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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유왕비초장성 (463)화 (462/1,192)

제463화

밖으로 나온 수민과 학평관은 둘 다 식은땀에 젖어 있었다. 황제가 된 이후, 묵용감은 판이하게 달라졌다. 이제 그의 앞에서는 살얼음 위를 걷듯 조심하고 또 조심해야 했다.

수민이 학평관에게 두 손을 올리며 예를 갖췄다.

“나 때문에 총관리인까지 연루되어 미안할 따름이네.”

학평관이 서둘러 답례했다.

“아이고, 수 대인. 어찌 그런 말씀을 하십니까? 애당초 소인의 본분입니다. 대인께서 말씀하지 않으셨어도 소인이 여쭤보았을 것입니다. 다만…….”

그가 고개를 내저으며 말을 이었다.

“이 일은 조급하게 생각하지 마십시오. 폐하께 꾸지람을 듣긴 했지만, 폐하께서도 이 사실을 아셨으니 마음 놓으셔도 됩니다. 폐하께서 다 생각해 두신 바가 있을 겁니다. 측왕비께서는 폐하께서 즉위하시기 전 시집온 분이시니, 훗날 궁에 들이실 새로운 분들과는 엄연히 다른 신분이시지요. 염려 마십시오. 추측건대, 사비四妃 자리는 문제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수민의 걱정은 더욱 깊어질 뿐이었다.

“봄이 되면 수녀秀女를 선발해야 하는데 폐하의 상태로 봐선… 새 조정이 들어섰을 때 기반이 불안정하면 잡음이 끊이지 않는 법일세. 폐하께 사자嗣子(대를 이을 아들)가 생기지 않으면 만천하의 잡음을 막을 길이 없을 터인데…….”

학평관이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게 말입니다. 마음의 병이 차차 나아지시기만 바랄 뿐입…….”

그때, 황제의 곁을 지키던 소복자小福子가 급히 방을 뛰쳐나왔다. 학평관이 서둘러 물었다.

“무슨 일인가?”

“폐하께서 또 두통이 심하십니다. 월규 고고姑姑를 불러오시랍니다.”

“서두르게, 어서.”

학평관이 수민에게 그만 인사를 건네려는데 수민이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

“폐하께서 두통이 있는데 어찌 의정이 아닌 궁녀를 부르신단 말인가?”

학평관이 간단히 말했다.

“모르고 계셨군요. 황제 폐하의 두통은 위 의원처럼 의술이 뛰어난 의관도 고치지 못합니다. 월규만이 가능하지요. 간단히 설명해 드릴 수 있는 일이 아니라… 먼저 들어가 보겠습니다.”

그는 허리를 살짝 굽히고 서둘러 안으로 들어갔다.

그가 말을 하다 말자 수민의 의구심은 더욱 깊어졌다. 화단을 따라 밖으로 향하는데 소복자가 월규를 데리고 급히 복도를 걸어가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월규의 손에는 광주리가 들려 있었지만 천으로 덮어 두어 무엇이 안에 있는지 알 수 없었다.

두 사람은 초조한 얼굴로 걸음을 재촉하더니 잽싸게 안으로 들어갔다.

조금 놀란 수민은 커다란 나무 옆에 멈춰 섰다. 그는 신발을 터는 척하며 몰래 안을 지켜보았다. 월규가 들어가니 황제의 시중을 드는 이들이 줄줄이 밖으로 나왔다. 누군가는 뒤채로 향했고, 누군가는 복도에 서 있었다. 그러나 아무리 기다려도 월규는 나오지 않았다.

월규는 예전처럼 허둥대지 않고 토끼를 광주리에서 꺼내 마음껏 뛰어놀게 했다. 혹여 토끼가 귀중한 물건을 건드리거나 넘어뜨릴까 봐 걱정할 필요도 없었다. 황제의 눈에 토끼들보다 더 귀한 건 없었다.

그녀는 황제의 안색을 힐끔 살폈다. 황제는 바닥에서 뛰노는 토끼들을 향해 넋을 놓고 있었다. 월규가 목청을 가다듬었다.

“폐하, 시작하겠습니다.”

아무런 반응도 돌아오지 않았다.

그녀는 대수롭지 않게 이야기를 늘어놓기 시작했다.

“강남에 도착했을 때 원래는 잠시 머물기만 할 계획이었습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영남 지역으로 떠날 생각이었지요. 그쪽은 겨울에도 춥지 않아 솜옷도 입을 필요가 없다고 해서요. 왕비께서는 겨울옷을 만들 필요 없으니 돈을 아낄 수 있을 거라면서 좋아하셨습니다.

강남에서 머문 지 얼마 되지 않아, 마마께서 그곳에 남겠다고 결정하셨습니다. 강남의 경치가 너무 좋다는 이유에서였지요. 물안개가 아른아른 피어오르는 모습도, 색색이 예쁜 꽃이 활짝 피는 것도 무척 아름답다고 하셨습니다.

