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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유왕비초장성 (469)화 (468/1,192)

제469화

백천범은 정말 울고 싶은 심정이었다. 모자는 서로를 빤히 바라보았지만 뾰족한 수가 없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반대쪽에서 오는 마차를 마주쳤다. 마부의 말처럼 그 마차 역시 느리긴 피차일반이었다. 그래도 그녀가 탄 마차보다는 빨랐다. 정말 이대로라면 발각되는 건 시간문제였다.

수목이 울창한 숲이 그녀의 시야에 들어왔다. 이곳은 숲의 모습도 동월국과는 달랐다. 흐드러지게 핀 꽃과 풀, 나무들은 무한한 생명력을 자랑하듯 온 천지를 뒤덮었다. 그 푸르른 녹음은 그녀마저도 덥석 집어삼킬 듯했다.

머리 위로 떠오르는 태양이 산 아래 부락을 이룬 가옥들의 지붕을 눈부시게 빛냈다. 아무리 허름한 집이라 해도 뾰족한 금빛 지붕이 갖춰져 있었다. 그녀는 놀란 얼굴로 가옥들을 지켜보았다.

희미하게 피어오르는 연기에 마음이 동요된 그녀가 마부에게 말했다.

“아저씨, 저기 저 마을까지만 데려다주세요.”

마부가 고개를 돌려 그녀를 바라보았다.

“급히 가야 한다더니?”

“이곳에 친척이 살고 계시거든요. 생각난 김에 잠시 보러 가려고요.”

마부는 군말 없이 고삐를 돌려 언덕 아래로 향했고 마을 입구에 그녀를 내려 주었다. 돈을 지불한 백천범은 묵용린을 품에 안은 채 보따리를 짊어지고 마을로 들어갔다.

그리 크지 않은 마을이니 서로간의 소식이 빨랐다. 손님이 찾아올 집이 없으니, 모두가 그녀를 호기심 어린 눈으로 지켜보았다.

백천범은 다가온 주민들에게 말을 살 수 있냐고 물었다. 정작 그들이 데려온 말들은 크기도 작고 가격도 비싸서 살 게 못 되었다. 그녀는 다음 마을로 가는 길을 물었다. 아무래도 이번 마을은 그냥 지나쳐야 할 듯했다.

그녀는 좁은 산길을 따라 걷기 시작했다. 한참을 걷다 뒤를 돌아보니 주민들이 나무 아래에 모여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는 웃으며 손을 흔들다 천천히 나무 뒤에 몸을 숨겼다. 잠시 뒤, 슬쩍 몸을 내밀어 보니 주민들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조용히 주변을 둘러본 그녀는 다음 마을이 아닌 왼쪽 산길을 따라 깊은 산속으로 향했다.

사람들의 왕래가 잦은지, 왼쪽 오른쪽 할 것 없이 굽이굽이 길이 많이 나 있었다. 빽빽한 숲속을 가로지르던 백천범은 좋은 터를 발견했다. 언덕을 등진 낮은 평지에 나무 그늘이 드리워져 쉬기에 적당했다.

그녀는 풀이 뒤덮인 곳에 자리를 잡고 등을 기대앉았다. 광활한 경치가 곧장 시야에 담겼다. 마차를 타고 왔던 도로도 훤히 내다보였다.

그녀는 찐빵을 잘게 쪼개 묵용린에게 먹여 주고 자신은 주먹밥을 먹었다. 남원의 쌀은 맛이 좋았지만 식으면 조금 딱딱해졌다. 그대로 묵용린에게 먹였다간 탈이 날 수도 있었기에 일부러 찐빵을 챙겨 왔다. 이제는 모유가 많이 나오지 않아 아이를 배불리 먹일 수가 없었다.

다행히 묵용린은 주는 대로 신나게 받아먹었다. 기분이 정말 좋을 땐 그녀에게 침방울을 뱉어 가며 흥분을 가라앉히지 못했다.

그녀는 그럴 때마다 엄하게 가르쳤다.

“아직도 침을 뱉으면 어떡해. 더럽잖아. 앞으로는 이러면 안 돼.”

그러나 묵용린은 멈추지 않았다. 백천범은 소매로 아이의 입가를 닦아 주고는 통통한 볼을 한 차례 꼬집었다.

“말 안 들으면 혼날 줄 알아!”

묵용린은 입을 활짝 벌리며 웃더니 그녀의 팔을 잡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이가 나긋한 목소리로 그녀를 불렀다.

“음마.”

그 조그마한 입술이 달싹이며 내뱉은 말에 백천범은 이루 표현할 수 없는 행복을 느꼈다. 그녀가 아이의 얼굴에 입을 맞추며 방긋 웃었다.

