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가유왕비초장성 (479)화 (478/1,192)

제479화

백천범은 나무 뒤에 숨어서 걱정스러운 얼굴로 상황을 살폈다. 그때, 저 멀리 수많은 사람들이 몰려오는 모습이 보였다. 다시 희망이 찾아온 순간이었다. 근교에서 축제를 보러 온 백성들은 성문을 나서야 집으로 돌아갈 수 있으니, 그들을 무작정 이곳에 잡아 두진 못하리라.

그녀는 가면을 쓴 채 묵용린을 피풍으로 가린 뒤, 사람들 틈에 섞여 들어갔다.

성을 지키는 사병들은 백성들이 벌떼처럼 몰려오자 눈을 부라리며 소리쳤다.

“물러서거라! 길을 막아선 안 된다. 옆으로 물러나래도!”

그때 한 노인이 입을 열었다.

“병사 나리, 어째서 성문을 열어주지 않는 것입니까? 그만 돌아가 자야 할 시간입니다.”

“말이 많다!”

사병이 성을 내며 언성을 높였다.

“성문을 닫으라는 상부의 명령이다. 다시 명이 내려올 때까지 조용히 기다리거라.”

“저희들이야 기다릴 수 있지만 아이는 어찌합니까요. 좀 보십시오. 다들 잠이 들지 않았습니까? 이대로 업고 있기가 힘이 듭니다.”

한 부인이 허리를 굽힌 채 원망을 토로했다. 그녀의 등에는 튼실한 아이가 업혀 있었는데, 손발이 축 늘어진 게 곤히 잠든 것 같았다. 등이 굽은 부인의 모습은 보는 것만으로도 안타까울 지경이었다.

그러나 사병들이 상부의 명령을 어찌 거역할 수 있을까. 그녀의 고충까지 신경 써 줄 여력은 없었다. 사병이 다시 소리쳤다.

“다들 조용히 하고 길옆으로 붙거라. 범인만 잡으면 문을 열어줄 것이다.”

범인이라는 말은 백성들에게 파도처럼 퍼져나갔다. 곧 백성들이 웅성거리며 떠들기 시작했다. 대체 누굴 잡아들이기에 이리 난리를 피우는 것일까.

“대체 누구를 잡는 거야? 지난번에 금불상을 훔친 대도大盜?”

“여인을 찾는 것 같던데? 공작신 가면을 쓴 사람이라더군.”

“여자 도적이라고?”

“아냐, 무시무시한 남자 도적이라던데. 처마를 날아다니는 건 물론이고 열 장이나 되는 궁의 담을 평지처럼 오간다더군. 남 장군마저 놀랐다는 걸 보면 범상치 않은 놈이 틀림없네.”

“남자가 아니라 여인이라니까. 병사 나리들이 공작신 가면만 벗기는 걸 내가 두 눈으로 똑똑히 봤어. 요즘은 여인들이 더 무섭지 않은가. 칼자루를 날린다는 그 여협처럼 말일세. 칼부림 한 번에 사내 둘은 처리한다더군. 어찌나 대단한지.”

“맞네, 맞아. 남 장군이 직접 잡으려는 걸 보면 엄청난 여인이 틀림없네.”

군중들 틈에 숨어 있었던 백천범은 사방에서 들려오는 이야기에 황당함을 금치 못했다. 대체 어쩌다 자신이 여협이 되었단 말인가? 그때, 우렁찬 말발굽 소리가 그녀의 정신을 일깨웠다. 고개를 들어보니 한 무리의 병사들이 말을 몰고 성문으로 달려오고 있었다.

선두에는 남문우가 병사들을 지휘하고 있었다. 환하게 불타오르는 횃불에 드러난 그의 얼굴은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누군가 겁에 질린 외침을 내뱉었다.

“남 장군님이다, 남 장군님이 오셨어!”

장내는 순식간에 얼어붙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장내를 뒤덮었던 소란스러움이 가시자, 백천범은 본능적으로 사람들 틈에 몸을 숨겼다. 그녀의 심장이 조금씩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남문우는 두 곳의 성문을 확인한 뒤, 세 번째 성문을 확인하러 오는 길이었다. 백천범을 찾는 데 연달아 실패하자 그는 심기가 매우 뒤틀려 있었다. 평소엔 능글맞은 모습을 유지했지만, 지금의 그에게서는 다가갈 수 없는 냉기가 뿜어져 나왔다. 옆을 지키던 호위병들마저 잔뜩 긴장해 있었다.

그가 수행원에게 몇 마디 분부를 내렸다. 수행원은 곧장 말을 끌고 앞으로 다가오더니 큰소리로 외쳤다.

“잘 듣거라. 사내는 왼쪽, 여인은 오른쪽에 서거라.”