그땐 마마께서 사내아이처럼 꾸미셔서 동네 꼬마들과 어울려 놀기도 하셨지요. 다들 마마를 좋아했습니다. 마마께서 집에 계실 땐 늘 아이들이 찾아와 범이 형을 찾을 정도였습니다…….”

황제는 나긋한 목소리를 들으며 의자에 등을 기대고 천천히 눈을 감았다. 구겨져 있던 미간이 조금씩 펴지기 시작했다. 그의 머릿속에 백천범의 모습이 하나씩 그려지기 시작했다. 짧은 웃옷을 입고 낚싯대를 짊어진 그녀가 사내아이들과 당당히 거리를 걷는 모습. 그녀를 둘러싼 사내아이들과 재잘거리며 활짝 웃는 모습…….

월규의 목소리가 점점 잦아들다가 마침내 말을 멈췄다. 그녀는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는 황제의 곁으로 조용히 다가가 담요를 덮어 주었다. 어느덧 편안함에 잠긴 그의 표정 앞에서, 그녀는 씁쓸한 마음을 달랠 길이 없었다. 지금 이 세상에 황제보다 가여운 사람이 또 있을까?

학평관이 월규에게 손짓을 보내자 그녀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제야 긴 한숨을 내쉰 학평관이 때마침 달려온 위중청에게 말했다.

“이제 괜찮네.”

월규는 위중청을 본체만체하며 광주리를 들고 그를 스쳐 지나갔다. 잠시 망설이던 위중청이 그녀의 뒤를 쫓았다.

“월규, 잠시만요. 할 말이 있습니다.”

월규는 발걸음을 늦추었지만, 멈추진 않았다. 그녀가 가볍게 코웃음을 쳤다.

“일개 궁녀가 어찌 의관과 말을 섞겠습니까?”

위중청이 정식으로 태의원에 들어가기 전이라, 월규는 아직 그를 의관이라고 부를 수밖에 없었다.

“지금은 누구도 폐하를 설득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도 그대만큼은 조금 다르게 대하시니 폐하를 설득해 보는 게 어떻겠습니까? 폐하께서는 마음의 병을 앓고 계십니다. 물론 마음의 병이라도 치료 방법이 아예 없는 게 아니지요. 폐하께서 협조만 하시면 분명 나아지실 거라…….”

월규가 눈을 부릅뜨며 그를 흘겨보았다.

“위 의관님. 어찌 말을 함부로 하십니까? 폐하께서 절 언제 다르게 대하셨습니까?”

그녀의 오해에 위중청이 서둘러 입을 열었다.

“제 말은 그런 뜻이 아니라…….”

“그럼 무슨 뜻입니까?”

월규가 불쾌한 기색을 드러냈다.

“아무도 원하는 이 없는 제가 운이 터서 폐하의 눈에 들었단 말입니까? 그런 소문이 나면 전 정말 살고 싶지 않을 겁니다!”

위중청이 한숨을 푹푹 내쉬었다.

“월규, 정말 이렇게까지 해야겠습니까? 우린 남쪽에서 함께 오지 않았습니까? 어찌 그리 날 원수처럼 대합니까? 내가 그대에게 잘못한 일이 있는 것도 아닌데…….”

머리끝까지 화가 치솟은 월규가 냉랭하게 웃어 보였다.

“예. 아무것도 잘못한 게 없으시지요. 신경 쓰지 마십시오. 제가 요즘 할 짓이 없어서 종일 남들을 괴롭히기만 하거든요.”

위중청은 휙 하고 가 버린 그녀의 뒷모습만 하릴없이 바라보았다. 풀이 잔뜩 죽은 얼굴로 돌아온 그를 보며 학평관이 놀리듯 말했다.

“위 의관, 또 퇴짜라도 맞은 겐가?”

위중청이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저었다.

“전생에 저와 원수지간이었나 봅니다.”

학평관이 혀를 끌끌 찼다.

“월규를 탓하지 말게. 자네가 월규의 마음을 아프게 하지 않았나? 감정적인 일은 그리 질질 끌어선 안 되는 법이네. 밥그릇에 담긴 음식을 먹으면서 솥 안에 있는 걸 넘보는 건 욕심일세. 그러니 월규가 자넬 봐주지 않는 것 아닌가.”

위중청이 코를 문지르며 멋쩍게 웃었다.

“어찌 그런 말씀을 하십니까? 지금은 폐하의 옥체가 더 중요한 것을요. 이대로 가다가 폐하께서 더는 버티시지 못할까 봐 걱정입니다. 아무리 철로 만들어진 몸이라 해도 계속 내버려 두면 무너지는 법입니다.”

“자네 말이 맞네.”

학평관의 안색이 어두워지며 연신 탄식이 흘러나왔다.

