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68화
사흘 후, 가족 연회가 열렸다. 백천범은 드디어 명성이 자자한 부마 백청음柏青吟을 만날 수 있었다. 역시 들은대로 품위가 넘치고 외모에 기품이 있었다. 세월의 흔적도 거의 느낄 수 없어 남제화의 형 정도로 보였다. 그러나 여제보다 여덟 살이 많다고 하니 보이는 것과 달리 나이가 꽤 많을 터였다.
가족 연회에는 종실 황족들도 함께했다. 여제는 그들에게 일일이 백천범을 소개했다. 정작 백천범은 한 명도 제대로 기억할 수 없었다. 남자든 여자든 금관을 쓰고 화려한 옷으로 치장한 탓에 구분하기 어려웠다. 더욱이 다들 백천범의 곁으로 몰려드니, 주변이 흐드러지게 핀 꽃밭처럼 느껴졌다. 시선을 조금만 돌려도 화려한 무늬에 눈이 어질어질했다.
남제화가 그녀 대신 길을 터주며 다른 이들을 막아섰다.
“조급해하지 마십시오. 이제 막 돌아왔으니 가까워질 기회는 많을 겁니다. 이러다 무양 공주가 놀라겠습니다.”
남원의 연회 상은 동월국과 조금 달랐다. 기다란 식탁 위에는 새하얀 천이 깔려 있었고, 그릇은 동그랗지 않고 제각각 모양이 다양했다. 접시에는 놓인 꽃도 다채로웠다. 설마 꽃도 먹는단 말인가? 그녀가 의아해하는 눈으로 꽃을 살폈다.
그녀의 표정을 보고 남제화가 설명했다.
“어떤 꽃은 먹기도 하고 어떤 건 미관상 꾸며 놓은 것이지. 자세히 보면 분별할 수 있다.”
백천범은 노란색 꽃을 집어 한 입 베어 물었다. 부드럽고 달콤한 맛이 입안에 가득했다. 그녀는 신이 난 얼굴로 남제화에게 꽃으로 만드는 요리법을 물었다. 나중에 임안성으로 돌아가면 기홍에게 알려 줄 생각이었다. 꽃으로 만드는 요리라면 기홍도 좋아하지 않겠는가.
노래 또한 동월국과는 달랐다. 동월국의 음악은 은은하고 간드러지는 운율이 있다면, 남원은 밝고 경쾌한 가락이 흥을 돋웠다.
춤도 큰 차이가 있었다. 동월국 무희들은 소맷자락이 넓고 찰랑거리는 옷을 입은 채 드러날 듯 말 듯 한 춤사위를 중시했다. 반면 남원의 무희들은 굴곡이 훤히 드러나는 딱 붙는 치마를 입고 가냘픈 허리를 훤히 드러낸 채 요염한 춤사위를 선보였다. 역동적이고 생기 넘치는 자태에 모두들 시선을 빼앗기곤 했다.
무희들은 손님들에게도 열성적으로 춤을 권했다. 나이가 지긋한 손님들은 팔다리가 시큰할 법도 한데 제법 유연하게 춤을 췄다. 신나게 머리를 흔들기도 하고 입을 헤벌쭉 벌려 웃기도 했다. 백천범은 휘둥그레진 눈으로 그 광경을 지켜보다 조용히 혀를 내둘렀다. 정말 자유분방한 모습이 아닐 수 없었다.
백천범이 오늘의 주인공인 만큼, 무희들은 그녀에게도 춤을 권했다. 그녀는 당당하게 묵용린을 등에 업고 무대에 올라 무희들의 춤 동작을 하나하나 따라 했다. 묵용린은 신이 났는지 끊임없이 희한한 소리를 내뱉으며 손발을 휘둘렀다. 백천범은 그런 묵용린의 모습을 보며 더욱더 즐겁게 춤을 췄고, 모자는 뜨거운 관심을 받으며 사람들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그중에서도 한 사람의 시선이 가장 뜨거웠다. 마치 탐구라도 하듯 그녀를 유심히 살피는 시선이었다.
옆에 있던 남농화가 불쾌한 어조로 그의 시선을 가렸다.
“뭘 그렇게 뚫어져라 보는 거야. 아이까지 낳은 여인인데.”
그가 눈썹을 치켜세우며 웃었다.
“아이가 귀엽잖아.”
남농화가 살짝 놀란 얼굴로 말했다.
“아이를 보고 있었구나. 내가 뭐랬어. 무양 공주는 별 볼 일 없다고 했지? 눈은 멀뚱히 크기만 하고 콧대는 높은데 콧구멍이 하늘로 솟아 있잖아. 저 입은 또 어떻고, 꼭 원숭이 같아.”
사내가 의아하다는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지금 네 얘기 하는 거야?”
“너!”
남농화가 꽃 한 송이를 그에게 집어 던지며 화를 냈다.
