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74화
백천범은 자신의 앞을 가로막은 남농화를 바라보며 황당한 표정을 지었다.
“뭐라고? 나랑 한판 겨루자고?”
“맞아.”
남농화가 하찮다는 눈빛을 보내며 대꾸했다.
“할 수 있겠어?”
백천범이 입을 떼려는 순간, 그녀에게 안겨 있던 묵용린이 먼저 반응을 보였다. 아이는 통통한 손을 뻗어 퍽 소리가 날 만큼 주먹을 날리는 게 아닌가. 어린아이였지만 동작도 빠르고 손도 매웠다. 남농화는 하마터면 눈을 정통으로 맞을 뻔했다. 그녀는 소리를 지르며 뒷걸음질 쳤다.
백천범은 묵용린을 꽉 끌어안으며 다독였다.
“어머니의 일은 어머니가 알아서 해결할 테니 린아는 참견하면 안 돼.”
옆에 있던 여옥과 여주는 하마터면 웃음을 터트릴 뻔했다. 남농화가 두려웠던 그들은 얼른 고개를 숙이고 웃음을 삼켰다.
남농화가 입술을 질끈 깨물더니 묵용린에게 삿대질을 했다.
“야만인도 아니고, 물고 때리는 것밖에 할 줄 몰라!”
어쨌든 묵용린이 먼저 손찌검을 했으니, 백천범은 조금 미안한 마음이 들었었다. 그러나 남농화가 야만인 운운한 순간, 저도 모르게 코웃음이 나왔다.
“뭘 잘 모르네. 우리 린아는 야만인한테만 이렇게 하거든.”
뒤늦게 공주의 자리에 올랐던 남농화는 변변치 못한 취급을 견디지 못했다. 백천범의 말은 그녀의 자존심에 큰 흠집을 내었다. 그녀가 이를 악문 채 중얼거렸다.
“누가 아비 없는 자식 아니랄까 봐, 어디서 또 아비 없는 아들을 낳아서…….”
백천범의 미간이 좁혀들었다. 자신에게 무어라 떠들든 상관없었지만, 아이를 비난하는 건 참을 수 없었다.
“함부로 말하지 마. 우리 린아에게도 아버지는 있으니까.”
“어디 있는데?”
남농화가 냉소를 흘렸다.
“그 아버지란 사람이 누군데? 어째서 같이 오지 않고? 말해 봐. 아버지가 누군데?”
“린아의 아버지는…….”
백천범은 말문이 막혔다. 마치 전생의 기억이라도 떠올리려 하는 듯 막막한 기분이 들었다. 그의 이름 한 글자마저 떠오르지 않았다. 이름뿐일까? 커다란 형체와 맑은 눈망울, 따뜻한 미소만 아른거릴 뿐 정확한 생김새마저 희미했다. 대체 누구란 말인가? 어디에서 무얼 하는 사람이고? 그녀는 뜬구름처럼 멀어진 기억에서 무엇도 잡아낼 수 없었다.
그녀가 관자놀이를 누르며 초조하게 말했다.
“린아의 아버지가 누구든 무슨 상관인데? 나랑 한판 겨루자는 거 아니었어? 어서 덤기나 해.”
“화통하네.”
남농화는 웃음을 터뜨리더니 주변에 있던 하인들을 멀찍이 물렸다.
“덤벼.”
그녀가 어깨 위에 있던 하얀 천을 두 손에 휘감았다. 백천범은 묵용린을 땅에 내려놓고 소매를 걷어 올렸다. 자세를 잡고 제대로 싸워 보려는데, 한 태감이 호로사葫蘆絲(조롱박 모양의 피리)를 불기 시작했다.
밝고 경쾌한 곡조가 허공을 수놓으니 남농화가 손을 들어 올렸다. 그녀가 허리를 움직일 때면 치맛자락이 가볍게 나풀거렸다. 이제 보니 그녀는 화려한 치마를 입고 있었다. 파란색과 초록색, 자색 실로 수많은 공작 깃을 수놓은 치마였다. 사뿐사뿐 춤을 추는 그녀에게 햇살이 내리쬐자 마치 공작새가 꼬리를 활짝 펼친 듯했다. 그 아름다운 자태가 모두의 박수를 불렀다.
백천범은 천천히 눈을 깜박이다 손을 내렸다. 한판 겨뤄 보자면서 갑자기 춤은 왜 춘단 말인가?
한편 묵용린은 갑작스레 벌어진 춤판에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아이는 손발을 휘두르며 나부끼는 흰 천을 잡으려고 애썼다.
여주가 당황스러워하는 백천범에게 다가와 차분히 설명했다.
“남원에서 여인들의 대결은 춤을 의미합니다. 단령 공주는 춤 솜씨가 뛰어나서 진 적이 거의 없답니다.”
