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84화
서 태후가 화들짝 놀라며 눈을 부릅떴다.
“간도 크지, 어찌 감히 황제에게 약을 먹일 수 있단 말입니까!”
“소자도 일을 성사시키기 위해 한 것이었습니다. 더욱이 몸을 해하는 약이 아닙니다. 소자가 자주 쓰던…….”
“자주 쓰다니…….”
서 태후가 이마에 손을 얹었다. 머리가 깨질 듯 지끈거렸다. 그리 중요한 일을 한량에게 맡긴 게 후회스러웠다.
“되었습니다, 되었어.”
서 태후가 손을 내젓더니 푹신한 의자에 기대어 앉았다.
“황상은 어떻습니까? 성이 났습니까?”
“성은 그리 내지 않으셨습니다.”
진왕이 자신의 추측을 털어놓았다.
“이 일을 추궁하진 않을 것입니다.”
그가 아랫입술을 짓씹다 어렵게 말을 꺼냈다.
“다만 다시 기회를 잡기가 어려워질 듯합니다.”
“당분간은 경거망동하지 말아야지요.”
서 태후가 한숨을 내쉬며 이마를 짚었다.
“이 일이 지나간 뒤에나 다시 얘기합시다.”
황제는 욕통을 떠날 수 없었다. 자신이 너무나도 더럽게 느껴졌다. 백천범이 아닌 여인과 살이 맞닿았다니…….
그러나 누굴 탓하겠는가. 진왕의 수작을 뻔히 알면서도, 그는 스스로를 놓아 버리는 심정으로 그들을 따라나섰다. 그렇지만… 여인이 있는데도 그가 한 일은 없었다. 오랜 시간 고여 있어 썩어 버린 물처럼… 그의 몸은 아무런 파동도 일으키지 못했다.
그녀를 사랑하는 데 모든 것을 쏟아부어서일까? 그는 더 이상 다른 여인에게 건넬 마음이 없었고, 접촉 또한 필요치 않았다.
사실 자신이 원치 않는 것인지, 그리하지 못하는 것인지 분명히 알지 못했다. 만약 그리하지 못하는 것이라면……. 차마 더 생각할 엄두가 나지 않았다. 그 사실을 태후와 대신들이 알게 된다면 더 큰 소동이 일어나기 충분했다.
고개를 숙여 제 몸을 바라보던 황제가 천천히 손을 옮겼다.
더는 안 되겠다 싶었는지, 학평관이 안으로 들어왔다. 그가 수건을 탁탁 털며 인기척을 냈다.
욕통의 물이 가볍게 출렁였다. 등을 보인 황제가 무언가를 하고 있는 듯했다. 학평관이 또 한 번 수건을 털자 마침내 황제가 고개를 돌렸다.
욕탕의 등불이 그의 불그스름한 얼굴에 그림자를 드리웠다. 황제의 표정은 다소 기이했다. 학평관은 이상하게 여기면서도 내색하지 않고 말을 이었다.
“폐하, 너무 오래 계셨습니다. 그만 일어나시지요.”
황제는 그제야 묵묵히 몸을 일으켰다. 학평관이 서둘러 수건을 건넸다. 곁눈으로 보이는… 혈기 왕성한 황제의 모습에 그는 황급히 고개를 숙였다.
황제는 아무렇지 않게 옷을 입더니 성큼성큼 밖으로 나가 버렸다.
* * *
평락궁에 있던 백천범은 가까워지는 발소리에 미소를 지었다.
“왔어?”
남문우가 성큼성큼 안으로 들어왔다. 머리 위의 금관이 등불 빛에 반짝였다.
“날 기다리기라도 한 거야?”
“오늘 나한테 줄 게 있다며, 뭔데?”
백천범은 기대에 찬 눈으로 그의 두 손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텅 빈 두 손이 눈에 들어오자, 백천범이 푸념하듯 내뱉었다.
“없어?”
남문우가 반짝이는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한 번만 안아 주면 줄게.”
백천범이 뿌루퉁한 얼굴로 말했다.
“뭐야, 재미없긴. 분명 준다고 했으면서 조건을 거는 게 어디 있어?”
남문우가 경박한 웃음을 흘렸다.
“그러게 누가 이렇게 좋아하게 만들래.”
그가 천천히 그녀에게 다가갔다.
“가만히 있을 테니까 안아 줘 봐.”
백천범의 미간이 살며시 찌푸려졌다. 그가 눈치를 보며 손을 뻗었다. 그녀는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남문우가 그녀를 꼭 끌어안은 순간, 백천범은 번개같이 팔꿈치를 휘둘렀다. 퍽 소리와 함께 가슴을 얻어맞은 남문우가 비틀거렸다. 그가 가슴을 움켜쥐며 뒷걸음질을 쳤다.
