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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유왕비초장성 (477)화 (476/1,192)

제477화

공작은 남원에서 길조吉鳥로 취급받았다. 그 때문에 황궁 곳곳에서도 공작을 볼 수 있었는데, 묵용린이 유난히 공작을 좋아했다. 아이는 걷다가도 공작을 발견하면 쫓기 바빴다. 공작들은 이제 묵용린의 그림자만 봐도 꽁지가 빠지게 달아나곤 했다.

묵용린의 목표가 된 공작새는 다급히 처마 위로 올라갔다. 하지만 묵용린은 포기할 수 없었는지 허리를 숙여 돌멩이를 집어 들었다. 그때 여주와 여옥이 묵용린을 타이르며 공작은 길한 새라 돌을 던지면 하늘에 있는 신선이 노한다고 알려 주었다.

그러나 묵용린이 고집을 부리기 시작하자 도통 말을 듣지 않았다. 아이는 통통한 손에 돌을 꽉 쥐고 언제든 던질 기세였다. 여주와 여옥이 난감한 얼굴로 백천범을 바라보았다. 정작 그녀는 나무 아래에 서서 멍하니 허공을 보고 있을 뿐, 이 상황과 무관해 보였다.

또다시 그 여자아이가 보였다. 화려한 옷을 입은 그 아이는… 옷에 지지 않을 만큼 화려한 화장을 하고 있었다. 앳된 얼굴과 화장의 부조화가 익살스러울 정도였다. 여자아이 앞에는 공작 한 마리가 바닥에 웅크려 바들바들 떨고 있었다.

아이는 공작 앞을 서성이며 이따금 예쁜 치맛자락을 펼쳐 보여 주었다. 계속 무언가를 중얼댔는데 공작보다 자신이 더 예쁘다고 하는 듯했다. 그러나 공작은 눈길도 주지 않았고 웅크린 채 고개만 숙이고 있었다.

그때, 커다란 손이 여자아이의 목을 쓸어내렸다. 따뜻한 손과 다르게 냉정한 목소리는 땀이 많이 났다며 그녀를 책망했다. 여자아이가 고개를 돌린 순간, 손의 주인이 깜짝 놀라더니 곧장 미간을 찌푸렸다.

너무 짙은 화장을 한 그녀를 혼내긴 했지만, 그의 눈빛만큼은 봄바람처럼 따스했다. 그가 엄지로 조심스레 그녀의 입술을 닦아 내었고, 여자아이는 그를 향해 활짝 웃었다…….

여전히 그의 얼굴은 흐릿했지만, 손가락이 입술에 닿았던 느낌만큼은 선명히 떠올릴 수 있었다. 조금은 거친 손가락이었지만, 더없이 따스한 온기를 품은 손가락이었다. 입술을 닦아 주는 손길이 더없이 조심스러워, 백천범의 마음은 까닭 없이 부풀었다.

그때, 묵용린이 결국 손에 들고 있던 돌멩이를 던졌다. 돌멩이는 처마 근처에도 가지 못하고 바닥으로 떨어졌다. 묵용린은 기분이 나빴는지 또다시 돌을 주워 허공에 던졌다. 결과는 똑같았다. 한 살밖에 되지 않은 아이가 무슨 힘이 있을까.

그러나 묵용린의 고집은 좀처럼 꺾이지 않았다. 어떻게든 공작을 내려오게 할 심산인지 잔뜩 성이 난 얼굴로 이것저것 던져 보고 있었다. 그러나 아이의 힘으로는 공작을 맞히기엔 역부족이기에, 결국 묵용린은 제풀에 지쳐 털썩 주저앉았다.

처마 위에 자리 잡은 공작이 덩그러니 앉아 있는 묵용린을 향해 날갯짓을 했다. 꼭 그를 비웃는 것 같았다. 그에 묵용린은 볼을 부풀리며 다시 일어났다. 아이는나무 밑에 서 있던 백천범에게 가려다 남문우의 모습을 보고 발길을 돌렸다.

남문우는 환하게 웃으며 묵용린을 안아 올렸다.

“린아, 말 잘 듣고 있었느냐? 어머니를 성가시게 한 건 아니겠지?”

묵용린은 아직 말을 하진 못했지만 의미는 다 알아들었다. 아이가 세차게 고개를 저으며 나무 밑을 가리켰다. 어머니가 저곳에 있다고 남문우에게 알려 주고 있었다.

남문우가 백천범에게 가려고 하자 묵용린이 몸에 힘을 주며 버텼다. 이내 몸을 틀고 처마 밑을 가리키더니 끊임없이 옹알이를 했다. 잔뜩 골이 난 모습이었다.

