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72화
“…사씨 아가씨가 왕비 마마를 쫓아다니실 땐 날마다 집 앞을 찾아왔었습니다. 아무리 타일러도 말이 통하지 않았지요. 결국 월향이 이장을 찾아가 사 주인장에게 잘 말해 달라고 청했습니다.
계속 귀찮게 굴면 미움만 살 테니 자제해 달라고 말입니다. 사 주인장도 체면이 서지 않는다고 생각했는지 아가씨를 잘 타일렀고, 그 뒤로 아가씨가 집을 찾아오는 일은 없었습니다…….”
월규는 입술을 달싹이면서도 조심스럽게 조심스레 묵용감의 안색을 살폈다. 그는 평소처럼 의자에 등을 기대고 잠이 드는 대신, 바닥에 있는 토끼를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괜스레 마음이 불안해지는 광경이었다.
얼마나 더 이야기를 늘어놔야 하는 걸까. 어쨌든 그녀가 해 줄 수 있는 이야기는 한정적이었다. 황제도 그동안 많이 들어왔으니 질리지 않았겠는가.
월규가 잠시 숨을 돌리려고 하는데 황제가 토끼를 가리켰다.
“새로 들인 것이냐?”
월규의 안색이 하얗게 질렸다. 감히 거짓을 고할 수는 없었던 그녀가 털썩 무릎을 꿇었다.
“소인, 죽을죄를 지었나이다. 제대로 돌보지 못해 얼마 전에 한 마리가 목숨을 잃었습니다. 폐하께 고하기 두려워 감히 새로 한 마리를 들였습니다.”
황제는 잠시 눈을 감았다 뜨더니 가라앉은 음성으로 말했다.
“왕비가 없으니 저 애들도 재미가 없는 모양이구나. 되었다. 생사를 어찌 마음대로 하겠느냐. 새로 데려온 놈은 다시 풀어 주거라. 앞으로는 이리할 필요 없다.”
잠깐의 침묵 후, 황제의 음성이 이어졌다.
“그만 물러가거라. 잠시 혼자 있어야겠다.”
“예, 명 받잡겠나이다.”
월규는 자리에서 일어나 토끼들을 광주리에 담고 밖으로 향했다.
그녀가 밖으로 나오자, 학평관이 여느 때처럼 조심스럽게 물었다.
“어찌, 잠이 드셨는가?”
월규가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혼자 계시겠다며 그만 나가보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녀가 목소리를 잔뜩 낮췄다.
“폐하께서 새로 데려온 토끼를 알아보셨습니다. 토끼를 어찌나 빤히 보시는지 코끝이 절로 찡해져서… 울어 버리고 싶었습니다.”
학평관의 눈가도 어느새 촉촉해졌다.
“나 또한 울고 싶긴 마찬가지라네. 하지만 여기선 안 되지. 장생전에 찾아가서 울어야겠네.”
월규가 학평관을 따라 걷기 시작했다.
“폐하께서는 대체 왜 왕비 마마께 봉호를 내리지 않으시는 겁니까? 계속 왕비 마마라고 불러야 하다니요, 황후 마마라고 불러야 하는 게 옳지 않습니까. 세자 아기씨도 마찬가지입니다. 대황자라고 불러 드려야지요.”
“아무래도 황후와 대황자라고 부르시는 게 낯설으신 모양이네. 왕비 마마와 세자 아기씨가 더 익숙하지 않은가. 그렇지 않아도 왕비 마마의 위패를 비워 둔 일로 여러 차례 말씀을 드렸네.
하지만 폐하께서는 아무런 대꾸도 없으셨지. 아무래도 정이 너무 깊어 결정을 내리지 못하시는 듯하네. 위패를 쓰면 왕비 마마의 죽음이 현실이 되니, 폐하께서 받아들이실 수 없는 것이겠지.”
학평관의 추측대로였다. 묵용감은 차마 위패를 쓸 수 없었다. 규율대로라면 적왕비인 백천범은 세상을 떠났다 해도 대행황후로 불려야 했다. 그러나 묵용감이 주저한 끝에 봉호도 위패도 없는 일이 되어 버렸다. 황릉 변두리의 묘패와 장생전의 위패는 텅 빈 채였다.
이게 그가 할 수 있는 마지막 발악이나 다름없었다. 위패를 비워 두어서라도 그녀가 살아 있다고 믿고 싶었다.
이상하게도, 그의 슬픔은 시간이 흘러도 줄어들지 않았다. 오히려 더 짙은 농도로 그를 뒤덮을 따름이었다. 하지만 그는 지혜로운 사람이었다. 천하를 거머쥐었으니 백성들과 신하들에게 전쟁에만 능한 군신이 아니라 나라를 잘 다스리는 황제의 모습을 보여야 했다.
그러기 위해선 마음의 병을 겉으로 드러내며 지낼 순 없었다. 위중청과 수민의 꾸준한 권유에 그는 침을 맞기 시작했고, 조금씩 효과를 보는 중이었다.
