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가유왕비초장성 (466)화 (465/1,192)

제466화

사흘 후, 이 장군이 보낸 병사가 도착했다. 영구는 병사를 잠시 쉬게 한 뒤, 자신이 직접 물건을 들고 황제를 찾았다. 커다란 보따리를 열어보니 제법 많은 물건이 들어 있었다. 산굴을 파헤쳐 가져온 것이었기 때문에 물건엔 전부 지저분한 흙이 묻어 있었다. 하나씩 헤아려 보니 옷가지와 주머니, 머리 꽂이, 은으로 만든 장명쇄가 나왔다.

황제는 월규와 기홍을 불러 물건을 살펴보라는 분부를 내렸다. 옷가지와 머리 꽂이, 주머니에는 왕비의 물건이 섞여 있었다. 황제가 장명쇄를 문질러 먼지를 걷어 냈다. 세자의 장명쇄가 확실했다. 만월 날, 오수진의 사성성이 준 선물이었다. 가장자리에 금테가 정교하게 둘려 있어 백천범이 무척 마음에 들어 했다. 그녀가 직접 묵용린의 목에 걸어 주지 않았던가.

이번에는 틀림없었다. 그가 장명쇄를 꽉 움켜쥐었다. 차가운 기운이 천천히 그의 가슴으로 스며들었다. 그의 가슴속에서 폭풍처럼 이는 격동을 잠재우기엔 부족한 한기였다. 당장 누군가를 죽여야만 분이 풀릴 것 같았다.

마음이 어수선할수록 그는 무서우리만치 차분해졌다. 그가 낮은 목소리로 영구에게 분부를 내렸다.

“제갈겸유를 불러오너라.”

명을 받든 영구가 제갈겸유를 끌고 왔다. 그간 제갈겸유는 배불리 먹고 편한 생활을 해 얼굴이 훨씬 좋아져 있었다.

황제는 월규와 기홍을 물린 뒤, 제갈겸유에게 말했다.

“왕비가 돌아오면 대사면을 내리겠다고 했지만, 돌아오지 못했으니 짐이 널 죽여야겠다.”

제갈겸유가 뜻밖이라는 듯 물었다.

“왕비 마마를 찾지 못하셨습니까?”

영구가 덧붙였다.

“찾았지만 이미 늦었다. 산굴이 무너졌다.”

제갈겸유는 안타깝다는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하늘의 뜻인가 봅니다.”

말이 끝나자마자 그는 거친 숨을 들이켰다. 어느새 날카로운 검이 그의 몸을 관통하고 있었다.

황제의 동작이 너무 빨랐던 나머지, 그는 칼이 날아드는 것조차 보지 못했다.

그를 배웅하는 황제의 목소리가 서늘했다.

“이 또한 하늘의 뜻이다.”

황제가 팔을 거두자 선홍빛 피가 허공을 물들였다.

가슴을 움켜쥔 제갈겸유가 기이한 미소를 지었다. 이내 그의 몸이 천천히 뒤로 기울더니 바닥으로 허물어져 내렸다.

피를 보자 황제의 분노는 간신히 가라앉았다. 그 뒤로 걷잡을 수 없는 공허함이 밀려왔다. 꼭 잠겨 죽을 것만 같은 깊은 공허함이었다. 그는 검을 내팽개치고 비틀거리며 문을 나섰다.

찬바람이 얼굴을 스치고 지나갔다. 그의 발길이 닿는 곳 어디든 우르르 무릎을 꿇기 바빴다. 그는 무작정 앞으로 걸었다. 희망이 없다는 걸 알면서도 기적이 일어나기만을 바랐다. 단 한 번의 기적이면 충분했다. 그러나 시신까지 찾고 말았으니, 더는 바랄 기적조차 없었다.

그의 발길이 닿는 모든 곳이 스러졌고, 세상은 온통 잿빛이었다. 햇살이 그의 머리 위로 내리쬐었지만 온기는 조금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는 바닥에 무릎을 꿇은 수많은 이들을 바라보며 잠시 넋을 놓았다.

천하를 빼앗고 군왕이 되었지만, 그의 곁에서 이 모든 걸 누려야 할 이는 어디 있단 말인가?

아무리 높은 곳에 서 있다 한들, 하늘에 맞닿을 권력을 누린다 한들, 그는 고독한 군주에 불과했다.

발걸음을 멈춘 그는 그제야 자신이 태액호太液湖 주변에 와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살랑이는 바람에 맑은 수면에 잔잔한 파문이 일었다. 그는 혼이 나간 얼굴로 잘게 부서지는 금빛 물결을 바라보았다.

