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80화
필사적으로 굴었지만, 사실 백천범은 왜 자꾸 도망치려 하는지 알 수 없었다. 그저 궁에 있으면 마음이 불안하고 초조해 견디기 어려웠다. 더욱이 머릿속엔 자꾸만 흐릿한 장면이 아른거렸다. 안개가 낀 듯 얼굴이 흐릿한 사내와 어쩐지 익숙한 어린 여인이 그녀의 머릿속을 뒤덮었다. 그 장면들은 오랫동안 지속할 때도 있었고, 잠시 스쳐 지나갈 때도 있었다.
일련의 과정들은 그녀에게 기이한 상실감을 안겨 주었다. 무언가 아주 중요한 것이, 그녀의 기억에서 천천히 흘러내려 흩어지는 듯했다. 시간이 지날수록 그녀는 겁에 질렸다. 자신의 기억은 나날이 불안정해지는데, 믿고 도움을 청할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다. 그래서 이곳을 떠나야겠다고 생각했다. 다만 궁을 떠난 뒤에 어디로 가야 하는지, 갈피를 잡지 못했다.
한바탕 혼이 날 각오를 하며 궁으로 돌아왔지만, 그녀의 예상은 보기 좋게 빗나갔다. 남문우는 평소와 다름없이 그녀를 처소로 데려다주었고, 여주와 여옥도 여느 때처럼 시중을 들었다. 꼭 그녀가 축제를 마치자마자 아무 일 없이 궁으로 돌아온 것처럼 느껴졌다.
그녀도 피곤했기에 침대에 눕자마자 잠이 들었다.
침대 옆에 선 여주와 여옥이 그녀를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잠시 후, 여주가 밖으로 나갔고 여옥은 침대 밑에서 은으로 만든 작은 화로를 꺼내 그 안에 가루를 뿌렸다. 이내 화절자로 불을 붙이더니 다시 화로를 침대 밑으로 밀어 넣었다. 금세 향의 연기가 방 안을 가득 메웠지만, 아무런 냄새도 나지 않았다.
그때, 여주가 다시 안으로 들어오더니 융단 위에 앉아 두 손을 모았다. 연기가 기이한 모양으로 흩어지는 동안, 그녀의 얼굴은 조금씩 창백해졌고 이마에는 땀이 송골송골 맺혔다. 급기야 하얀 팔 위에 멍울이 하나 솟아오르더니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던 여옥이 허리춤에 꽂힌 비수를 꺼내 들었다…….
* * *
남류청은 걱정이 가득한 얼굴로 방 안을 서성였다. 기다란 치맛자락이 바닥을 쓸며 사르륵거리는 소리가 끊임없이 이어졌다.
문득 들려오는 익숙한 발소리에 그녀가 고개를 들었다.
“어찌 되었는가?”
“잠들었습니다.”
남문우가 궁전 안으로 들어오며 답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폐하. 자고 일어나면 오늘 일은 기억하지 못할 것입니다.”
남류청의 굳은 표정은 풀어질 줄을 몰랐다.
“어째서 지금도 떠나려 한단 말인가? 설마 그 애에겐 향이 듣지 않는 건가? 냄새가 없으니 자각도 못 할 터인데.”
그녀의 걱정스러운 목소리가 이어졌다.
“정말 조제 양을 늘리기라도 해야 하는가? 그 애는 짐의 혈육이네. 그렇게 하기에는 짐이…….”
“폐하.”
남문우가 그녀의 말을 끊었다.
“신이 매일 공주의 곁을 지키며 살펴보았습니다. 향은 분명 효능이 있었습니다. 공주가 궁을 떠나려고 한 것은 묵용감에게 가기 위해서가 아니라 궁에서의 생활이 익숙지 않기 때문입니다.”
남류청이 그를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남 장군은 그리 생각하는가?”
“예.”
남문우는 담담하게 그녀의 시선을 마주했다. 여기서 용량을 더 늘리면 백천범의 몸에 해로울 게 분명했다. 그는 향에 지능을 잃은 바보와 혼인하고 싶진 않았다.
“다른 이였다면 이미 넘어왔겠지만, 저 애는…….”
남류청이 무거운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짐도 정말 뜻밖이다.”
“무양 공주는 의지가 강한 여인입니다. 평범한 사람과는 비교할 수가 없지요. 폐하께서도 처음부터 알고 계시지 않으셨습니까?”
남문우가 말했다.
“신에게 조금만 더 시간을 주십시오. 반드시 공주를 바꿔놓아 행복한 삶을 누리게 하겠습니다.”
남류청이 한숨을 내쉬었다.
“그 앤 짐이 배 아파 낳은 자식이라네. 어릴 때부터 온갖 고생을 겪은 아이지. 짐도 그 애가 행복하길 바라네. 오늘 일은 이만하면 되었으니 여주와 여옥에게 서두르라고 전하게.”
“예, 알겠습니다.”