백천범은 사람들 사이에 끼어 조용히 왼쪽 벽 가까이에 섰다. 지금은 완벽히 남장을 한 상태였기 때문에 들킬 염려는 없었다.

남문우의 수행원은 두 무리로 나뉜 백성들을 바라보며 큰소리로 외쳤다.

“모두 가면을 벗거라!”

백천범은 자신도 모르게 주먹을 꽉 쥐었다. 남장을 했다지만, 가면을 벗는 순간 남문우가 얼굴을 확인하기라도 하면 끝장이었다. 그렇다고 가면을 벗지 않으면 더욱 빨리 발각될 터였다.

그녀는 마음을 가다듬고 재빨리 가면을 벗었다. 이윽고 고개를 살짝 숙인 그녀가 대열의 가장자리로 자리를 옮겼다. 상황이 녹록지 않을 땐 곧장 도망칠 생각이었다.

여인들은 고개를 들어 올려 제 얼굴을 보였다. 남문우는 말에 탄 채 모든 여인의 얼굴을 꼼꼼히 확인했다.

그러나 처음부터 끝까지, 역으로 다시 한번 확인해 보아도 백천범의 얼굴은 보이지 않았다. 그는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여인들의 얼굴을 훑고 또 훑었다. 이곳에 없다면 남은 성문은 단 하나뿐이었다. 그는 최후의 선택을 좋아하지 않았다. 상황에 끌려다니는 기분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백천범이 이곳에 없으니 어찌하겠는가…….

남문우가 한참 동안 침묵에 잠기자 수행원이 다가와 조용히 말했다.

“장군, 이곳에는 없습니다. 다음 성문으로 가시지요.”

남문우는 왼쪽에 있던 사내들에게 시선을 옮겼다. 한 명 한 명 살펴보았지만 역시 그곳에도 없었다. 그는 속으로 쓴웃음을 삼킬 수밖에 없었다. 당연한 일이 아닌가. 그녀는 여인이니 사내들 틈에 끼어 있을 리가. 그저 이곳에도 백천범이 없다는 사실을 좀처럼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하지만 언제까지고 무고한 이들을 잡아 둘 수도 없는 노릇이기에, 그가 손을 내저었다.

“성문을 열고 보내 주거라.”

성문을 지키던 병사들은 두꺼운 통나무로 만든 빗장을 열고 백성들을 밖으로 내보냈다.

남문우는 말을 돌려세워 마지막 남은 성문으로 내달렸다. 마차 문틈으로 빼꼼 얼굴을 내민 백천범은 그가 사라지자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사람들 틈에 숨어 있다가 재빨리 운반용 마차에 몸을 숨겼으니 망정이지, 하마터면 남문우에게 잡힐 뻔했다.

말은 마차를 끌고 성문을 나선 뒤, 천천히 도로를 걸어갔다. 길 양쪽으로 흩어진 백성들은 조금 전 일을 회상하며 걸어갔다. 그러나 이번에는 범인에 대한 얘기가 아니라 남문우에 대한 얘기가 주를 이루었다.

남 장군은 자자한 명성과는 달리 좀처럼 백성들이 보기 힘든 인물이었다. 다소 곤욕을 치르긴 했어도 그의 실물을 본 백성들은 그에 대한 이야기를 신나게 늘어놓았다.

“남 장군님은 정말 잘생기셨더라.”

남원은 개방적인 나라였기 때문에 여인들이 공공연히 사내의 외모를 논하는 것도 지극히 흔한 일이었다.

“분을 바르셨는지 내 얼굴보다 더 희더라니까.”

다들 웃음을 터뜨리는데 누군가 입을 열었다.

“그런 말은 남 장군님 귀에 절대 들어가면 안 돼. 엄청 싫어하실 거야.”

“남 장군님은 백옥 같은 얼굴에 늘 웃고 계신다고 해서 옥면소호라 불린댔잖아. 하지만 아까는 그 차디찬 얼굴이 어찌나 무섭던지.”

“그러게 말이야. 그렇게 얼굴을 굳히는 일은 극히 드물다고 들었어. 아무래도 범인을 잡지 못했으니 심기가 불편하셨겠지.”

“대체 범인이 누구길래 남 장군님조차 손을 못 쓰시는 거람?”

“쉿! 조용히 해 봐.”

누군가 큰소리로 말했다.

다들 말을 멈추고 뒤를 돌아보았다. 어렴풋한 달빛 아래, 말에 탄 한 무리의 병사들이 달려오고 있었다. 다급한 말발굽 소리가 땅을 울리자 백천범의 심장도 함께 요동쳤다. 맙소사, 남문우가 쫓아온 게 분명했다.

영문을 알 리 없는 백성들은 어리둥절한 얼굴로 서로를 바라보았다. 기껏 성문을 열어 보내 주더니, 어찌 또 쫓아왔단 말인가?