매일같이 묵용린과 놀아 주었던 터라, 남문우는 이제 아이의 말을 제법 알아들었다. 그가 묵용린의 볼을 가볍게 꼬집었다.

“이 녀석, 공작은 무엇 하러 괴롭힌단 말이냐? 이렇게 하자. 날 아버지라고 부르면 공작을 내려오게 해 주마.”

묵용린은 아버지가 무슨 뜻인지 몰랐지만, 불러만 준다면 공작을 내려오게 해 준다지 않는가. 못할 것도 없었다. 아이는 입을 벌려 비슷한 발음을 해 보려고 노력했다.

“아부.”

“아버지.”

“아부.”

“아버지.”

“압디.”

남문우가 이마를 문지르며 웃음을 터뜨렸다.

“그래, 그 정도면 인정해 주마. 이 아버지의 목을 꽉 잡아야 한다. 곧 날아갈 테니까.”

묵용린이 그의 목을 힘껏 움켜쥐었다. 남문우는 한 손으로 묵용린을 안아 든 채 옆에 있던 커다란 나무 위로 가뿐히 뛰어올랐다. 그리곤 눈 깜짝할 새에 공작의 깃털을 한 가닥 뽑아냈다. 공작은 통증을 느끼곤 날개를 펼치며 곧장 땅으로 내려왔다.

남문우는 공작보다 더 빨리 땅으로 내려와 묵용린을 바닥에 내려놓았다. 아이는 다시 공작을 줄기차게 쫓았다.

남문우는 멀어지는 아이를 보며 미소를 지었다. 그때, 퍽 하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백천범이 주먹으로 그의 얼굴을 힘껏 때린 것이다. 아픈 것도 아픈 것이지만, 남문우는 얼떨떨할 따름이었다. 그가 억울한 표정으로 물었다.

“왜 때리는 거야?”

“누가 아이를 안고 그리 높은 곳에 올라가래?”

백천범이 화를 내며 말했다.

“떨어뜨리진 않았잖아.”

“그러다 널 따라 할지도 모른다고.”

“그 앤 못 올라가.”

“위로 올라가진 못해도 높은 곳에서 밑으로 떨어지는 걸 따라 할지 몰라.”

남문우는 아무런 대꾸도 할 수 없었다. 묵용린의 성격이라면 정말 그렇게 할지도 모른다. 어린 녀석이 뭔가에 흥미가 생겼다 하면 무슨 수를 써서라도 꼭 얻으려 했다. 어찌나 총명한지 하나를 보여 주면 열을 배워 따라 하기 일쑤였다.

백천범은 남문우를 뒤로한 채 묵용린을 불렀다. 묵용린은 고삐 풀린 망아지처럼 굴다가도 백천범이 부르면 곧장 오곤 했다. 백천범의 품에 안긴 묵용린이 그녀의 품에서 애교를 부렸다.

조금 언짢았던 백천범은 아이를 꼬옥 안아 주며 꾸짖었다.

“이것 봐. 땀이 이렇게나 많이 났잖아. 감기라도 걸리면 어쩌려고 그래?”

묵용린은 땀이 흥건한 얼굴로 그녀의 품에 파고들며 커다란 눈을 깜빡였다. 사랑스러운 아이의 모습에 백천범도 별수 없었다. 그녀는 몇 마디 꾸중을 하긴 했지만 결국 미소를 지었다.

남문우가 넉살 좋게 다가와 묵용린에게 손을 뻗었다.

“자, 아버지에게 와 봐.”

그는 불분명한 발음으로 넘어가려 했지만, 백천범의 귀에는 아버지란 단어가 또렷이 들렸다. 그녀가 눈을 부릅뜨며 언성을 높였다.

“아버지는 무슨 아버지? 누구 마음대로 아버지야!”

그녀는 말을 마치자마자 자리를 떴다. 남문우는 그녀를 따라가려 했지만, 유난히 매서운 시선을 마주하자 걸음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묵용린은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보더니 의기양양한 미소를 지었다.

두 모자가 멀어질 때까지 지켜보던 그는 이마를 문지르며 미소를 지었다. 방금 그녀가 보인 눈빛은 가슴이 시릴 정도로 싸늘했다. 그녀가 완전히 돌아설까 겁이 날 만큼.

그는 한참 동안 나무 아래에 서 있다가 금원대전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마침 남류청은 두 명의 대신들과 세수에 대한 문제를 논의 중이었다. 그는 인내심을 갖고 기다리며 여제의 모습을 관찰했다.

정말 이상했다. 백천범과 남류청은 둘 다 뛰어난 미인이었지만 분위기가 전혀 달랐다. 남류청이 차갑고 고귀한 분위기라 다가가기 어려웠던 반면, 백천범은 티 없이 맑고 순수한 분위기의 여인이었다. 성격도 단순하고 쾌활해서 자신도 모르게 그녀에게 이끌리게 되었다.