그는 엉킨 실타래를 천천히 풀어내 한곳에 차곡차곡 쌓아 두듯 감정을 다스리게 되었다. 짙은 슬픔도 남들 앞에서 억제할 수 있었다. 엉망진창으로 뒤엉켰던 머릿속도 이제는 제법 맑아지고 있었다.
그러나 오늘만큼은… 감정을 억누르고 싶지 않았다. 그에게는 서럽도록 특별한 날이 아니던가. 그리움으로 숨을 쉴 수 없다고 해도, 한없이 그리움에 잠겨 두 사람을 떠올리고만 싶었다.
일 년 전 오늘, 그녀가 아이를 낳았다. 그날의 일을 하나부터 열까지 똑똑히 기억할 수 있었다. 문밖을 지키는 동안 들려온 그녀의 울부짖음, 애간장이 녹을 듯 타 들어가던 그때의 심정, 그녀의 고통을 덜어주듯 울려 퍼졌던 아이의 울음소리, 그 순간 흘러내리던 눈물까지…….
그의 슬픔과는 무관하게, 스며드는 햇살은 찬란하기만 했다. 한 자도 되지 않을 만큼 가까운 거리였으나, 그는 햇살에 닿는 순간 녹아 없어질 눈인 양 그늘에 파묻혀 있었다. 볼을 따라 쉴 새 없이 눈물이 흘러내렸다.
그녀와 함께했던 날들이 선연하게 눈앞을 스쳤다. 지난날을 하나하나 되짚어가던 그가 갑작스레 미간을 찌푸렸다. 조금 전 떠오른 그 광경은… 제갈겸유가 쓰러지기 직전에 보인 표정이었다. 그는 뒤로 천천히 쓰러지면서도 기이한 미소를 머금고 있지 않았던가.
대체 왜 그리 웃었단 말인가? 그 의미는 또 무엇이고?
별안간 자리를 박차고 일어난 묵용감이 초조하게 방 안을 서성였다. 그동안은 슬픔에 잠긴 나머지 미처 생각하지 못한 부분들이 불쑥불쑥 튀어나왔다. 돌이켜 보면 허점 또한 적지 않았다. 태자가 죽을 때까지 입을 열지 않은 것은 자백하는 순간 죽임을 당할 걸 알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제갈겸유는 왜 그런 태도를 보였단 말인가? 더욱이 제갈겸유는 죽는 순간에도 홀가분한 얼굴을 했다. 그래서 그렇게 웃을 수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 한들 제갈겸유의 심중을 어찌 알아낼까. 관련된 사람은 모두 처리되었으니 증인을 찾을 수도 없었다. 그는 고개를 느릿느릿 저으며 다시 자리에 앉았다. 백천범이 살아 있다고 믿고 싶어서, 제갈겸유의 웃음에라도 의미를 부여하는 게 아닐까.
어쩌면 그의 기억이 잘못된 것일지도 몰랐다. 애당초 제갈겸유는 웃음을 보인 적이 없을지도…….
무엇도 확신할 수 없게 되자, 그는 허리를 굽히고 두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천범, 아직 살아 있는 것이오? 어찌하여 꿈에 한 번도 나타나지 않는단 말이오. 이미 너무 멀리 떠나 버렸소? 애당초 죽은 것이 아니란 말이오? 어찌 이리 무정할 수 있소. 천범, 알고 있소?
이 궁에서 나는 산송장이나 다름없다오. 그대와 린아를 생각할 때만 겨우 숨을 쉴 수 있소. 그대와 린아가 그립소. 너무나도 보고 싶어 마음이 아프오. 아파 죽을 것만 같소…….
* * *
남원과 동월국은 아이의 돌을 기념하는 공통적인 풍습을 지녔다.
남류청은 묵용린의 돌을 맞아 성대한 연회를 준비했다. 황실 종친, 문무백관 할 것 없이 모두가 모여 맛있는 음식과 술을 마시며 어린 왕자의 돌을 축하했다.
화려하게 치장한 묵용린은 붉은 방석 위에 서 있었다. 묵용린을 가운데에 두고 모두들 자리에 착석했다. 묵용린은 머리에 작은 금관을 쓰고, 목에는 자물쇠 모양의 금목걸이를 걸고 있었다. 빨간색 비단으로 만든 장포는 아이에게는 너무 길어 조금 우스꽝스럽기도 했다.
새하얗고 통통한 얼굴에 커다란 눈을 깜박이는 묵용린의 미간에는 붉은 점이 그려져 있었다. 방긋 웃을 때마다 커다란 보조개가 파이는 모습이 꼭 그림 속의 어린아이처럼 귀여웠다. 다들 묵용린을 예뻐했고, 손뼉을 치며 노래를 불러 주었다.
무희들은 묵용린 앞에 서서 천을 휘날리며 춤을 췄다. 만약 묵용린이 천을 잡으면 그 천의 주인이 상으로 은자를 받게 되어 있었다.