백천범은 춤에는 자신 없었다. 그러나 이미 대결을 승낙했으니 물러설 수도 없었다. 그녀는 남농화의 모습을 지켜보며 조용히 동작을 익혔다.
여주의 말대로 남농화는 발군의 춤 실력을 뽐냈다. 그녀는 날렵하고 가뿐하게 몸을 움직이며, 때때로 절도 있는 동작을 선보였다. 어느새 구경꾼들이 몰려와 그녀의 주위를 에워싸기 시작했다. 그들의 얼굴에는 하나같이 감탄의 표정이 떠올라 있었다.
어느덧 그녀가 춤을 마치자 박수 갈채가 끝을 모르고 이어졌다. 남농화는 합장을 하며 관객들에게 인사를 했다.
이제 백천범의 차례였다. 이곳 사람들은 늘 흰 천을 두르고 다녔지만, 그녀는 아니었다. 여옥이 자신의 천을 건네며 조용히 속삭였다.
“겁내지 말고 추십시오. 소인이 응원하겠습니다!”
백천범은 담담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긴장은 되지 않았다. 애당초 춤을 잘 추는 것도 아니었기에 승패엔 미련이 없었다.
그녀는 흰 천을 그럴싸하게 손에 감은 뒤, 허공으로 힘껏 흩뜨렸다. 그러나 춤을 시작하기도 전에 흰 천은 멀리 날아가 버렸고, 여기저기서 웃음이 터져 나왔다.
옆에 있던 묵용린이 서둘러 땅에 떨어진 천을 주워 와 건네주었다. 아이는 기세등등한 표정으로 이상한 소리를 냈다. 자신의 어머니가 아까 그 여인보다 더 멀리 던졌다고 생각한 듯했다.
백천범은 묵용린의 얼굴에 입을 맞추고 칭찬을 해 준 뒤, 아무 일 없다는 듯 춤을 이어갔다. 그녀는 비슷하게 흉내라도 내기 위해 남농화의 동작을 떠올렸다.
그런데 어찌 된 일일까. 방금 본 동작이건만, 그녀의 기억은 빠르게 흩어지고 있었다. 남농화가 춤을 춘 일이 까마득한 옛날의 일처럼 느껴졌다. 결국 동작은 점점 더 느려져 곡조와 완전히 따로 놀게 되었다. 보고 있자니 여간 우스꽝스러운 게 아니었다.
그녀는 공주였기 때문에 관중들은 차마 소리 내어 웃을 수 없었다. 그러나 춤이 이어질수록 하나둘 배를 잡고 웃기 시작했다. 그중 가장 신나게 웃는 사람은 묵용린이었다. 아이는 자신의 어머니가 더 잘해서 웃는 줄 아는지, 손뼉을 치며 까르르 웃었다.
마침내 백천범이 춤을 마쳤다. 가쁜 숨을 몰아쉬며 자리에 멈춰선 그녀는 흰 천으로 이마에 맺힌 땀을 닦아냈다. 여전히 웃음소리로 시끄러운 와중에 누군가 우렁찬 박수 소리를 냈다.
소리가 나는 쪽을 바라보니 언제 왔는지 군중들 사이에 남문우가 서 있었다. 그는 미소 띤 얼굴로 열렬히 손뼉을 쳐 주었다.
남농화가 벌컥 화를 내었다.
“뭐가 그렇게 신나? 설마 나보다 더 잘 췄다는 거야?”
남문우가 태연하게 답했다.
“무양 공주의 꿋꿋함과 용기에 보내는 박수지.”
그가 남농화를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네가 춘 건 춤이었지만, 무양 공주가 춘 건 정신이라 해야겠군. 춤을 잘 추지 못하는데도 도전을 피하지 않으니, 얼마나 값진 일이야?”
백천범을 보며 박장대소를 터뜨렸던 이들은 남문우의 말에 얼굴을 붉힐 수밖에 없었다. 그들은 서둘러 자리를 벗어났다.
설마 남문우가 백천범의 편을 들 줄은 몰랐기에, 남농화는 열을 올리기 시작했다.
“내가 더 잘할 수 있다고.”
그 말에 백천범이 무릎을 살짝 굽히고 손을 들어 올렸다.
“덤벼, 제대로 붙어 보자.”
조금 겁이 난 남농화의 목소리가 움츠러들었다.
“야만인이나 그렇게 싸우는 거야.”
백천범이 도발하듯 손짓을 해 보였다.
“포기하겠다고? 그럼 지는 거나 다름없어.”
남문우 앞에서 지고 싶지 않았던 터라, 남농화는 백천범의 자세를 따라 했다. 무릎을 살짝 굽히고 왼손바닥을 내민 채, 오른손으로는 주먹을 쥐니 제법 그럴싸해 보였다.
