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76화
어슴푸레한 어둠 속, 문지기가 헐레벌떡 뛰어오고 있었다. 그 모습에 덜컥 겁이 난 추문은 정원 대문을 사이에 두고 물었다.
“무슨 일인가? 무슨 일이라도 생긴 것인가?”
“구, 궁에서 손님이 오셨습니다.”
문지기가 가쁜 숨을 헐떡이며 가까스로 소리쳤다.
“츠, 측왕비 마마께서 잠시 가 보셔야…….”
추문은 손끝까지 차가워지는 기분을 느꼈다. 문득 고개를 돌려보니 수원상이 복도 아래에 서 있었다. 정작 그녀의 표정은 산보를 즐기듯이 평온하기만 했다.
“문을 열어라. 가자꾸나.”
좋은 일일지 나쁜 일일지 알 수 없었지만 나쁜 일이라 해도 피할 방법은 없었다. 묵용감이 즉위한 지도 오랜 시일이 흘렀지만 감감무소식이었다. 그녀에게 봉호를 내리지도 않았을뿐더러 저택을 찾아오지도 않았다.
처음엔 그녀를 위로했던 수민도 이제는 아무런 말이 없었다. 더는 희망이 없다는 의미가 아닌가. 그런 상황에서 사람을 보냈다면, 그리 좋은 소식은 아닐 터였다.
예전에 초왕이 그녀를 내쫓으려 했을 땐 죽음으로 그를 협박할 수 있었지만 이제는 달랐다. 황제가 처를 내쫓는다면 그녀의 죽음만으로 끝나는 게 아니라 가족들에게까지 화를 입는다. 자신이 죽는 건 받아들일 수 있었지만, 가족들마저 목숨을 잃게 할 수는 없었다.
“마마…….”
추문이 슬픈 얼굴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아무리 두려워도 피할 수 없는 일이 있는 법이다.
수원상이 옷매무새를 정돈하고 곧은 자세로 계단을 내려갔다.
“가자. 궁에서 온 분을 기다리게 해선 안 된다.”
하녀가 정원 대문을 열어 주었다. 수원상은 앞장서서 문을 나섰다. 몇 걸음 내딛던 그녀가 갑작스레 걸음을 멈춰 세우더니 뒤를 돌아보았다. 그녀가 두 해 동안이나 먹고, 자고, 꽃을 가꾸고, 책을 읽고, 글을 쓰던 곳이었다…….
돌이켜보면 많은 추억이 있는 곳이었다. 이렇게 떠나면 다시 돌아올 수 있을까? 그녀는 확신이 서질 않았다.
대문 앞에 도착하니 학평관이 서 있었다. 두 해 만에 처음으로 묵용감의 사람을 만났다. 순간 만감이 교차해, 그녀는 하마터면 눈물을 흘릴 뻔했다. 겨우 눈물을 삼킨 그녀가 단정한 자태로 인사를 올렸다.
학평관이 예를 갖추며 그녀에게 다가왔다.
“소인, 측왕비 마마를 뵈옵니다.”
수원상이 서둘러 그를 일으켰다.
“그간 무탈하셨습니까? 잘 지내신 것인지요?”
학평관이 고개를 끄덕였다.
“측왕비 마마께서 걱정해 주신 덕에 잘 지냈습니다. 측왕비 마마께서도 잘 지내시었습니까?”
수원상이 옅은 미소를 지었다.
“그런대로 잘 지냈습니다. 총관리인께서 이곳은 어쩐 일로…….”
인사치레를 마쳤으니 황제의 분부를 받고 온 이가 난처하지 않도록 본론으로 들어갈 시간이었다.
학평관이 서둘러 말했다.
“아, 소인의 정신 좀 보십시오. 안부를 묻는 것에 정신이 팔려 그만… 폐하께서 이걸 마마께 전해 달라고 하셨습니다.”
수원상은 가슴이 쿵쿵 뛰었다. 측왕비를 폐위한다는 서한? 아니면 독주?
정작 소태감이 건넨 물건은 다른 것이었다. 수원상이 멍한 얼굴로 물었다.
“폐하께서 제게 내리신 게 틀림없습니까?”
“예. 강남에서 보내온 흰 비단입니다. 올해 처음 뽑아낸 실로 짠 것이지요. 폐하께서 측왕비께 보내라고 하셨습니다. 한번 만져 보십시오. 아주 부드럽습니다.”
수원상은 말을 잇지 못했다. 가만히 비단을 어루만지던 그녀의 손등 위로 물방울이 톡 떨어져 내렸다.
* * *
남원의 황궁에서는 종종 이런 광경이 펼쳐졌다. 묵용린이 아장아장 걷고 있으면 그 뒤를 백천범이 따라가고, 그녀 뒤를 남문우가 어슬렁어슬렁 걷는다. 이들과 멀지 않은 곳에는 늘 남농화가 있었다. 그녀는 곁을 지키는 궁녀들에게 앞서 걷는 세 사람을 계속해서 헐뜯었다.