사실 누구도 탓할 수 없었다. 따지자면 전부 그의 잘못이었다. 그는 자신이 노력하면 양이 될 수 있는 늑대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늑대는 그저 늑대일 뿐, 피에 굶주린 천성은 절대 바꿀 수 없었다. 늑대가 양의 세계에 물들 수 없듯, 양은 늑대의 세계에서 살아남을 수 없었다. 결국 늑대에게 필요한 것은 같이 싸워 줄 동료뿐이었다. 설령 그 동료에게 자신이 잡아먹힌다 해도.

오랜 시간 납득할 수 없던 일을 야생에 적용하니 단번에 그 이치를 헤아릴 수 있었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멀지 않은 곳에서 그를 살피는 학평관의 모습이 보였다. 영구가 곧장 학평관의 앞을 막아섰다.

“무슨 일이냐?”

황제가 초연하게 물었다.

그가 입을 열자 영구가 길을 열었다. 학평관이 잰걸음으로 다가오더니 조용히 읊조렸다.

“폐하, 옥감사가 찾아왔는데 범인이 형벌을 견디지 못해 반 각쯤 전에 숨을 거두었다고 합니다.”

그가 말하는 범인은 묵용연이었다. 황제는 입꼬리를 늘어뜨리며 수면에 시선을 고정했다. 단조로운 분부가 내려왔다.

“시신을 잘게 잘라 고기 밥으로 강에 뿌리거라.”

학평관은 잠시 경악했지만 서둘러 명을 받들었다.

“예, 소인이 곧장 가서 전하겠습니다.”

응당 죽어야 할 사람은 전부 처리되었으니 모든 게 끝난 것이나 다름없었다.

보름 뒤, 왕비와 세자의 시신이 임안성으로 옮겨졌다. 가동은 금군을 이끌고 왕비와 세자를 맞이한 뒤, 시신을 장생전으로 옮겼다. 그는 도저히 믿을 수 없어, 슬며시 흰 천을 걷고 시신을 확인했다. 전쟁터를 누비며 수많은 시체를 봐 온 그였지만, 시체를 보고 속을 게워 내고 말았다. 그의 반응만 봐도 시신의 상태가 얼마나 끔찍한지 알 수 있었다.

다들 황제를 생각해 시신을 확인하지 않을 것을 권했지만 황제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천을 걷어 올린 그는 차분하기 그지없었다. 놀라기는커녕 눈물을 보이지도, 분노를 드러내지도 않았다. 한동안 시신을 들여다보던 그는 다시 천을 덮고 관에 잘 안치하라는 분부를 내렸다.

사람들의 눈에는 비통함이 극에 달해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못하는 것으로 비쳤다. 심지어 황제는 왕비의 장례도 전부 수민에게 맡겨 버렸다.

추도문의 초안을 완성한 뒤, 수민이 황제를 찾아왔다.

“폐하, 마마께… 추가로 봉호와 시호諡號(왕이나 왕비 등이 죽은 뒤에 공덕을 칭송하여 붙인 이름)를 내리실 것인지요? 다른 황릉이 착공을 시작했으니 하관下棺은…….”

황제는 서예를 하는 중이었다. 족제비 털로 만들어진 붓이 잠시 허공에 머물렀다. 황제가 한참이 지나서야 답했다.

“위패에는 아무것도 적지 않고 비워 두겠네. 황릉 변두리에 있는 땅을 한 곳 골라 그곳에 묻게. 겉치레에 신경 쓸 거 없이 사흘 뒤에 장례를 치르게.”

수민은 조금 얼떨떨했다. 황제가 백천범을 끔찍이 아꼈으니, 대행황후의 봉호를 내리는 것은 물론, 시호를 하사하고 엄청난 규모의 장례를 치를 줄 알았다. 하지만 이를 전부 생략하는 것도 모자라 황릉도 아닌 변두리에 관을 묻으라고 하다니. 하지만 황제는 늘 마음을 깊이 숨기는 사람이니, 누구도 그의 의도를 파악할 수 없었다.

* * *

남원의 황궁에는 백천범의 궁전이 따로 있었다. 그녀는 평락전平樂殿이라는 이름이 마음에 쏙 들었다. 평안함과 즐거움은 그녀가 평생 바라 온 것들이었다.

남류청은 매우 바빴던 터라 저녁 외에는 그녀와 함께할 시간이 없었다. 반면 남제화는 늘 한가해서 그녀를 데리고 이곳저곳을 안내해 주었다. 물론 여주와 여옥도 함께했다. 두 시녀는 그녀 대신 아이를 안고 있으려 했지만 백천범이 절대 허락하지 않았다.

