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75화
묵용감의 표정은 고요한 바위처럼 변화가 없었지만, 머릿속은 징으로 그를 내리치는 듯 시끄럽기 그지없었다. 묵용감은 지독한 통증을 무시하며 생각을 이어 갔다.
사실 언관들의 말이 틀린 것도 아니었다. 그간 황제의 후궁이 비어 있던 적은 단 한 번도 없었으니, 그가 고독한 군주로 남는다면 누구에게 황위를 물려준단 말인가?
황제의 자리를 지키는 자는 자손을 남겨야 하는 의무도 지고 있었다. 그러나 그 의무를 수행할 수 있을 만큼, 묵용감의 마음은 평온하지 않았다. 설령 그가 마음속의 지옥에서 나왔을지언정, 그의 마음속에는 다른 이가 들어올 자리가 없지 않은가.
그때, 수민이 대열 앞으로 나오더니 언관들에게 예를 갖췄다.
“폐하께서도 이 일의 중요성을 잘 알고 계시오. 지금 결정을 내야 하는 문제는 아니질 않소. 폐하께선 아직 황위에 오른 지 얼마 되지 않으셨소. 정무를 돌보시느라 여념이 없으셨으니 조급해하지 마시오. 시급한 일부터 처리한 후에 결정해도 늦지 않소.”
수민의 말에 채안화가 다시 머리를 조아리며 외쳤다.
“폐하, 간택을 늦춘다 한들 후궁이 비어 있는 것은 아니 될 일이옵니다. 폐하께서 수 대학사의 적녀를 측왕비로 들이신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폐하의 옛 저택에서 지내고 계시니 호를 내리시어 궁으로 들이시는 게 어떠신지요. 그리하면 천하가 잠잠해질 것이옵니다.”
오히려 수민이 난처해졌다. 그에게 수원상은 아픈 손가락이나 다름없었다. 처음에는 황제의 곁을 지키다 보면 수원상의 이야기를 꺼낼 기회가 올 거라 믿었다. 그러나 그 시간이 길어질수록 그는 더더욱 입을 열 수 없었다.
학평관에게 언질을 부탁했을 때, 하마터면 벌을 받을 뻔하지 않았던가. 그런데 채안화가 또 그 말을 꺼낼 줄이야!! 지난번 일이 떠오르자 수민은 저절로 간담이 서늘해졌다. 또다시 뒤에서 일을 꾸몄다고 황제의 오해를 살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 자리에서 해명하자니 뻔한 거짓말로 비칠 가능성도 있었다. 하는 수 없이 그는 무릎을 꿇은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역시나, 황제의 시선이 와 닿았다. 수민은 최대한 담담한 표정을 보이며 자신과는 무관함을 보여 주려 애썼다. 한편으로는 이번 기회를 발판삼아 수원상이 궁에 들어왔으면 하는 기대도 희미하게나마 담고 있었다.
신하들은 고개를 푹 숙인 채 황제의 대답을 기다렸다. 간택은 미뤄 둔다고 해도 수원상을 궁으로 들이는 일은 가망이 있을지도 모른다. 이마저도 신하들이 많이 양보한 것이었다.
대전 안의 고요함이 길게 이어졌다. 당혹스러울 정도의 고요함 끝에 황제가 입을 열었다.
“퇴조하라!”
학평관이 곧장 목소리를 길게 끌며 외쳤다.
“퇴조!”
신하들이 고개를 들었을 때, 이미 옥좌는 비어 있었다. 그들은 어안이 벙벙한 표정으로 서로를 바라보았다. 이렇게 된 이상, 다음 기회를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다.
묵용감도 서둘러 자리를 뜨는 것 외에는 방법이 없었다. 황제의 서재나 침전까지 찾아와 성가시게 하진 못할 테니 우선 도망가는 방법을 택했다.
대신들과 함께 밖으로 나가던 수민의 표정은 그리 밝지 않았다. 다른 신하들은 몰라도 그는 황제의 마음을 잘 알고 있었다. 애초에 황제가 천하를 빼앗은 것은 왕비의 복수를 위함이 아니던가.
한데 초왕비를 묻은 지 얼마나 되었다고 벌써 간택 이야기가 나오다니… 가당치도 않은 말이었다. 황제의 상처가 아물기 위해선 더 많은 시간이 필요했다. 수민은 언젠가 황제가 마음속 응어리를 풀고 간택에 동의하는 날이 올 거라 믿었다. 그땐 수원상도 무사히 입궁할 수 있으리라.
계단을 내려오는데 소태감이 뛰어와 그에게 예를 갖췄다.
“수 대인, 폐하께서 남서방으로 드시랍니다.”
