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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유왕비초장성 (481)화 (480/1,192)

제481화

태후가 된 후, 한동안은 영광스러운 날들이 이어졌다. 그녀는 봉포를 입고 삵을 안은 채 후궁 곳곳을 여유롭게 거닐었다. 그녀는 더없이 존귀한 자리에 올라, 모두의 존경을 한 몸에 받는 신분이 되었다. 그러나 후궁 곳곳을 돌아다니고 있으면, 어느 순간 공허함이 그녀의 가슴을 채웠다.

비빈들이 단 한 명도 없는 터라, 후궁은 한기가 들 만큼 적막함만 맴돌았다. 아무리 걷고 또 걸어도 그녀에게 다가와 인사를 건네는 이가 없었다.

자안궁으로 처소를 옮긴 덕에 궁전의 규모도 더 커졌고 경치도 좋아졌지만, 그녀는 예전보다 쓸쓸한 처지가 되었다. 궁전에는 그녀와 내감, 궁녀들이 전부였다. 그녀의 말동무가 되어 줄 사람도 없었다.

오히려 묵용한이 황제로 있던 때보다 못했다. 그땐 황후와 비빈들이 그녀를 수시로 찾아왔다. 비록 태비였지만 비빈들의 후한 대접을 받았고, 다들 그녀를 공경하며 효를 다했다. 지금 그녀는 풍족한 재물에 둘러싸여 있었지만, 그녀가 원하는 것은 사람들의 온기였다.

젊을 땐 총애를 받지 못해 누군가와 어울려 지내는 게 싫었다. 괜스레 부끄러웠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이가 들고 보니 평범한 부인들처럼 북적이고 소란스러운 모습이 그리울 따름이었다.

더욱이 몸까지 아프니 기분이 더 가라앉아, 서 태후는 자그마한 장명쇄를 손에 쥐고 눈물만 흘렸다.

영 마마嬷嬷가 급히 그녀를 달랬다.

“마마, 어찌 이러십니까? 그리 큰 병도 아닌걸요. 태의가 약 몇 첩만 먹으면 곧 나을 거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서 태후가 손수건으로 눈물을 닦으며 고개를 저었다.

“애가는 한 번도 본 적 없는 손자가 아닌가. 가엽기도 하지. 이 할미의 얼굴도 한번 못 보고 떠나다니. 애가가 어찌 마음이 아프지 않겠나.”

“마마, 세자 아기씨는 박복하시어 오래 머물지 못한 것입니다. 세자 아기씨의 운명이 그러한 것이니 마마께서도 너무 마음 아파하지 마시어요. 폐하께서 후궁을 들이시면 금방 대를 이으실 겁니다. 마마께서 다 안아 주지 못하실 만큼 아기씨들로 넘쳐나겠지요.”

서 태후는 은색 장명쇄를 베개 밑에 내려놓으며 긴 한숨을 내쉬었다.

“그 일로 애가의 머리가 다 아프네. 황상의 한은 자네도 잘 알지 않나? 오늘은 조정에서 채안화를 감금하고 가을에 참형을 내리라고 했다더군. 어찌 그리 실망스러운 말을 한단 말인가? 대신들은 다 황제를 위해서 하는 말이거늘, 오히려 그 대신들의 목숨을 해하려 하다니.”

“폐하께서는 현군이십니다. 소인이 보기엔 홧김에 모진 말을 내뱉으신 것뿐입니다. 냉정함을 되찾으시면 채 대인의 목숨을 해하실 일은 없을 것입니다.”

영 마마가 간곡하게 말했다.

“요즘 다들 방법을 강구하고 있지 않습니까? 채 대인과 수 대인은 조정에서 간언을 드리고, 학 관리와 진왕야께서도 암암리에 방법을 꾀하고 계시지요. 소인은 진왕야께서 말씀하신 방법이 좋을 것 같습니다. 다만 소인도 같은 염려가 들어 겁이 납니다.”

“애가의 생각도 그러하다네.”

서 태후가 고개를 끄덕였다.

“궁에는 우리 모자 둘뿐이니 마땅히 더 가까워져야 하지. 한데 애가가 느끼기엔 예전만 못해. 이렇게 가까이서 지내는데도 거리는 더 멀어졌지. 몇 걸음이면 될 거리를 찾아오지도 않고, 늘 소복자만 보내 문안을 물으니, 얼굴 한번 보기도 참 힘들지 않은가.

진왕이 언급한 일은 애가도 찬성일세. 설령 위험한 일이라 해도 애가는 그리할 걸세. 예전에는 초왕비가 있어 일을 그르쳤지만, 이제는 마땅히 빈틈을 메워야지. 이대로 두어서는 안 될 일이야.”

