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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유왕비초장성 (482)화 (481/1,192)

제482화

침상에 기댄 서 태후의 눈은 빨갛게 충혈되어 있었다.

“애가는 다그치는 게 아니라 그저 묻는 것입니다. 그리 아무 말도 않는 건 대체 무슨 뜻이란 말입니까?”

황제는 새어 나오는 웃음을 참지 못했다.

“다그치는 게 아니라고 하셨으면서 어찌 그리 다그치십니까.”

서 태후는 눈물이 그렁그렁 맺힌 눈으로 황제를 바라보았다. 황제도 더는 어쩔 도리가 없었다.

“아직 젊으신데 그리도 손주를 보고 싶으십니까? 손자가 있으면 더 연로한 기분이 들 텐데 말입니다.”

“손자만 있다면 얼마든 늙어 보여도 좋습니다.”

황제가 잠시 침묵하다 입을 열었다.

“짐에게 시간을 주십시오. 태후께서도 짐의 속이 어떤지 잘 아시지 않습니까…….”

“물론 애가도 알지요.”

서 태후가 고개를 끄덕이며 서둘러 말을 이었다.

“애가도 많은 걸 바라진 않습니다. 그저 구색만 갖추자는 것이지요. 많이도 말고, 같이 마조를 둘 수 있는 정도면 됩니다. 가능하겠습니까?”

역시 나이가 들면 아이가 된다는 말이 맞았다. 그리 간절히 애원하는 이유가 마조를 하기 위해서였다니.

“좀 더 생각해 보겠습니다.”

“그것도 어려우면 측왕비를 궁으로 들이는 것도 좋은 방법입니다. 애가와 함께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눌 수 있으니까요. 측왕비도 저택에서 혼자 적적하지 않겠습니까? 게다가 그 또한 규율에 맞지 않는 일이에요. 진작에 잠룡潛龍(황제가 황위에 오르기 이전을 일컬음) 저택으로 격상했어야 합니다.

황제가 되었는데도 측왕비를 궁에 들이지 않다니, 이미 시답잖은 말이 오르내릴 겁니다. 수 대학사는 그간 나라를 위해 큰 공을 세우지 않았습니까? 다른 건 몰라도 대학사의 체면은 신경 써야지요. 황상에게 충심을 다하는데 그런 자의 귀한 여식을 모른 척하면 안 될 일입니다. 대학사의 서운함은 걱정도 되지 않습니까?”

황제는 한참 동안 입을 굳게 다물더니 여전히 똑같은 말만 내뱉었다.

“좀 더 생각해 보겠습니다.”

서 태후도 이 정도면 황제가 그녀의 말을 알아들었을 거라고 생각했다. 최근 그녀는 황제 앞에서 최대한 평범한 어머니처럼 보이고자 노력했다. 설령 눈물을 보이며 소란을 피워서 체통을 잃더라도, 황제와 멀어지는 것보다는 낫지 않겠는가.

얼마 지나지 않아 영 마마가 약을 들고 들어왔다. 황제는 서 태후가 약을 들이켜는 걸 지켜보더니, 직접 매실을 건네 쓴맛을 달래도록 했다.

그 행동이 모자를 조금이나마 가깝게 만들어 주는 듯했다. 서 태후가 또다시 눈물이 그렁그렁 맺힌 눈을 깜박이자, 황제는 서둘러 자리에서 일어나 인사를 고했다.

어둠이 내린 바깥에 물안개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무엇이라도 나올 듯 음산한 분위기였다. 황제는 고요한 어둠 속에서 힘껏 두 눈을 감았다. 자신이 꼭 고치를 만들어 스스로를 옭아매는 누에처럼 느껴졌다. 고독한 군주가 되고 싶었건만, 안타깝게도 너무 어려운 길이었다.

* * *

칠월 열여드렛날은 황제의 탄일이었다. 그는 요란한 생일잔치를 싫어했지만, 궁에서는 황제의 탄일을 조용히 넘길 순 없었다. 그렇게 그의 의사와는 상관없는 준비로, 궁 안은 분주하게 돌아갔다.

탄일 날, 황제는 여느 때처럼 조회에 나갔다. 대전 안엔 대신들이 가져온 화려한 선물들이 가득 차 있었다. 하나같이 귀하고 훌륭한 것들이라, 어느 선물이 더 진귀한지 다투기라도 듯했다. 가장 많은 종류를 차지한 선물은 여의였고, 탁자에 두는 장식용 병풍, 보병, 산호를 비롯한 각종 분재, 시계, 칠기, 장식품 등이 그 뒤를 이었다.

황제가 자리에 앉자마자 신하들은 곧장 삼배를 올리며 큰소리로 외쳤다.

