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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유왕비초장성 (483)화 (482/1,192)

제483화

오늘의 황제는 여느 때보다 강한 인내심을 가져야 했다. 그는 진왕의 제안을 받아들여 종친 왕들을 승덕전으로 데리고 왔다. 학평관이 눈치 빠르게 술을 내왔다.

진왕은 오늘 단단히 준비를 하고 온 참이었다. 그는 묵용감의 마음을 돌릴 방법을 알기에 일부러 떠들썩한 분위기를 만들었다. 모두가 술과 음식을 즐기며 종실에서 일어난 재미있는 일들을 늘어놓았다. 황제는 침묵을 지켰지만 표정은 평온했다. 이따금 술을 한 모금씩 들이켜며 그들의 이야기를 듣고 있었다.

술잔이 여러 차례 오가자 종친 왕들도 조금씩 대담해졌다. 진왕이 앞장서서 음담패설을 늘어놓자 다들 박장대소를 터뜨렸고 황제의 얼굴에도 옅은 웃음기가 돌았다.

종실 형제들은 하나같이 노는 데 일가견이 있었다. 모두들 질세라 이야기보따리를 풀어 놓았고, 그 바람에 술자리는 그야말로 웃음바다가 되었다.

이번엔 예친왕禮親王이 자신의 저택에서 있었던 일을 꺼냈다. 작년에 첩이 아이를 낳아 유모를 들였는데, 어느 날 유모가 일이 있다며 한나절 동안 휴가를 냈다고 했다. 한데 휴가를 끝내고 돌아온 유모가 아이에게 젖을 물려도 아이가 계속 울기만 했다는 것이다.

화가 난 첩이 유모를 다그쳤다. 휴가를 보내며 유모의 아이에게 젖을 물린 게 아니냐고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유모는 팔짝 뛰며 절대 그런 일은 없었다고 맹세했고, 유모도 의아해하고 있었다.

그러나 끈질긴 추궁 끝에 유모가 솔직하게 털어놓았다. 그녀는 휴가 중에 부군을 만나고 온 것이다. 그제야 범인이 누군지 밝혀졌다.

모두가 배를 잡고 웃음을 터트리는 가운데, 상석에서 화통한 웃음소리가 터져나왔다. 시종일관 무덤덤하던 황제가 요란하게 웃고 있었다. 어찌나 크게 웃는지, 눈가에 눈물이 슬쩍 비치기까지 했다. 꼭 제 이야기 같지 않은가. 돌이켜 보니 참으로 우스웠다.

그의 웃음이 길게 이어지니 오히려 진왕이 당황했다. 자신의 형이 이렇게 박장대소하는 모습은 너무나도 오랜만이었다. 더욱이 이런 음담패설에 웃고 있다니…….

황제의 웃음은 분위기를 더욱 농익게 했다. 그때 진왕이 궁 밖으로 나가는 건 어떻겠냐는 제안을 내놓았다.

말을 하면서도 진왕은 혹여 거절을 들을까 가슴을 졸이고 있었다. 뜻밖에도 황제는 흔쾌히 허락했다. 불콰하게 취한 그는 학평관에게 채비를 하라는 분부까지 내렸다.

본래 황제가 출궁을 하는 것은 보통 일이 아니었다. 그러나 학평관은 진왕의 눈짓에 의도를 파악하고 간소한 연을 준비해 왔다.

궁 밖으로 나간다는 말에 영구가 묵묵히 황제의 곁을 따랐다. 이로써, 가동과 진왕은 손발을 맞춰 비밀리에 황제를 궁 밖으로 내보낼 수 있었다.

아직 신시 전이라 연회가 끝나지 않은 차였다. 다들 연회의 즐거움에 빠진 틈을 타, 황제와 종실 자제들은 궁 밖으로 나섰다. 진왕은 그가 잘 아는 가게가 있다며 황제를 이끌었다.

얼큰하게 취한 황제는 머리가 빙빙 도는 듯했다. 예전에 저질렀던 황당한 일들이 눈앞을 스쳐 갔다. 그래, 향긋하고 부드럽던, 황홀한 맛을…….

어느샌가 그는 방 안으로 휘청거리며 끌려가고 있었다. 방문에는 주렴이 걸려 있었고 탁자에 놓인 유리 등잔이 야릇한 빛을 내뿜었다. 은은한 향이 코끝을 스쳤다. 겹겹이 드리운 붉은 천은 침대를 포근한 둥지처럼 감싸고 있었다.

머리가 너무 어지러웠던 터라, 황제는 자연스레 침대 옆으로 걸어갔다. 옆에 있던 영구가 고개를 숙여 보였다.

“폐하, 신은 밖에서 기다리겠습니다.”