두 사람이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데 문 앞에 있던 태감이 목청을 높였다.

“황제 폐하 납시오!”

서 태후는 서둘러 등을 보이고 침상에 누웠다. 영 마마가 얼른 이불을 덮어 주곤 황제를 맞이했다.

황제가 담담히 말했다.

“다들 일어나거라.”

말을 마친 그가 성큼성큼 안으로 들어갔다.

궁녀와 태감들은 자리에서 일어났지만 차마 그를 따를 순 없었다.

황제가 서 태후를 힐끗 내려다보더니 영 마마에게 물었다.

“주무시는가?”

영 마마가 시선을 내리깐 채 말했다.

“이제 막 누우셨으니 아마 아직은…….”

황제가 그녀의 말을 가볍게 잘라 냈다.

“주무시니 다음에 다시 오겠다.”

“…….”

분명 아직 아닐 거라고 했는데 어찌…….

말을 마치자마자 곧장 몸을 돌리는 황제를 붙잡듯이, 서 태후의 기침 소리가 들려왔다.

“여기까지 왔는데 어찌 앉지도 않고 가십니까, 황상.”

황제는 멀찍이 서서 옅은 미소를 보였다.

“소자가 어찌 노불야의 숙면을 방해할 수 있겠습니까.”

“종일 누워만 있으니 조금 피곤한 것이지요.”

서 태후가 천천히 몸을 일으켜 앉자 영 마마가 서둘러 그녀의 허리에 베개를 대 주었다.

서 태후는 멀찍이 서 있는 황제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귀하디 귀한 태후의 신분이 되었지만, 당최 묵용감 앞에선 그 위력이 드러나지 않았다. 그렇다 한들, 그녀는 태후가 아닌가. 아랫것들이 지켜보는 앞에서 태후의 위엄을 잃을 순 없었다.

그녀가 황제에게 손짓하며 말했다.

“이리 오세요, 황상. 또 얼마나 야위었는지 애가가 봐야 하지 않겠습니까.”

황제는 서 태후의 말대로 침상 근처에 놓인 커다란 멀구슬나무 의자에 앉았다. 차를 내온 궁녀가 빠르게 물러났다.

“태후께서 몸이 편찮으시다길래 찾아왔습니다.”

황제는 찻잔을 들고 찻잎을 걷어내며 느긋하게 말했다.

“다만 말씀을 들어 보니 기력이 넘치시는 게 별 탈 없으신 듯하군요. 약을 드시지 않으려는 이유를 알겠습니다.”

그의 말은 서 태후의 간담을 서늘하게 만들었다. 그녀가 나약한 목소리로 말했다.

“애가에게 농을 하는 겁니까? 애가가 지금 기력이 넘쳐 보이냔 말입니다. 이렇게 기대고만 있어도 힘이 달립니다.”

“한데 어찌 약을 드시지 않겠다 하셨습니까? 약사발을 내동댕이치시면서까지 말입니다.”

황제의 표정은 변화가 없었지만, 서 태후의 얼굴엔 당혹스러움이 가득했다. 그녀가 웅얼거리며 말했다.

“애가는 그저, 손이 잠시 미끄러워, 실수로 떨어뜨린 게지요.”

“실수로 그릇을 놓치는 것은 큰일도 아니지요. 다시 약을 달여 올리면 되지 않습니까.”

황제가 고개를 들어 영 마마에게 물었다.

“태후께서 다시 약을 드셨느냐?”

영 마마는 머뭇거리며 태후를 잠시 바라보더니 솔직히 털어놓았다.

“폐하께 아룁니다. 드시지 않으셨습니다.”

황제의 시선이 다시 서 태후에게 향했다.

“어째서 저들에게 다시 약을 달여 달라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서 태후는 눈을 내리깐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이게 어딜 봐서 아들이란 말인가? 꼭 부모가 자식을 혼내는 듯한 모습이었다. 이렇게 기세등등한 자세로 어머니를 대하는 아들이 어디 있단 말인가…….

황제가 별안간 얼굴을 굳혔다.

“아랫것들이 제대로 시중을 들지 않아 태후께서 심기가 불편하신가 봅니다. 여봐라! 당장 이 쓸모없는 것들을 끌어내…….”

그가 말을 마치기도 전에 자안궁의 내관과 궁녀들이 일제히 무릎을 꿇고 머리를 조아렸다. 그러나 차마 용서해 달란 말은 내뱉지 못했다. 황제의 협박에 깜짝 놀란 태후가 몸을 꼿꼿이 세웠다.

“황상, 대체 무슨 짓입니까?”

황제가 냉랭하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소자가 다른 이들로 보내 드리겠습니다. 태후께서는 옥체만 보중하십시오. 태후의 건강이 곧 소자의 행복이자 은혜입니다.”