“두고 봐! 네 코를 납작하게 해 줄 테니까.”
사내가 시시덕거렸다.
“입만 살아서는. 참신한 표현 좀 써 봐. 매번 똑같이 말하는 거 지겹지도 않니?”
남농화는 화가 나다 못해 얼굴까지 붉게 물들었다.
“한 번만 더 이러면 너한테 시집 안 갈 거야.”
“네가 시집오겠다고 울고불고 난리 친 거잖아. 난 아직 대답 안 했다.”
남농화는 그의 말이라면 껌뻑 죽는 시늉도 할 수 있었지만, 방금 그의 말은 참아 넘길 수 없었다. 그녀는 곧장 몸을 돌려세우고 자리를 옮겼다.
그녀는 입이 좀 큰 것 말고는 제법 예쁜 외모였다. 더욱이 공주라는 신분 때문에 자리를 옮겨 앉자마자 곧장 두 사내가 그녀를 에워쌌다. 그녀는 기세등등한 얼굴로 아까의 사내를 바라보았지만, 그의 시선은 여전히 백천범에게 머물러 있었다. 그녀는 이를 꽉 깨물고 겨우 화를 억눌렀다.
연회는 한밤중까지 이어졌다. 분위기는 점점 무르익었고 대부분의 손님이 술을 마셨다. 연회가 끝났을 땐 모두의 얼굴이 붉게 물들어 있었다.
남원의 술은 동월국처럼 도수가 높지 않았다. 대신 과실즙처럼 달콤하면서도 깔끔한 맛이 일품이었다. 백천범도 술을 제법 많이 마셨지만 묵용린을 잘 업고 돌아갔다. 묵용린이 통통한 손을 뻗어 그녀의 얼굴을 감싸자, 모자는 서로를 바라보며 바보처럼 헤벌쭉 웃었다.
조금 어지러웠던 그녀는 여주와 여옥의 부축을 받으며 처소로 돌아갔다. 대충 씻고 난 뒤 묵용린과 함께 침대에 누운 그녀는 두 사람에게 일찍 깨우지 말라고 분부했다. 눈이 저절로 떠질 때까지 푹 자고 싶다는 이유였다.
여주와 여옥은 웃으며 그리하겠다고 답했다. 취기가 오른 모습을 보니 어차피 깨워도 일어나지 않을 게 분명했다. 며칠 동안 그녀를 가까이에서 지켜본 두 사람은 무양 공주의 자유분방한 성격을 어느 정도 파악하고 있었다.
이튿날, 진시가 되었는데도 백천범은 일어날 생각을 하지 않았다. 여주와 여옥이 몇 차례나 침대 앞까지 다가와 인기척을 확인했지만, 아무런 소리도 나지 않았다. 혹여나 공주의 숙면을 방해할까 싶어 두 사람은 조용히 문 앞만 지켰다.
여주가 입을 가리고 조용히 말했다.
“정말 잘 주무신다.”
여옥은 언니보다 눈치가 빨랐다. 그녀가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공주께서 아직 주무신다 해도 아기씨는 지금쯤 일어나시는데……. 오늘은 함께 늦잠을 주무시는 걸까?”
그녀는 조용히 방 안으로 들어갔다. 공작무늬가 새겨진 장막을 슬쩍 걷고 안을 들여다보니 이불 가운데가 불룩 튀어나와 있다. 아무래도 모자는 아직 단잠에 빠진 모양이었다. 그녀가 목을 좀 더 길게 뺐다. 묵용린이 깼는지 확인해 볼 생각이었다.
슬그머니 이불을 걷어 보니 안이 텅 비어 있었다. 심장이 쿵 내려앉은 그녀는 이불을 완전히 젖혔다. 이불 밑에는 뭉친 옷가지가 동그랗게 모양이 잡혀 있었다. 그녀가 기겁하며 소리쳤다.
“폐하께 보고해야 해. 무양 공주와 아기씨가 사라지셨어!”
여주도 놀라긴 마찬가지였다. 그녀는 상황을 확인해 볼 겨를도 없이 밖으로 달려갔고, 얼마 지나지 않아 남류청과 남제화가 도착했다. 침대를 바라본 남류청은 안색이 어두워졌지만 남제화는 웃음을 터뜨리며 코를 만지작거렸다. 그가 흥미롭다는 듯 말했다.
“어마마마께서 여우를 낳으신 것 아닙니까? 어젯밤엔 그렇게 즐겁게 놀더니, 이렇게 인사도 없이 떠나다니요.”
남류청이 그를 향해 눈을 부릅떴다.
“네 누이가 사라졌는데 웃음이 나오느냐? 어서 찾거라!”
