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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유왕비초장성 (462)화 (461/1,192)

제462화

고개를 비스듬히 꺾어 그녀를 바라보던 남제화가 곧 웃음을 터뜨렸다.

“역시 그자의 말이 맞구나. 넌 참 재미있는 사람이야.”

“그자라니요?”

남제화는 대답 대신 몸을 일으켜 세워 향로에 향을 더 꽂았다. 다시 자리에 앉은 그는 이제 막 잠이 든 묵용린을 바라보았다.

“넌 그를 보고 싶어 한다지만, 그는 널 보고 싶어 하지 않는 모양이다.”

“그게 무슨 말입니까?”

“너무 오랜 시간 갇혀 지냈으니 바깥소식은 전혀 모르는구나. 네 부군은 군대를 이끌고 북진하여 임안성을 함락했고 스스로 황제에 자리에 올랐다. 그리고 다른 이를 황후에 앉혔지. 네가 돌아간다 한들 부질없다. 그러니 이 오라비와 함께 집으로 가자꾸나. 우리야말로 네 진정한 가족이다.”

백천범은 머리를 한 대 맞은 듯 어안이 벙벙했다.

“뭐라고요? 초왕이 황제가 되었다고요? 태자는요? 대체 언제 그런 일이 있었단 말이에요?”

남제화는 순간 멍한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지금 그게 더 중요하단 말인가? 다른 이가 황후의 자리를 차지했다는 말은 아무렇지도 않고?

“초팔일에 즉위식을 올려 천하에 알렸다. 태자는…….”

남제화가 코웃음을 쳤다.

“백번 죽어 마땅하지!”

산굴에 붙잡혀 온 지 얼마 지나지 않았을 때, 백천범은 자신을 이곳에 가둔 배후를 알 것만 같았다. 다만 확신할 수 없었고, 믿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남제화의 반응을 보니, 그녀의 추측대로인 모양이었다.

사실 몇 가지 사실만 유추해 봐도 쉽게 눈치챌 수 있었다. 태자는 초왕을 움직이려고 그녀를 붙잡았으리라. 하지만 그가 초왕을 너무 간단히 생각한 게 분명했다. 초왕은 결국 태자의 음모를 알아차렸고 그를 죽인 뒤 스스로 황제의 자리에 올랐을 터였다.

그녀는 누구보다 묵용감을 잘 알았다. 그는 사실 너무나도 마음이 약했고, 가족들에게는 더욱더 그러했다. 그 때문에 늘 대황자와 태자가 원하는 대로 두었지만, 사람의 욕심은 끝이 없는 법이었다. 그를 그렇게까지 몰아세우니 결국 제 손으로 형제를 죽였을 테지. 그에게는 상상할 수 없을 만큼 고통스러운 일이었으리라…….

그녀가 남제화의 손을 덥석 잡았다.

“제발 부탁입니다. 돌아가게 해 주세요. 지금 왕야 곁엔 제가 필요해요. 반드시 제가 있어야 합니다.”

남제화가 미간을 찌푸렸다.

“방금 한 말은 듣지 못한 것이냐? 다른 이를 황후의 자리에 앉혔대도. 더는 네가 머무를 자리가 없다는 뜻이다. 무엇 하러 눈치를 보며 살아간단 말이냐, 이 오라비와 함께 집으로 돌아가자.”

“아뇨, 가야 합니다. 황제든 왕야든 그분은 제 지아비이십니다. 제 아이의 아버지이시고요. 전 반드시 돌아가야 합니다.”

백천범이 애처로운 얼굴로 매달렸다.

“제 오라버니가 아니십니까? 제가 가족과 뿔뿔이 흩어지는 걸 지켜만 보실 셈입니까?”

분명 가까이에 있는데 그녀의 시야에서 남제화의 얼굴이 흐릿하게 번져갔다. 꼭 그가 점점 멀어지는 듯했다. 백천범은 다급히 손을 뻗어 그를 붙잡으려 했다.

“가지 마세요……. 제발 저 좀…….”

그녀의 몸이 앞으로 쏠리더니 남제화의 품에 쓰러졌다. 남제화는 그녀를 자세히 살핀 뒤, 조심스레 의자에 눕히고 담요를 덮어 주었다.

“이 오라버니와 함께 가자. 집에 가면 다 괜찮아질 것이다.”

고개를 돌려 묵용린을 바라본 그는 아이의 얼굴을 한번 쓰다듬고 백천범 옆에 눕혀 주었다.

그가 별안간 재채기를 하더니 또 한 차례 웃음을 터뜨렸다. 묵용린에게 담요를 덮어 주던 그가 코를 비비며 중얼거렸다.