“황제 폐하 만세 만만세, 폐하의 성절聖節을 경하드립니다. 만수무강하시옵소서!”

황제는 쓴웃음을 지었다. 관례대로라면 오늘은 만수절萬壽節이니 정사를 논하지 않고 황제의 축수祝壽만 기원했다.

묵용감이 즉위하고 처음 맞는 탄일인 만큼 성대하기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서 태후는 전날 직접 황제를 찾아 축하를 건넸다. 어미인 태후가 매년 격식을 갖추고 탄일을 챙겨야 황제의 앞날이 무탈하다고 했다. 반면, 황제는 이 모든 과정이 번거로웠지만 협조하지 않을 수도 없었다. 그는 그저 준비가 끝내면 얼굴을 비추는 걸로 제 역할을 다했다.

축수를 기원한 뒤에 선물을 바치는 것은 중요한 행사 중 하나였다. 신하들은 관직의 높낮이에 따라 줄을 서서 선물을 바쳤다. 선물을 바치는 이마다 황제의 눈에 들기만을 간절히 바라고 있었다. 황제가 마음에 들어 하면 선물을 바친 사람에게는 엄청난 영광이 아니겠는가.

그러나 옥좌에 앉은 황제는 시큰둥하기만 했다.

잔뼈 굵은 신하들은 일일이 실망하지 않았다. 황제가 아무 반응 없다면 그들끼리 즐기면 될 일이었다. 신하들은 서로를 치켜세워 주며 놀란 표정을 짓거나 과장이 섞인 말을 늘어놓았다. 그렇게 대전 안엔 웃음소리가 끊이질 않았다.

“아이고, 사마司馬 대인께서 아주 귀한 백옥불을 가져오셨습니다. 높이는 한 석 자 정도 되어 보이는군요. 잡티 하나 없이 새하얀 백옥에 조각도 아주 정교합니다. 이 자비로운 눈매를 보니 집안에 두면 가정이 필히 편안해지겠습니다.”

“이 대인의 말씀대로라면 참 좋을 텐데요. 석 자는 족히 되는 크기이지요. 백옥은 북강北疆에서 온 것인데 조각 대사는 남쪽의 명가입니다. 남북의 화합을 뜻하는 좋은 기운을 담아 왔지요. 아이고, 이 경태람景泰藍(법랑 공예품의 일종) 장식품도 매우 훌륭합니다. 흔하지 않은 것인데, 서양에서 들여왔습니까?”

“역시 보는 눈이 뛰어나십니다. 제가 허풍을 떠는 게 아니라 궁에서도 이런 건 못 만들어 냅니다. 구리 선으로 정교하게 무늬를 만들었지요. 이 색 좀 보십시오. 남색, 녹색, 자색은 말할 것도 없고 이 밝은 황색은 다른 경태람에서는 볼 수 없는 색입니다. 전문가만이 이런 미세한 차이를 알아보지요.”

황제 옆에 서 있던 학평관이 목청을 높여 소리쳤다.

“사마 대인 백옥불, 이 대인, 서양 경태람…….”

발밑이 소란스러웠지만 황제는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규율만 아니었다면 그는 탄일에도 남서방에서 서예를 하며 시간을 보냈을 텐데.

“양 대인, 병풍이 아주 훌륭합니다. 비단에 수를 놓은 것이지요? 꽃이며 벌레, 물고기가 꼭 살아 움직이는 듯합니다. 역시 보통 솜씨가 아니군요. 실이 가늘어서 조금만 힘을 주어도 곧장 끊어질 터인데, 이는 필시 강남의…….”

“맞습니다. 강남의 유명 수방에서 만든 것입니다. 초봄에 첫 옥사玉絲를 말려 얻은 비단으로 만든 것이지요. 꼬박 반년에 걸쳐 만들어 냈다고 합니다. 폐하에 대한 신의 작은 효심으로 생각하여 주시옵소서.”

황제에게 강남은 특별한 곳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강남의 비단 자수라는 말을 듣자 황제의 시선이 슬쩍 향했다. 누구보다 황제를 잘 아는 학평관이 곧장 목청을 높였다.

“여봐라, 폐하께서 감상하실 수 있도록 병풍을 옮기거라.”

병풍을 가져온 양 대인은 기쁨을 감출 수 없었다. 병풍과 함께 황제 앞으로 걸어간 그가 두 손을 모으며 말했다.

“신, 폐하의 천추를 경하드리며 만수무강을 기원하겠나이다. 보잘것없지만 신의 작은 성의이오니 부디 기쁘게 받아주시옵소서, 폐하!”

황제는 조금의 표정 변화도 없이 대꾸했다.

“훌륭하군.”

