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73화
다들 할 말을 잃은 듯 멍하니 묵용린을 바라보았다. 설마 하니 옥좌를 선택하는 아기가 있을 줄이야.
묵용린은 사람들의 얼빠진 표정을 마주하더니 신나게 웃기 시작했다. 백천범 역시 묵용린을 따라 박장대소를 터뜨렸다. 그녀가 웃자 귀빈들도 따라 웃기 시작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사람들의 우렁찬 웃음소리가 대전을 메웠다.
백천범은 웃음을 보이면서도 남류청의 눈치를 슬쩍 살폈다. 다행히 남류청 역시 웃음을 보이기에 백천범은 안도의 숨을 내쉬다 묵용린을 안고 단폐를 내려왔다.
남류청이 내관을 불러 몇 마디 분부를 내렸다. 내관은 허리를 숙여 대답을 올리곤 곧장 대전을 나섰다.
묵용린을 안고 돌아온 백천범이 남류청에게 사죄했다.
“린아가 철이 없어 그런 것이니, 부디 린아를 탓하지 말아 주십시오. 탓하시려거든 제대로 가르치지 못한 절 탓하시어요.”
남류청이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어찌 널 탓하겠느냐? 네가 린아에게 그리하라고 가르친 것도 아닐 텐데. 더욱이 꿈을 크게 갖는 건 좋은 일이 아니더냐. 보아라, 얼마나 패기가 넘치니? 너보다 린아가 더 낫구나.”
그러나 백천범의 마음은 무거울 따름이었다. 남류청의 심기를 거스르는 행동이 아니었던가.
남류청은 묵용린을 받아들더니 그를 바닥에 내려놓았다. 그녀가 비단을 가리키며 말했다.
“우리 린아, 착하지. 마음에 드는 게 있는지 다시 한번 보고 이 할미에게 가져다주렴.”
묵용린은 신이 난 얼굴로 또다시 아장아장 걸어갔다.
다들 그제야 화려한 비단 위에 몇 가지 물건이 더 놓였음을 알아차렸다. 알록달록한 과자도 있고 금인金印도 있었다. 금인은 남류청의 것으로, 남원 군주의 상징이었다. 동월국으로 따지면 황제의 옥새에 해당했다. 저 금인이 있어야 명실상부한 남원의 군주로 인정받을 수 있었다.
묵용린은 물건들을 이리저리 살펴보았다. 이번에는 함부로 잡지 않고 유심히 살펴보기만 했다. 간식 앞에서 발걸음이 살짝 멈추긴 했지만 그대로 지나쳐갔다. 이윽고 조그만 손이 금인을 덥석 집어 들더니 제자리로 돌아갔다.
남류청의 미소가 조금씩 어색해졌다. 묵용린이 제게 금인을 가져다줄 거라고 예상했지만, 묵용린의 통통하고 작은 손은 백천범에게 금인을 꼭 쥐여 주었다.
또다시 어색한 침묵이 대전을 휘감았다.
얼떨결에 금인을 받아 든 백천범의 얼굴에 난감한 빛이 서렸다. 그녀가 애써 웃으며 상황을 수습했다.
“린아가 금을 좋아하니, 아무래도 장사꾼이 되려나 봅니다.”
그때 남농화가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비아냥거리기 시작했다.
“금원보가 저렇게 많은데 어째서 금인을 집었을까요? 어린 나이에 야망도 참 큽니다.”
금기를 범하긴 했어도, 다들 그가 남원의 핏줄이라고만 생각하여 크게 문제 삼지 않았다. 물론 묵용린이 동월국의 황태자라는 사실을 안다면 누구도 가만히 넘어가지 않았을 것이다. 후환을 대비해 묵용린을 서둘러 제거하는 게 가장 좋은 방법이라고 생각하리라.
백천범이 대꾸하려는데 누군가 웃으며 말을 가로챘다.
“눈썰미가 참 좋은 아이입니다. 금인이 금원보보다 색도 좋고 무게도 더 나가니, 이를 알아보고 값어치를 따져 고른 것이지요. 장사에 소질이 있는 아이입니다.”
옆에 있던 이들도 황급히 맞장구를 치기 시작했다.
“훗날 황상皇商(궁에 필요한 물자의 구입을 관리하던 사람)이 되실 건가 봅니다. 국고가 왕자 아기씨께 달렸군요.”
“이렇게 영특한 걸 보니 틀림없이 장사를 잘하시겠습니다.”
“항상 방긋방긋 웃으시니 장사꾼이 체질이라니까요.”
“…….”
눈썹을 찌푸리던 남농화가 남문우의 귓가에 나지막이 말했다.