태후도 더는 돌려 말할 수 없었다. 긴 한숨을 내쉰 태후는 주변을 물리고 영 마마만 곁에 두었다. 더는 체통을 지킬 여력도 없었기에, 서 태후는 손수건으로 눈가를 닦아내며 흐느꼈다.

“황상, 애가를 몰아세우는 겁니까? 애가가 왜 약을 먹으려 하지 않는지 정녕 모른단 말입니까? 어미와 자식 간에는 마음이 이어져야 하는 것을, 황제와 애가는… 듣기 싫겠지만, 산과 바다만큼 멀고도 멀지 않습니까.

이 어미가 차마 다가갈 수조차 없어요. 꼭 그리 고독한 군주가 되어야겠습니까? 이 어미도 필요 없는 것입니까? 이 어미도 압니다. 황상에게 몹쓸 짓을 하여 상처를 주었단 것을…….”

황제가 손을 내저었다.

“지나간 옛일을 다시 꺼내실 필요 없습니다. 앞을 보며 살아야지요.”

“애가가 하고 싶은 말이 그 말입니다. 앞을 보며 살아야지요. 하지만 황상은요? 궁에 우리 모자 말고 또 누가 있습니까? 궁전마다 텅텅 비어 스산하기 짝이 없습니다. 문턱을 넘는 것조차 무서울 정도예요. 선조들도 후궁에서는 대사를 논하지 않았습니다. 그것이 규율이니까요.

하지만 애가는 어미로서 아들에게 이리 간청을 하고 있습니다. 그저 어미의 소원을 들어준다고 생각하면 안 되겠습니까? 죽기 전에 손자 얼굴을 볼 수만 있다면 이 어미는 편히 눈을 감겠습니다. 황상, 부디 이 어미를 가엽게 여겨주세요…….”

급기야 서 태후는 눈물 콧물을 다 쏟으며 울기 시작했다. 영 마마가 그녀 뒤에서 가볍게 등을 토닥였다.

“노불야, 부디 울지 마십시오. 황상께서도 마음이 아프십니다.”

아무리 냉랭한 황제라고 해도 어미가 우는 모습 앞에서 태연할 수는 없는 법이다. 그 또한 마음이 아렸다. 서 태후는 천하나 사직, 조정의 근간처럼 이치를 따지는 말은 전혀 하지 않았다. 냉랭하고 소원했던 태도도 찾아볼 수 없었다. 그의 눈앞에 있는 태후는 그저 손자가 보고 싶은 마음에 눈물을 흘리는 평범한 노부인에 불과했다.

그 또한 후궁을 이토록 오래 비워 두는 일이 규율에 어긋남을 잘 알고 있었다. 어느 황조도 황제만 덩그러니 궁을 지키는 경우는 없었다. 사실 황제는 묵용한의 장자에게 제위를 물려줄 생각이었다. 그러나 계획을 들은 수민이 도리에 어긋난다고 답했다.

어쨌든 이 천하는 묵용한에게서 빼앗은 것이고, 아무리 태자의 마음씨가 좋다고 한들 묵용감은 아버지를 죽인 원수가 아닌가. 어쩌면 백 년쯤 뒤엔 묵용감의 무덤을 파내 유골을 매질하며 죄를 추궁할지도 몰랐다.

서 태후는 눈물을 닦으며 황제의 안색을 힐끔 살폈다. 그녀가 이토록 애걸복걸하고 있건만, 황제는 여전히 무엇을 생각하는지 알 수 없는 표정이었다. 그 모습에 왈칵 설움이 밀려왔다. 눈물범벅이 된 어미를 봐도 아무런 반응이 없다니…….

몸도 편치 않은 데다 오열까지 하니 순간 서 태후에게서 기침이 연달아 터져나왔다. 두 모자를 바라보던 영 마마의 마음이 조급해졌다. 그녀가 서 태후의 등을 토닥이며 말했다.

“태후 마마, 울지 마시어요. 편치 않으신데 이렇게 우시다간 병이 더 악화될 것입니다.”

황제가 마침내 입을 열었다.

“소자도 이해했습니다. 지금은 몸이 편치 않으시니 회복에만 신경 쓰시고 이 일은 나중에 얘기하시지요. 약을 드시지 않는 것은 절대 안 될 일입니다.”

그가 영 마마에게 분부했다.

“태후께 약을 다시 달여 드리거라. 짐이 약을 드시는 걸 확인해야겠다.”

황제가 이곳에 더 머무르겠다는 말에 영 마마는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모자의 마음속 응어리가 풀린다면 황제도 태후의 말에 따르지 않겠는가. 영 마마는 얼른 대답을 올리고 방을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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