“착한 우리 린아, 말도 잘 듣지. 어머니가 아버지한테 꼭 데려다줄게. 우리 린아 이렇게 큰 거 보시면 얼마나 기뻐하실까.”

묵용린이 그녀의 목을 끌어안고 애교를 부렸다. 백천범은 아이를 힘껏 안아 주었다. 그때, 아이가 고개를 돌리더니 산 아래쪽을 바라보았다. 백천범의 시선도 아이와 같은 곳을 향했다. 말을 탄 한 무리의 병사들이 먼지를 휘날리며 마을을 향해 달려오고 있었다.

그녀를 찾으러 온 병사들이었다. 역시, 마차에서 내리지 않았다면 붙잡혔을 터였다. 병사들이 곧바로 마을에 들이닥친 걸 보니 성으로 돌아가던 마부가 그녀가 내린 위치를 털어놓은 듯했다.

병사의 수는 대략 열 몇 명 정도로, 그리 많지 않았다. 병사들을 이끄는 사내는 풍채가 좋고 머리에 금관을 쓰고 있었다. 끝이 뾰족한 금관은 꼭 마을의 지붕을 축소해 놓은 것 같았다.

그녀는 미동도 하지 않고 조용히 기다렸다. 얼마 지나지 않아 병사들이 산길을 따라 다음 마을로 향했다. 그녀의 예상대로였다.

다음 마을에서 그녀를 찾지 못하면 그곳을 이 잡듯 뒤질 테니, 그녀는 보란 듯이 산을 내려가면 그만이다. 길에서 마차를 만나면 잡아타고 유유히 이곳을 뜰 생각이었다.

그녀는 묵용린을 몸에 잘 동여매고 보따리를 짊어진 채 다른 방향으로 내려갔다. 얼마 지나지 않아 도로가 나왔다. 그녀는 걸음을 재촉하면서 끊임없이 주변을 살폈다. 어서 마차가 나타나야 그녀의 계획이 순조롭게 흘러갈 수 있었다.

보따리에 아이까지 안고 있으니 좀처럼 속도가 나진 않았지만, 그녀의 표정은 의기양양했다. 지금쯤 병사들은 두 마을을 헤매고 있으리라. 그동안 그녀는 읍내까지만 가면 되기에, 자신감이 솟구쳤다.

그때, 희미하게 말발굽 소리가 들려왔다. 그녀는 급히 나무 뒤로 숨으며 몸을 낮춰 언덕을 내려갔다. 수풀 사이에 웅크리고 있으니 말발굽 소리가 점점 크게 들려왔다. 그녀는 부드러운 흙이 깔린 바닥만 바라보며 말발굽 소리가 멀어지기만을 기다렸다.

다음 마을로 떠난 무리와는 다른 이들일 테지. 아무래도 모황은 그녀를 제대로 붙잡을 심산인 듯, 모든 병력을 동원한 모양이었다.

조용히 몸을 일으키려고 하는데, 또다시 말발굽 소리가 가까워지기 시작했다. 그녀는 곧장 몸을 숙이고 묵용린에게 조용히 하라는 눈짓을 보냈다. 묵용린은 통통한 손으로 흙을 한 줌 집더니 그녀를 향해 미소를 지었다.

이윽고 말발굽 소리는 그녀의 근처에서 멈췄다. 무슨 일인지 말에서 사람들이 우르르 내리는 소리도 이어졌다. 그녀는 마음이 조급해지기 시작했다. 왜 이곳에서 내린단 말인가? 설마 그녀를 발견한 것인가?

하지만 그녀를 발견했다면 곧장 달려와 잡으면 될 일이었다. 무엇 하러 주변을 수색하듯 사방으로 흩어진단 말인가?

잠시 뒤, 발걸음이 뿔뿔이 흩어지는 소리가 났다. 그녀는 여전히 고개를 들 수 없었다. 그러나 힐끔거리며 본 시야에서는 묵용린이 고개를 들고 누군가를 향해 웃고 있었다.

이윽고 그녀의 시야 안으로 회색 신발이 불쑥 비집고 들어왔다. 시선을 조금 위로 올려보니 청색 옷자락이 보였다. 금색으로 테를 두르고 꽃무늬를 수놓은 옷이었다.

그녀는 꽃무늬 옷자락만 바라보며 고집스레 시선을 유지했다. 그자는 백천범이 아무런 반응이 없는 게 퍽 기분이 나빴는지 먼저 허리를 숙였다. 이윽고 웃을 듯 말 듯 한 눈이 그녀를 향했다.