그는 손을 내저으며 무어라 중얼거리더니 침대에 몸을 내던졌다. 너무 오랜 시간 억눌렸던 그는 몹시 괴로웠다. 그를 단단히 옭아맨 고치 속에서, 꿈쩍도 할 수 없었다. 이대로 가다간 자신을 완전히 잃을 것만 같았다. 무엇이라도 해야 한다는 생각이 스쳤지만, 이 고통은 도무지 벗어날 길을 보여 주지 않았다…….

문 앞에 서 있던 영구와 가동이 눈빛을 주고받았다. 다른 방에 있던 진왕은 슬쩍 고개를 내밀더니 가동을 힐끔거렸다. 가동은 고개를 끄덕이며 옅은 미소를 지었다. 이제 곧 성패가 결정되리라. 성공하면 다행이지만 실패한다면 저마다 책임을 피할 수 없는 일이었다.

침대에 파묻힌 묵용감은 문득 기이한 기분에 힘겹게 눈을 떴다. 침대가 부드러워도 너무 부드러웠다. 눈앞이 아찔할 만큼 부드럽고 푹신한 느낌에, 그가 손을 뻗었다. 비단결처럼 매끄러운 감각이 손끝을 스치고 있었다.

그때, 그의 밑에서 꿈틀거리는 움직임이 느껴졌다. 어느새 그의 목을 새하얀 팔이 휘감기 시작했다. 그윽한 향기가 코끝을 자극하자 묵용감이 미간을 찌푸렸다. 붉은 입술은 요염하게 휘어지더니 천천히 그의 귓가로 향했다.

그때, 묵용감의 몸속에서 무언가 꿈틀대고 포효하기 시작했다. 그는 자신을 겹겹이 둘러싼 고치를 마구 찢고 새로이 태어나고만 싶었다. 아니, 숨이라도 제대로 내쉬고 싶었다. 더는 견딜 수 없었던 그는 밑에 있던 이를 힘껏 짓누르며 핏대를 세웠다…….

문밖에는 가동과 영구, 진왕이 조용히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잠시 후, 진왕이 가동을 멀찍이 데려갔다.

진왕이 목소리를 낮췄다.

“들어가신 지 얼마나 되었느냐?”

가동이 고민하다 대꾸했다.

“일각쯤 되지 않았을까요?”

진왕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일각이면 될 텐데. 너무 오래 참으면 빨리 끝나기 마련이다.”

그 말에 가동은 알 수 없는 불안감을 느꼈다.

“왕야, 정말 확실한 이로 고르신 것입니까?”

진왕이 가동을 흘겨보았다.

“그리 의심이 되거든 네가 직접 해 보거라. 다리가 풀려 걷지도 못할 것이다.”

가동이 멋쩍은 웃음을 흘렸다.

“그런 말씀 마십시오. 부인에게 들켰다간 저는 목숨을 부지할 수 없을 것입니다.”

진왕이 피식 웃더니 그를 놀렸다.

“이런 모자란 놈! 부인이 그리도 무섭더냐? 다른 이었다면 첩부터 들였을 것이다.”

가동이 씁쓸한 얼굴로 말했다.

“첩을 들여도 아이를 낳지 못한다면 제 문제겠지요…….”

진왕은 웃음을 참지 못하며 답했다.

“그게 무서운 것이었구나. 아주 쉬운 문제가 아니더냐? 아이를 가지거든 그때 첩으로 들이면 되지. 녹하도 별말 없을 게다. 가 대인, 불효에는 세 가지가 있는데 그중에 후사가 없는 게 가장 큰 불효입니다. 아시겠습니까?”

가동은 어색하게 웃기만 했다.

“그 일은 녹하가 저보다 조급해하고 있습니다. 몇 년 더 기다리면 녹하가 먼저 말을 꺼내겠지요.”

“아닌 척하긴, 넌 그냥 아내가 무서운 거야.”

진왕은 재미있다는 듯 가동을 놀려 댔다.

“이리 우락부락한 사내가 아내를 무서워하는 꼴이라니!”

한창 이야기를 나누는데 별안간 황제가 모습을 드러내었다. 순간 공기가 싸늘하게 얼어붙었다. 두 남자는 꾸물거리며 황제에게 다가갔다.

“황형.”

진왕이 애써 뻔뻔스럽게 물었다.

“…괜찮으십니까?”

황제의 코웃음이 내려앉았다. 그의 얼굴은 영원히 녹지 않을 얼음처럼 차갑게 굳어 있었다.

“짐의 머리 위에 기어오르려 하는구나. 황제가 되고 싶은 것이더냐? 말만 하거라. 짐이 곧장 물려주겠다.”

눈이 휘둥그레진 진왕이 서둘러 무릎을 꿇었다.

“이 아우, 죽을죄를 지었음을 잘 압니다. 다만 황형에 대한 제 충심은 하늘이 알고 땅이 알 것입니다. 전부 황형을 위해 벌인 일입니다!”

