술을 한 잔 권했다.
서 태후는 술잔을 다 들이켠 뒤 서둘러 수원상에게 눈짓을 보냈다. 수원상은 똑똑한 여인이었기 때문에 술잔을 들고 어여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신첩, 폐하의 천추만대와 평안함을 기원하겠습니다.”
민첩한 소태감이 황제에게 술이 가득 찬 잔을 건넸다. 잠시 머뭇거리던 황제는 단번에 술을 들이켰다.
수원상은 옷깃으로 입을 가리고 조심스레 한 모금 들이켰다. 두 사람의 모습을 보던 서 태후가 눈이 가느다래질 만큼 활짝 웃었다. 그녀가 황제에게 살갑게 말했다.
“모처럼 궁에 왔으니 애가가 며칠 곁에 두고 싶습니다. 잠시 경수궁景秀宮에서 지내게 하려는데 황상의 생각은 어떠한지요?”
황제의 얼굴에는 옅은 웃음기가 있었지만, 억지로 지은 태가 역력했다. 이윽고 의미심장한 눈빛이 수원상에게 잠시 머물렀다가 사라졌다. 황제는 가타부타 답을 주지 않고 그대로 몸을 돌려 자리를 떴다.
언뜻 보기에는 평온해 보이는 눈빛이었으나, 수원상은 등골이 오싹했다. 그녀는 황급히 고개를 숙여 예를 갖췄다.
황제가 떠난 후에야 다들 숨통이 트인 듯했다. 서 태후는 수원상의 침울한 표정을 알아차리고 그녀의 손을 토닥였다.
“황제의 침묵은 묵인이나 다름없으니, 오늘부터 이곳에서 지내도록 하세요. 조급해하지 말고 천천히 다가가는 게 좋겠습니다. 요즘 황제의 마음이 워낙 차가운 바위 같아서 측비가 황제를 잘 감싸 주어야 해요. 힘들겠지만 계속 견뎌 내야 합니다. 폐하도 측비의 정성을 알아줄 겁니다.”
수원상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신첩은 견딜 수 있습니다.”
독수공방으로도 삼 년을 견뎠는데 그의 곁에 있을 수 있다면 얼마든지 견딜 수 있었다. 그녀는 다른 재능은 몰라도 인내심만큼은 자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