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65화
그녀가 버럭 화를 내자 남류청의 얼굴이 굳었다. 이를 알아차린 남제화가 서둘러 눈짓을 보내며 웃음을 터뜨렸다.
“힘겹게 왔는데 모황께 효는 다하지 못하더라도 며칠은 묵어야 하지 않겠느냐? 돌아오자마자 다시 돌아가겠다니?”
남류청이 여러 번 타이른 끝에, 백천범은 남원에서 보름 동안 지내기로 했다. 단, 남류청이 묵용감에게 서신을 보내 그녀와 아이가 어디에 있는지 알려 준다는 조건을 내걸었다.
그녀가 결정을 내리자 남류청은 조건을 들어주겠다며 호언장담했다. 남류청이 손뼉을 치자 자색의 옷을 입은 궁녀 두 명이 다가왔다.
“폐하.”
“무양 공주가 쉴 수 있게 방으로 안내하거라.”
“예, 명 받잡겠나이다.”
두 사람이 백천범에게 허리를 숙이고 예를 갖췄다.
백천범은 그들을 빤히 바라보았다. 잘 보니 옷뿐만 아니라 얼굴도 똑같았다. 누가 누구인지 구별할 수 없을 정도였다.
얼이 빠진 그녀에게 남류청의 설명이 이어졌다.
“여주如珠와 여옥如玉이다. 곁에서 시중을 들 테니 필요한 게 있거든 이 애들에게 편히 말하거라.”
백천범이 불쑥 물었다.
“둘 중 누가 언니고 누가 여동생이지?”
왼쪽에 있던 궁녀가 웃으며 말했다.
“제가 언니인 여주입니다. 이 애가 여동생 여옥입니다.”
백천범이 고개를 끄덕이며 웃었다.
“두 사람도 시집을 가야 할 텐데 한 명은 남쪽으로, 한 명은 북쪽으로 가는 게 좋겠구나. 부군이 부인을 헷갈리기라도 하면 큰일이니 말이야.”
“…….”
그리 먼 일까지 생각하다니……. 두 사람은 멋쩍은 웃음을 보였다.
남류청은 백천범이 문을 나설 때까지 바라보다 시선을 거두었다. 이번엔 웃을 듯 말 듯 한 남제화의 얼굴이 시야에 들어왔다. 그녀가 물었다.
“어찌 그런 얼굴로 보는 것이냐? 내 얼굴에 뭐가 묻기라도 했더냐?”
남제화는 웃기만 할 뿐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남류청이 별안간 미간을 찌푸렸다.
“저 애에게 향을 쓴 것이냐?”
“그럼 어찌합니까?”
남제화가 고개를 저었다.
“죽어도 오지 않으려 했습니다. 그땐 동월국 국경을 벗어나지 못한 터라 소란을 피우면 수습이 어려웠으니까요. 한데 저리 고집을 피우는 걸 보니…….”
“그게 왜?”
“어마마마와 아주 많이 닮았습니다!”
남류청이 입꼬리를 올리며 웃었다.
“이 어미 몸에서 태어난 피붙이인데 닮는 게 정상이지.”
남제화가 천천히 말했다.
“어릴 때부터 고생을 많이 했다 들었습니다. 어마마마께서도 좀 더 잘 대해 주십시오. 소자 생각엔 비록…….”
남류청의 얼굴이 단번에 굳어졌다.
“그 앤 남원의 공주다. 마땅히 져야 할 책임이 있어.”
“어마마마!”
“더는 왈가왈부하지 말거라. 네겐 아직 임무가 남지 않았느냐? 당장 출발하거라.”
“여동생이 방금 돌아왔는데 소자도 더 머물고 싶습니다.”
“화아華兒.”
남류청이 날 선 목소리로 말했다.
“모황이 널 어찌 가르쳤더냐. 항상 대국大局을 중시하라 하지 않았느냐.”
남제화가 또박또박 당차게 말했다.
“전 아직 군주도 아닌데 혈육의 정을 나누는 게 뭐 그리 문제겠습니까. 전 저 애가 좋습니다. 농화濃華보다 더요.”
그는 남류청의 대답도 듣지 않고 발걸음을 돌렸다.
남류청은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이를 악물었다. 그러나 별 수 있을까! 자식은 애당초 원수라고 하지 않던가. 아무래도 전생에 아들에게 빚을 진 모양이다.
* * *
백천범은 자신과 남류청이 제법 닮았다고 생각했다. 남류청이 화장을 지우고 검은 머리를 늘어뜨리니 더욱더 그러했다. 특히 커다랗고 동그란 눈이 가장 닮아 있었다. 또한 그녀의 얼굴에서도 세월의 흔적을 엿볼 수 있었다.