농담을 하긴 했지만, 남제화도 조금은 걱정이 되었다. 백천범은 남원에 대해 아는 게 거의 없었다. 먼 곳에라도 가게 된다면 말도 통하지 않을 터였다. 도성인 이곳 납란納蘭에서는 많은 이들이 표준어를 할 수 있으니 소통에 별문제가 없었지만, 외곽으로 가면 사정이 달라진다.
그래도 아이를 데리고 있으니 멀리 가진 못했으리라. 그는 당장 병사를 불러 모아 일부는 성안을, 일부는 성 밖 교외를 수색하게 했다.
* * *
백천범은 보름간 있어 달라는 요구를 수락하긴 했지만, 마냥 어리숙하게 기다리고 싶진 않았다. 하루라도 빨리 묵용감의 곁으로 돌아가야만 했다.
남원 사람들도, 어머니와 오라버니도 좋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녀가 묵용감의 부인이라는 사실이었다. 두 사람은 정식으로 혼사를 치른 부부였다. 그녀의 지아비야말로 그녀와 가장 가까운 가족이었다.
그녀는 남류청이 서신을 보내지 않았단 사실을 몰랐지만, 그것만 믿고 기다릴 수 없었다. 태자조차 그녀에게 손을 쓰는 마당에, 갑작스레 나타난 어머니와 오라버니를 어찌 믿을 수 있을까?
게다가 그녀의 지아비는 동월국 황제였고 그녀 곁엔 황자가 있었다. 누군가 그녀의 신분을 노리고 해를 가할 수도 있으니, 미리 대비를 해야만 했다.
만약 그녀의 어머니가 두 사람을 이용해 묵용감을 협박한다면, 어찌한단 말인가? 예전에는 묵용감이 늘 옆에 있었으니 고민해 본 적도 없는 문제였다. 그러나 지금은 두 사람을 지켜주던 묵용감이 없으니 믿을 건 오직 자신뿐이었다. 그녀는 더더욱 많은 일들을 염두하고, 철저히 대비해야 했다.
그래서 결국 도망치기로 결심했다. 그녀는 며칠간 궁을 돌아다니며 도망칠 경로를 정해 두었다. 비록 궁을 나가 본 적은 없지만 남제화와 여주, 여옥이 이야기를 나눌 때 성안에서 벌어지는 일을 엿들었고 대략적인 상황을 추측했다.
준비가 덜 되긴 했지만 흔치 않은 기회였다. 밤늦게 연회가 끝난 뒤, 그녀는 평락궁으로 들자마자 침대를 꾸며놓고 곧장 밖으로 나왔다. 연회의 분위기가 가라앉지 않은 혼란을 틈타, 무사히 궁 밖으로 나올 수 있었다.
문제는 밖으로 나와서부터였다. 성문이 잠겨 있었다. 그녀는 성문에서 가장 가까운 객잔을 찾아 잠시 쉬었다가 날이 밝기도 전에 마차를 빌려 성문 앞에서 기다렸다. 그녀는 솟아오르는 붉은 태양을 마주하며 동쪽으로, 그녀를 기다리는 지아비의 품으로 돌아갈 것이다.
아직 궁 안의 사람들은 깊은 잠에 빠져 있을 터이니, 그녀가 빠져나간 걸 눈치채지 못했으리라. 그녀는 제한된 시간 안에 최대한 멀리 떠나야 했다.
백천범은 풍채가 남다른 준마를 골랐다. 이런 말이라면 초왕이 있는 곳까지 한달음에 달려갈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말은 그녀를 놀리기라도 하듯, 여유롭기 짝이 없었다. 차라리 그녀가 달리는 게 더 빠를 성 싶었다. 이대로 가다간 몇 번이든 붙잡히고도 남으리라.
참다못한 백천범이 마부에게 말을 걸었다.
“어르신, 죄송하지만 채찍 좀 쓰시면 안 될까요? 제가 정말 급히 가야 해서 말이에요!”
마부는 까무잡잡한 얼굴에 하얀 이의 대조가 두드러진 중년인이었다. 그가 고개도 돌리지 않고 말했다.
“재촉하지 마시오. 이미 빨리 가고 있으니까.”
백천범이 가슴을 쿵쿵 치며 고개를 저었다.
“이게 어딜 봐서 빠르다는 거예요? 좀 빨리 달리게 해 주세요. 정말 급해서 그래요!”
그제야 고개를 돌린 마부가 불쾌한 기색을 보였다.
“외지인이오? 내 오래 마차를 끌고 다녔지만 느린 걸 싫어하는 사람은 한 명도 못 봤다오. 그리 빨리 가고 싶다면 직접 몰고 가든가. 게다가 내 채찍은 말을 때릴 때 쓰는 게 아니오.”
“말을 때릴 때가 아니면 언제 쓰실 건데요?”
마부가 공중으로 손을 휘두르자, 휙 하고 맑은소리가 허공을 갈랐다.
“이런 소리를 들을 때 쓰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