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64화
“어째서?”
황제가 물었다.
“자넬 태의원에 보내지 않아서?”
위중청이 굳은 얼굴로 말했다.
“그런 이유가 아닙니다. 신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폐하의 안위와 옥체입니다. 하나 폐하께서 병이 나셨는데도 신에게 치료를 받지 아니하시니, 좌절감이 이루 말할 수가 없사옵니다. 면목이 없어 이곳에 남아 있을 수가 없사옵니다.”
황제가 웬일로 웃음을 터뜨렸다. 날카로운 웃음소리였다.
“짐을 위협하는 것인가?”
깜짝 놀란 위중청이 무릎을 꿇더니 바닥에 머리를 조아렸다.
“신이 어찌 감히 그리할 수 있겠습니까? 죽을죄를 지었나이다!”
황제는 무슨 일만 생기면 신하들이 무릎을 꿇는 게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저 한번 물어본 것뿐인데 죽을죄는 무슨?
“일어나서 말해 보거라.”
황제가 그를 흘겨보았다.
“네 생각엔 짐에게 병이 있는 것 같더냐?”
위중청이 황송해하는 얼굴로 말했다.
“신은 폐하의 두통을 말씀드린 것이었습니다.”
황제의 안색이 살짝 어두워졌다.
“그 일은 언급할 필요 없다 하지 않았느냐! 짐에게 좋은 방도가 있대도.”
“폐하의 좋은 방도는 도피나 다름없습니다. 계속 이러시다간 병세가 악화할 뿐입니다. 훗날 그 방도가 효능을 잃는다면 그땐 어찌하시겠습니까? 폐하께서 듣기 거슬리시겠지만 이승을 떠난 이는 돌아오지 못…….”
“무엄하다!”
황제가 언성을 높였다.
“짐 앞에서 썩 물러나거라!”
겁에 질린 위중청은 바닥에 엎드린 채 부들부들 떨었다. 그러나 그의 입은 하려던 말을 끝까지 내뱉고야 말았다.
“폐하께서 이러시는 걸 왕비 마마께서 아신다면 편히 눈 감지 못하실 것입니다!”
“네 이놈!”
결국 황제가 그를 걷어차며 호통쳤다.
“당장 이놈을 끌어내 죽을 때까지 매질을 하거라!”
곧장 금위군 두 명이 들어오더니 위중청을 끌고 나갔다. 학평관이 서둘러 무릎을 꿇고 애원했다.
“폐하, 위 의관을 죽이시다니요. 본래 충언은 귀에 거슬리는 법입니다. 대담하긴 했지만, 다 폐하를 위해서 그리 한 것을 아시지 않습니까…….”
황제가 심호흡을 내뱉으며 화를 겨우 억눌렀다.
“한 번 내뱉은 말은 되돌릴 수 없는 법. 다만 그간의 공로를 생각해 곤장 열 대로 대신하겠다.”
학평관은 겨우 숨을 돌리고 서둘러 황제의 말을 전하러 갔다.
황제는 창가에 서서 위중청이 끌려가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밖으로 나오자 금위군은 곧장 손을 풀고 예를 갖추더니 위중청에게 앞으로 향하라는 손짓을 해 보였다. 금의군 또한 황제가 남쪽에서 데려온 사람들을 남다르게 대한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아무리 큰 잘못을 저질러도 사형에 처할 일은 없었다.
황제는 꼭 왕비의 토끼를 돌보듯 그들을 지켜 주었다. 사실 요행을 바라는 마음에서였다. 언젠가 백천범이 돌아왔을 때 모든 이들이 그대로 자리를 지키고 있다면, 그녀는 분명 크게 기뻐하리라.
* * *
영구는 역시나 약속을 지켰다. 제갈겸유를 잡아 오겠다고 호언장담했던 그는 정확히 여드레 후, 거지꼴이 된 제갈겸유를 황제 앞에 데려왔다.
꾀죄죄한 겉모습에 누렇게 뜬 얼굴을 보니 며칠은 쫄쫄 굶은 듯했다. 다만 침착하게 꿇어앉은 모습으로 콧대 높은 기백이 여전함을 보여 주었다.
제갈겸유를 본 순간, 황제의 동공은 급격히 수축되었다. 다만 그뿐이었다. 황제의 안색은 조금도 달라지지 않은 채,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왕비는 어디 있느냐?”
그는 일부러 왕비의 생사가 아닌 위치를 물었다. 백천범의 생존 사실을 알고 있다는 걸 제갈겸유가 인지할 수 있게 한 것이다.