황제의 부름은 이미 예상한 일이었기에, 수민은 곧바로 발걸음을 돌렸다. 간택 때문이든 수원상 때문이든 그는 황제의 신하였다. 응당 군주의 걱정을 함께 나눠야 했다.
남서방에 도착하니 문 앞에 서 있던 학평관이 예를 갖춰 인사를 건넸다.
“수 대인, 들어가 보십시오. 폐하께서 기다리십니다.”
수민도 답례를 한 뒤, 서둘러 안으로 들어갔다. 남서방은 채광이 잘 드는 편이었지만 황제는 늘 어두운 곳에 앉아 있는 걸 좋아했다. 어둑하게 그늘이 드리운 얼굴까지 더해지니, 묘한 냉기가 풍겨왔다.
황제는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수 경은 짐이 간택을 해야 한다고 보는가?”
수민이 허리를 숙이고 공손히 답했다.
“폐하, 지금까지 동월국은 건국과 동시에 간택 제도로 비빈을 선발했사옵니다. 이 같은 제도가 이어져 왔음은 그 쓰임새가 분명하다는 의미가 아니겠사옵니까. 이것이 첫 번째 이유이고, 그다음은 윤리적인 문제 때문입니다.
백성들은 일부일처혼을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끝까지 이어지는 연도 있고 그렇지 않은 연도 많지만, 어찌 되었든 대대손손 자손을 이어가지요. 대를 잇는 일은 마땅히 지켜야 할 기본 도리이기 때문입니다.”
말을 마친 수민은 잠자코 그의 대답을 기다렸다.
황제도 그의 말뜻을 잘 알고 있었다. 백성들조차 부인이 죽으면 후처를 들이는 일이 다반사였다. 사가의 백성들조차 그러한데 황제인 그가 처자식이 없는 건 크게 도리에 어긋나지 않는가.
황제가 한참 망설이다 물었다.
“짐이 황위에 오른 지 제법 시일이 흘렀지만, 측왕비에게 봉호를 내리지 않았네. 수 경은 이 일에 불만이 있는가?”
수민은 솔직히 답했다.
“감히 불만을 품겠습니까? 연이 닿아야 혼인으로 가족이 되는 것이지요. 폐하께서 원상이를 마음에 두고 계시지 않음을 잘 알고 있습니다. 해서 신 또한 그 애에게 저택을 떠나라고 권하였지요.”
수민도 어쩔 도리가 없다는 듯 침울한 얼굴을 보였다.
“폐하께서 저택을 떠나 계신 두 해 동안 그 애는 저택을 한 발짝도 떠나지 않았습니다. 지금은 신도 어찌할 도리가 없는 상태입니다. 한데 신이 어찌 폐하를 원망하겠습니까? 그저 딸아이가 가여울 뿐입니다.”
침묵을 지키던 황제가 천천히 손을 내저었다.
“그만 나가 보게.”
수민은 예를 갖춰 밖으로 향했다. 발걸음은 한없이 무거웠다. 황제는 대체 어찌할 생각인지 도통 종잡을 수가 없었다.
수민이 떠난 뒤, 황제는 오전 내내 상주서를 결재했고 점심을 먹은 후엔 낮잠을 청했다. 잠에서 깬 그는 한참을 우두커니 앉아 있었다. 창살 틈으로 새어 들어온 넓은 햇살이 점점 좁아질 때까지, 밝았던 하늘이 어두워질 때까지, 그는 움직이는 법을 잊은 듯 가만히 앉아 있기만 했다.
밖에 서 있던 소복자가 슬쩍 안을 살펴보더니 학평관에게 달려갔다.
“폐하의 두통이 도지신 게 아닐는지요? 위 태의나 월규 고고를 불러올까요?”
학평관이 고개를 저었다.
“폐하께서 명하지 않은 이상, 우리가 독단적으로 불러올 순 없네. 조금 더 기다려 보세.”
잠시 뒤, 마침 기홍이 학평관을 찾아왔다.
“폐하의 저녁 어선은 어디에 차릴까요?”
학평관이 기홍을 멀찍이 데려가 말했다.
“자네가 안으로 들어가서 여쭤보게. 폐하와 되도록 많이 말하는 게 좋겠네.”
“무슨 일이라도 있으십니까?”
기홍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폐하의 기분이 언짢으십니까?”
“오늘 조정에서 간택 이야기가 나왔네. 폐하께서는 단칼에 거절하셨지만, 신하들도 의견을 굽히지 않았지. 시일이 많이 흐르긴 했어도 왕비 마마에 대한 폐하의 마음은 우리가 잘 알지 않나. 한데 이야기가 나왔으니, 폐하께서 어찌 기분이 좋으실꼬.”
자초지종을 들은 기홍이 한숨을 내쉬었다.