그도 강남의 비단 자수를 기억하고 있었다. 백천범이 그곳의 공방에서 세자에게 옷을 지어 주지 않았던가. 비단 자체도 훌륭하고 수공예도 뛰어났지만 가격이 조금 비쌌다. 백천범은 그곳의 옷을 좋아하지만 너무 비싸다는 말을 하며 점차 발길을 끊었다. 지금도 그녀의 목소리가 귀에 또렷했다.

황제의 눈에 든 선물은 늘 감상할 수 있도록 남서방이나 승덕전으로 보내졌다. 그 외에 다른 것들은 곳간에 두어 하사품으로 쓰였다. 양 대인은 자신의 선물이 선택받았다는 기쁨에 곧장 감사 인사를 올렸다. 황제는 선물을 감상하며 자신의 이름을 떠올릴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이는 엄청난 영광일 뿐만 아니라 자신의 입지를 위해서도 좋은 일이었다.

점심이 되자 황제는 벽복전에 신하들을 초대해 연회를 베풀었다. 수연壽宴이라 불리는 탄일 연회에는 스무 종류의 익힌 요리와 냉채, 네 종류의 탕과 반찬, 여덟 종류의 생과일과 꿀에 잰 과일뿐만 아니라 떡, 전병 등 아홉 종류의 간식이 줄을 이었다.

다 먹는 데만 해도 두 시진이 걸리니, 신시가 되어야 연회가 끝날 듯했다. 그러나 오래 자리를 지킬 마음이 없었던 황제는 신하들이 권한 술을 마신 뒤 곧장 자안궁으로 향했다.

그의 생일은 태후에게는 가장 고통스러웠던 날이기도 했다. 그는 아이를 낳던 백천범의 모습을 영원히 잊을 수 없었다. 제 목숨을 걸고, 고통을 견디며 아이를 낳던 그 모습을 어찌 잊을까. 그는 그 고통스러운 순간을 그녀와 함께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어떻게 견뎠는지 의아할 정도였다.

이렇듯 자식을 낳아야 부모의 은혜를 깨닫는 법이었다. 황제에게 아직 온기 어린 마음이 남아 있다면 서 태후에 대한 감정이리라. 이제 서 태후는 그에게 가장 가까운 사람이었다. 서 태후가 그와 거리를 좁히기 위해 애쓰고 있으니, 아들로서 상응하는 모습을 보여야 하지 않겠는가.

황제가 먼저 찾아오자 서 태후는 기뻐서 어쩔 줄 몰라 하며 곧장 장수면을 내오게 했다. 황제는 식사를 하고 왔지만, 그녀의 정성을 무시할 수 없었기에 함께 간단히 식사를 했다.

서 태후가 속마음을 털어놓은 뒤로 두 모자의 사이는 부쩍 가까워졌다. 황제는 짬이 날 때마다 직접 찾아와 문안을 여쭈었다. 식사는 잘했는지, 잠은 편히 잤는지 등 사소한 부분까지 세심하게 그녀를 챙겼다.

태후는 미륵보살처럼 자애로운 미소를 지으며 모자간의 따스한 정을 나누었다. 이 광경에 태감과 궁녀들도 덩달아 마음이 들떴다. 적막하기만 하던 궁에 미약하지만 온기가 흐르게 되지 않았는가.

태후와 식사를 마친 황제는 인사를 고하고 밖으로 향했다. 자안궁을 빠져 나오던 중 그는 맞은편에서 걸어오던 사람들과 마주쳤다. 가장 앞에 서 있던 이가 그를 향해 예를 갖췄다.

“황형皇兄께서 이곳에 숨어 계셨군요. 이 아우가 얼마나 찾았는지 아십니까.”

황제의 얼굴에 옅은 미소가 떠올랐다.

“벽복궁에서 술을 마시지 않고 어찌 짐을 찾았단 말이냐?”

“주인공이 자리를 비웠는데 술맛이 나겠습니까? 형님과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습니다.”

보아하니 진왕은 술을 제법 마신 듯 두 볼이 발그스레했다. 그가 뒤에 있던 이들을 가리켰다.

“아우들이 어렵사리 모였으니 황형을 모시고 한 잔만 더 하겠습니다.”

진왕과 함께 온 이들은 묵용씨 성을 가진 종친 왕들이었다. 하나같이 공손한 자세로 서서 미소만 짓고 있는 이들이었다. 그들은 황제를 두려워했기 때문에 진왕처럼 스스럼없이 술을 권하진 못했다. 혹시라도 황제의 눈 밖에 나면 뼈도 못 추릴 걸 알았기 때문이다.

오늘은 흥이 돋은 진왕이 먼저 앞장섰기에 다들 용기를 낼 수 있었다. 그러나 황제의 얼굴을 보는 순간, 끌어 올린 용기가 무색할 정도로 오금이 저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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