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61화
백천범은 사람과 사람 사이엔 묘한 분위기가 흐른다고 믿었다. 특히 어린아이일수록 그 분위기를 잘 감지하는 듯했고, 만약 아이가 누군가를 향해 활짝 웃는다면 악한 사람은 아닐 터였다.
묵용린을 안고 있는 사람은 젊은 청년이었다. 짙은 눈매에 훤칠한 체격을 가진 그는 몸에서 남다른 기개를 내뿜었다.
바닥에는 열 구가 넘는 시체가 널브러져 있었다. 그중 여섯 구는 백천범을 붙잡은 보초와 같은 옷을 입고 있었다. 그녀는 이곳에 머무는 동안 자신을 감시하는 이들을 전부 다 외웠는데, 그 수가 많진 않았다.
부인과 노파를 포함해 총 열 명이 산굴을 지키고 있었다. 이미 죽은 이가 여섯, 그녀를 인질로 잡은 이가 하나, 조금 전 그녀가 두 다리를 베어 쓰러진 이까지 합치면 남은 사람은 부인과 노파뿐이었다.
젊은 청년이 데려온 병력의 시신이 더 많긴 했지만 남은 병사도 훨씬 많았다. 열 명 넘는 병사들이 달을 에워싼 별무리처럼 청년을 지키고 있었다.
청년이 백천범을 바라보며 활짝 웃더니 듣기 좋은 음성으로 말했다.
“겁먹지 말거라. 널 구하러 왔으니.”
백천범을 인질로 잡은 보초는 주검이 된 동료들을 바라보며 가망이 없다는 사실을 알아차린 듯했다. 백천범의 목에 칼을 가져다 댄 그가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날 보내 주거라. 그렇지 않으면 이자를 죽이겠다.”
청년이 옅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그럴 순 없지. 저 애가 죽게 내버려 두는 일은 더더욱 없을 테고.”
그가 양옆을 바라보며 눈짓을 보내자 다섯 명 정도 되는 병사들이 검을 들고 천천히 다가왔다.
보초가 큰소리로 외쳤다.
“멈춰, 안 그럼 정말 죽일 테니!”
그가 손끝에 힘을 주자 백천범의 피부에 붉은 상처가 생겼다. 그 광경에 병사들이 곧장 발걸음을 멈추었다.
“감히 상처를 내?”
청년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네 죽음은 다른 이들보다 고통스러울 것이다.”
백천범에게 이 정도 고통은 정말 아무것도 아니었다. 그녀는 보초의 주의가 쏠린 틈을 타, 이를 악물고 늘어뜨린 손을 천천히 들어 올렸다. 얼핏 보이는 보초의 검은색 요대가 차츰 가까워지고 있었다.
그녀는 얼굴색 하나 변하지 않고 천천히 움직였다. 그녀를 마주 본 젊은 청년 외에는 무엇을 하는지 누구도 눈치채지 못했다.
별안간 청년이 보초를 향해 활짝 웃어 보였다. 어리둥절해진 보초가 입을 열려는 순간, 허리춤이 헐렁한 느낌과 함께 바지가 쑥 흘러내렸다.
그는 본능적으로 바지를 추켜올리기 위해 손을 내렸고, 그 틈에 백천범이 잽싸게 몸을 틀어 빠져나왔다. 보초가 바지를 올리기도 전, 몇 자루의 칼이 그의 몸을 관통했다. 그는 당혹스러우면서도 고통스러운 표정으로 숨이 끊어졌다.
청년이 몸을 틀어 묵용린을 품에 끌어안았다. 아이에게 잔인한 장면을 보여 주지 않으려는 듯했다.
백천범은 서둘러 청년에게 달려가 묵용린을 데려왔다. 아이를 품에 안는 순간, 모든 게 다 지나갔다는 안도감이 밀려왔다.
“왕야께서 보내신 분들입니까?”
그녀는 아이의 손과 발에 상처가 나진 않았는지 유심히 살펴보며 청년에게 물었다.
청년이 여전히 웃으며 모호한 답을 내놓았다.
“어쨌든 이렇게 찾지 않았느냐.”
백천범이 재차 물었다.
“이곳엔 부인과 노파도 있습니다. 그들은 찾았습니까?”
청년이 그녀와 함께 걸어 나가며 말했다.
“이미 죽었다.”
순간 백천범은 마음이 편치 않았다. 적이긴 해도 부인과 노파는 싫지 않았다. 함께 생활하면서 정성을 다해 자신과 아이를 보살펴 주었기 때문이다. 그녀가 가장 증오한 이는 배후에 숨어 모습 한번 드러내지 않은 납치범이었다.