자신과 닮은 그녀의 얼굴을 마주하니, 백천범이 품었던 의혹이 천천히 사그라들었다. 피를 어찌 속이겠는가. 그녀는 눈앞에 있는 여인을 어머니라고 믿을 수밖에 없었다.
비단 침의를 입은 남류청은 여제의 신분을 잠시 내려놓았다. 그녀가 온화한 얼굴로 백천범에게 손을 뻗었다.
“자, 닙닙아. 이 어미한테 안겨 보렴.”
백천범은 그녀에게 안길 때만 해도 별다른 느낌이 없었다. 하지만 그녀가 저를 꼭 안은 순간, 무언가 울컥하고 솟아올랐다. 어느새 백천범은 자신도 모르게 흐느껴 울기 시작했다.
등을 토닥이는 남류청의 목소리도 가늘게 떨렸다.
“우리 닙닙이, 이 어미는 널 하루도 빠짐없이 그리워했단다.”
그녀가 울먹이자 백천범은 서둘러 울음을 그치더니 소매로 눈물을 닦으며 위로했다.
“어머니, 울지 마시어요. 이렇게 다시 만났으니 얼마나 좋은 일이에요.”
남류청은 흐느끼며 손수건으로 눈물을 닦았다. 다시 고개를 든 그녀의 눈은 빨갛게 물들어 있었다.
“닙닙아, 어미가 널 버리고 떠났다고 많이 탓했지? 이 어미도 정말… 피치 못할 사정이 있었다. 남원의 황실은 아주 복잡하게 엮여 있지. 이 어미는 네 오라비를 데리고 힘겹게 살았단다. 자칫하면 목이 날아갈 위기에 처해 있었어.
그땐… 정말 하루하루가 힘겨웠단다. 이 악물고 한 걸음 한 걸음 내디뎌 겨우 오늘 같은 날을 맞이했지. 닙닙아, 부디 이 어미의 고충을 이해해 줄 수 있겠니…….”
그녀의 말대로였다. 다들 저마다 크고 작은 고충을 안고 힘겹게 삶을 이어가는 법이었다. 본래 세상살이는 뜻대로 되지 않은 게 너무도 많지 않던가.
갑작스레 나타나긴 했지만 백천범은 제 어머니가 그리 밉지 않았다. 어릴 때 어머니는 없었지만 그래도 유모가 있었다. 그녀에겐 유모가 어머니와 마찬가지였다. 유모는 늘 그녀를 지켜 주고 가르쳐 주었다. 악조건 속에서도 무너지지 않고 풍파를 헤쳐 나가는 법을, 즐겁게 살아가는 방식을 알려 주었다.
유모를 생각하니 마음이 다시 무거워졌다. 그리고 남류청을 보니 뭔지 모를 감정들이 솟구쳤다. 그녀는 늘 어머니를 상상해 왔다. 유모의 얼굴이기도 했고, 고운 얼굴일 때도 있었지만… 아무래도 눈앞에 있는 여인과는 거리가 멀었다.
“자책하지 마시어요. 이해할 수 있습니다. 게다가 유모가 돌봐주어서 괜찮습니다. 제게 무척 잘해 주었어요.”
남류청이 고개를 끄덕였다.
“좋은 사람이었지. 그래서 널 맡길 수 있었단다. 다만.”
그녀가 슬픈 목소리로 말했다.
“명이 너무 짧아 복도 누리지 못하고 떠났구나.”
그녀의 말은 백천범의 가슴을 아프게 찔렀다. 유모라는 단어는 늘 그녀의 약한 부분을 건드리는 것 같았다. 그때 남류청이 요람에서 손가락을 빨고 있는 묵용린을 바라보며 웃었다.
“아이가 참 예쁘게 생겼구나.”
백천범이 얼른 말했다.
“예. 제 아버지와 똑 닮아 아주 예쁩니다.”
남류청이 그녀를 지그시 바라보았다.
“…닙닙아, 오늘 밤에는 어미와 함께 자자꾸나. 모녀지간에 아직 못다 한 말이 많지 않니.”
백천범은 그리하겠다고 대답하며 묵용린을 품에 안았다.
“린아도 함께 자야 합니다. 태어났을 때부터 떨어져 지낸 적이 없어서요.”
남류청이 그녀를 넌지시 타일렀다.
“닙닙아, 린아는 황가에서 자라야 할 아이다. 훗날 큰일을 해야 하니 이만큼 컸으면 혼자 자야지.”
백천범이 의아하다는 얼굴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아직 돌도 되지 않았는데 이만큼 컸다니요? 큰일을 하든 그렇지 않든, 더 지나야 알 일입니다. 지금은 제가 잘 돌봐야 하고요.”
“어미가 아이를 감싸기만 하면 응석받이가 된다. 오히려 아이에게 독이 돼.”
