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71화
남류청의 침전으로 향하는 남제화의 걸음이 조급했다. 그러나 아무리 황자라 해도 여제의 침전에 막무가내로 들어갈 수는 없는 법이다. 보초 두 명이 그의 앞길을 막아섰다.
그가 얼굴을 굳히고 낮게 호통쳤다.
“물러나거라!”
보초들은 서로 눈짓을 주고받다 결국 길을 내주었다.
남제화는 성큼성큼 안으로 들어갔다. 문 앞에 다다르자 시를 읊는 나지막한 목소리가 들렸다. 고개를 들어보니 백청음이 창가에 서 있었다. 훤칠한 키에 남다른 풍채를 지닌 그가 하얀 겉옷까지 걸치고 있으니, 꼭 적선謫仙(인간 세계에 쫓겨 내려온 선인, 뛰어난 시인을 비유적으로 일컫는 말)처럼 보였다.
건너편에는 머리를 풀어 헤치고 평상에 기댄 남류청이 있었다. 그녀의 시선은 백청음의 뒷모습에 고정되어 있었는데, 무한한 애정으로 따스하게 빛났다.
남제화는 자신도 모르게 얼굴이 화끈거렸다. 인기척 없이 걸어온 것도 아닌데 그들은 둘만의 세상에 빠져서 그가 온 줄도 모르는 모양이다.
결국 남제화가 목청을 가다듬고 헛기침을 했다. 그제야 백청음이 그를 바라보며 웃었다.
“마침 잘 왔구나. 새로 시를 한 수 지었는데, 한번 들어 보렴.”
“이미 문 앞에서 한참 동안 들었습니다. 훌륭합니다.”
남제화의 대답은 무성의했다.
“모황을 위해 지으신 것이지요?”
백청음이 담담히 답했다.
“그래. 경경卿卿(처에게 사용하는 애칭)을 위해 쓴 시지.”
남제화는 또 한 번 얼굴이 달아올랐다. 두 사람의 애정 행각은 그들보다 젊은 사람들보다 농염하기 짝이 없어서, 민망하기 그지없었다. 그러나 가끔은 부러워지기도 했다.
“쿨럭, 크흠, 소자 모황께 드릴 말씀이 있어 찾아왔습니다. 혹 가능하다면…….”
“그래, 어서 얘기 나누거라.”
백청음이 남류청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다정하게 말했다.
“경경, 안에서 기다리겠습니다.”
남류청이 얼굴을 붉히며 어여쁜 얼굴을 그의 팔에 기대었다.
“금방 들어갈게요.”
“…….”
남제화는 결국 몸을 돌린 채 홧홧한 얼굴을 식혀야 했다.
기품 있는 발소리는 문 닫는 소리와 함께 사라졌다. 남제화는 다시 몸을 돌려세우고 남류청에게 다가갔다. 그녀의 얼굴에서 조금 전의 온화함은 찾아볼 수 없었다.
“어찌 이리 경솔하게 구느냐. 한밤중에 모황의 침전에 뛰어들다니?”
“저는 내일이면 떠나야 합니다. 그전에 드릴 말씀이 있어 찾아왔습니다.”
“대체 무슨 일인데 그러느냐?”
“어째서 남문우를 닙닙이 근처에 보내신 겁니까?”
“내가 보낸 적 없다. 남 장군이 스스로 간 것이지.”
“좋은 마음으로 찾아가진 않았을 겁니다.”
“네가 그 애의 마음을 어찌 아느냐? 다들 닙닙이를 좋아한다. 남 장군도 닙닙이가 마음에 든 모양이지.”
“그 애에게는 농화가 있지 않습니까?”
“농화의 일방적인 마음이 아니더냐. 게다가 그 둘의 연이 닿아서 네게 좋을 게 있느냐?”
남류청이 아무렇지 않게 말했다.
“닙닙이와 잘되어야 네게는 더 좋은 일이다.”
남제화의 마음은 무겁기만 했다.
“어마마마, 닙닙이를 이만 보내 주시지요. 애당초 우리가 한 말을 믿지 않던 아이입니다. 똑똑한 아이란 말입니다. 지금은 향도 피우지 못하게 한답니다. 벌써 무언가를 알아차렸을지도 모릅니다.”
“고집이 센 아이라 그렇겠지. 향을 피우지 않아도 다 방법이 있다.”
남류청이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제아, 이 모황의 마음은 잘 알고 있지 않느냐? 그토록 오랫동안 고생한 끝에 오늘 같은 날이 왔다. 한데 모황을 실망하게 할 셈이더냐?”