말에서 내린 남문우는 길 한가운데 서 있는 운반용 마차를 바라보았다. 원래대로라면 마차엔 사람이 아닌 각종 물품이 가득 차 있어야 했다.

“열거라.”

마지막 성문으로 내달리던 중, 그의 머릿속을 스치는 사실이 있었다. 마차 한 대가 사람들과 함께 성문을 통과하지 않았던가. 모든 이들을 확인했지만, 마차 안은 생각지 못했다. 만약 마차에 다른 향료가 섞여 그녀의 향을 덮었다면……? 지금으로서는 하나의 실마리라도 놓칠 수 없었기에, 그는 서둘러 말을 돌려 마차를 뒤쫓아 온 터였다.

중년 남성의 마부가 남문우에게 예를 갖춰 인사를 올렸다.

“장군님, 이 안에는…….”

“시끄럽다. 어서 열거라.”

마부는 하는 수 없이 문을 열었다. 안은 잡다한 물품으로 가득 차 있었다. 매년 이런 식이었다. 행사가 열리기 전에는 가지런히 정리한 물건을 실어 왔지만, 행사를 마친 뒤에는 마구 집어넣었다. 어차피 도화절을 맞이할 때마다 모든 물품을 새로 만드니, 망가져도 상관없는 탓이었다.

활짝 열린 문 두 짝은 꼭 두 팔을 벌려 그를 환영하는 것 같았다. 남문우의 날카로운 시선이 마차 안을 샅샅이 훑었다.

의아해하는 시선이 사방에서 날아오고 있었다. 마차가 그렇게 큰 것도 아니었건만, 남 장군은 미동도 하지 않았다. 차마 물을 수도 없기에 주변은 조용하기만 했다.

한참 뒤, 남문우가 허리를 숙이더니 마차 안쪽에 놓인 옷자락을 들어 올렸다. 어두운색의 옷감이라 웬만한 사람은 발견하지 못했겠지만 그는 끝끝내 찾아내고야 말았다. 그의 입꼬리는 조금씩 치켜 올라갔고 눈망울에는 웃음기가 차올랐다. 옷 위에 놓여 있던 물건을 전부 치우니 깜짝 놀란 얼굴이 드러났다.

그녀가 당황해할수록 그의 웃음은 짙어질 따름이었다. 피풍을 걷어 올리니 곤히 자고 있는 묵용린의 모습이 보였다.

백천범은 간절한 눈빛으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남문우에게는 아주 익숙한 눈빛이었다. 처음 그녀를 붙잡았을 때도 이렇게 애원하는 눈빛으로 바라보지 않았던가. 그러나 그가 어찌 그녀를 놓아주겠는가.

그는 곧장 그녀에게 가면을 씌워 주었다. 이내 백천범이 반항할 틈도 없이, 그가 그녀를 끌어안고 밖으로 나왔다.

그 광경에 백성들은 깜짝 놀랐다. 마차 안으로 들어갈 때만 해도 차갑게 굳어 있던 그의 얼굴에 미소가 가득했다. 게다가 황금이 가득 든 보따리를 들기라도 한 양, 사내 옷을 입은 사람을 품에 소중히 안고 나오기까지 했다.

가면을 쓰고 있었지만, 사내라면 저리 여인처럼 들어 올릴 수 없을 터였다. 백성들은 속으로 범인이 남장한 여인일 거라고 추측했다.

뒤이은 남 장군의 행동에 백성들은 더욱 확신을 가졌다. 범인을 거칠게 다루기는커녕 자신의 말에 태워 자리를 뜨는 게 아닌가.

남겨진 백성들은 멀어지는 남 장군의 모습을 빤히 바라보았다. 한참 뒤, 누군가 입을 열었다.

“범인을 잡으려는 게 아니라 자신의 여인을 찾으려고 했던 거였나?”

그렇다면 대체 어떤 여인이길래 남원에서 제일가는 신랑감인 남 장군을 거부한단 말인가? 게다가 이런 날에 도망까지 치고?

남문우의 품에 안긴 백천범이 힘껏 발버둥을 쳤다. 그녀가 분을 참지 못해 소리쳤다.

“이런 사기꾼!”

백천범이 무어라 하든 남문우는 들리지 않는 듯했다. 그녀를 찾은 것만으로 그는 희망의 꽃을 피워낸 듯했다. 그가 태연하게 물었다.

“내가 왜 사기꾼인데?”

백천범이 코웃음을 쳤다.

“날 좋아한다며! 내가 그렇게 부탁했건만… 나를 붙잡아 왔잖아!”

남문우가 시시덕거리더니 곧 당당하게 말했다.

“너무 좋아하니깐. 어떻게 널 보내겠어. 그럼 내가 손해잖아?”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