“설마 네 어머니가 자면서 내 욕을 하는 것이냐?”

* * *

아침 일찍부터 사앵앵의 잔소리에 시달린 사장풍은 폭발하기 직전이었다. 그는 사앵앵이 어린 시절 음파공音波功(공간을 울려 소리를 전달하는 기술)을 배운 게 아닌지 의심스러웠다. 그녀의 붉은 입술이 움직일 때마다 그의 귀청이 쩌렁쩌렁하게 울렸다.

“대체 남제화 그자는 무슨 수작이랍니까? 떠난 지가 언젠데 아직도 돌아오질 않다니요. 외상값을 나 몰라라 하고 도망친 거 아니에요? 일로 다 갚을 거라더니, 밖에 산더미처럼 쌓인 저 나무 좀 보세요. 물독은 또 어떻고요. 빈 독만 족히 열 개는 될 겁니다.

빨리 돌아오지 않으면 정말 먹고살기 힘들어진단 말이에요. 다른 사람이 해도 그만이지만, 그 사람만큼 일을 잘하는 사람은 없어요. 무술을 연마했으니 넘치는 게 힘이라고요. 다른 사람을 시키니 효율이 절반도 채 되지 않는단 말이에요. 점원들 원성이 얼마나 자자한 줄 아세요?”

그녀는 허리에 손을 얹고 쉴 새 없이 호통을 쳤다.

“어휴, 내 말 듣고 있어요? 당신도 마찬가지예요. 사내대장부가 일은 않고 맨날 검술 아니면 멍하니 앉아 있으니……. 신선이 되고 싶어요? 그래서 지금 도라도 닦는 거예요? 당신 얼굴 좀 보세요. 그렇게 하얗더니, 이제는 당신이 문 앞에 서 있으면 바위가 있다고 다들 착각할 지경이에요. 어찌나 울퉁불퉁 거친지 내가 다 망신스러울 정도라고요. 계속 이런 식이면 쫓아낼 줄…….”

사장풍이 곧장 맞받아쳤다.

“그래 주면 참 고맙습니다.”

“흥! 꿈 깨세요!”

사앵앵이 있는 힘껏 콧방귀를 뀌었다. 여전히 죽상인 그의 얼굴을 보고 있으면 부아가 치밀었다.

“효를 다하는 것이라 해도 이만하면 되었잖아요? 대체 왕비가 당신 어머니예요, 아버지예요? 삼년상이라도 지낼 생각이에요? 초왕야도 당신처럼 효심이 깊진 않겠어요. 그가 한 일을 보세요. 임안성까지 쳐들어가서 직접 황제의 자리에 올랐잖아요.

이제 곧 후궁을 수도 없이 들이고 옛일은 잊겠지요. 다들 그렇게 앞날을 보며 살아간다고요. 과거에 파묻혀 자신을 못살게 구는 건 바보들이나 하는 짓이에요.”

사장풍이 냉랭하게 말했다.

“뭣 하러 바보한테 시집을 왔습니까.”

“…하, 정말 열 받아서 못 살겠네.”

그녀는 주변을 둘러보며 손에 잡을 만한 물건을 찾았다. 사장풍은 정말 사람을 열 받게 하는 데 재주가 탁월했다. 그는 한마디로 그녀의 정곡을 찌르고 상처를 주곤 했다. 매번 참고 넘기니, 그녀가 얼마나 무서운 사람인지 모르는 모양이었다.

“찾지 마십시오. 그러다 또 손을 삐면 어찌하려고.”

사앵앵이 화를 참지 못하고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다. 지난번엔 방망이를 집어 들어 그를 때렸는데, 그가 그녀의 팔을 살짝 비트는 바람에 눈물을 쏙 빼고 말았다. 그녀가 씩씩거리며 삿대질을 했다.

“이봐, 사장풍. 언젠간 제대로 본때를 보여 줄 테니 두고 봐!”

사장풍에게는 익숙해질 대로 익숙해진 모습이었다. 그는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며 곧장 침대로 향했다. 몸을 눕힌 그가 이불을 머리끝까지 뒤집어쓰자, 그제야 방 안이 고요함에 잠겨 들었다.

* * *

황제의 말이 끝나자 수민은 인사를 올리고 나갈 채비를 했다. 그때, 학평관이 들어오더니 예를 갖춰 인사를 올렸다.

“폐하, 여쭤볼 게 있습니다. 바깥의 초왕부는 어찌 처리하실 계획이십니까?”

황제가 찻잔을 들어 한 모금 들이켜더니 아무렇지 않게 답했다.