“전 닙닙이를 다치게 하고 싶지 않습니다.”
“닙닙이를 다치게 하다니?”
남류청이 눈을 휘둥그레 떴다.
“닙닙이는 모황이 낳은 핏줄이다. 모황도 그 애를 끔찍이 아끼니 걱정하지 말거라. 모황이 반드시 그 애를 지켜 주마. 그 애가 다치는 일은 절대 없다.”
남제화가 침음을 흘리며 물었다.
“린아는… 어찌하실 계획이십니까?”
반짝이는 손톱을 어루만지던 남류청이 입꼬리를 올렸다.
“늑대 새끼는 거둘 수 없지. 제 아비에게 돌려보낼 것이다.”
“하지만 닙닙이가…….”
남류청은 그의 말을 가볍게 잘라냈다.
“닙닙이는 남원의 무양 공주다. 그 애는 남원에 남아야 해.”
“어마마마, 뒷일은 생각해 보셨습니까? 린아를 돌려보내면 묵용감이 닙닙이가 살아 있음을 알게 될 겁니다. 그럼 대군을 거느리고 전쟁을 하러 올 수도 있다고요.”
남류청이 입을 가리고 웃었다.
“그자가 군대를 이끌고 이곳을 친다면 모황도 닙닙이를 그에게 돌려보낼 것이다.”
그제야 남제화의 표정이 살짝 달라졌다. 그녀의 말뜻을 이해한 것이다.
“그걸 기회로 삼으시려는 것입니까?”
“묵용감도 황제가 되었으니 예전과는 달라졌겠지. 더욱더 조심스러워졌을 테니 그럴수록 정신없이 들쑤셔야 한다. 그래야 앞뒤 생각하지 않고 달려들지 않겠느냐.”
남류청이 어떤 사람인지 훤히 꿰고 있는 터라, 남제화는 더 이상 그녀를 설득할 수 없음을 깨달았다. 그녀에게는 오랜 염원이 있었다. 그가 보기엔 광기 어린 숙원에 지나지 않았지만, 그녀는 목숨이 달린 일인 양 굴었다.
“어쨌든 닙닙이는 어마마마의 친딸입니다. 부디 그 애를 해하지 말아 주십시오. 전 그 애가 산송장처럼 사는 꼴은 볼 수 없습니다.”
남류청의 안색이 눈에 띄게 굳었다.
“그게 무슨 말이더냐? 너와 닙닙이는 내가 배 아파 낳은 자식이다. 열 손가락 깨물어 안 아픈 손가락이 어디 있겠느냐. 이 모황은 누구를 편애하는 사람이 아니다. 네가 군주가 되거든 모황을 대신해 그 애를 보살펴 주거라.”
침전을 나온 남제화는 곧장 평락전으로 향했다. 궁전 앞에는 남문우가 여유로운 모습으로 앉아 있었다. 부드러운 어둠에 감싸인 그의 옆모습이 한 폭의 그림 같았지만, 이곳을 찾기엔 늦은 시간이 아닌가. 남제화의 안색은 밤하늘보다 더 어둡게 가라앉았다.
“이리 늦은 시간에 장군이 어찌 이곳에 있는가?”
고개를 돌린 남문우가 활짝 웃어 보였다.
“전하께서도 오지 않으셨습니까?”
“난 닙닙이의 오라버니니…….”
“전하, 잊으셨습니까? 제 성도 남씨입니다. 저 또한 닙닙이의 오라버니지요.”
남제화로서는 남문우의 말재간을 이길 수 없었다. 그와 설전을 벌여 기력을 소진하고 싶지 않았기에, 남제화는 곧장 방 쪽으로 시선을 옮겼다.
“닙닙이는 잠들었고?”
“제가 이곳에 있으니 잠이 들진 못했을 겁니다.”
남제화가 목소리를 낮췄다.
“대체 이곳에서 무얼 하는 것인가? 저 애한테 반하기라도 했는가?”
남문우의 입가에 묘한 웃음이 떠올랐다.
“저 애의 아들이 좋습니다.”
남제화가 황당한 얼굴로 그를 바라보았다.
“린아를 좋아한다고?”
“어린아이가 정말 대단합니다. 오랜만에 제 몸에 상처를 남긴 사람이 아닙니까.”
그 말에 남제화가 웃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어린아이가 선악을 가장 잘 구별하는 법이지. 안 그럼 어찌 남 장군만 물었겠는가?”
남문우가 입을 열려는 순간, 방 안에서 낭랑한 소리가 들려왔다.
“오라버니, 이 시간에 어쩐 일이세요?”