“명성이 자자한 남 장군께서 강아지처럼 여인의 뒤꽁무니만 따라다니다니. 소문이라도 나면 다들 배꼽 빠지게 웃을 일이야.”
남농화의 목소리가 작지 않았기에 남문우와 백천범도 그 말을 들을 수 있었다.
백천범이 고개를 돌려 남문우를 바라보았다. 남문우는 남의 이야기를 들은 양 태연하기만 했다.
“화 안 나?”
그녀가 불쑥 물었다.
남문우가 피식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무엇 하러 화를 내. 본인은 갖지 못하는 걸 남이 가지니 배 아플 테지. 그걸 어떻게 일일이 따져 묻겠어.”
“무슨 뜻이야?”
“무슨 뜻인지 모르겠어?”
남문우가 빙그레 웃더니 까불거리며 눈을 깜빡였다.
“저 앤 날 좋아하지만, 난 저 애가 가질 수 없는 사람이거든.”
백천범은 그제야 알겠다는 듯 헛웃음을 흘렸다.
“그래서 나한테 춤을 겨루자고 한 거였구나?”
남문우는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 어깨를 으쓱였다.
“이렇게나 둔하다니. 남원에서는 사내들이 여인을 쟁취할 때 정식으로 결투를 신청하고, 반대로 여인들이 사내를 쟁취할 땐 춤으로 겨루지.”
백천범은 그제야 돌아가는 상황을 깨달았다.
“내가 너 때문에 겨뤘다고 생각하는 거야? 그래서 이렇게 쫓아다니는 거고?”
남문우의 당연하다는 표정 앞에서, 백천범은 긴 한숨으로 답했다.
“난 이곳에 온 지 얼마 안 돼서 아무것도 몰랐어. 오해하지 말아 줘.”
“오해 안 했어. 네가 날 싫어한다는 건 잘 알아.”
“그럼 왜 귀찮게 자꾸 따라다니는 건데?”
남문우의 태도는 당당했다.
“넌 날 안 좋아해도 난 널 좋아할 수 있잖아.”
“난 아이도 있어.”
“난 아이 아빠가 되어도 상관없어.”
“린아의 아버지는 따로 있어.”
“어디에 있는데?”
“…….”
매번 이 질문을 떠올리면, 그녀의 머리는 멈춰 버린 듯했다. 모두의 말처럼, 아이 아버지가 어디에 있든 두 사람은 멀리 떨어져 있지 않은가. 어쩌면 죽었을지도, 새 아내를 들였을지도 모른다. 또… 더는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았다. 그녀의 기억은 나날이 옅어져, 사람들의 말로 덧칠해지고 있었다.
밝게 빛나는 눈동자, 따스한 미소만이 흐릿하게 아른거렸다. 그런데도 그녀는 두 사람이 서로를 깊이 은애했다고 믿었다. 아이가 그 증표이지 않은가. 다만 인연이 그리 길지 않아 끝까지 함께하지 못했으리라.
“아버지가 어디에 있든 이미 헤어졌잖아.”
남문우가 말했다.
“난 네가 좋아. 왜 기회를 주지 않는 거야?”
백천범이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군주가 되기 위해서야?”
그가 답하기도 전에 그녀가 말을 이었다.
“네 마음은 받아 줄 수 없어. 내 오라버니가 왕위에 오르는 게 더 좋거든.”
남문우가 박장대소를 터뜨렸다.
“내가 여인의 힘을 빌려야 성공할 수 있는 사내로 보여? 무엇보다 난 남씨이긴 해도 왕위에는 관심 없어.”
여러 모로 수상쩍은 대답이었다. 백천범이 그를 쏘아보았다.
“설마, 날 진심으로 좋아한다는 거야?”
“맞아. 난 마음속에 있는 말도 못 하는 사람과는 다르게 좋으면 좋다고 말하는 사람이거든. 추측만 하는 건 영 재미가 없잖아.”
“그게 누군데?”
남문우가 입꼬리를 비틀었다.
“있어, 그런 사람.”
백천범은 그의 말에 흥미를 느낄 수 없었다. 그녀가 성가시다는 듯 답했다.
“내가 널 싫어한다는 건 너도 이미 잘 알잖아?”
“그래도 상관없어. 나한테 한 번만 기회를 줘.”
“어떻게 주면 되는데?”
“네 곁을 지키면서 매일 볼 수 있게 해 줘.”
남문우가 두 눈을 반짝였다.
“그리 어려운 일도 아니잖아.”
백천범은 곤혹스러운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이상하게도, 그의 표정은 어디선가에서 본 듯한 느낌이 들었다. 그러나 여전히 뿌연 안갯속을 헤매는 듯, 뚜렷한 형상이 보이지 않았다.
그녀는 멍하니 고개를 돌렸다. 뾰족한 금빛 지붕은 햇살 아래서 찬란하게 반짝였고, 그 아래에는 색색의 꽃들이 흐드러지고 있었다. 비현실적으로 아름다운 이 공간에서, 그녀는 무언가를 잊은 사람처럼 화단 주변을 천천히 맴돌았다.