“너, 날 때렸어?”
백천범은 얼떨떨한 얼굴로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그녀도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나도 왜 그랬는지 몰라. 때릴 생각은 없었는데.”
자신이 왜 그리 힘껏 팔을 휘둘렀을까. 그녀로서도 알 수 없는 일이었다.
남문우가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무술이라도 배운 거야?”
백천범이 고개를 내저었다.
“아닐걸. 항상 같이 있었다며, 내가 무술을 배웠는지 너도 모르는 거야?”
남문우가 시험하듯 말했다.
“이리 와서 나 한 대 때려 봐.”
백천범이 미간을 찌푸렸다.
“내가 널 왜 때려야 하는데?”
남문우가 더욱더 재촉했다.
“어서, 때려 봐.”
그는 백천범의 진짜 실력을 보고 싶었다.
백천범은 이유도 없이 사람을 때리는 걸 싫어했지만, 그가 계속 부탁하니 못 할 것도 없어 보였다. 그래, 한 대 때려 주지.
남문우는 손을 뻗어 그녀의 주먹을 받아냈다. 힘도, 기교도 없었다. 조금 전 그의 가슴을 때릴 때와는 비교도 되지 않는 공격이었다. 그는 속으로 의아함을 삼켰다. 방금의 일은 정말 우연이었단 말인가?
“때렸으니깐 어서 줘. 어디 있는데?”
남문우가 손뼉을 치자 문 앞에 있던 사람이 철제 우리를 들고 안으로 들어왔다. 우리 안에는 작은 생명체가 몸을 잔뜩 웅크리고 있었다. 백천범이 바닥에 쪼그려 앉아 우리를 두드렸다. 엎드려 있던 동물이 고개를 들어 올렸다. 경계심이 가득한 눈빛이 그녀를 향하자, 백천범이 환히 웃었다.
“고양이야?”
남문우는 조금 어이가 없다는 투로 답했다.
“새끼 표범이야.”
“표범?”
백천범이 눈을 반짝였다.
“우리 좀 열어 줘. 안아 볼래.”
“안 무서워?”
“이렇게 작은데 물기야 하겠어?”
그녀는 기쁨을 감추지 못하며 이것저것 묻기 시작했다.
“먹이는 뭘 먹어? 아직 어미젖을 먹어?”
어느새 남문우는 따스한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이제 막 태어난 새끼라 아직 젖을 먹여야 해. 잘 돌볼 수 있겠어?”
그가 우리를 열고 새끼 표범을 백천범의 품에 안겨 주었다.
표범을 안아 든 백천범은 묘한 기시감에 사로잡혔다. 이 따스하고 부드러운 기분은 어딘가 익숙했다. 그녀가 힘껏 고개를 끄덕였다.
“할 수 있어! 튼튼하고 건강하게 길러 줄 거야.”
백천범은 새끼 표범을 한시도 품에서 떼어 놓으려 하지 않았다. 어느새 점박이라는 이름까지 지어 주었다. 몸에 있는 옅은 무늬를 보고 붙인 이름이었다. 남문우는 표범이 다 자라고 나면 반점이 아주 예쁠 거라고 알려 주었다. 백천범은 당장 그 예쁜 모습을 볼 수 없다는 사실이 야속하기만 했다. 표범에게 쏟아붓는 정성에 그녀도 이따금 놀랄 정도였다.
그녀는 매일 점박이에게 양젖을 먹였다. 그릇에 담긴 양젖을 점박이의 분홍빛 자그마한 혀에 한 방울씩 떨어뜨려 주었다. 점박이가 날름거리며 먹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으면 괜스레 흐뭇한 마음이 들었다. 그녀는 아기 표범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아침과 저녁이면 그녀는 점박이를 데리고 책을 했다. 여옥은 점박이가 함부로 뛰어다닐까 봐 줄을 묶어 주려고 했다. 그러나 말을 꺼내자마자 백천범에게 한바탕 꾸지람을 들었다. 평소에는 늘 기분이 좋았던 그녀였지만 오늘은 이상하게 성질을 부렸다. 놀란 여옥은 입도 벙긋하지 못하고 물러나야 했다.
남문우가 백천범을 찾아왔을 때, 그녀는 아직도 시무룩한 얼굴이었다. 남문우는 여옥을 꾸짖고는 멀리 떨어져 있으라고 분부했다. 공주의 눈앞에서 알짱대며 심기를 건드리지 말라는 것이었다.
백천범은 점박이를 품에 끌어안고 있었다. 표범은 뽀송뽀송한 머리를 끊임없이 그녀에게 문질렀다. 꼭 애교를 부리는 것 같았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백천범의 눈에서 갑작스레 눈물이 흘러내렸다.