요즘 묵용린은 걷다가 넘어지지 않았다. 비틀거리며 주저앉다가도 땅을 짚고 엉덩이를 치켜세우며 일어나곤 했다. 다만 아직 말은 서툴렀다. 가끔 어머니와 비슷한 발음 외에는 알아들을 수 없는 말만 옹알거리는 게 전부였다.
술잔이 오가며 분위기가 무르익은 가운데, 가장 중요한 행사가 시작되었다. 깔개 위에 금빛 비단을 펼치고 각종 물건을 올려 두었다. 동시에 악사들이 연주를 멈추었고 무희들도 한쪽으로 물러났다. 별안간 조용해진 분위기에 묵용린은 어리둥절한 듯했다.
묵용린은 주변을 두리번거리다 한 무희 앞으로 다가가 어깨에 걸린 천 조각을 힘껏 잡아당겼다. 그런 묵용린이 귀여웠는지, 무희는 힘을 풀며 천을 늘어뜨렸다. 묵용린이 천을 잡고 빙글빙글 돌다 온몸이 천에 휘감겼고, 여기저기서 박장대소가 터져 나왔다.
결국 백천범이 다가가 묵용린을 풀어 주었다. 그녀는 묵용린을 금빛 비단 앞으로 데려간 후, 마음에 드는 걸 하나만 골라 보라고 설명했다.
그녀의 말을 알아들은 묵용린은 천을 내려놓고 아장아장 걸엉갔다. 금빛 비단 위에서 두리번거리며 이것도 살피고, 저것도 살피는 모습이 쉬이 결정을 내리지 못하는 모양이었다. 사람들은 묵용린이 어떤 물건을 고를지 궁금해하며 시선을 집중했다.
그러나 유독 한 사람의 시선만큼은 줄곧 백천범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늘 그러하듯 오만함이 가득한 표정이었다. 곁눈으로 시선을 알아차린 백천범은 꿋꿋이 시선을 외면했다. 자신의 낯짝도 제법 두껍다고 생각했지만 남문우에 비하면 얇은 수준이었다. 아마 남문우의 두께에 일 할도 되지 않을 터였다.
남농화의 시선은 백천범을 뚫어지게 바라보는 남문우에게 향해 있었다. 화가 치밀어 입술까지 비뚤어진 그녀가 있는 힘껏 남문우를 쳤다.
“눈알이 튀어나올 것 같거든.”
남문우는 덤덤하게 그녀를 힐끔 훑었다.
“입술이 왜 비뚤어졌지?”
남농화가 서둘러 제 입술을 가렸다.
“누가 입술이 비뚤어졌다는 거야? 아무것도 안 했는데?”
남문우가 피식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화가 나서 그런가 본데.”
남농화는 그제야 장난에 걸려들었다는 사실을 깨닫고 그를 힘껏 때렸다. 다정하게 장난을 치는 듯한 모습에 주변의 사람들이 속으로 웃음을 삼켰다. 사람들의 시선은 다시 묵용린에게 향했다.
묵용린은 붓을 집었다 금원보를 집었다 하며 갈팡질팡하고 있었다. 그러다 도무지 못 고르겠다는 듯 백천범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백천범은 어쩔 수 없이 묵용린에게 다가가 다시 한번 말해 주었다.
“린아, 제일 마음에 드는 걸 가져와. 알겠지?”
묵용린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마음에 드는 게 없다는 의미였다.
묵용린을 향한 시선들에 의아함이 담겼다. 넓게 깔린 비단 위에 물건이 이토록 많은데 정녕 하나도 마음에 들지 않는단 말인가?
남류청은 어떻게든 돌잡이를 하게 하려는 듯 묵용린에게 다가갔다.
“아가, 이곳에 있는 것 중에 마음에 드는 게 있니? 이 할미에게 알려 주렴.”
묵용린이 자그마한 몸을 돌려세우더니 두리번거리다 앞으로 향했다.
백천범이 나서려 하자 남류청이 조용히 막아섰다.
“걱정 말거라. 무얼 원하는지 봐야 하지 않겠니?”
모든 이의 시선이 묵용린의 자그마한 몸집에 고정되었다. 묵용린이 조심스레 단폐를 기어올랐다. 계단을 오르는 건 익숙지 않았기에 손발로 땅을 짚고 배를 밀어 올리며 기어가야 했다.
백천범은 당장이라도 묵용린을 데려오고 싶었지만, 남류청의 손이 그녀를 단단히 붙들고 있었다.
“잠시 기다려 보렴. 저 위에 원하는 게 있을지도 모르잖니.”
이 순간만큼은 말을 하는 이도, 음식을 먹는 이도 없었다. 다들 묵용린이 힘겹게 계단을 오르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마침내 계단을 다 오른 묵용린은 금빛 옥좌를 붙잡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내 조그마한 몸이 힘겹게 옥좌를 기어 올라가더니 앞을 향해 앉았다. 아이는 용이 조각된 팔걸이에 두 손을 올린 채 수많은 사람들을 향해 활짝 웃어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