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78화
백천범이 그가 준 가면을 쓰고 물었다.
“어때?”
본래 도화절에 쓰는 가면은 기괴하게 생긴 신의 형상을 본떴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남녀 간에 구분을 두었다. 그런 와중에 예쁜 형태의 가면도 속속들이 등장했다. 나이 지긋한 중장년층은 여전히 이빨이 길쭉하게 튀어나온 초록색 가면을 썼고, 젊은이들은 주로 예쁜 가면을 고르는 추세였다.
남문우가 백천범에게 건넨 가면은 현천玄天(구천의 하나로 북쪽 하늘) 여신의 얼굴이었다. 냉엄한 분위기가 물씬 풍겼지만 그 얼굴만큼은 빼어나게 아름다웠다. 묵용린에게는 화룡을 닮은 자그마한 괴수 가면을 씌웠다. 커다란 이가 조그마한 얼굴 위로 솟아 있는 게 우스꽝스러우면서도 귀여웠다.
그가 묵용린을 안으려 하자 백천범이 막아섰다. 그녀는 미리 준비한 광주리를 등에 짊어지더니 그 안에 묵용린을 넣었다. 묵용린이 제법 큰 탓에 계속 안고 있을 수 없으니, 이곳 사람들처럼 광주리에 아이를 넣고 다닐 생각이었다. 남문우의 얼굴에 잠시 씁쓸한 미소가 스쳤지만, 곧 본래의 표정으로 돌아왔다.
도화절은 군민君民 모두 즐겁게 즐기는 명절이었다. 이날만큼은 신분을 가리지 않고 가면을 쓴 채 자유롭게 행동했다. 도화跳火라는 명칭답게 활활 타오르는 불더미를 뛰어넘는 의식을 치르기도 했다.
보통은 젊은 청년들이 불을 뛰어넘었고 여인과 노인, 아이들은 그 모습을 지켜보며 청년들에게 열렬히 박수를 보냈다.
군중들 틈에 서 있던 백천범은 조금 아쉬운 기색을 보였다.
“옷만 아니면 나도 뛰어넘는 건데.”
남문우는 처음으로 그녀와 가까이 붙어 있을 수 있었다. 주변은 사람들로 득실거렸지만 그 틈에 섞인 그녀의 숨결을 느낄 수 있었다. 어렴풋이 달콤한 향이 났다.
“뛰어넘을 수 있겠어?”
“왜 못 뛰어?”
백천범이 아무렇지 않게 대꾸했다.
“치마만 갈아입으면 얼마든 뛸 수 있지.”
그녀의 발랄한 말투를 듣고 있자니 남문우는 절로 웃음이 나왔다. 그때 묵용린은 가면에 난 이빨을 깨물고 있었다. 그가 손을 뻗어 묵용린의 가면을 잡았다.
“물면 안 돼. 그러다 망가질 거야.”
묵용린은 가면을 뺏기지 않으려고 두 손으로 힘껏 그의 손을 떼어냈다. 남문우와 묵용린이 옥신각신하는 모습을 지켜보던 백천범이 물었다.
“너는 안 뛰어?”
남문우가 불더미를 힐끔 바라보더니 가소롭다는 듯이 답했다.
“너무 낮잖아. 재미없게.”
“해 보는 게 중요하지. 가만히 구경만 하면 무슨 재미가 있어?”
남문우는 그제야 백천범이 원하는 걸 알겠다는 듯 활짝 웃어 보였다.
“내가 뛰는 게 보고 싶구나?”
백천범이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어서 가. 나랑 린아가 응원해 줄 테니까.”
이런 불더미를 뛰어넘는 건 남문우에게는 일도 아니었다. 무엇보다 그녀를 위해서라면 몇 번이고 뛰어넘을 수 있었다. 그가 사람들 틈을 비집고 나가더니 손을 들고 참여 의사를 밝혔다. 참가자 대열 끝에 선 그가 고개를 돌려 뒤를 바라보았다.
그를 바라보고 있던 백천범과 시선이 마주쳤다. 가면 탓에 표정을 읽을 수는 없었지만 두 개의 눈구멍으로 미소가 묻어나는 듯했다.
심장이 철렁 내려앉은 남문우는 길게 심호흡을 내쉬었다. 꼭 잘 해내겠다는 결심이 섰다. 그는 멀리서 뛰어와 도움닫기를 하는 참가자들과 달리 곧장 출발선 앞에 서서 불더미를 뛰어넘었고, 관중들의 힘찬 박수를 받았다.
불더미는 점점 더 높아졌고 거세지는 불길이 참가자들의 승부욕을 자극했다. 망설이다 포기 선언을 하는 청년도 나왔다. 구경하던 관중들은 겁쟁이라며 야유를 퍼부었다. 또 다른 이는 야유를 받고 싶지 않아 무리해서 불더미를 뛰어넘으려 했다.