“밤에도 편히 주무시지 못하시네. 가끔 내가 폐하 곁을 지킬 때면 뒤척이시는 소리가 끊이질 않는다네. 한숨도 주무시지 못하는 듯하니 걱정일세. 가장 시급한 문제는 두통이지. 한번 두통이 오기 시작하면 끔찍한 통증을 호소하시니 어찌하면 좋단 말인가?

폐하처럼 참을성 많으신 분이 견디지 못하시고 월규를 부르실 정도라네. 하지만 매번 이런 식으로 할 수도 없는 노릇이고, 정말 걱정일세.”

위중청이 뭔가를 생각하더니 결연한 어조로 말했다.

“번거로우시겠지만 폐하께서 깨시거든 사람을 보내 알려주십시오. 결과가 어찌 되든 간에 설득은 해 봐야 하니까요.”

학평관이 뒤채로 들라는 손짓을 해 보였다.

“위 의관만 믿겠네.”

* * *

천천히 눈을 뜬 황제, 묵용감은 화려한 장식장을 보며 침음을 흘렸다. 그가 그나마 편히 잠을 청할 수 있는 건, 월규에게 오수진의 이야기를 들을 때뿐이었다. 그렇게 잠들면, 꿈속에서 월규가 설명했던 장면이 생생하게 펼쳐졌다.

길가에 선 그는 백천범의 당찬 모습을 지켜보았다. 씩씩하게 걸음을 내딛는 그녀의 뒤를 바짝 뒤쫓으며, 그녀의 모습을 원 없이 볼 수 있었다. 그녀는 이따금 초원에서 연을 날리거나 개울에서 낚시를 했고, 어떤 때는 신나게 뛰어놀며 봄바람처럼 해맑게 웃었다. 그럴 때면 그의 입가에도 어느새 미소가 슬며시 떠올랐다.

그러나 잠에서 깨면 모든 장면이 산산이 흩어지곤 했다. 꿈이 찬란하게 빛날수록, 깨어났을 때 더욱더 짙은 공허함과 쓸쓸함만이 그의 곁을 지켰다.

그의 인기척을 느꼈는지 문 너머로 학평관의 목소리가 들렸다.

“폐하, 일어나셨습니까?”

그가 짤막하게 대답하며 물었다.

“몇 시진이더냐?”

학평관이 조용히 안으로 들어왔다.

“오시입니다. 어선御膳을 올리라고 할까요?”

황제가 눈을 감았다. 오시라……. 한 시진이나 잤으니 충분했다. 그는 담요를 걷고 자리에서 일어나 손발을 풀었다.

“배가 고프지 않으니 천천히 준비하라 이르거라.”

학평관이 조심스레 말했다.

“폐하, 위 의관이 뒤채에서 기다리고 있습니다. 잠시 들이시겠습니까?”

황제가 책상 앞에 앉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들라 하라.”

학평관이 서둘러 밖으로 나가고, 때마침 기홍이 방금 우려낸 차를 내왔다.

“폐하, 차를 내왔습니다.”

황제가 차를 받아들고 찻잎을 걷어내며 물었다.

“영구는 돌아왔느냐?”

기홍이 얼굴을 붉히며 말했다.

“영 대인의 일을 어찌 소인에게 물으십니까? 가 대인께 물으셔야지요.”

궁에 들어온 이후, 영구와 가동은 황제의 곁을 지키는 대도호위帶刀侍衛로 임명되었고 각각 금군의 정총령과 부총령을 겸임했다. 영구는 이품 고관, 가동은 종이품 고관이었다.

가동은 부총령이긴 해도 할 일은 영구보다 더 많았다. 영구는 보통 황제의 곁을 지켰지만 요 며칠은 황제가 지시한 일을 처리하느라 좀처럼 얼굴을 볼 수 없었다.

궁은 밖과는 다르게 모든 일에 규율이 있어서, 조금의 소홀함도 용납하지 않았다. 그래서 기홍은 꼬박꼬박 그들을 대인이라고 부를 수밖에 없었다.

기홍을 포함한 시녀들은 입궁 후, 교육을 담당하는 마마嬷嬷에게 규율을 다시 배워야 했다. 하지만 신분이 남달랐기 때문에 입궁하자마자 곧장 사무를 보는 고고가 되었다. 기홍은 차와 어선을, 월규는 회계를 담당했다.

가정을 꾸린 녹하는 규율대로라면 궁에서 보직을 맡을 수 없었다. 그러나 황제에게 무릎을 꿇고 애걸복걸한 끝에, 황제는 그녀를 내무부에 있는 침수감針綉監 마마로 임명했다. 어쨌든 각자 자신의 능력을 발휘할 수 있는 곳에서 일을 맡게 된 셈이었다.

곧 위중청이 안으로 들어와 무릎을 꿇었다.

“신, 황제 폐하를 뵈옵니다.”

“일어나거라.”

황제가 담담히 말했다.

“무슨 일로 짐을 찾아왔는가?”

위중청이 자리에서 일어나 두 눈을 내리깐 채 대답했다.

“신, 폐하께 사직을 청하러 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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