그녀는 산굴에서 체득한 방법대로 천을 사용해 묵용린을 품에 동여매고 다녔다. 그 모습을 본 남제화는 박장대소를 터뜨렸지만, 이내 좋게 타일렀다.

“그런 모습으로 밖에 나가면 다들 널 비웃을 것이다.”

백천범이 대수롭지 않게 대꾸했다.

“비웃으라지요. 저랑은 상관없는 일입니다.”

그녀와 며칠 동안 함께 지낸 끝에, 남제화는 그녀의 성격을 어느 정도 파악할 수 있었다. 백천범은 세속적인 것에는 신경을 쓰지 않았고 늘 단순하고 즐겁게 생활했다. 세속적인 것들에 항상 매달려 왔던 남원 황자로서는 그녀가 마냥 부러울 따름이었다.

길을 걷던 백천범의 눈에 독특한 궁전의 외형이 들어왔다. 지붕은 뾰족하고 벽은 전부 금색이었다. 동월국의 황궁과는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

동월국의 궁전은 위엄이 넘쳤고, 바라보면 절로 위압감이 느껴졌다. 하지만 이곳은 조금도 위압감을 느낄 수 없었고, 시선이 닿는 곳마다 사람들로 넘쳐났다. 궁녀들은 하늘거리는 치마를 입고 있었고 환관들은 상의와 하의가 분리된 흰색 옷을 입고 있어 경직된 느낌이 덜했다.

모두들 남제화를 마주치면 예를 갖추었다. 남제화는 옅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이거나 그들의 머리를 만지기도 했다. 그의 손길을 받은 이들은 크게 기뻐하며 다시 합장을 한 뒤, 허리를 깊이 숙여 인사를 올렸다.

백천범은 그 모습에 깊은 감명을 받은 듯했다.

“다들 즐거워 보이네요.”

남제화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너랑 비슷하기 때문이지. 저들은 많은 걸 고민하지 않거든.”

백천범이 주변을 둘러싼 금색 궁전을 가리켰다.

“왜 벽에 금색 칠을 해놓는 거죠? 진짜 금이에요?”

“진짜 금이다.”

남제화가 그녀를 놀리며 말했다.

“무양 공주가 될 자격이 없구나. 자신의 나라를 그렇게 모르다니. 남원에서는 금이 많이 나지. 동월국에 있었을 때 남원에 대해 못 들어봤느냐? 남원에선 황궁과 절을 진짜 금으로 도금한다.”

그가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남원에는 또 다른 특산품이 있지. 무엇인지 아느냐?”

백천범이 주변의 화려한 꽃을 바라보며 곧바로 대꾸했다.

“꽃인가요?”

“똑똑하구나.”

남제화가 고개를 끄덕이며 칭찬했다.

“지금 동월국은 겨울이겠지만 남원은 꽃이 핀 지 오래다. 꽃의 왕국이라고 불릴 정도로 그 품종이 무척 다양하지.”

그의 말처럼, 각양각색의 크고 작은 꽃송이는 제각기 아름다움을 뽐냈다. 화려한 색이 곳곳에 어우러져 눈길 닿는 곳마다 흐드러지게 피어났다. 길가, 나무 아래, 심지어 지붕 위까지, 보기만 해도 화려하고 아름다운 광경이었다.

백천범이 자리를 맴돌며 중얼거렸다.

“정말 예쁩니다.”

남제화가 웃으며 그녀를 바라보았다.

“이렇게 예쁜 곳인데, 남고 싶지 않더냐?”

백천범이 웃으며 답했다.

“아무리 예뻐도 집이 아닙니다. 전 집으로 돌아가고 싶어요.”

“모황 앞에서 그 말을 하면 화를 내실 거다.”

남제화가 고개를 저었다.

“이곳 또한 네 집이다. 그간 와본 적은 없어도 넌 남원 사람이다. 어느 곳에서 자랐든 네 뿌리는 남원이야. 이곳의 사람들은 남원의 사람이라는 데 자부심을 갖고 있다.

남원은 국토도 작고 백성도 그리 많지 않은 게 사실이다. 긴 시간 동안 강대국의 침략을 받아 분할이 되기도 했지. 하지만 그 틈에서도 생존을 위해 분투한 끝에 이렇게 건재하지 않느냐. 닙닙아, 부디 어머니를 이해하거라. 그 어떤 군주보다 어렵게 사신 분이시다.”

백천범이 의아해하며 물었다.

“왜 군주가 되신 거예요? 다른 나라의 군주는 전부 사내들이잖아요?”

“남원에서는 여인과 사내를 똑같이 대한다. 누구든 그 자리에 오를 수 있지. 조정에는 여인인 신하도 많다. 조정을 둘러볼 기회가 생기거든 바로 알게 될 것이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