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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유왕비초장성 (470)화 (469/1,192)

제470화

백천범은 그 자리에 버티고 섰다.

“당신과 같이 타지 않을 거야. 부군께서 아시면 화를 내실 테니까.”

남문우가 박장대소를 터뜨렸다.

“우습군. 그 부군이란 자는 어디 있는데? 동월에 있는 그 황제? 이미 새 황후를 들이고 공주를 잊은 지 오랜데 아직도 단꿈에서 깨어나지 못하는군.”

백천범이 한숨을 내쉬며 입을 열었다.

“뭐라 하든 난 믿지 않을 것이니 불필요한 말은 하지 말도록 하지.”

남문우가 고개를 저으며 그녀를 무시했다.

“정말 바보 같은 여인이로군.”

하지만 백천범이 고집을 피우니 그도 어쩔 방법이 없었다. 어쨌든 그녀는 남원의 공주가 아닌가. 억지로 끌고 갈 수는 없기에, 그는 길가에 서서 마차를 기다렸다.

남문우로서는 이토록 막무가내인 사람이 드물었다. 그가 늘상 웃고 떠드는 허술한 모습을 보여도, 그는 경외받는 존재였다. 동월국에 군신 초왕이 있다면 그는 남원의 군신이었다.

다만 성격은 묵용감과 딴판이었다. 묵용감은 늘 냉랭하고 차가웠지만, 그는 웃는 얼굴로 필요한 자들을 처단했다. 그래서 백성들은 그를 옥면소호玉面笑虎라고 불렀다.

백옥처럼 희고 아름다운 얼굴로 늘 웃고 있는 호랑이란 뜻이었다. 사실 그의 외모는 남원에서 늘 화제를 불러일으킬 만큼 빼어났다. 새하얀 피부에 봉황의 눈을 닮은 기다란 눈, 짙은 눈썹과 깊은 눈망울까지.

더욱이 항상 머금고 있는 미소는 사람들의 호감을 불러일으켰다. 그는 황자인 남제화를 제치고 남원의 여인들이 손꼽는 가장 훌륭한 신랑감이었다.

거의 반 시진쯤 기다리고 있으니 마차 한 대가 천천히 다가왔다. 남문우가 턱을 들어 올리자 수하 한 명이 곧장 마차를 막아서더니 큰소리로 외쳤다.

“멈추거라. 남 장군님께서 마차를 쓰셔야 하니 마부를 제외한 이들은 전부 내리거라.”

마차 안에 있던 이들은 모두 네 명이었다. 부모가 아들딸을 데리고 어디론가 떠나는 모양이었다. 대여섯 살 정도 되어 보이는 막내아들은 겁에 질린 듯 어머니 곁에 딱 붙어 있었다.

남을 괴롭히는 걸 두고볼 수 없기에 백천범이 날카롭게 외쳤다.

“어떻게 이럴 수 있지? 다짜고짜 사람을 내리라고 하다니, 이렇게 허허벌판에서 내리면 저들은 어찌하라고?”

남문우가 성가시다는 듯 그녀를 힐끔 바라보며 말했다.

“정말 우습군. 다른 사람을 걱정할 여유도 있고 말이야. 저들이야 어찌 되었든, 공주의 요구를 들어주었으니 어서 가지.”

백천범이 다시 그에게 따져 물으려 했지만, 그가 짜증스럽다는 듯 그녀를 밀쳐냈다.

“그만하고 어서 가자니까.”

“감히 내게 손을 대다니, 난 공주다!”

“지금은 그저 도주범이지.”

그가 가소롭다는 듯 웃음을 흘렸다.

“타지 않으면 내가 안고 가 주지.”

남문우처럼 뻔뻔한 사람이라면 정말 그녀를 안고 갈지도 모른다. 백천범은 동정 어린 눈으로 네 사람을 바라보다 하는 수 없이 묵용린을 안고 마차에 올랐다.

성을 나올 때와는 달리, 마부는 남 장군의 명에 따라 빠르게 앞으로 질주했다. 말을 때리는 맑은 채찍 소리도 끊임없이 이어졌다. 마차가 쉴 새 없이 요동치니 오장육부가 다 뒤집히는 듯했다. 더는 참을 수가 없었던 백천범이 소리를 질렀다.

“멈춰! 토할 것 같아!”

백천범이 뭐라고 하든 남문우의 재촉은 멈추지 않았다. 마부는 있는 힘껏 마차를 몰았고, 결국 백천범은 마차 안에서 속을 게워 내고 말았다. 그녀는 분노가 치밀었다. 살다 살다 이렇게 마음에 안 드는 자는 처음이었다. 가능하다면 모황에게 곤장을 내리라고 청하고 싶었다.

