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60화
묵용감은 눈길을 줄 가치도 없다는 듯, 곧장 밖으로 향했다. 그가 나오자마자 영구에게 물었다.
“제갈겸유의 소식은?”
영구가 고개를 저었다.
“즉위식 날 도망칠 줄은 몰랐습니다. 궁문을 지키는 병력이 있었지만 오가는 이들이 너무 많았습니다. 보초들도 얼굴을 다 알지 못하니 요패만 확인하고 보낸 듯합니다. 아무래도 진작에 계획을 세워 둔 모양입니다.
하지만 마음 놓으십시오, 폐하. 아무리 교활한 자라도 모습을 아예 감출 순 없습니다. 모습을 보이는 대로 신이 곧장 잡아들이겠습니다.”
묵용감이 담담하게 말했다.
“태자 외에 모든 과정을 아는 건 그자가 유일하다. 반드시 빠른 시일 안에 잡아오너라.”
그가 하늘을 올려다보며 한숨을 쉬었다.
“며칠 더 살겠다고 내뱉은 거짓일지도 모른다만, 부디 그 말이 사실이었으면 좋겠구나. 어쨌든 희망을 가지는 것은 좋은 일이 아니더냐.”
영구가 잠시 침묵하다 물었다.
“비밀 조직이 발각되자 대부분 스스로 독을 들이켰고, 목숨을 부지한 이들도 입을 꾹 다물고 있습니다. 또한, 태자 당파인 이들은 어찌 처리할 계획이십니까?”
묵용감의 고요한 시선이 자신을 향하자, 영구가 곧바로 말을 이었다.
“왕비 마마와 세자 아기씨 사건을 조사하려면 우선 그들을 살려 두시는 게…….”
“그럴 필요 없다. 태자는 누구보다 신중한 사람이다. 그 일은 그와 제갈겸유만 알고 있을 것이다. 다른 이들이 알고 있다고 해도 아주 작은 부분에 불과할 테지. 지난번에도 조사 도중에 실마리가 끊기지 않았더냐.
비밀 조직의 병사들은 태자에게 개별 지령을 받으니 한번 끊기면 그 단서는 더 이상 이어지지 않는다. 치밀한 사람이니, 짐이 알아낼 여지를 남기지 않았을 것이다.”
영구가 하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마차는 계단 밑에서 대기 중이었다. 무예가 뛰어난 금위군들이 마차를 둘러싸고 팽팽한 경계 태세를 취하고 있었다. 영구가 앞으로 나가 발을 걷어 올렸다. 마차에 올라 푹신한 등받이에 몸을 기댄 묵용감은 두 손을 무릎 위에 올려놓고 멍한 눈빛으로 마차 내부를 바라보았다.
태자가 그를 속이지 않았길 간절히 바랐다. 만약 그를 속인 것이라면… 영원히 환생하지 못하도록 그의 뼈마저 가루로 만들어 먼지 더미와 함께 쓸어 버릴 작정이었다.
늦은 밤이라 행인은 아무도 없었고 말발굽 소리만 아스라이 울려 퍼졌다. 묵용감은 눈을 감고 생각에 잠겼다. 마차가 움직이는 대로 몸이 흔들리니 천천히 졸음이 밀려왔다. 정신이 혼미해지려는데 저 멀리 누군가의 외침이 들려왔다.
“궁문이 이미 잠겼거늘 누가 이 시간에 찾아왔단 말인가?”
한 금위군이 큰소리로 외쳤다.
“제대로 보지 못할까! 황제 폐하의 마차도 알아보지 못하고 소리를 지르다니! 목이 날아가고 싶단 말이냐, 어서 궁문을 열거라!”
궁문을 지키던 보초가 쩔쩔매며 말했다.
“용서해 주십시오, 대인. 거리가 멀어 알아보지 못하였습니다. 정말로 송구합니다.”
보초는 황급히 목청을 높였다.
“어서 문을 열거라. 폐하께서 돌아오셨다!”
마차는 곧 빠르게 궁 안으로 들어갔다. 묵용감이 잠시 발을 걷고 밖을 바라보았다. 마차 뒤로 한 무리의 병사들이 우르르 무릎을 꿇고 있었다. 그는 손을 내리고 다시 푹신한 등받이에 몸을 기댄 뒤 눈을 감았다.
고작 이런 것들이 태자가 한평생 갈망하던 드높은 황권이리라…….
* * *
저들이 무언가를 알아차기라도 했는지, 최근 들어 백천범은 아이를 안고 문 앞에 잠시 서 있는 일마저 할 수 없었다. 보초들은 그녀를 보기만 하면 검을 뽑아 위협했다. 벽에 새겨 넣은 표시를 바라보던 그녀는 정말 울고 싶은 심정이었다.
해도 해도 너무한 사람이 아닌가. 이런 곳에 그녀와 어린 아기를 가두고 모습도 보이지 않는단 말인가. 게다가 철통같은 감시를 도무지 빠져나갈 방법이 없었다.
날을 헤아려 보니 이미 새해가 지났고, 린아는 구 개월에 접어들었다. 이제 린아는 혼자 일어날 수 있었고 기는 속도도 아주 빨랐다. 그녀는 종종 린아를 바닥에 내려놓고 기는 연습을 하게 했다.
몇 가지 물건을 이곳저곳에 두고 순서대로 가져오게 하는 놀이도 빠트리지 않았다. 순서가 틀리면 처음부터 다시 하기도 했다.
어찌나 영민한지, 린아는 그녀의 말 대부분을 알아들었다. 린아는 대체로 수월하게 성공해 냈고, 그때마다 백천범은 입을 맞추며 한바탕 칭찬을 해 주었다.