“마마께서 떠나셨을 때, 소인조차 마마를 따라가고 싶었는데 폐하께서는 오죽하시겠습니까? 다만 죽은 이는 돌아오지 않는 법이니, 산 사람은 어떻게든 살아야 합니다. 소인은 오히려 간택을 서두르길 바랍니다. 많은 여인 중 왕비 마마와 닮은 분이 계실지도 모르잖습니까. 그런 분을 만나면 폐하의 병환도 나아지실지 모를 일입니다.”
학평관이 눈을 번뜩였다.
“좋은 생각이군. 제왕야와 상의해 봐야겠어. 폐하께서 마음을 여시면 곧바로 사람을 찾아봐야겠네.”
기홍이 걱정스러운 얼굴로 물었다.
“폐하께서 마음을 여실까요?”
“언젠간 그렇게 될 걸세. 태후 마마와 제왕야, 수 대인, 많은 언관까지 나서는데 어찌 마음을 열지 않으시겠나.”
학평관은 이미 답을 찾은 것처럼 좋아하고 있었다.
“어서 들어가 보게. 난 제왕야께 전갈을 보내야겠네.”
기홍이 방 안으로 들어갔을 때, 날은 이미 어둑어둑해져 있었다. 황제는 우두커니 앉아 미동도 하지 않았다. 누군가 안으로 들어온 사실조차 인지하지 못한 듯했다.
기홍이 조용히 다가가 물었다.
“폐하, 어선을 올릴 시간입니다. 오늘은 어느 곳에서 드시겠습니까?”
황제의 초점 없는 시선이 기홍에게 닿았다. 마치 처음 보는 사람을 대하는 표정이었다.
하는 수 없이, 기홍이 다시 물었다.
“폐하, 어선을 올리겠습니다. 어느 곳에서 드시겠습니까?”
그제야 황제가 흠칫 놀라며 대꾸했다.
“뒷전에 차리거라.”
기홍은 방을 나서려다 학평관의 말이 떠올라 잠시 자리에 멈춰 섰다.
“폐하, 소인이 새로 술을 빚었습니다. 오늘 저녁에 술상을 올릴 테니 한번 드셔 보시지요.”
황제는 짤막하게 대꾸했다. 기홍은 다시 머뭇거리다 또다시 입을 열었다.
“폐하, 오늘 야참으로 죽은 어떠신지요?”
“좋다.”
녹하와 달리 말재주가 좋지 않은 터라, 기홍은 더 할 말이 없었다. 그녀가 천천히 걸음을 옮겨 문 앞에 다다랐을 때, 황제의 목소리가 그녀의 발목을 붙들었다.
“잠시.”
기홍이 몸을 돌렸다.
“폐하, 분부하실 일이라도 있으신지요?”
황제가 말했다.
“영구와의 혼사는 언제쯤 치를 예정이더냐?”
기홍은 숨이 턱 막혔다. 계획대로라면 진작에 치러야 했지만 초왕비의 사고로 인해 계속 미뤄지지 않았던가. 더욱이 전쟁까지 일어났으니 더더욱 혼례를 치를 시간이 없었다. 이제는 모든 게 안정을 되찾았지만, 혼사 이야기를 꺼내기도 모호해진 상황이었다.
“소인은 평생 혼인을 하지 않고 폐하를 모시고 싶습니다.”
“영구와 싸우기라도 했더냐?”
“아닙니다.”
“한데 어째서 혼사를 치르지 않겠단 말이냐?”
기홍은 고개를 숙이고 침묵으로 답했다. 이런 일은 한 사람이 결정할 수 있는 문제도 아닌 데다 그녀가 먼저 입을 열기엔 더더욱 어려운 문제였다.
황제도 그녀의 상황을 알아챈 듯 고개를 끄덕였다.
“영구의 문제로구나. 다음에 영구에게 물어보마.”
“폐하, 부디 소인의 일로 마음 쓰지 마십시오. 소인에게 혼인은 중요치…….”
그녀의 말은 간단하게 끊겼다.
“그만 나가 보거라.”
기홍은 입술을 깨물며 방을 나섰다. 백천범에게 큰일이 생긴 후, 황제뿐만 아니라 영구도 낯선 이처럼 변해 버렸다. 그녀를 바라보는 눈빛도 예전과는 달리 무덤덤했다. 그녀는 똑똑한 여인이었기에 어떤 설명이 없어도 그 의미를 이해할 수 있었다.
그녀가 나간 후, 황제는 학평관을 불러 몇 가지 분부를 내렸다. 그리고 홀로 정원을 거닐었다. 학평관은 묵묵히 황제의 뒷모습을 바라보다 그가 분부한 일을 처리하기 위해 자리를 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