역시나 깜짝 놀란 제갈겸유가 황급히 고개를 들었다. 그는 입술을 달싹거렸지만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네 주인이 다 자백했다. 짐이 충고하는데, 너도 털어놓는 게 좋을 것이다. 살가죽이 벗겨지고 싶지 않다면.”
제갈겸유가 웃으며 말했다.
“태자 전하께서 자백하셨다면, 무엇 하러 이리 힘겹게 노부를 잡아들이시어 고문까지 하시려는 겁니까?”
“네 주인의 교활함에 진위를 가리려 너에게도 묻는 것이지. 어서 말하거라.”
제갈겸유가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입을 열었다.
“노부가 사실대로 털어놓는다면 폐하께서는 노부를 풀어 주실 것인지요?”
황제가 몸을 살짝 돌리며 대답했다.
“왕비가 무사히 짐의 곁으로 돌아오면 대사면을 내릴 것이다.”
제갈겸유가 순순히 털어놓았다.
“아무리 콧대가 높다 한들, 노부도 속물에 불과합니다. 이미 노쇠하여 고문도 버티기 힘들지요. 폐하께서 알고 계신다면 노부도 사실대로 털어놓겠습니다. 태자 전하께서 왕비 마마와 세자 아기씨를 납치하실 때, 당장 왕비 마마를 죽일 생각은 없으셨습니다.
절벽 아래로 떨어지는 모습은 다 꾸며 낸 것이지요. 가동에게 쫓길 땐 인질을 바꿔치기한 뒤였습니다. 그러니 절벽에서 떨어진 사람도 다른 이였지요. 왕비 마마를 납치한 자는 북쪽이 아닌 서쪽으로 향했습니다.
태자께선 몇 년간 전국을 돌아다니면서 몸을 숨길 곳을 여러 군데 만들어 놓으셨습니다. 그중 하나가 서북에 있는 화염산입니다. 화산 활동을 멈춘 휴화산인데 그곳에 산굴을 만들어 두었지요. 인적도 드물고 인근 마을과도 거리가 있어 몸을 숨기기엔 제격인 곳입니다.”
황제가 고개를 들어 영구를 바라보았다. 영구는 곧장 밖으로 나갔다. 장소를 알았으니 서둘러 왕비를 데려와야 했다.
영구에게 일을 맡기면 황제는 늘 마음이 놓였다. 위치를 안 이상, 제갈겸유의 말이 진실이든 거짓이든 제대로 확인해야 했다. 서북에 있다 한들 걱정할 건 없었다. 이천행의 부대가 서북을 지키고 있으니, 정말 서북에 백천범이 있다면 이천행이 어떻게든 그녀와 세자를 찾아 무사히 데려올 수 있었다.
그는 조급한 마음을 숨기고 재차 물었다.
“네 주인이 정말로 애당초 왕비와 세자를 죽이지 않을 생각이었단 말이냐?”
“세자 아기씨는 죽일 생각이 없으셨습니다. 세자 아기씨로 폐하를 협박해 평생 전하를 지키게 할 계획이셨으니까요. 그러나 왕비 마마는 반드시 죽여야 한다고 하셨지요. 애당초 폐하께서 강남에 남기로 한 것도 왕비 마마의 제안에 북진을 멈춘 탓이니까요.
그때 태자께서 속을 많이 태우셨지요. 폐하 곁에 왕비 마마가 계시는 한, 늘 폐하의 생각을 좌지우지할 테니 불리하다고 생각하셨습니다. 세자 아기씨가 모유를 끊으면 왕비 마마를 살해하기로 정하셨지요.”
말을 마친 제갈겸유가 몸서리를 쳤다. 줄곧 담담하게 응수하던 황제가 갑작스레 반응을 보였기 때문이다. 먼지 낀 거울처럼 흐릿하던 두 눈망울이 순식간에 살기로 번뜩이고 있었다. 제갈겸유는 죽는 게 두렵진 않았지만, 황제의 눈빛에 놀라 고개를 숙이고 말았다. 생각해 보면 참 우스웠다. 죽는 건 두렵지 않은데 놀라 겁을 집어먹다니.
제갈겸유가 다시 고개를 들어 올렸을 때, 황제는 다시 감정이 담기지 않은 표정으로 돌아와 있었다. 마치 조금 전 그가 본 눈빛은 착각인 것처럼.
사실 제갈겸유는 태자가 백천범에게 칼을 드는 순간, 그의 앞에 펼쳐진 자멸의 길을 보았다. 그가 줄곧 암시했음에도 태자는 마지막 순간까지 의심하지 못한 듯했다. 자신이 가장 신뢰하던 군사軍師가 초왕을 황위에 올릴 거란 것을.