백천범이 속을 완전히 게워 냈을 때쯤 마차는 궁에 도달했다.

남류청은 걱정스러운 얼굴로 대전 안을 서성이고 있었다. 끌려온 백천범을 보자마자 그녀는 곧바로 화를 내며 호통을 쳤다. 군주가 화를 내니 대전 안에 있던 이들이 전부 무릎을 꿇었다. 남문우만이 꼿꼿이 서서 오만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백천범은 태연한 표정으로 남류청의 화가 가라앉기를 기다렸다. 한참 후, 주위가 조용해지자 백천범이 말했다.

“먹을 것 좀 있을까요? 배가 고파요.”

남류청이 황당함을 감추지 못하는 반면, 남문우는 피식 웃고 말았다.

“오는 길에 속을 게워 내서 배가 고픈가 봅니다.”

그의 말에 남류청이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황급히 물었다.

“닙닙아, 어디가 불편했느냐? 어찌 속을 게워 냈어?”

백천범이 언짢은 표정으로 남문우를 가리켰다.

“저자에게 물어보십시오!”

그녀가 고자질을 하자 남문우는 옷자락을 걷어 다리에 생긴 자국을 보여 주었다.

“폐하, 신도 무양 공주와 아기씨를 모셔오기 위해 대가를 치러야 했습니다.”

남류청이 의아한 기색을 내비쳤다.

“무엇에 물린 것인가?”

둥근 모양으로 붉게 흔적이 남긴 했지만 위아래 총 네 개의 이빨 자국이 전부였다.

남문우가 묵용린을 가리켰다.

“폐하의 외손자께서 문 자국입니다.”

남류청은 그만 웃고 말았다. 이렇게 작은 아이를 어찌 책망할 수 있을까? 다만 남문우는 그녀가 가장 아끼는 신하이니 잘 달래 주는 수밖에 없었다.

“남 장군, 무양 공주와 린아를 무사히 데려오느라 고생 많았네. 상으로 옥구슬 백 알과 화관을 내리지. 아, 짐의 어용 연고도 한 병 보낼 테니 상처에 바르게. 흔적도 없이 금방 나을걸세.”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남문우는 무릎 한쪽을 꿇고 감사 인사를 올린 뒤, 다시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가 백천범을 향해 눈썹을 꿈틀거리며 잘난 체를 해 보였다.

백천범은 이를 꽉 깨물었다. 어찌나 밉살맞은지, 당장 달려가 때려주고 싶어 손이 근질거렸다.

한바탕 혼이 난 걸로 이 일은 마무리되는 듯싶었다. 백천범은 또다시 평락전으로 돌아와 무양 공주로 지내야 했다. 그녀는 손가락을 펼쳐 날짜를 헤아려 보았다. 약속했던 보름이 되려면 반이나 더 남아 있었다.

그러나 보름이 지난 후에 이곳을 떠날 수 있을까? 하늘만 알고 있을 일이었다. 그러니 어떻게든 기회를 틈타 이곳을 빠져나가야 했다. 한 번으로 안 되면 두 번, 두 번으로도 안 되면 세 번에 걸쳐 도망치면 된다. 언젠간 이곳을 벗어날 수 있지 않겠는가?

백천범은 묵용린을 바닥에 내려놓았다. 묵용린만 한 개월 수의 아이들은 한창 걷는 걸 좋아할 때였다. 과연 묵용린은 가구를 잡고 방 안을 이리저리 돌아다녔다. 가구 사이가 멀 때는 철퍼덕 엎드려 기어가더니 가구를 짚고 일어나 계속 앞으로 걸어 나갔다.

백천범은 푹신한 의자에 반쯤 기댄 채 묵용린을 지켜보았다. 그러나 그녀의 눈은 또다른 고민에 잠겨 들고 있었다.

여옥이 모퉁이에 쪼그려 앉더니 향기로운 향을 피웠다. 동월국에 있을 때 백천범도 향을 즐겨 피웠지만 대부분 계화꽃 향이나 연꽃 향, 단향목 향이 전부였다. 남원에서는 매일 향 종류를 바꾸는 듯했다. 종류가 많은 건 둘째 치고 무슨 향기인지도 알아맞히기 어려운 향이 대부분이었다.

어쨌든 남원에는 꽃이 많으니 종류가 다양한 것도 당연했다. 듣자니 주변국에서도 남원의 향을 선호해 많이들 구입한다고 했다.

코끝을 스치는 향을 맡던 중, 그녀는 갑작스레 중요한 일을 잊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그녀는 무의식적으로 허리춤에 찬 장신구를 빙빙 꼬았다.