“노파와 부인까지 죽였단 말입니까?”
“내가 어찌 그리했겠느냐?”
청년이 어깨를 들썩이며 억울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난 여인은 죽이지 않는다. 특히 아무런 무기도 없는 여인은 더더욱.”
얘기를 나누다 보니 어느새 햇살이 내리쬐는 밖으로 나왔다. 강한 햇볕에 백천범은 눈을 제대로 뜰 수 없었다. 그녀가 서둘러 손으로 아이의 얼굴을 가렸다. 한참 동안 눈살을 찌푸리며 주위를 살펴본 끝에, 백천범은 자신이 기이한 산꼭대기에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풀이라고는 전혀 없고, 전부 기이한 괴석이 자리잡고 있었다.
산 아래로 내려가는 산길은 돌이 반짝거릴 만큼 닳아 있었다. 먼 곳을 바라보니 드넓은 초원과 낮은 가옥들이 눈에 들어왔다. 아무래도 시골 마을인 듯했다. 그보다 더 먼 곳을 바라보니 누런빛이 펼쳐졌는데 거리가 먼 탓에 형체가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이렇게 기이한 곳은 정말 난생처음이었다. 그녀가 청년에게 물었다.
“대체 여기가 어딥니까?”
청년이 자신의 두봉을 벗어 그녀에게 걸쳐 주더니 모자까지 꼼꼼히 씌워 주었다. 이내 얇은 손수건을 꺼내 묵용린의 얼굴에 덮어 주기까지 했다.
“이곳은 화염산, 동월국 서북 지역이다.”
“서북이요?”
백천범이 화들짝 놀랐다. 서북이라면, 강남에서 멀리 떨어진 곳이 아닌가!
“하고 싶은 말이 있거든 내려가서 하자꾸나.”
청년이 울퉁불퉁한 산길을 가리키며 말했다.
“길이 미끄러우니 조심해야 한다.”
그가 조심스레 바깥쪽으로 걸으며 그녀를 보호했다.
“춥진 않으냐?”
“이곳은 따뜻하더군요. 춥진 않습니다.”
“지금은 활동을 멈추긴 했지만 이곳은 화산이다. 그래서 별로 춥지 않았겠지. 다만 내려가면 조금 추울 것이다. 마차에 난로와 솜옷을 준비해 두었으니 걱정 말거라. 몸이 얼 일은 없다.”
백천범은 그의 말을 듣는 내내 위화감이 들었지만, 정확하게 짚어 낼 수가 없었다. 그녀가 그저 웃음을 흘렸다.
“정말 세심히 준비하셨군요.”
“당연히 그리해야지.”
청년이 옅은 미소를 지었다.
“어찌 너희를 추위에 떨게 내버려 두겠느냐.”
백천범은 그와 거리를 두려고 했지만, 청년은 그녀를 붙잡았다.
“그쪽은 위험하다. 암석이 풍화되었으니 닿기만 해도 돌이 깨질 수 있다.”
백천범은 그의 팔을 내려다보았다. 하얗고 기다란 팔은 햇볕을 쬐어가며 고생한 사람의 팔이 아니었다. 그녀가 발걸음을 멈추며 얼굴을 차갑게 굳혔다.
“대체 누구냐?”
“널 구하러 왔대도.”
“왕야가 보낸 사람이 아니지?”
청년이 경멸에 찬 미소를 지었다.
“묵용감을 말하는 것이냐? 묵용감이 나에게 명령을 내릴 순 없지.”
백천범의 두 눈에 경계심이 차올랐다. 그녀가 그를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하면 대체 누구란 말이냐? 나와 아이를 어디로 데려가려고?”
“그리 원수 보듯 쳐다보지 말거라, 동생아.”
청년은 어이가 없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난 네 오라버니다.”
“내게 오라버니가 있긴 하지만, 그게 당신은 아니다.”
“마차에 타서 얘기하자꾸나.”
청년이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세워진 마차를 가리켰다.
“이곳은 햇빛이 강하니 오래 서 있으면 아이에게 좋지 않다.”
백천범은 두봉으로 묵용린을 감싸고는 몸을 틀어 햇빛을 막아 주었다.
“제대로 말하지 않으면 아무 데도 가지 않을 것이다.”
“좋다.”
청년이 어쩔 수 없다는 듯 한숨을 내쉬었다.
“내 이름은 남제화. 네 친오라버니다. 우린 같은 어머니에게서 태어난 사이지.”
다른 사람에게서 어머니의 이야기를 듣는 건 지금이 처음이었다. 그녀가 눈을 가늘게 뜨며 그를 바라보았다.