마음속으로 두 여인을 떠올려 보면서도, 남문우의 눈은 대신들의 뒤통수를 노려보고 있었다. 패기 넘치는 그의 눈빛에 대신들은 결국 자리를 떴다. 남류청이 옅게 미소를 지었다.

“어찌, 기분이 별로 좋지 않아 보이는데?”

“눈치채셨습니까?”

남문우가 의자에 등을 기대더니 자신의 얼굴을 가리켰다.

“보이십니까? 맞았습니다.”

남류청이 흠칫 놀라며 그의 볼을 유심히 살폈다. 아직도 붉은 자국이 선명했다. 그녀가 급히 물었다.

“감히 어떤 놈이 남 장군에게 손찌검을 했단 말인가? 짐이 그자의 가죽을 벗기겠다.”

“무양 공주요.”

남류청이 그만 웃음을 터뜨렸다.

“남 장군이 고작 그런 일로 고자질을 하러 왔단 말인가?”

남문우가 단호히 말했다.

“고자질을 하러 온 게 아니라 폐하께 알려 드리려 온 것입니다. 무양 공주와 혼인을 올리겠습니다!”

“…하지만 우리 계획은?”

“무양 공주가 어떤 상태인지 폐하께서도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워낙 의지가 강해 통제하기 어려운 여인입니다. 이대로 돌려보내면 큰일이 날 겁니다. 계획대로 하거나 천면인千面人을 기용하는 게 나을 것입니다.”

남류청이 그를 빤히 바라보다 물었다.

“짐에게 말해 보거라. 어째서 그 애와 혼인을 하려는 것이야? 황위를 다툴 생각인가?”

남문우가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황위는 다툴 생각 없습니다. 전 그 애만 있으면 됩니다.”

* * *

오월 열닷샛날은 남원의 큰 명절 중 하나인 도화절跳火節이었다. 이날은 집마다 첨화고甜花糕라 불리는 떡을 쪘다. 찹쌀이 주재료인 첨화고는 취향껏 고구마나 호박, 가지, 마, 각종 꽃 등이 들어갔다.

모양새도 제각각이었는데 평가를 거쳐 가장 예쁘고 맛있는 첨화고를 뽑아 여제와 황자, 공주들에게 바쳤다. 발탁된 첨화고를 만든 집에는 큰 영광이 돌아갔다.

물론 모두의 기대를 한 몸에 받는 행사는 저녁에 열리는 무나제巫儺祭로, 각종 가면을 쓰고 악귀를 쫓는 축제였다. 기다란 장대를 타는 사람, 입으로 불을 내뿜는 사람, 팔에 커다란 구렁이를 두른 사람은 물론이고 코끼리, 낙타, 조랑말 등을 탄 사람들이 사방에서 몰려왔다. 화룡처럼 길게 이어진 등불은 축제가 열리는 곳곳을 낮처럼 훤히 밝혔다.

모두 가면을 써서 서로의 얼굴을 확인할 수 없었다. 다만 여인들은 짙은 화장을 하고 소매가 없는 비단 상의와 허리를 조여 매는 긴 치마를 입었다. 이 차림새가 도화절을 맞이하는 여인들의 전통 복장이었다. 이날 입는 옷은 여인들이 일찍부터 한 땀 한 땀 정성을 들여 만든 작품이었다.

백천범의 옷은 남류청이 준비해 주었다. 그녀가 금색 실로 수놓은 상의와 치마를 입으니 가느다란 허리가 더욱 도드라졌다. 걸음을 걸을 땐 여인의 향기가 물씬 느껴졌다.

그녀의 모습을 마주한 남문우는 갑작스러운 두근거림을 느꼈다. 그는 눈을 내리깔고 감정을 갈무리한 뒤, 다시 시선을 올렸다. 어느새 그는 평소의 장난기 가득한 모습으로 돌아와 있었다. 그가 가볍게 손뼉을 쳤다.

“닙닙아, 오늘 정말 예쁘구나.”

백천범이 들뜬 얼굴로 제자리에서 한 바퀴 돌았다.

“예뻐?”

남문우가 진심으로 감탄사를 흘렸다.

“오늘 너보다 예쁜 여인은 없을걸.”

그러나 백천범은 예쁜 옷에는 별 흥미가 없었다. 그녀가 들뜬 이유는 다른 데 있었다. 백천범이 손을 뻗었다.

“내 가면은?”

남문우가 뒷짐을 지고 있던 손을 내밀었다. 그는 백천범 모자를 위해 크기가 다른 두 가지 가면을 준비해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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