심장이 저릿해진 남문우가 황급히 무슨 일이냐고 물었다.
백천범은 느릿하게 고개를 저었다. 갑작스레 몰려온 슬픔은 그녀를 까닭 없는 감정의 늪으로 빠트렸다. 점박이가 그녀에게 머리를 비비니 눈물을 멈출 수가 없었다.
그녀가 코를 훌쩍이며 물었다.
“예전에도 내가 표범을 기른 적 있어? 다른 동물이라도.”
남문우가 웃으며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어릴 때부터 고양이며 강아지며, 동물을 어찌나 좋아하는지 수도 없이 키웠지. 하지만 표범은 처음이야.”
“고양이랑 강아지는 지금 어디 있는데?”
“대부분 천수를 다했고 몇몇은 잃어버리기도 했지.”
백천범이 흠칫 놀라더니 점박이를 꼭 끌어안았다. 그녀가 나지막이 속삭였다.
“걱정 마. 널 잃어버리는 일은 없을 거야.”
“궁 안은 보초가 삼엄하니 잃어버릴 일 없어. 걱정 마.”
남문우는 그녀를 바라보았지만 그녀의 시선은 아기 표범에게만 향해 있었다. 두 눈에는 사랑이 가득 담겨 있었다. 일종의 모성애 같은 눈빛이었다. 장난꾸러기 아기 표범은 그녀의 품 안에서 팔다리를 늘어뜨린 채 천진난만한 모습으로 안겨 있었다. 바라보고 있자니 절로 웃음이 나오는 모습이었다.
그녀가 자랑이라도 하듯 남문우를 불렀다.
“이것 봐, 어서. 정말 귀엽지.”
남문우가 맞장구를 치며 웃었다.
“그래, 정말 귀엽네.”
그러나 가슴 속에 커다란 돌이 자리 잡은 듯 숨을 쉬기가 불편했다.
“닙닙아.”
그가 진지하게 그녀를 바라보았다.
“날 믿어?”
백천범이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
“갑자기 왜 물어?”
“날 믿어?”
“믿지, 그럼.”
“그래, 계속 날 믿어줘야 해.”
그가 그녀의 어깨에 손을 얹더니 조금씩 힘을 주었다.
“죽을 때까지 네게 잘할게.”
“네가 줄곧 나한테 잘해 주고 있다는 건 나도 알아.”
눈이 다 감길 정도로 웃는 그녀의 모습은 아이처럼 천진난만하기만 했다.
* * *
월규는 다급하게 위중청을 끌고 갔다. 지나가던 이들이 힐끔거리자, 난처해진 위중청이 말했다.
“놓으십시오. 제가 걷지 못하는 것도 아닌데, 무슨 일인지 말을 해야 하지 않습니까? 어찌 이리 끌고…….”
항의하던 그의 목소리가 조금씩 작아졌다. 월규의 안색이 나빠도 너무 나빴다.
“대체 무슨 일입니까?”
그가 조심스레 물었다.
월규가 코를 훌쩍였다. 그녀는 당장이라도 울음을 터트리고 싶었지만, 애써 눌러 참고 있었다.
“토끼가… 더는 힘들 듯합니다.”
위중청은 흠칫 놀라며 급히 발걸음을 재촉했다.
날씨가 너무 더워서일까? 아니면 남쪽에서 살던 토끼가 북쪽에서 적응을 못 한 탓일까. 누구도 이유를 밝혀내지 못한 채, 토끼들이 하나둘 죽기 시작했다. 겨우 한 마리가 남았건만……. 보아하니 그 토끼의 상태도 좋지 않았다.
토끼가 죽을 때마다 황제는 방에 틀어박혀 나오지 않았다. 식사도 거부하고 출입도 금지되니 황제를 모시는 이들은 가슴을 졸일 수밖에 없었다. 어두운 방 안에서 넋이 나간 듯한 황제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어찌 알겠는가?
마지막으로 남은 토끼를, 황제는 몹시도 애지중지했다. 먹이는 잘 먹었는지, 무얼 먹었는지, 상태는 어떤지 등 태후의 안부를 묻을 때보다 더 세심할 정도였다.
그러나 어느 날, 월규는 황제에게 마지막 토끼마저 상태가 좋지 않다고 털어놓았다. 황제는 곧장 위중청에게 토끼를 돌보라고 명했다. 하지만 위중청이라고 뾰족한 수가 있겠는가.
애초에 그는 수의가 아니라 태의였다. 그러나 황제의 명을 받았으니 무슨 수를 써서라든 토끼의 목숨을 지켜야 했다. 그런데 이제 그 토끼마저 가망이 없어 보인다니……. 그 또한 마음이 죄어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