백천범은 그 눈을 본 적 있었다. 어젯밤 연회에서 무례할 정도로 그녀를 빤히 바라보던 눈이었다. 몇 차례나 시선이 마주쳤지만 그때마다 그자는 시선을 피하기는커녕, 뻔뻔하게 웃었다.

그자의 이름은 남문우藍文宇였다. 백천범도 그자의 이름만큼은 기억하고 있었다. 되바라진 그의 태도 때문이 아니었다. 묵용감이 위지문우라는 자와 죽마고우였다는 말을 한 적 있었기 때문이다.

태자와 황보주아, 묵용감이 했던 이야기에서 스치듯 나온 인물이지만, 그녀의 뇌리에 똑똑히 남아 있었다. 낯선 곳에 있으니 묵용감과 관련된 일은 아주 작은 것이라도 크게 다가왔다.

하지만 이자는… 문우라는 이름에 걸맞지 않게 점잖기는커녕 불량배처럼 느껴졌다.

곧장 자신을 붙들 거라는 그녀의 예상과는 달리, 남문우는 자리에 쪼그려 앉았다. 그러더니 재미있는 걸 찾은 어린아이처럼 그녀를 빤히 보는 게 아닌가. 병사들이 그녀를 찾든 말든 그는 그녀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문득 백천범은 또 다른 기회를 잡았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눈앞의 남자가 망나니처럼 보이긴 해도, 자신의 처지에 동정심을 가질 수도 있지 않는가?

그녀는 입을 벙긋거리며 부디 자신을 못 본 척 보내 달라고 청했다.

그러나 남문우는 의미 모를 미소만 보일 뿐이었다. 그는 여전히 그녀를 뚫어지게 바라보고만 있었다.

이상함을 느낀 그녀가 그제야 그의 시선을 따라 고개를 숙였다. 옷 앞섶이 다 벌어져 새하얀 피부가 훤히 드러나 있었다.

백천범은 솟구치는 분노를 느꼈다. 이제 보니 뻔뻔할 뿐만 아니라 호색가가 따로 없었다. 당장이라도 주먹을 날리고 싶었지만, 상황이 상황인 만큼 조용히 옷매무새를 가다듬는 수밖에 없었다.

남문우는 볼만한 구경이 끝나 아쉽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리곤 별안간 손을 뻗어 그녀를 들어 올렸다. 깜짝 놀란 백천범이 본능적으로 소리쳤다.

“린아, 도망쳐!”

그 순간 그녀는 후회에 사로잡혔다. 바닥이 너무나도 거칠었다. 아이가 이런 바닥에서 기었다간 온몸에 상처가 날 게 뻔했다. 다행히 묵용린은 도망치지 않았고 남문우의 옷자락을 부여잡으며 일어났다. 뒤이어 입을 벌려 다리를 힘껏 깨물기 시작했다.

이가 네 개밖에 나지 않았지만 무는 힘이 제법 아팠다. 꼭 어린 짐승이 깨무는 것 같았다.

남문우는 다른 쪽 손으로 묵용린을 들어 올리려 했지만, 묵용린은 쉬이 떨어지지 않았다.

한편 그에게 옷깃을 붙잡힌 백천범은 목이 졸린 탓에 신음만 흘릴 뿐이었다. 그 소리를 들은 묵용린은 더더욱 세게 남문우의 다리를 물었다.

두 모자의 행태에 남문우는 어처구니가 없었다. 마침내 그가 묵용린을 끌어올렸다. 아이는 울기는커녕 그의 얼굴을 향해 손을 휘둘렀다. 퍽 소리와 함께 남문우가 눈을 질끈 감았다. 별안간 따가운 통증과 이물감에 눈이 타는 듯했다. 그가 서둘러 소리쳤다.

“여기 있다! 다들 이리 오거라!”

사병들이 재빨리 뛰어와 백천범과 묵용린을 붙잡았다. 한 사병이 눈을 뜨지 못하고 있는 남문우를 보고 물병을 꺼내 그를 도와주었다.

백천범은 사병이 데려간 묵용린을 뺏어와 품에 안았다. 그리곤 꾀죄죄한 얼굴에 힘껏 입을 맞췄다.

“잘했어, 우리 아들.”

그녀 역시 묵용린이 남문우에게 흙을 던질 줄은 몰랐다.

눈을 씻어 낸 남문우가 실소를 흘렸다. 그가 수건으로 얼굴을 닦으며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 어미에 그 자식이라더니, 본 장군이 너희를 얕보았군. 가자, 무양 공주. 폐하께서 기다리신다.”

백천범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마차가 없는데 어떻게 간단 말인가?”

남문우가 자신의 말을 토닥이며 말했다.

“너희의 꼴이 더럽지만, 본 장군이 데리고 가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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