한참 침묵에 잠겨 있던 그녀가 여옥을 바라보았다.

“향 좀 치워 줄래?”

여옥이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

“이 향이 싫으십니까? 그럼 다른 향으로 바꿔 드릴까요?”

“아니, 그럴 필요 없어.”

백천범의 시선이 묵용린에게 향했다. 어느새 철퍼덕 넘어진 묵용린의 모습에 그녀는 절로 웃음이 났다.

“난 향을 잘 쓰지 않아서 그래. 앞으로는 방에 향을 꽂지 않아도 돼.”

살짝 놀란 듯했지만 여옥은 재빨리 구리 향로를 방에서 치웠다.

밖에서 여옥이 남 장군이 왔음을 알리는 소리가 들렸다. 곧이어 남문우가 들어왔지만, 백천범은 예도 갖추지 않고 말했다.

“이곳은 어쩐 일이지?”

남문우는 들은 척도 하지 않고 묵용린만 빤히 바라보았다. 걷다가 넘어지기를 반복하는 묵용린의 모습에 절로 웃음이 흘러나왔다. 그는 조용히 걸어가 가구를 잡은 아이의 손을 슬쩍 뗐다. 묵용린의 통통한 몸이 앞으로 기울더니 철퍼덕 넘어졌다. 이미 넘어진 경험이 많았던 묵용린은 고개를 치켜들고 자리에서 힘껏 일어났다.

바닥에 쪼그려 앉은 남문우가 묵용린을 지켜보며 시시덕거렸다. 그때, 누군가 그의 엉덩이를 힘껏 걷어찼다. 그는 보기 좋게 앞으로 고꾸라졌다. 묵용린이 놓치지 않고 그의 얼굴에 털썩 주저앉더니 침을 흘리며 깔깔 웃었다.

바닥에 대자로 뻗어 있는 남문우를 바라보며 백천범이 박장대소를 터뜨렸다.

한참이 지나서야 남문우는 백천범 모자에게 당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여주와 여옥은 휘둥그레진 눈으로 이 광경을 빠라보았다. 지금껏 남 장군에게 무례하게 구는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다. 여제마저도 그의 체면을 세워 주는데 무양 공주와 왕자 아기씨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있었다.

묵용린은 남문우의 머리를 타고 등까지 기어가더니 그의 등을 꾹 짓눌렀다. 마치 그를 장난감처럼 여기는 듯 즐거워하고 있었다. 백천범은 묵용린을 말리기는커녕 더욱더 신나게 웃었다.

남문우는 부아가 치밀었다. 서둘러 묵용린을 떨어뜨리려고 하는데, 문득 그의 시선이 백천범의 얼굴에 가 닿았다. 순간 남문우의 시간이 멈춘 듯했다. 반짝이는 그녀의 눈망울은 꼭 별이 담긴 듯 총총 빛났고, 웃는 모습은 더없이 눈부셨다. 그는 한동안 굳은 채로 꼼짝도 하지 않았다.

한바탕 혼쭐을 내준 덕분에 백천범도 분이 좀 풀렸다. 그녀가 묵용린을 안아 들며 말했다.

“미안하게 됐어, 남 장군. 방금 일은 일부러 그랬어.”

몸을 일으킨 남문우가 먼지를 털어내며 옅은 미소를 지었다.

“일부러 그런 건 알아. 그렇게 세게 걷어찰 줄은 몰랐지만. 보기엔 약해 보이는데 힘이 장사군. 수련이라도 한 건가?”

백천범이 일부러 뜸을 들이며 말했다.

“그건 알려 줄 수 없어. 여긴 무슨 일로 온 거야?”

그녀의 말투에는 동월국의 어조가 배어났다. 남문우의 눈빛이 잠시 반짝였다.

“싸우다 보면 정이 든다는 말도 있으니까, 한번 찾아와 봤지.”

잠시 침묵하던 그는 내키는 대로 말을 뱉었다.

“우리 친구 하자.”

백천범이 코웃음을 쳤다.

“날 잡아들인 사람과 친구를 하자고?”

“친구가 아니면 적이 되는 거 아닌가.”

남문우가 웃으며 말했다.

“나와 적이 되는 건 좋은 선택은 아닐 텐데.”

잠시 침묵하던 백천범이 불쑥 물었다.

“내가 길옆에 숨어 있다는 건 어떻게 알았어?”

남문우가 곤란한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그건 알려 줄 수 없어.”

“하, 그래 놓고 친구가 되자고?”

“너도 수련을 했는지 안 했는지 말 안 해 줬잖아. 비긴 거나 마찬가지니까, 친구 하자.”

“친구는 얼어 죽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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