그러나 높게 뛰지 못해 그만 엉덩이에 불이 붙고 말았다. 엉덩이를 마구 때리며 사방을 뛰어다니던 그는 겨우 물동이를 찾아 그대로 뛰어들었다. 불은 꺼졌지만 물에 빠진 생쥐 꼴이 된 그를 보고 여기저기서 웃음소리가 흘러나왔다.
이런 일이 자주 있었기에 불더미 근처에는 커다란 물동이가 여러 개 놓여 있었다. 자칫 잘못해 불이 붙으면 곧장 물동이에 뛰어 들어가면 되었다. 물론 그 순간 도화에 실패한 것이니, 내년을 기약해야 했다.
시간이 지날수록 불더미는 점점 더 높아졌고 참가자들의 수는 줄어들었다. 남문우는 한 차례가 끝날 때마다 습관적으로 백천범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내내 같은 자리에 서서 고개를 돌릴 때마다 박수를 보내고 있었다. 마치 그의 용기를 칭찬해 주는 것 같았다. 묵용린은 그새 지친 모양인지, 까만 정수리만 빼꼼 내보이고 있었다.
남문우는 그녀에게 손을 흔든 뒤 계속해서 도화를 이어갔다. 어느새 참가자는 세 사람밖에 남지 않았다. 두 명마저 물러나면 그가 우승을 차지할 수 있었다.
불더미는 이제 성인의 키만큼이나 높아진 터라, 첫 번째 도전자는 한참을 망설이며 기웃거렸다. 뛰어넘기에 가장 적합한 지점을 찾으려는 듯했다.
관중들 역시 손에 땀을 쥐며 그가 뛰길 기다렸다. 만약 뛰어넘지 못한다면 실패자가 되어 내년을 기약할 테고, 뛰어넘는다면 오늘의 용사가 되어 여인들의 환심을 사지 않겠는가. 청년들이 앞다투어 도화에 참여하는 결정적인 이유가 그 때문이었다.
한참 고민하던 그는 결국 멀리서부터 달려와 도움닫기를 한 끝에 불더미를 넘었다. 그러나 그의 몸은 불더미 너머가 아니라 물동이 안으로 들어가야 했다.
관중둘은 탄식을 내뱉으며 두 번째 주자에게 시선을 옮겼다. 두 번째 주자는 자신이 없었는지 한참을 망설이다가 결국 도전을 포기했다. 남은 사람은 남문우뿐이었다.
그는 고개를 돌려 백천범을 향해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반드시 성공하겠다는 의미였다. 백천범은 그를 응원하듯 박수를 보냈다. 용기가 샘솟은 그는 천천히 불더미 앞으로 향했다. 심호흡을 내뱉으며 뛰어오르려던 순간, 갑작스레 이상한 기분이 남문우를 휘감았다. 뒤를 힐끗 돌아보니, 백천범은 여전히 그 자리에 서서 박수를 보내고 있었다.
남문우는 몸을 돌려 성큼성큼 그녀에게 다가갔다. 커다란 손이 백천범의 손목을 낚아챘다. 그녀가 짊어진 광주리를 살펴보니 아이는 곤히 잠들어 있었다. 그러나 묵용린이 아니었다. 그가 손을 들어 여인의 가면을 벗기자 낯선 이의 얼굴이 드러났다.
화가 치솟은 남문우는 군중들 속에서 여인을 끌고 나왔다.
“누가 이 가면을 쓰라 하였느냐? 그 여인은 어디로 간 것이냐?”
광주리 안에서 자고 있던 아이가 놀라 잠에서 깨어나 울기 시작했다. 그 소리는 남문우의 짜증을 부채질할 뿐이었다. 남문우는 품에서 무언가를 꺼내더니 심지를 뽑아 공중에 던졌다. 자색과 푸른빛의 불꽃이 곧장 하늘 위로 흩어졌다. 호위병들을 부르는 신호탄이었다.
호위병들이 따라다니는 걸 거추장스러한 남문우는 일부러 그들을 멀리 배치해 두었다. 어차피 그가 곁에 있는 한, 별일 없을 거라는 생각에서였다. 그러나 눈 깜짝할 사이에 그녀가 사라진 건 예상치 못한 상황이었다.
신호를 본 호위병들이 재빨리 몰려들었다. 남문우가 가면을 벗어 바닥에 내동댕이치자 준수한 얼굴이 드러났다. 여인이 바들바들 떨며 입을 열었다.
“대인, 용서해 주십시오. 그 부인이 돈을 주며 가면을 써 달라고 하였습니다.”
그의 얼굴이 흉악하게 일그러졌다.
“다시 한번 말하거라. 누가 이 가면을 쓰라 하였더냐?”