남문우는 살짝 허리를 굽혀 예를 갖춘 뒤 궁전을 나섰다.
깊은 밤, 둥근 달이 거리를 희게 비추고 있었다. 흰 빛을 어깨에 받으며 걷고 있으려니 괜스레 홀가분한 기분이 들었다. 뒷짐을 지고 걷던 남문우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평락궁에 다다랐다. 그는 커다란 문밖에 서서 남제화에게 했던 말을 떠올렸다. 다른 이의 것을 빼앗는 걸 즐긴다던 말.
그땐 그 과정이 이리 순탄치 않을 줄은 몰랐다. 사실 그도 적잖은 충격을 받은 터였다. 그러나 그는 이쯤에서 물러설 생각이 없었다. 묵용감이 그녀에게 어떤 기억을 남겼든, 그가 묵용감의 흔적을 덮으리라. 결국 그녀의 기억 속엔 그밖에 남지 않을 때까지.
그가 이렇게까지 나올 정도로, 그녀의 어떤 점이 좋냐고 물으면 섣불리 답할 수 없었다. 그저 그녀는 다른 여인들과는 달랐다. 기억을 잃은 채였지만 여전히 도망가려는 것만 봐도 감탄이 나올 정도였다.
지금은 그도 쉽게 단정 지을 수 없었다. 자신이 그녀를 굴복시키는 것인지, 그녀가 자신을 길들이고 있는 것인지…….
* * *
남제화는 전서구의 다리에 걸린 작은 고리에서 쪽지를 꺼냈다. 팔을 들어 올리자 비둘기가 날개를 파닥거리며 밤하늘로 돌아갔다. 그때, 등 뒤에서 미세한 인기척이 느껴졌다. 그는 쪽지를 재빨리 소매 안에 넣고 몸을 돌려세웠다. 사장풍이 뒤에 서 있었다. 남제화가 멋쩍은 웃음을 흘렸다.
“사 형, 언제 오셨습니까? 어찌 소리도 없이 들어오십니까? 깜짝 놀랐습니다.”
사장풍이 담담한 표정으로 대꾸했다.
“숨기는 게 없으면 놀랄 것도 없는 법이지요.”
남제화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사 형, 이 아우는 부끄러울 게 없는 사람입니다. 숨기는 게 있다니, 그리 달갑진 않은 말이군요.”
“그렇습니까?”
사장풍이 탁자 앞에 앉더니 물을 한 잔 따라 마셨다.
“이곳을 떠나지 않는 이유는, 앵앵이 때문입니까?”
남제화가 부끄러운 듯 코를 비볐다.
“알고 계셨습니까?”
“모르는 게 더 이상하지요.”
사장풍이 술을 마시듯 물을 한 번에 들이켰다.
“이미 시집간 여인이니 마음 접으십시오.”
“진짜 혼인이 아니라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누가 그럽니까?”
“사 형께서 그러셨습니다. 억지로 한 것이라고요.”
“…제가 언제 그랬습니까?”
“저와 술을 마셨을 때 하셨습니다.”
“술김에 한 말을 어찌 진담으로 여긴답니까.”
“술김에 진담이 나오는 것이지요. 이 아우는 진심으로 받아들였습니다.”
“…그래, 내가 형이니 형으로서 충고 하나 하지. 앵앵이는 여간 사나운 여인이 아니니 거리를 유지하는 게 좋을 것이네.”
남제화가 또다시 코를 문지르더니 부끄러운 듯 웃어 보였다.
“솔직히 말씀드리면 전 그런 사나운 여인이 좋습니다. 눈을 부릅뜨고 절 바라봐 줄 때면 날아갈 듯 기쁘지요.”
“…쿨럭, 점잖게 생긴 사람이 취향 한번 고약하군.”
잠시 고민에 잠긴 듯 말이 없던 사장풍이 다시 입을 열었다.
“군자는 남을 위해 돕는 법. 앵앵에게 이혼장을 보낸다면 앵앵이를 데려가 줄 수 있겠나?”
남제화가 진지하게 고민한 뒤 답했다.
“어려울 겁니다. 앵앵은 저보다 이 역참을 훨씬 좋아할 테니까요. 제가 더 큰 역참을 선물하면 고민은 해 보겠지만요. 사 형, 어째서 사 형께서 떠나진 않으시는 겁니까?”
사장풍은 묵묵히 몸을 일으키더니 밖으로 향했다.
마침 그는 복도에서 사앵앵과 마주쳤다. 그녀는 잔뜩 신이 나 있었다.
“호인胡人 상인들이 뒤채 방을 전부 대절했어요. 이번에 아주 큰 돈을 벌게 되었다고요.”
사장풍은 돈에 연연하지 않았기에 별 감흥이 없었다. 그가 시큰둥하게 한마디 던졌다.
“남제화는 그리 좋은 사람이 아니니 조심하십시오. 쥐도 새도 모르게 팔려 가지 말고.”