“왜 편을 들어주는 거야? 네가 이런다고 저 애가 고마워할 줄 알고?”
남문우는 대수롭지 않다는 표정이었다.
“정말 장사꾼 기질이 있는 아이야. 얼굴부터 능글맞잖아. 훗날 상인이 될 인재라고.”
남농화는 입술을 삐죽거리기만 할 뿐,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백천범은 조심스럽게 남류청의 안색을 살폈다. 군주가 이런 일을 특히 꺼리는 것을 그녀도 잘 알고 있었다. 과거 묵용감과 아이의 모반에 대해 이야기할 때 이런 것들이 얼마나 위험한 일인지 알게 되지 않았던가.
그래서 그녀는 늘 묵용린을 직접 돌보며 머리의 용 모양 점이 발견될까 늘 주의를 기울였다.
다행히 남류청은 개의치 않는 듯했다. 오히려 다른 이들이 하는 말을 들으며 짙은 미소를 보이고 있었다.
돌잔치는 화기애애한 분위기에서 마무리되었다.
백천범은 묵용린을 안고 평락궁으로 돌아갔다. 무심코 뒤를 돌아보니 남문우가 그녀를 바라보며 웃고 있었다. 평소라면 아는 체도 하지 않았겠지만 이번에는 그의 도움을 받지 않았는가. 그녀는 미소로 화답했다.
남문우는 한술 더 떠 눈을 찡긋거렸다. 평소보다 더 난봉꾼 같은 모습이었다.
백천범은 고개를 돌려 버렸다. 그녀가 남문우에 대해 아는 건 그리 많지 않았다. 그는 남류청의 사촌인 능왕陵王의 아들이자 남원의 호국대장군이며, 그 또한 왕위를 다투는 경쟁자였다. 하지만 남류청은 돌아가는 이들 중에서 남문우만 따로 남긴 듯했다. 그에게 무슨 볼일이라도 있는 것일까?
텅 빈 대전, 둘만 남게 되자 남류청이 남문우에게 물었다.
“남 장군이 보기엔 어떠한가?”
남문우가 방만하게 웃으며 말했다.
“위협이 될 만한 건 싹을 잘라야 한다고 가르쳐 주시지 않으셨습니까.”
남류청이 고민스러운 기색을 내비쳤다.
“죽이는 건 어렵지 않다만…….”
“폐하께서는 닙닙이가 걱정이십니까?”
남류청이 긴 한숨을 내쉬었다.
“짐이 그 애에게 너무 큰 빚을 졌다. 게다가 지금은 시기적으로도 좋지 않아.”
남문우가 고개를 끄덕였다.
“의지가 강한 여인입니다. 이렇게 오래 버텨 내는 건 정말 어려운 일이지요.”
그가 잠시 생각하다 입을 열었다.
“폐하, 원래 계획대로 하시지요. 동월로 돌려보내는 게 좋겠습니다.”
남류청은 여전히 망설이고 있었다.
“호랑이를 산으로 돌려보내는 꼴이 아닌가.”
“아이가 한 행동을 신경 쓰십니까?”
남문우가 피식 웃고 말았다.
“그 애를 통해 더 좋은 걸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 물론 닙닙이와의 관계도 유지할 수 있으니 일석이조가 아닙니까. 고민할 일이 아닙니다.”
남류청은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대전 안을 천천히 서성였다.
남문우는 의자에 앉아 새빨간 과실 하나를 집어 우물거렸다. 과즙이 터지며 그의 입가를 붉게 물들였다. 잠시 후, 남류청이 발걸음을 멈췄다.
“남 장군의 말을 듣겠네. 원래 계획대로 하겠다.”
남문우는 그녀의 결정을 예상하고 있었다. 남류청은 그 계획을 위해 오랜 시간 공을 들이지 않았던가. 그만큼 조금의 허점도 없었다. 설령 묵용린을 제거해야 하는 일이 생긴다 한들… 아직 한 살밖에 안 된 아이니 고민할 시간은 충분했다.
* * *
백천범은 요즘 들어 조금 게을러졌다. 뭘 해도 좀처럼 기운이 나지 않았다. 그러나 묵용린은 반대였다. 돌이 지나더니 자라는 속도가 더욱더 빨라진 듯했다. 매일 생기가 넘쳐흘렀고 다른 이들의 도움 없이도 혼자 잘 놀았다.
백천범은 늘 묵용린을 바라볼 뿐이었다. 그녀가 부드러운 평상에 누운 채 여옥에게 물었다.
“요즘은 왜 향을 피우지 않지?”
