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67화
백천범이 신기하다는 듯 물었다.
“처음 들어 보는 얘기네요. 모두 원해서 하는 일인가요?”
“물론이지.”
남제화가 그녀의 어깨를 토닥였다.
“계속 이곳에 있게 된다면 너 또한 좋아하는 일을 찾아볼 수 있을 것이다. 우리 민족은 자유와 근면을 중시하지. 집에 누워 잠만 자는 삶은 아무도 원치 않는다.”
“정말 좋네요.”
백천범이 진심으로 감탄했다.
“저도 자립해서 외지에서 생활한 적이 있어요. 하지만 사내아이 분장을 해야 했죠. 여인의 모습이면 무시당하기에 십상이거든요.”
“우리 남원 사람들은 다른 이를 무시하지도, 다른 이에게 무시를 당하지도 않는다.”
남제화가 뒷짐을 진 채 햇살을 맞으며 그 자리에 멈춰 섰다. 준수한 얼굴에는 자신감과 강인함이 깃들어 있었다.
“닙닙아, 너도 남원을 지키고 싶으냐?”
그의 굳건한 모습에 홀리기라도 한 듯 백천범의 가슴속에 사명감 비슷한 감정이 솟아났다.
“저도 오라버니처럼 남원을 지킬 것입니다.”
남제화가 기쁨을 감추지 않으며 말했다.
“모황께서 들으시면 정말 기뻐하실 것이다.”
여주와 여옥은 커다란 우산을 들고 햇빛을 가려 주었다. 우산에는 색색이 예쁜 술이 달려 있었는데 술 틈으로 누군가 천천히 걸어오는 모습이 보였다.
화려한 옷과 가녀린 몸, 짙은 화장을 한 모습이 남류청과 조금 닮은 듯했다. 그러나 가까이에서 보니 치장만 비슷했을 뿐 생김새는 딴판이었다.
그녀를 발견한 남제화가 코를 만지작거리며 불편한 기색을 보였다.
“크흠, 쿨럭, 닙닙아, 여긴 단령丹靈 공주다.”
백천범이 인사를 건네려는데 단령 공주가 코웃음을 치더니 거만한 기색으로 말했다.
“모황께서 다른 곳에 방치하셨다던 무양 공주가 이분인가 보군요?”
“그래.”
남제화가 백천범에게 말했다.
“단령 공주의 이름은 남농화다.”
“안녕하세요, 농화 언니.”
“언니라뇨?”
남농화가 백천범을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이 칠칠치 못한 꼴 좀 보십시오. 스물은 훨씬 넘어 보이는데 어찌 언니란 말이 나온답니까?”
남제화가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내가 스물을 넘은 지 얼마 안 되었는데, 어찌 이 애가 스물을 넘겼겠느냐?”
남농화는 불쾌한 기색을 지우지 않으며 이번에는 묵용린을 바라보았다.
“이 아이는 또 뭐랍니까. 멍청하게 생긴 게 분명 제 아비를…….”
“멍청하게 생긴 건 너지.”
백천범이 곧장 맞받아쳤다.
“눈은 멀뚱히 크기만 하고 콧대는 높지만 콧구멍이 하늘로 솟았잖아. 원숭이처럼 입도 크고, 피부는 또 어찌나 거칠고 거무스름한지, 세상 사람 다 찾아봐도 너처럼 멍청해 보이는 사람은 없을걸.”
남농화는 얼이 빠진 채 그대로 굳어 버렸다. 지금껏 늘 남을 나무라기만 했지 이런 말을 들어 본 건 처음이었다. 그녀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해지자, 남제화가 몸을 슬쩍 틀었다. 얼굴을 돌렸지만 작게 들썩이는 어깨까지 가릴 수는 없었다. 정말 통쾌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남농화가 그를 힘껏 밀쳐 내며 언성을 높였다.
“웃음이 나오십니까! 이대로 끝내진 않을 테니 둘 다 두고 보십시오.”
그녀는 말을 마치자마자 씩씩거리며 발걸음을 돌렸다.
백천범은 이해가 되지 않아 입술을 삐죽였다.
“먼저 린아를 건드렸으면서. 저 앤 왜 화가 난 거예요?”
“신경 쓰지 말거라.”
남제화가 담담하게 말했다.
“저 애에게 양보할 필요 없다. 대신 일부러 공격해서도 안 돼. 단령 공주는… 조금 성가신 애다. 이제 곧 고자질을 하겠구나.”
“누구한테 고자질을 해요?”
“물론 모황께 하겠지?”