말을 마친 그는 곧장 자신의 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사앵앵은 황당한 표정으로 그 자리에 서 있었다. 그러다 무언가 깨달았는지 그의 방문에 대고 소리쳤다.
“걱정하지 마세요. 전 일편단심이니까요. 아무도 절 빼앗아갈 수 없어요.”
아래층 방에 있던 남제화는 등불 밑에서 쪽지를 펼쳤다. 쪽지에는 다섯 글자만 적혀 있었다.
「재도주, 무산.」
그는 쪽지를 촛불에 가져다 대었다. 쪽지에 그을음이 번져 가다 천천히 재로 변하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지켜보며 그는 알 수 없는 표정으로 생각에 잠겼다.
* * *
유월이 되자 동월국의 날씨는 제법 끓어올랐다. 방 안에 얼음 그릇을 가져다 놓았지만 좀처럼 더위를 식혀 주지 못했다. 황제는 옷깃을 풀어헤친 채 의자에 앉아 있었다. 더운 날씨 때문인지 몸에 너무 많은 화기가 쌓인 것인지 분간할 수 없었다.
고작 두 달이 지났을 뿐이건만, 대신들은 또다시 간택을 서두르라며 우르르 무릎을 꿇었다. 어찌나 목에 핏대를 세우고 주절주절 떠드는지, 황제는 귀가 다 아플 지경이었다.
개중에서도 얼굴이 벌게질 만큼 간언을 올리던 도찰원 어사 채안화는 당장 목숨을 끊을 수 없음에 안타까워했다. 결국 분노를 참지 못한 황제는 탁자를 내리치며 자리에서 일어나 호통을 쳤다. 장형 서른 대를 내리겠다고 했건만, 오히려 채안화는 커다란 나무 기둥에 머리를 박으려고 했다.
천만다행으로 옆에 있던 수민이 그를 붙잡아 가벼운 찰과상만 입었을 뿐, 크게 다치진 않았다. 이미 자리를 뜨던 묵용감은 뒤에서 들려오는 소란스러움에 힐끗 돌아보았다. 안 그래도 화가 치솟던 참인데 채안화의 꼴을 보니 황제는 머리끝까지 화가 치밀고 말았다. 채안화에게는 감금과 함께 가을이 되면 참형에 처하라는 명이 내려졌다. 노기등등한 황제는 그대로 승덕전을 찾았다.
단번에 치솟았던 화는 그래도 제법 빠르게 가라앉았다. 그는 오전 내내 조용히 상주서를 확인했고 오후에는 잠시 눈을 붙이고 일어났다. 비록 화는 가라앉았지만, 마음은 줄곧 허공을 둥둥 떠다녔다. 알 수 없는 무언가가 그의 뒤꽁무니를 쫓아다니며 불안함을 일으키고 있었다.
학평관이 그의 등 뒤에서 조용히 부채질을 해 주었다. 몇 차례나 황제의 안색을 살피던 그가 결국 입을 열었다.
“폐하, 해가 기울었습니다. 잠시 나가셔서 바람 좀 쐬시지요.”
황제는 침대에서 꿈쩍도 하지 않고 눈을 감고 있었다. 그때 소복자가 조심스레 들어와 고했다.
“폐하, 자안궁慈安宮의 황유도가 뵙기를 청하옵니다.”
“무슨 일로?”
소복자가 허리를 숙이며 답했다.
“태후께서 어젯밤 찬 바람을 쐬신 탓에 풍한이 드셨다 하옵니다. 태의도 진맥을 했다고 하옵니다.”
“태의는 뭐라고 하였느냐?”
“처방한 약을 드시면 별일 없을 거라고 했다 하옵니다.”
소복자의 말이 이어졌다.
“한데 태후께서 약을 거부하신다고 하옵니다. 황 관리가 초조한 마음에 폐하를 찾아온 듯합니다.”
그제야 황제가 천천히 눈을 떴다.
“어째서 약을 거부하신단 말이냐?”
별안간 소복자가 우물쭈물하며 입술만 달싹였다. 문 앞에 있던 황유도는 어쩔 줄 모르며 무릎을 꿇었다.
“폐하께 아룁니다. 태후께서 몸이 편치 않으셔서 그런지 약사발을 내던지시더니…….”
“내던지시더니?”
“그것이… 이렇게 살아서 무엇 하겠냐며 차라리 빨리 선황을 뵈러 가는 게 나으시다고…….”
황제가 가벼운 웃음을 터뜨렸다. 태후가 또다시 그를 압박하려는 게 아닌가.
황유도는 무릎을 꿇은 채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었다. 학평관만이 황제의 안색을 살피며 그를 타일렀다.
“폐하, 한번 뵈러 가시는 게 어떠신지요. 홀로 자안궁에만 계시니 적적하실 테지요. 본래 나이가 들면 어린아이가 된다고 하지 않습니까? 태후께서도 폐하의 관심을 받고 싶으신지도 모릅니다.”
황제가 옷자락을 털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가자. 태후를 뵈러 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