그러나 백천범은 사정을 봐주지 않았다. 그녀의 아들을 건드린 자는 누구든 대가를 치러야 마땅했다.
비록 뒤늦게 공주가 되었다지만, 남농화는 이전에도 금이야 옥이야 귀하게 자란 딸이었다. 누가 감히 그녀에게 손을 댈 수 있었을까. 눈 깜짝할 사이에 백천범의 주먹과 발이 그녀의 몸을 세게 내리쳤다. 바닥에 내동댕이쳐진 그녀가 머리를 감싸더니 울음을 터트렸다.
백천범이 손을 탈탈 털었다.
“지면 진 거지, 왜 우는 거야? 난 졌어도 안 울었잖아.”
“…….”
그녀가 우는 이유는 패배 때문이 아니었다. 정말로 너무 아파서 눈물을 참을 수가 없었다.
* * *
옥좌에 앉은 묵용감의 얼굴에 쓴웃음이 어렸다. 그의 시선 끝에는 시끄럽게 떠드는 신하들이 걸려 있었다. 누구에게도 구속받지 않으려 황제가 되었는데, 황제 또한 그리 자유로운 존재가 아니었다.
신하들은 간택에 대한 이야기로 열변을 토했다. 특히 옳은 말만 내뱉는 성가신 언관言官(임금의 잘못과 신하들의 비행을 규탄하던 관리)들이 극성이었다. 예부터 지금까지, 후비부터 황태자까지 넘나들며 청산유수로 간언諫言을 늘어놓으니, 눈물 콧물을 다 쏟을 뻔한 충심이었다.
묵용감은 역대 황제들 중에서도 근면 성실한 황제였다. 그는 국정을 돌보는 일에는 빈틈이 없었지만, 단 하나 거들떠보지 않는 일이 있었다. 그는 사적인 일로 생각하는 후궁 문제였다. 대신들에게는 경중과 공사로 나눌 수 없는 일이었다. 그들은 전통과 규율를 위배하는 일에는 앞다투어 시비를 가리려 했다.
열띤 토론이 이어지는 동안, 묵용감은 옥좌에 우두커니 앉아 있기만 했다. 그의 입에서는 어떠한 의견도 흘러나오지 않았다.
“폐하.”
도찰원都察院(행정 기관을 감찰하는 관청)의 어사御史 채안화蔡安和가 무릎을 꿇고 머리를 조아렸다.
“폐하께서 즉위하신 이후로 백성을 위해 노고를 아끼지 않으시어, 만백성이 폐하를 우러러보고 있습니다. 남북도 통일되어 안정적인 국면을 맞이하였지요. 다만 신하들의 근심이 깊어지니, 내궁의 문제를 부디 굽어살펴 주십시오.
중궁의 빈자리는 말할 것도 없고 후궁 전체가 텅 비어 있다니, 역대 황조에서도 이런 일은 없었사옵니다. 폐하, 무엇보다 황태자는 사직의 안정을 굳건히 하는 데 가장 중요한 존재입니다. 간택 없이 어찌 황태자를 얻을 수 있겠습니까?
백성들도 세 가지 불효 중 후대를 잇지 않는 걸 가장 큰 불효로 여깁니다. 하물며 황가는 어떻겠사옵니까? 혈통을 잇지 않음은 도리에 맞지 않는 일입니다. 폐하, 동월국의 미래를 위해 부디 통촉하여 주시옵소서! 만약 폐하께서 간택을 하지 않으시겠다면 신은 죽음으로 간언을 대신하겠사옵니다!”
뭇사람들의 가슴을 뭉클하게 울릴 만큼 충심 어린 말이었다. 아쉽게도, 묵용감의 귀에는 늙은이의 시끄러운 잔소리에 불과했지만. 수박을 자르듯 하나하나 처단하는 방법도 있었다. 다만 묵용감은 성가심을 못 이겨 그리할 만큼 어리석은 군주가 아니었다. 황제가 누군가의 목숨을 거두려면 걸맞은 명분이 있어야 했다. 더욱이 언관들은 황제조차 쉽게 죄를 물을 수 없었다.
그는 침묵으로 태도를 정했다. 그러자 또 누군가가 무릎을 꿇더니, 목청을 높였다.
“폐하, 통촉하여 주시옵소서, 신 죽음으로 간언을 대신하겠나이다!”
마치 신호탄을 쏘아 올린 듯, 점점 더 많은 이들이 무릎을 꿇고 외치기 시작했다.
“폐하, 통촉하여 주시옵소서! 통촉하여 주시옵소서…….”
어느새 그들의 외침은 대전 안을 쩌렁쩌렁하게 울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