“폐쇄하거라.”

학평관이 조금 망설이다 대답했다.

“실은 아직 머무르는 이가 있어서 말입니다.”

황제의 얼굴에 놀라움이 스쳤다.

“누가 그곳에 있단 말이냐?”

학평관이 허리를 숙이고 조심스럽게 말을 이어갔다.

“측왕비께서 계십니다. 더는 왕비 마마가 아니시지만, 폐하께서 봉호를 내리지 않으시어… 즉위를 하신 후로 눈코 뜰 새 없이 바쁘심을 소인도 잘 압니다. 그래도 말씀을 드려야 할 것 같아서 말입니다. 측왕비께서 계속 궁 밖에 계시는 것도 옳지 않으니 마땅히…….”

묵용감이 손을 내저어 그의 말을 끊었다. 그로서도 의아하긴 했다. 그간 날마다 수민을 만났는데 단 한 번도 수원상이 떠오르지 않았으니. 묵용감은 잠시 고민하다 입을 열었다.

“계속 그곳에 머물라고 하거라.”

학평관은 수민의 안색을 힐끔거리다 눈을 내리깔며 대답했다.

“예, 소인 명 받잡겠나이다.”

수민은 조금 난처해졌다. 그간 수원상의 일로 오랜 시간 고민했지만, 직접 이 말을 꺼내기도 적절치 않은 터였다.

요즘 그는 황제의 두터운 신임을 얻고 있었다. 황제는 거의 매일 그를 남서방으로 불러 공무를 논했다. 그런 와중에 수원상 이야기를 꺼내면 그간의 공로로 딸아이의 앞길을 거래하려 한다는 의심을 살까 두려웠다.

그래서 그는 학평관을 찾아가 수원상을 언급해 달라고 부탁했다. 그가 황제와 함께 있을 때 수원상 이야기를 꺼내면 어느 정도 그의 체면을 봐주지 않겠는가. 어쩌면 수원상의 입궁을 허락할지도 모른다는 기대가 있었다. 그러나 계속 저택에 머무르라니… 수민에게는 예측하지 못한 답변이었다.

그가 서둘러 예를 갖춰 인사를 올렸다.

“폐하, 노신은 이만 물러가 보겠습니다.”

황제의 눈빛이 칼날처럼 그의 얼굴을 훑었다.

“수 대인, 앞으로 할 말이 있거든 짐에게 직접 하게. 다른 사람의 입을 거칠 것 없네.”

깜짝 놀란 수민이 황급히 무릎을 꿇었다.

“폐하, 소인이 잠시 사리 분별을 하지 못하였습니다. 죽어 마땅한 죄를 저질렀나이다!”

옆에 서 있던 학평관도 서둘러 무릎을 꿇고 용서를 빌었다.

황제의 목소리는 차갑고 단조로웠다.

“짐은 다른 이들에게 놀아나는 걸 가장 싫어하는 사람이네. 그대의 공을 생각해서 한 번은 용서하겠지만, 또 이런 일이 있거든 짐도 사정을 봐주지 않을 테니 그렇게 아시게.”

“예, 잘 알겠습니다.”

어느새 수민의 이마는 땀으로 흥건했다. 그가 바닥에 머리를 힘껏 찧으며 말했다.

“망극하옵니다, 폐하.”

“다들 그만 물러나게.”

수민과 학평관은 사면이라도 받은 듯 황공해하며 자리를 떴다.

황제의 시선이 창가를 향했다. 따사로운 햇살이 창살 사이로 비스듬히 내리쬐어 기다란 틈새를 만들어 냈다. 수많은 먼지가 그 틈을 떠다녔다. 어떤 것들은 위로 솟아올랐고 어떤 것들은 아래로 가라앉았다…….

그는 조금 전 일을 되새겨 보았다. 수원상이 두 해 동안 저택에 남아 있었다는 건 그에게도 뜻밖이었다. 다만 수민이 있었으니 그리 힘들게 살진 않았을 터였다. 아쉽게도… 수원상의 생각이 틀렸을 뿐. 그는 그녀가 원하는 걸 줄 수 없었다.

먼 길을 아프게 돌고 돌아왔는데, 누군가 그 자리를 지키고 있다는 건 감격스러운 일이었다. 하지만 어째서… 모든 이는 다 그대로인데 어째서 그녀만 없단 말인가…….

황제는 머리를 스치는 강렬한 통증을 느꼈다. 꼭 머릿속이 갈기갈기 찢어지는 듯했다. 그는 손가락으로 힘껏 자신의 관자놀이를 문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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