옆에 있던 가동과 영구도 무릎을 꿇으며 고개를 조아렸다.

황제가 삐뚜름하게 입꼬리를 올리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다들 한통속이구나. 짐이 그토록 호락호락하게 보였느냐? 너희를 죽이지 못할 줄 알고?”

진왕이 용기를 쥐어짰다.

“황형, 전부 황형을 위한 일이었습니다. 강산이 굳건하기 위해선 응당 황태자가 있어야 합니다. 한데 간택도 하지 않으시겠다 하시고 후궁을 저리 비워 두시니…….”

황제가 그의 말을 끊으며 포악하게 외쳤다.

“허튼소리, 짐에겐 아들이 있다!”

진왕이 이를 꽉 깨물며 어렵사리 내뱉었다.

“…태자 전하께서 어, 어디에 있단 말입니까…….”

황제는 아무런 답도 할 수 없었다. 차츰 분노가 가라앉으니 그의 표정은 오묘한 빛으로 물들었다. 잠시 후, 그가 뒷짐을 지고 앞으로 향하자 영구가 황급히 뒤를 좇았다. 황제가 멀어진 후에야 가동이 진왕을 일으켰다.

“대체 이게 어찌…….”

진왕은 황급히 방 안으로 들어갔다. 이불에 덮인 여인이 인부들의 손에 실려 나오고 있었다. 이불 밖으로 흐트러진 머리채가 삐져나와 있었다. 진왕이 깜짝 놀란 얼굴로 물었다.

“어찌 된 것이냐?”

인부가 어두운 얼굴로 답했다.

“죽었습니다요.”

진왕과 가동은 아무 말도 못하고 서로를 바라보았다.

궁으로 돌아온 황제는 곧바로 탕에 몸을 담갔다. 수면 위로 그의 넓은 등이 솟아올랐다. 화살에 맞아 생긴 왼쪽 어깨의 흉터가 아직 또렷했다.

무표정하게 문 앞을 지키는 영구와 달리, 학평관은 근심이 가득했다. 이따금 안을 들여다보던 그가 참지 못하고 중얼거렸다.

“저렇게 오랫동안 물속에 계시다간 피부가 하얗게 변하겠어. 아무리 여름이라 해도 병이 날 터인데. 아이고, 폐하께서 적잖이 괴로우신가 보군.”

궁을 지키고 있던 그는 일의 성공 여부가 궁금했다. 그가 목소리를 낮춰 은근히 물었다.

“대체 성공한 것인가, 못한 것인가?”

영구는 아무 말도 없이 고개만 저었다. 학평관은 답답함에 한숨을 내쉬며 원망을 늘어놓았다.

“자네는 황상께 무슨 말이든 할 수 있는 이가 아닌가? 어떻게든 폐하를 타일러 보지 않고 어찌 입을 다물고만 있는가? 군주의 녹을 먹고 사는 이는 응당 군주의 어려움을 나눠야 하는 것인데. 기홍이 자네에게 시집을 가지 않는지 이제야 알겠구만.”

영구는 기홍이 언급되자 눈꺼풀을 들어 앞을 바라보았다. 어둠 속에서 눈망울이 희미하게 반짝였지만, 그뿐이었다. 아무런 대꾸도 없었다.

학평관은 제 가슴을 치고 싶은 심정을 참으며 이내 조용히 황제를 불렀다.

“폐하, 물이 찹니다. 그만 일어나시지요.”

황제는 욕조에 조용히 웅크려 있었다. 학평관이 다시 그를 불렀지만 여전히 묵묵부답이었다. 잠시 기다리던 학평관은 고개를 저으며 다시 밖으로 나왔다.

이 일은 서 태후의 귀에도 들어갔다. 그녀는 서둘러 진왕에게 전갈을 보내 자안궁으로 들게 했다.

진왕을 본 그녀가 다짜고짜 희망에 찬 얼굴로 물었다.

“성사되었습니까?”

시작이 반이라고, 성공만 하면 뒷일은 잘 풀리지 않겠는가. 좋고 싫음을 떠나 갖고자 하는 마음만 있으면 충분했다.

그러나 진왕의 얼굴은 울상이 되어 있었다.

“아무래도 실패인 듯싶습니다.”

서 태후가 의아함을 감추지 못했다.

“아무래도라니요. 성사 여부도 모르다니, 직접 고른 자가 아닙니까?”

진왕이 고개를 저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말도 마십시오. 그자는 이미 가 버렸습니다.”

서 태후가 깜짝 놀라 물었다.

“가 버리다니요? 설마 황상이…….”

진왕이 우물쭈물하다 털어놓았다.

“제 탓입니다. 아마 약이 너무 강했던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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