* * *
백천범은 남제화가 말한 나라가 실존할 거라곤 상상도 못 했었다. 눈앞에 펼쳐진 으리으리한 궁전에 들어선 순간, 그녀는 자신이 꿈을 꾸는 게 아닌가 의심했다. 지금 단폐에서 내려오는 이는 아름다운 외모에 고귀한 기품을 지닌 여인이었다.
높게 빗어 올린 머리에는 반짝이는 장신구가 가득 꽂혀 있었고, 찰랑거리는 옷감에는 금사로 수놓은 화려한 무늬가 가득했다. 땅에 끌릴 만큼 긴 치맛자락은 그 길이가 족히 한 장은 되어 보였다.
백천범은 온몸에 돈을 휘감은 귀부인이 한 걸음 한 걸음 다가오는 모습을 빤히 지켜보았다. 그녀는 마침내 백천범 앞에 다다르더니 옅은 미소를 보였다.
“닙닙아, 드디어 돌아왔구나.”
붉은 입술 새로 나오는 부드러운 목소리는 무척 듣기 좋았다.
백천범은 그 자리에 꼿꼿이 서서 그녀를 멀뚱히 바라보았다.
옆에 있던 남제화가 웃으며 말했다.
“왜 그리 넋을 놓고 있느냐? 어서 모황母皇을 불러 보아라.”
모황은 무슨… 잠시만, 이 사람이 어머니라고? 백천범은 믿을 수 없다는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끽해야 자신보다 몇 살 더 많아 보이는 젊은 여인이 아닌가?
그녀는 그리 감격스럽지 않았다. 아무래도 어머니라는 사람이 너무 어려서인 듯했다. 유모와 달리 얼굴에 세월의 흔적이 없었고, 그저 젊고 어여쁜 여인처럼 보였기 때문일까.
그녀가 마른침을 삼키며 의심에 찬 목소리로 물었다.
“올해 연세가 얼마나 되십니까?”
귀부인은 놀란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설마 하니 그런 질문을 할 거라곤 예상하지 못한 듯했다. 놀람도 잠시, 그녀가 피식 웃음을 터뜨리며 말했다.
“이런, 어찌 모황에게 그런 걸 묻는단 말이냐?”
“모황이요?”
백천범은 별안간 무엇인가를 깨달은 듯했다.
“혹 이곳이…….”
“그래, 모황께서는 남원南原의 군주이시다.”
남제화가 거들었다.
“난 남원의 황자, 넌 남원의 무양舞陽 공주다.”
백천범은 혼이 쏙 빠진 얼굴로 허공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백 승상의 다섯째 딸이 아니던가? 갑자기 남원의 무양 공주라니?
“이 아이가 내 외손자란 말이지?”
남류청藍柳淸이 기쁨에 찬 눈으로 백천범의 품에 안긴 묵용린을 바라보았다. 그녀가 손을 뻗으며 말했다.
“자, 이 할머니한테 와 보렴.”
순간, 백천범이 경계심을 드러내었다.
“낯선 사람이 안으면 웁니다.”
남류청은 개의치 않고 웃으며 옆에 놓인 의자를 가리켰다.
“닙닙아, 앉아서 얘기하자꾸나.”
백천범은 일단 의자에 앉았다. 궁녀가 차와 다과를 가져와 탁자에 놓아 주었다. 그녀는 배가 고팠지만, 음식에는 손도 대지 않고 꼿꼿이 앉아 있었다.
“배고프지? 우선 다과 좀 들어보렴. 모황이 서둘러 어선을 올리라고 하마.”
“배 안 고픕니다.”
그녀가 묵용린을 더욱더 꽉 끌어안으며 곁눈으로 궁전의 출입문과 칼을 찬 보초를 훑었다.
오는 내내 그녀를 관찰했던 남제화는 자신도 모르게 웃음을 터뜨렸다.
“마음 놓거라. 집에 돌아왔으니 널 해할 이는 아무도 없다.”
백천범이 단호하게 말했다.
“닭과 혼인하면 닭을 따르고, 개와 혼인하면 개를 따르는 법입니다. 제게는 제 지아비가 계신 곳이 집입니다.”
남제화가 얼굴을 굳히며 목소리를 낮췄다.
“허튼 소리! 넌 남원의 무양 공주다. 묵용감과 혼인을 올렸어도 지금은 아니다. 게다가 그자는 다른 이를 황후로 맞이하지 않았느냐? 그러니 앞으로는 그자를 잊고 살거라. 모황께서 다시 좋은 배필을 구해주실 것이다. 그자보다 더 좋은 사람으로 말이다.”
“필요 없습니다!”
백천범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당신이 정말 제 어머니라면 돌아가게 해 주십시오. 나중에 제 지아비와 함께 찾아뵙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