그녀를 졸졸 따라다니던 남문우가 물었다.
“무얼 찾고 있는 거야?”
백천범이 멍하니 중얼거렸다.
“그러니까…….”
손을 꼼지락거리던 그녀가 문득 뭔가를 떠올렸다.
“린아, 우리 린아는?”
옆에 서 있던 여주가 말했다.
“걱정 마십시오. 여옥이 아기씨와 함께 연못에서 잉어 먹이를 주고 있습니다.”
연못가를 바라보니 역시나 묵용린이 먹이를 쥔 채 까르르 웃고 있었다.
남문우가 그녀를 놀리듯이 웃었다.
“여긴 궁이야. 궁에서 아이를 잃어버릴까 봐 겁이 나는 거야?”
백천범이 느릿하게 고개를 저었다. 그녀의 대답은 한참 후에야 들려왔다.
“요즘 기억력이 너무 안 좋아졌어. 내가 린아를 잊어버릴까 봐 겁이 나.”
남문우는 태연하게 웃음 지으며 답했다.
“말도 안 되는 소리. 어머니가 어찌 자기 아들을 잊을 수 있겠어.”
그러나 백천범은 우물쭈물하다 입을 닫고 말았다.
백천범이 다가오자 묵용린은 신이 난 얼굴로 붉은색과 흰색이 어우러진 잉어를 가리켰다. 아이의 끊임없는 옹알이가 백천범의 귀를 간지럽혔다.
백천범은 묵용린의 말뜻을 알아듣고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래, 어머니도 봤어. 물고기가 정말 예쁘네.”
묵용린이 먹이를 던지자 잉어들이 순식간에 몰려들더니 팔딱거리며 먹이를 쟁탈했다. 꼭 격투를 벌이듯 물보라가 사방으로 튀었다. 묵용린은 그 광경에 연신 손뼉을 치며 웃음을 터트렸다.
백천범은 묵묵히 그 모습을 바라보았다. 선명했던 시야가 천천히 흐릿해졌다.
한 여자아이가 연못가에 서서 먹이를 주고 있었다. 잉어들이 먹이를 놓고 싸우는 모습을 보며 여자아이는 꺄르륵 웃음을 터트렸다. 그때 커다란 손이 여자아이의 어깨에 내려앉더니, 이내 따뜻한 품이 온몸을 감쌌다.
그 품에 얼굴을 부비는 여자아이의 모습은 참으로 사랑스러웠다. 꼭 꿈 속에서 그들을 지켜보는 듯했다. 사내의 피풍에 새겨진 금색 구름 문양이 도드라졌지만, 그 위로는 어둠에 잠긴 듯 보이지 않았다…….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그때, 남문우가 잉어 먹이를 건네며 그녀를 일깨웠다.
“해 볼래?”
백천범은 먹이를 건네받고 힘껏 던졌다. 한곳에 모여 있던 잉어들이 곧장 먼 곳으로 헤엄쳐 갔다. 잘게 이는 물보라를 보며 묵용린이 통통한 팔을 흔들어 옹알이를 했다. 마치 잉어들에게 힘을 실어 주려는 모양새였다.
백천범이 묵용린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남문우에게 물었다.
“우리가 안 지 얼마나 되었지?”
남문우는 잠시 의아해하다 곧 웃으며 답했다.
“짧진 않지.”
“그래?”
그러나 백천범은 정확한 답을 원했다.
“얼마나 되었는데?”
“왜 그렇게 진지한 건데?”
남문우가 눈썹을 꿈틀대더니 불량배처럼 웃었다.
“우린 청매죽마靑梅竹馬(어릴 때부터 허물없이 지내온 남녀를 일컬음)잖아. 얼마나 되었겠어?”
백천범이 그를 위아래로 훑으며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우리가 청매죽마라고? 나보다 나이가 훨씬 많아 보이는데.”
남문우가 심하게 상처를 받은 양 가슴을 틀어쥐었다.
“겉으로 보기에만 그런 거야. 사실 아직 젊다고. 적어도 그자보단.”
백천범이 갑갑함에 눈썹을 찌푸렸다.
“아까부터 그러네, 대체 그자가 누구야?”
남문우가 짤막한 웃음을 터뜨렸다.
“하, 기억력이 나빠졌다면서 내 말은 잘도 기억하네.”
“말해, 누구야?”
“있어, 답답하고 재미없는 사람.”
남문우는 더는 대답하지 않았다. 어느새 묵용린을 어깨에 태운 그가 시시덕거리며 외쳤다.
“가자, 말 타고 가자!”
묵용린은 남문우의 금관을 붙잡고 까르르 웃었다. 백천범은 앞서가는 두 사람을 바라보며 고개를 저었다. 왜인지는 알 수 없지만, 남문우가 귀찮게 따라다니긴 해도 그리 반감이 들지 않았다. 아마… 묵용린이 남문우를 좋아해서 그런 거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