“모황께서 다른 집 아이의 역성을 들어주실까요?”
“다른 집 아이가 아니라 부마附馬(여황제의 남편이나 황제의 사위)의 아이다. 엄격히 따지면 저 애도 가족이지.”
“모황께서 부마를 무서워하시나요?”
남제화가 머쓱한 듯 코를 문질렀다.
“쿨럭, 모황께선 부마를 은애하시지.”
백천범은 더욱더 이해가 가지 않았다.
“그런데도 부마께서 다른 이와 아이를 낳으셨단 말이에요?”
이어진 남제화의 설명 덕에 백천범은 남원 황실의 복잡한 관계를 이해할 수 있었다. 남류청은 이전 황조의 공주였고, 지금은 여제의 자리에 올랐다. 그간 세 명의 부마와 혼사를 올렸는데 현재의 부마가 남농화의 아버지였다.
그는 남원에서 아주 유명한 시인으로, 그를 흠모하는 여인들이 넘쳐났다고 했다. 여제마저도 그를 은애하여, 의붓자식을 들이면서까지 그를 부마로 맞이한 비사가 있었다.
남농화는 궁에 들어온 후에 개명했다. 성을 바꿔야 남원의 군주가 될 자격을 갖출 수 있기 때문이었다. 남원은 개방적인 나라라 혈연보다 유능한 사람이 군주가 될 수 있었다.
여기까지 설명한 남제화가 농담처럼 말했다.
“너도 아예 남씨로 바꾸는 게 어떻겠느냐, 이 오라비와 함께 제위를 다투는 것이다.”
백천범으로선 상상도 하지 못할 일이었다. 동월국 황실에서는 태자 외에는 누구도 감히 제위를 다툴 수 없었다. 그저 뒤에서 암암리에 군사력을 키우고 파벌을 만들 뿐 앞에서 공공연히 논하지 못했다. 그런 동월국에서 자라난 백천범에게 남원의 제위 경쟁은 기이하게 비쳤다.
“제가 오라버니의 자리를 빼앗을까 봐 걱정되지 않으십니까?”
남제화가 어깨를 으쓱하더니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남원에는 장군이 되고 싶지 않은 병사는 좋은 병사가 아니라는 말이 있다. 높은 자리를 원하는 건 당연한 일이니 각자의 재능을 마음껏 펼쳐 능력을 겨뤄야지. 게다가 내게 경쟁자가 너 하나뿐인 것도 아니다.”
“또 누가 있습니까?”
“남농화도 있고, 종실 형제들이 몇 명 더 있다. 성이 남씨인 이들은 다들 권력을 쥐고 있지.”
“다른 이들이 계략을 쓸까 두렵지 않으십니까?”
“무엇 하러 겁을 내느냐? 배후에서 손을 쓰는 자는 많지만 목숨까지 앗아 가진 못한다. 남원 황실은 사람이 귀하니, 황족이 목숨을 잃으면 외세의 공격을 받지 않고도 자멸할 수 있지.”
백천범은 그의 말에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여제, 그러니까 모황께서 제위 쟁탈을 허락하신 거예요?”
“물론이지. 모황께선 의욕이 넘치는 사람을 좋아하신다.”
남제화가 그녀를 슬쩍 부추겼다.
“너도 함께하자꾸나. 모황께서도 기뻐하실 것이다.”
백천범이 단호히 고개를 저었다.
“전 관심 없습니다.”
그녀는 묵용린을 내려놓더니 탁자를 짚은 채 천천히 걸음마 연습을 하게 했다.
“전 그저 이 아이를 잘 기르는 데에만 관심이 있습니다.”
남제화는 어쩔 도리가 없다는 듯 웃었다.
“넌 정말 남원 사람 같지 않구나.”
그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묵용린이 엉덩방아를 찧으며 주저앉았다. 남제화가 서둘러 그를 일으켰다. 하지만 묵용린은 손을 뿌리치더니 직접 탁자 다리를 잡고 힘겹게 일어났다. 이내 작은 보폭이 뒤뚱거리며 천천히 앞으로 나아갔다.
어리둥절해진 남제화가 고개를 돌려 백천범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자리에 앉은 채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남제화가 의문을 감추지 못하며 물었다.
“린아 때문에 늘 조마조마하는 줄만 알았는데, 넘어지는 걸 보고도 아무런 반응이 없구나?”
백천범이 대충 얼버무렸다.
“넘어지는 것도 익숙해져야지요. 게다가 누가 도와주는 걸 싫어하는 아이입니다.”