“당신이 내 오라버니라고?”
“그래, 정말이다. 네 왼쪽 어깨에 붉은 점이 있지? 천범이라는 이름은 어머니께서 지어주신 이름이다. 넌 어릴 때 닙닙囡囡(어린아이에 대한 친근한 호칭)이라고도 불렸지.”
백천범이 흠칫 놀랐다. 유모만이 그녀를 닙닙이라고 불렀었다. 대체 저자가 그걸 어찌 알았단 말인가…….
“어머니께서 네게 사고가 생긴 걸 아시고 크게 걱정하셨다. 해서 나를 보내…….”
백천범이 그의 말을 끊었다.
“어머니가 살아 계신다고? 그럼 내가 백씨 집안에 있다는 걸 알면서도 왜 오지 않으셨단 말이냐?”
“그게.”
남제화가 코를 만지작거렸다.
“어머니께서도 부득이한 사정이 있었다. 천천히 설명해 주마.”
그가 먼저 앞으로 향하라는 손짓을 해 보였다.
“이제 가도 되겠지? 난 네 친 오라버니다. 내가 어찌 널 해하겠느냐? 힘들 텐데 어서 마차에 타자꾸나.”
백천범은 이 상황이 얼떨떨할 따름이었다. 갑작스레 어머니와 오라버니라니! 예상치 못한 존재가 등장해 그녀의 머릿속을 뒤죽박죽으로 헤집어 놓고 있었다. 그녀는 반쯤 넋이 나간 얼굴로 남제화를 따라 산을 내려갔다.
묻고 싶은 말이 너무나 많았지만, 한편으로는 무언가를 놓치고 있는 것 같기도 했다. 대체 뭐가 잘못된 것이란 말인가…….
마차는 매우 컸다. 밖에서 볼 땐 조금 소박해 보였는데, 안으로 들어가니 전혀 다른 세상이었다. 내부에는 두꺼운 금색 천을 둘렀고, 한쪽엔 정교하게 조각한 구리 향로를 놓아 두었다.
향로는 연기를 피워 올리며 좋은 향기를 퍼트렸다. 반대편에는 작은 화로가 놓여 있었고, 그 안에서 숯이 붉게 달아오르는 중이었다. 은은한 불빛이 퍼졌지만, 연기는 나지 않았다.
의자도 꼭 침대처럼 널찍한 데다, 부드러운 깔개를 덧대었다. 마차 한가운데 놓인 붉은 탁자 위엔 희미하게 그려진 꽃무늬와 복福 자가 도드라졌다.
세상 물정에 훤했던 백천범이었지만 눈앞의 화려한 풍경은 조금이나마 그녀를 주늑 들게 했다. 그녀가 어리둥절한 얼굴로 남제화에게 물었다.
“어머니가 돈이 많으신가 보죠?”
남제화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어마어마하시지. 이 나라가 가진 것과 맞먹을 것이다.”
백천범은 순간 말문이 막혔다. 대체 돈이 얼마나 많길래 저런 말을 할 수 있단 말인가? 어쩌면 묵용감보다 많을지도 몰랐다.
어디에서 났는지 남제화가 갑자기 찬합을 꺼내더니 층층이 뚜껑을 열었다.
“배가 고프진 않고? 좀 먹어 보겠느냐?”
찬합마저도 정교하고 예뻤다. 반짝거리는 검은색 찬합 안에는 알록달록한 색의 간식거리가 꽃송이 모양으로 담겨 있었다. 한눈에 봐도 격식을 중시하는 모양새였다. 소담스럽게 담은 간식거리에 백천범은 태자를 떠올렸다. 태자도 이런 사소한 것까지 격식을 갖추었는데.
그녀가 눈을 내리깔고 찬합을 밀어냈다.
“배 안 고파요. 안 먹을래요.”
“날 믿지 못하는구나.”
남제화가 쓴웃음을 지었다.
“난 네 오라버니가 맞다니깐. 틀림없는 사실이다.”
백천범이 단호하게 말했다.
“절 강남으로 데려다주면, 그때 믿을게요.”
남제화가 고개를 갸웃거리더니 물었다.
“어머니를 만나고 싶지 않더냐? 어머니는 하루도 빠짐없이 널 그리워하셨다.”
“전 올해로 열일곱이 되었습니다. 십칠 년 동안 절 찾을 수 있었는데도 찾지 않으셨지요.”
“말하지 않았느냐? 어머니께서도 부득이한 사정이 있으셨다고.”
“저도 지금 부득이한 사정이 있습니다.”
“부득이한 사정이 무엇이길래?”
“제 지아비를 만나야 합니다. 보고 싶어 죽겠으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