뒤이어 백천범이 밖으로 나왔다. 두 사내의 시선은 하얀 침의를 입은 그녀에게 쏠렸다. 그녀는 어둠 속에 떠오른 별처럼 반짝이는 눈망울로 그들을 빤히 보고 있었다.
남제화가 넉살 좋게 웃어 보였다.
“지나가는 길에 잠시 보러 왔다.”
“무슨 일이라도 있으세요?”
“내일 출궁을 하면 한동안 돌아오지 못할 듯하구나. 해서 인사차 들렀다.”
백천범이 눈을 반짝였다.
“오라버니, 저도 데려가시면 안 될까요?”
“쿨럭쿨럭…….”
남제화가 얼른 화제를 돌렸다.
“어찌 아직도 깨어 있느냐?”
“잠이 들었다가 오라버니 목소리가 들려서 잠시 나왔습니다.”
“이런, 내가 잠을 깨웠구나.”
그가 가만히 앉아 있는 남문우를 가리켰다.
“밖에 누가 있는데도 잠이 온단 말이냐?”
백천범은 남문우에게 눈길도 주지 않았다.
“왜 못 자겠어요. 궁전에는 늘 사람이 많잖아요. 돌아가면서 당직을 서기도 하고요. 익숙해졌으니 괜찮아요.”
남문우를 하인들처럼 여긴다는 뜻이 아닌가.
남제화는 슬쩍 남문우의 안색을 살폈다. 어쨌든 그는 남원의 군신이었으니까. 정작 남문우는 무덤덤한 미소를 보였다. 백천범의 무관심에 이미 익숙해진 듯했다.
“되었다. 그만 자거라. 이만 가 보마.”
남제화가 몸을 돌리며 남문우에게 시선을 주었다.
“남 장군. 같이 가도록 하지.”
남문우가 자리에서 일어나 백천범에게 말했다.
“내일 다시 올 테니, 내일 보자.”
백천범이 퉁명스러운 목소리로 대꾸했다.
“오지 않으면 참 감격스러울 텐데.”
남제화가 박장대소를 터뜨리더니 남문우를 끌고 밖으로 향했다. 밖으로 나오자마자 그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싹 가셨다. 남제화가 목소리를 낮췄다.
“저 앤 남농화가 아니라 내 친동생이네. 저 애를 넘볼 생각은 하지 않는 게 좋을 걸세.”
남문우는 천연덕스러운 얼굴로 물었다.
“전하는 남의 것을 빼앗아 본 적 있으신지요?”
“그게 무슨 말인가?”
“전 그 과정을 즐기는 사람이라서 말입니다.”
영문을 알 수 없는 말을 남긴 채, 남문우가 그대로 걸음을 옮겼다.
* * *
싱그러운 사월이 되어 봄기운이 완연했다. 동월국 곳곳에 생기가 넘쳐흘렀다.
봄바람은 분주히 온 세상에 흔적을 남겼지만, 황궁만큼은 예외였다. 어화원에 만발한 꽃과 무성한 나뭇잎이 무색하게도, 궁의 하인들은 아직도 한겨울에 놓인 듯했다. 황궁의 주인이 내뿜는 한기는 아무리 찬란하게 빛나는 햇살마저도 얼어붙게 만드는 힘이 있었다.
처마 밑에 서 있던 학평관이 나무에 앉은 새를 가만히 올려다보았다. 비취색 털에 자색의 긴 꼬리를 가진 새는 참 아름다운 모양새를 갖추고 있었다. 이윽고 날개를 펼치며 하늘로 날아가니 비취가 하늘을 가르는 듯했다.
소복자도 학평관의 옆에서 새를 지켜보았다. 이제는 빈 나뭇가지에서 시선을 거둔 소복자가 낮게 읊조렸다.
“벌써 반 시진이 다 되어 가는데 월규 고고께서 나오지 않으십니다. 그간 위 태의께서 침을 놓은 덕에 폐하의 두통이 많이 나아지지 않았습니까? 한데 오늘은 어찌 이리 심하시단 말입니까?”
학평관이 한숨을 내쉬었다.
“오늘은 세자 아기씨의 탄생일이라네. 폐하께서도 마음이 오죽하시겠는가.”
그 말에 소복자가 두 손을 모아 양쪽 소맷단을 맞댔다.
“…정말 가여우십니다.”
“누가 아니라나.”
학평관의 표정도 어둡게 가라앉아 있었다.
“그간 괜찮아 보이셨는데, 이런 날에는 역시나 무너지시는군.”
소복자는 무거운 한숨으로 답했다. 방 안에서는 월규의 목소리가 나직하게 흘러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