“린아는 노력을 게을리하지 않고 자립심이 강하니, 남원 사람을 꼭 닮았다. 혹…….”
그가 백천범을 슬며시 떠보았다.
“린아의 성을 남씨로 바꾸는 게 어떻겠느냐?”
“꿈도 꾸지 마십시오.”
백천범이 그를 흘겨보았다.
“전 곧 떠나야 합니다. 게다가 저 애 아버지는 동월국 황제입니다. 돌아가면 태자가 될 터인데 무엇 하러 이곳에서 제위를 다툰단 말입니까?”
남제화가 코를 만지작거리며 말했다.
“그건 그렇지만, 동월국 황제는 새 황후를 들였대도. 그 황후가 아들을 낳으면 린아는…….”
“아뇨.”
백천범이 그의 말을 차갑게 끊었다.
“그런 일은 있을 수 없어요.”
“그런 일은 있을 수 없다니? 새 황후가 아들을 낳지 못할 거란 말이냐?”
“제가 죽지 않았다는 걸 아는 이상 새 황후를 들일 리 없어요.”
“넌 처음부터 내 말을 믿지 않았던 것이구나?”
백천범은 그를 빤히 응시하다 고개를 저었다.
“안 믿어요.”
남제화가 그녀를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그 자신감은 어디에서 오는 것이냐? 사람의 마음은 세상에서 가장 예측하기 어려운 게 아니더냐. 황제가 되었으니 동월국의 미래는 그자에게 달려 있다. 고민해야 하는 문제가 예전과는 격이 다르지. 황제는 늘 만천하와 사직을 생각해야 해. 모황도 마찬가지다. 하늘같이 높은 여제이시지만 어쩔 수 없이 해야 하는 것들이 아주 많지.”
그가 한참을 떠들어도 백천범의 표정은 흔들리지 않았다. 그녀는 여전히 태평했고, 그의 말을 그다지 듣고 있는 것 같지도 않았다. 그는 속으로 탄식을 흘렸다. 이렇게 고집이 세다면 모황의 계획도 그리 순조롭진 않을 듯했다.
남제화가 무슨 말을 하든, 백천범은 자신의 입장을 명확히 했다. 자신은 때가 되면 떠나야 할 손님이었다. 이곳이 아무리 고향이라 한들, 어떠한 소속감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녀에게 있어 진정한 고향은 임안성이었다. 그곳에서 자랐고, 그녀의 지아비가 있는 곳도 그곳이었기에 그녀가 돌아갈 곳은 임안성이자 그의 곁이었다.
남원과 이곳의 여제, 그리고 남제화에게는 정이 깊다고 할 수 없었다. 사람 간의 감정은 오랜 시간 천천히 쌓이는 것이 아니던가. 무엇보다 이곳에 있으면서 묘하게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다들 그녀에게 잘해 주었지만 왠지 모르게 마음이 술렁였다. 일종의 직감이었다. 당장 위험하다고는 할 수 없었지만, 무슨 일을 겪게 될지 확신할 수 없으니 불안감이 커져 갔다.
* * *
여주와 여옥 자매의 분업은 명확했다. 여주는 몸소 뛰어 다니는 일을 도맡았고 여옥은 곁에서 시중드는 일을 책임졌다. 덕분에 그녀 곁에는 여옥만 있는 경우가 많았다. 또한 백천범은 다른 이에게 절대 묵용린을 맡기지 않았다. 그녀는 어디를 가든 늘 아이를 데리고 다녔다. 묵용린이 먹을 음식도 그녀가 직접 만들었다.
이제 곧 돌이 다가오니 모유 외에도 부드러운 밥을 먹여야 했다. 남원의 쌀은 품질이 뛰어나 윤기가 흐르고 단맛이 돌았다. 백천범이 작은 공기에 쌀밥을 담아 숟가락과 함께 주면, 묵용린은 한 톨도 남기지 않고 먹어 치웠다.
백천범은 묵용린이 먹는 모습을 바라보며 즐거워했다. 아직 이가 네 개밖에 나지 않았는데도 제법 능숙하게 밥알을 씹어 넘겼다. 그녀가 웃으면 묵용린은 더욱더 힘을 내어 밥을 먹는 듯했다.
그 모습을 지켜보며, 백천범은 그의 성격이 자신을 쏙 빼닮았다고 생각했다. 얼굴은 묵용감을 닮았지만, 자유분방하고 민첩한 성격은 그녀와 똑같았다. 아이가 어떤 모습으로 성장할지, 궁금증을 참기 힘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