여옥이 의아한 표정을 보였다.
“공주께서 피우지 말라고 하셨잖습니까?”
백천범이 멍하니 눈을 깜박였다. 제가 그런 말을 했던가? 어째서 기억이 나지 않는 걸까?
문득 그녀의 시선이 커다란 기둥에 닿았다. 물끄러미 기둥을 바라보던 백천범이 다시 입을 열었다.
“누가 여기에 줄줄이 표시를 새겨놨어. 이게 무슨 뜻일까?”
여옥이 다가와 표시를 살펴보았다. 정말로 금빛 기둥에 희미한 자국이 남아 있었다. 자세히 보지 않으면 지나칠 법했기에, 여옥이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왕자 아기씨께서 하신 게 아닐까요?”
백천범이 그녀를 흘겨보았다.
“린아의 키가 여기 닿을 리가 없잖아.”
여옥은 웃기만 할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백천범은 멍한 눈으로 여옥을 한참 들여다보다 물었다.
“네가 여주야? 아니면 여옥?”
여옥이 입을 가리며 웃었다.
“오늘 무슨 일 있으십니까? 소인은 여옥입니다. 늘 단번에 알아보셨잖습니까.”
백천범이 제 이마를 쓰다듬었다.
“나도 왜 이러는지 모르겠어. 요즘 통 머리가 안 돌아가. 기억력도 떨어지고. 맞다, 내게 오라버니가 있지 않았어?”
여옥이 조금 당황스러운 목소리를 내었다.
“공주의 오라버니는 제왕齊王 전하이십니다. 지금은 먼 길을 떠나셨지요.”
백천범이 제 머리카락을 빙글빙글 꼬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떠난 지 오래되셨어? 얼굴마저 기억이 잘 안 나.”
“예. 오래전에 떠나셨습니다. 보고 싶으시면 서신을 쓰셔도 됩니다.”
잠시 허공을 바라보던 백천범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냐. 그렇게 중요한 일도 아닌걸.”
* * *
남제화는 별안간 재채기를 터뜨렸다. 그는 코를 문지르며 계단을 올려다보았다. 사앵앵이 내려오고 있었다.
“방금 내 욕이라도 한 것입니까? 걱정 마십시오. 이렇게 돌아오지 않았습니까.”
그를 발견한 사앵앵은 조금 놀랐지만, 계단을 다 내려왔을 때는 한껏 일그러진 표정을 지어 보였다.
“돌아올 생각은 있었고요? 그쪽이 우리 가게에 얼마나 많은 빚을 졌는지 장부 좀 확인해 봐요. 매일 장작을 패고 물을 길어도 다 못 갚을 정도니까요.”
“사람이 어찌 이리 재미가 없습니까? 만나자마자 돈 얘기부터 꺼내다니.”
남제화가 품에서 은자 두 덩이를 꺼내 계산대 위에 올려놓았다.
“이 정도면 다 갚은 셈이지요?”
사앵앵이 눈을 번득이며 은자를 유심히 살폈다. 하마터면 입을 다무는 것도 잊을 뻔했다. 은자를 살피던 그녀가 의심스럽다는 듯 물었다.
“어디에서 난 거예요?”
남제화가 의기양양하게 답했다.
“이 몸이 강호의 검객 아닙니까. 의롭지 못한 부자를 벌하고 가난한 이를 돕던 중에 제 몫으로 두 덩이 남겨 두었지요.”
사앵앵은 여전히 의심스럽다는 얼굴이었다.
“고작 두 덩이가 다예요? 어떻게 두 덩이만 남길 수 있어요?”
“그게 다입니다.”
남제화가 주머니를 꺼내 탈탈 털어 보았지만, 안은 텅 비어 있었다.
사앵앵이 혀를 끌끌 찼다.
“진정한 협객은 아니네요. 부자를 털어서 돈을 얻었으면 전부 가난한 자를 위해 써야지요. 어떻게 두 덩이를 남길 수 있어요?”
남제화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앵앵, 당신과 얘기하다 보면 가끔 할 말이 없어졌습니다. 조금밖에 안 남겨 왔다고 혼을 내더니, 지금은 또 남겨 왔다고 책망하다니요.”
사앵앵은 금고 안에 은자 두 덩이를 넣고 금고를 단단히 걸어 잠갔다. 몸을 돌려세운 그녀가 태연하게 말했다.
“처음엔 그저 장사꾼의 입장에서 한 말이었고, 그다음은 양심 있는 장사꾼으로서 한 말이었어요.”
“…….”
남제화는 그녀의 뻔뻔함에 혀를 내두를 수밖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