“린아는 응석받이가 아닙니다. 넘어져도 울지 않는걸요.”
남류청은 별 수 없이 그녀 말에 따랐다. 결국 묵용린이 침대 가장 안쪽에, 백천범이 가운데에, 남류청이 바깥쪽에 누웠다. 모녀끼리 더 많은 얘길 나누기 위해 함께 잠을 청하기로 한 것이지만… 백천범은 묵용린을 재우는 데에만 몰두하고 있었다.
그녀는 린아를 보며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뒤에서 지켜보던 남류청은 나지막하게 아이를 어르는 목소리에 졸음이 쏟아지는 한편, 알 수 없는 부러움을 느꼈다.
두 명의 아이를 낳았지만 그녀는 한 번도 백천범이 묵용린에게 하듯 아이를 키워 보지 못했다. 이렇게 하는 게 정말 아이에게 좋을까? 아이에게 독이 되진 않고?
궁에서 태어나 자란 그녀는 가족에 대한 정이 그리 깊지 않았다. 하지만 몸소 낳은 자식을 사랑하지 않는 어머니가 어디 있을까? 이따금 그녀는 베개를 껴안고 공허한 마음을 달래기도 했다.
시간이 흐르면서 그러한 감정도 희미해졌다. 어쨌든 모든 황자가 규율을 따라야 했다. 일찍 어머니의 품을 떠나야 스스로 의지를 굳건히 하는 법을 배울 수 있었다.
* * *
힘 있는 발 소리에 묵용감은 곧장 고개를 들어 올렸다. 영구는 여느 때처럼 차가운 표정이었지만, 무슨 말을 할지 짐작할 수 있었다. 그는 자신도 모르게 주먹을 쥐며 연신 마른침을 삼켰다.
영구는 차마 묵용감의 얼굴을 바라보지도 못하고 털썩 무릎을 꿇었다.
“소인의 무능함을 벌하여 주시옵소서, 폐하!”
황제는 잠시나마 그를 지탱했던 기대를 힘없이 가라앉혔다.
“자세히 말해 보거라.”
“이 장군의 밀서를 받았습니다. 병사를 이끌고 화염산에 도착했을 때, 산 일부가 붕괴되어 있었다고 합니다. 붕괴된 곳을 파헤쳐 보니 산굴과 시신이 나와 서둘러 수습했다고 합니다. 총 열두 구였는데 그중 보초병이 여덟 구, 노파와 중년 부인이 각각 한 구, 그리고 나머지 두 구는…….”
잠시 말을 멈췄던 영구의 목소리가 어둡게 깔려나왔다.
“젊은 부인과 아기였다고 합니다. 체형과 용모가 왕비 마마와 세자 아기씨를 닮았다고 합니다.”
황제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그저 닮은 것뿐이더냐?”
“부패가 시작되어 형태를 제대로 파악하기 힘들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이 장군이 산굴에서 찾은 물건을 보냈다고 하니, 사흘 안에는 임안성에 도착할 것으로 보입니다.”
영구가 말을 이었다.
“이 장군이 직접 인근 마을을 돌며 탐문했는데, 중년 부인과 노파가 며칠 간격으로 마을에 들러 식자재를 사 갔다고 합니다. 손이 크고 흥정을 하지 않아 다들 물건을 팔고 싶어 했다더군요. 어떤 땐 은자를 더 얹어 주기도 했답니다.
다만 말을 하지 못하는 탓에 마을 주민들도 많은 걸 알진 못한다고 합니다. 그저 조금 수상하게 여겼을 뿐, 굳이 참견하진 않은 듯합니다.”
황제가 재차 물었다.
“멀쩡하던 산굴이 어찌 까닭 없이 무너졌단 말인가?”
“마을 주민 말로는 자연적으로 무너졌을 거라고 합니다. 예전에도 무너진 적이 있었기 때문이지요. 그들도 산이 무너진 정확한 이유는 모릅니다. 다만 산의 온도가 기이할 만큼 높아 화염산이라고 불리는 까닭에, 다들 오르기 꺼리는 곳이라고 합니다.”
한참을 서 있던 황제가 천천히 자리에 앉았다.
“하면 사흘간 기다려 보고 다시 얘기하지.”
영구가 입술을 들썩였다. 그를 타이르고 싶은 마음이 턱끝까지 차올랐다. 이미 이렇게 된 이상, 황제가 고대하는 희망은 그리 크지 않을 게 뻔했다. 그런데도 영구는 입을 열 수 없었다. 지금 그의 희망에 종지부를 찍기엔, 그가 너무나도 가여웠다. 어차피 사흘이라는 시간이 주어졌으니 그 후에 말해도 늦지 않을 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