“젊은 부인이었습니다. 제 가면과 바꾸자며 돈을 주었습니다. 대인께서 뒤를 돌아보시면 박수를 보내라고도 하셨습니다.”
그녀는 서둘러 금자 한 덩이를 꺼내 그에게 보여 주었다. 남문우가 금자를 힐끔 바라보았다. 금자 한 덩이라니, 참 통도 컸다. 가면 열 개라도 바꿔 쓸 수 있을 정도가 아닌가.
그가 천천히 손을 풀었다. 참으로 가소로웠다. 그녀가 사라진 사실을 알았을 때, 묵용감이 보낸 사람이 그녀를 빼돌린 줄만 알았다. 두 모자가 이곳에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면 분명 그리하지 않겠는가. 하지만 묵용감이 아니라, 그녀가 제 발로 떠날 줄은.
치솟는 분노가 그의 가슴을 쿵쿵 두드리고 있었다. 분명 처음에는 진심이 아니었다, 그저 재미있는 사람을 보았다고만 여겼다. 그러나 시간이 지날수록… 진심으로 그녀가 좋았다. 묵용린도 마찬가지였다. 어찌나 똑똑한 녀석인지, 분명 크게 될 아이였다. 아쉽게도 묵용씨 성을 가진 아이라 곁에 둘 수는 없겠지만.
그래도 백천범만큼은 곁에 둘 수 있었다. 그날 밤, 남류청을 찾아가 한 말은 모두 진심이었다. 그는 정말 백천범을 아내로 맞이하고 싶었다. 오랜 시간 방탕한 생활을 해 왔지만, 난생처음으로 부인을 맞아 아이를 낳고 평안한 삶을 보내고 싶었다.
그의 기대가 부풀어오를수록, 맞이한 현실은 잔인했다.
남문우는 그 여인에게 원래 쓰고 있던 가면이 무엇인지 물었다. 공작신이라는 답이 돌아왔다. 그는 서둘러 호위병에게 수색을 명했다. 공작신은 여인들이 쓰는 가장 흔한 가면이었다. 호위병들은 군중들을 헤집고 다니며 공작신 가면을 보는 족족 벗겨내었지만, 백천범은 어디에서도 보이지 않았다.
남문우는 광장에 서서 수많은 사람들을 지켜보았다. 분노로 혼란스럽던 머릿속이 조금씩 냉정함을 되찾았다.
설마 최근 백천범이 보인 모습은 모두 꾸며낸 것이란 말인가? 남류청이 약속했던 보름도, 묵용린의 아버지가 누구인지도, 과거의 일 모두를 잊은 것도 모두 그를 속이기 위함이었던가?
그가 매섭게 코웃음을 쳤다. 이런 교활한 여인 같으니라고!
사라진 지 얼마 되지 않았으니 아직 성문을 빠져나가진 못했을 것이다. 남문우는 곧장 성문을 잠그라는 분부를 내렸다.
다급히 걸어가던 백천범의 시야에 드디어 성문이 보이기 시작했다. 마음이 초조해진 그녀는 발걸음을 재촉하기 시작했다. 그때, 누군가 말을 타고 달려와 소리쳤다.
“장군의 명이다. 어서 성문을 잠그거라!”
깜짝 놀란 백천범은 곧장 나무 뒤로 숨었다. 남문우가 불을 뛰어넘는 동안 성문을 빠져나갈 수 있을 줄 알았다. 이렇게 빨리 발각될 거라곤 예상치 못했는데, 설마 그가 우승하지 못했단 말인가?
그러나 생각을 정리할 틈이 없었다. 어느새 몰려든 호위병들이 두꺼운 성문 앞을 빠르게 에워싸며 그녀의 희망 앞에 거대한 절망의 벽을 드리웠다.
많은 군사들을 동원했지만 어디에서도 백천범을 보았다는 보고가 들려오지 않았다. 조급해진 남문우는 급기야 모든 거리를 수색하기 시작했다. 무장한 병사들이 거리를 들쑤시자 백성들은 겁을 먹었고, 축제도 막바지에 이른 터라 다들 우르르 성문으로 몰려갔다. 그들로서는 불똥이 튀기 전에 서둘러 이 위험한 곳을 빠져나가고 싶었다.
말에 올라탄 남문우의 시선이 사람들을 싸늘하게 훑었다. 자세히 볼 것도 없이, 모두 가면으로 얼굴을 가리고 있었다. 그는 별안간 자신의 생각이 틀렸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한 번 가면을 바꿔쓴 이가 여러 번 바꿔 쓰지 않았다는 보장이 어디 있겠는가? 그렇다면 공작신 가면을 쓴 여인만 찾을 게 아니라 응당 모든 여인을 확인해야 했다.
지금 그녀는 백성들 사이에 숨어 도망칠 기회를 엿보고 있겠지.
다행히 성문을 일찍 막아 놓았으니 붙잡는 건 시간문제일 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