가끔 그녀는 묵용린이 거친 땅에서 기는 연습을 하게끔 바닥에 깔린 물소 가죽을 걷어낼 방법을 고민했다. 손에 신발을 끼워 주고 무릎에 두꺼운 천을 덧대 말처럼 신나게 누비는 모습을 상상하기도 했다. 심지어 자신이 보초병을 막아서고, 묵용린만 도망치게 하는 방법까지도.
하지만 스스로 생각해도 우스꽝스러운 계획이었다. 이렇게 어린아이가 어찌 도망을 칠 수 있을까. 설령 혼자 도망친다 해도 먹을 게 없으니 굶어 죽고 말 터였다.
이미 몇 차례 도망을 치려고 시도해 보았지만 번번이 실패로 돌아갔고, 보초들의 감시만 삼엄해졌다. 그러나 그녀는 한 번도 좌절하지 않고, 다음을 기약했다.
부인은 밥을 가져올 때마다 묵용린에게 쌀죽을 먹이라고 권했다. 오래전부터 얘기했던 문제였지만, 백천범의 반응은 감탄스러울 만큼 한결같았다. 그녀는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고 그릇을 들어 자신의 입으로 곧장 가져갔다.
부인도 이제 포기했는지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리곤 빈 그릇이 나오면 정리해 밖으로 나갔다. 백천범은 문득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노파는 어째서 보이지 않는단 말인가? 밖을 몰래 살펴보니 보초가 한 명뿐이었다. 지금이야말로 하늘이 돕는 기회가 아닐까.
그녀는 묵용린에게 옷을 몇 벌이나 껴입히고 자신도 껴입었다. 묵용린을 그녀의 몸에 꽁꽁 동여맨 뒤, 준비한 물건을 챙겨 넣었다. 어쨌든 기회가 온 이상, 실패하더라도 시도는 해 봐야 했다.
문을 나서기 전, 그녀가 의미심장한 표정으로 묵용린을 바라보았다.
“린아, 아직 말은 못 해도 조금 컸으니 이 어머니가 하는 말 이해하지? 기회가 왔으니까 같이 도망치자. 만약 너 혼자 도망치라고 해도 무서워하지 말고 최대한 빨리 기어가야 해.
이 어머니가 꼭 뒤쫓아 갈게. 이곳을 벗어나기만 하면 강남으로 돌아갈 거야. 아버지가 계신 곳으로 돌아가면 우리 세 식구가 다시 한데 모이는 거야.”
묵용린은 커다란 눈으로 그녀를 빤히 바라보더니 알아들을 수 없는 옹알이를 했다. 꼭 그녀의 말에 대답하려는 모양새였다.
“착하지, 우리 아들!”
백천범이 묵용린에게 입을 맞추었다.
“네가 다 알아들을 줄 알았어.”
그녀는 조심스레 문 앞으로 다가가 발 틈으로 밖을 내다보았다. 여전히 보초 한 명만 문 앞 오른쪽을 지키고 있었다. 그녀는 묵용린을 바라보며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소매에서 흙덩이를 꺼냈다. 냅다 밖으로 뛰어나가 소리를 지른 그녀가 흙덩이를 힘껏 던졌다.
보초는 깜짝 놀라긴 했지만 반응만큼은 민첩했다. 지금껏 몇 번을 당했으니, 그녀가 던지는 게 무언지 잘 알고 있었다. 그는 피하지도 않고 곧장 그녀를 잡으러 달려왔다. 그러나 오늘 백천범은 단단히 준비를 마친 상태였다. 그녀가 품에서 커다란 뭉텅이를 꺼내 그에게 던졌다.
“세자를 받아 주시오!”
그 말에 보초는 달려들다 말고 몸을 틀어 둥근 뭉치를 받았다. 백천범은 그사이 앞으로 질주했다. 안타깝게도 얼마 가지 못해 맞은편에서 또 다른 보초와 마주쳤다. 백천범은 흙덩이를 꺼내 힘껏 던졌지만, 역시 헛수고였다. 그녀가 품에서 커다란 뭉치를 꺼내 비스듬히 던지며 소리쳤다.
“이게 진짜 세자요!”
역시나 보초는 그녀가 던진 것을 잡으러 달려갔고, 백천범은 그 틈을 타 서둘러 앞으로 향했다. 묵용린을 바닥에 내려놓은 그녀가 아이의 신발을 힘껏 내던졌다.
“어서, 앞으로 가!”
묵용린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신발을 향해 기어갔다. 백천범은 허리에서 자신이 만든 채찍을 꺼내 손에 감았다. 위력이 세진 않았지만 없는 것보단 나았다. 두 보초는 자신이 받은 게 옷 뭉치라는 사실을 깨닫고 서둘러 그녀를 뒤쫓았다.
백천범은 어두운 복도 벽에 바짝 붙어 있었다. 보초는 그녀가 아이를 안고 도망쳤을 거라는 생각에 주변을 제대로 살피지 않고 그저 앞으로 달려오고 있었다.
그들과 거리가 가까워졌을 때 백천범은 다시 한번 흙덩이를 마구 던졌다. 보초들은 얼굴을 가리고 계속 달려왔다. 백천범은 채찍을 든 손을 힘껏 내리쳤고, 운이 좋게도 한 명의 눈에 명중했다. 그가 소리를 지르며 몸을 숙이자 백천범은 기회를 놓치지 않고 칼을 빼앗아 다리를 베었다.
보초는 갑작스러운 공격에 벽에 몸을 기댔다. 어떻게든 쓰러지지 않으려고 애쓰는 모습이 가상했으나, 정신을 차릴 기회를 줄 수 없었다. 그녀가 다른 쪽 다리에도 칼을 휘두르자, 참혹한 비명과 함께 보초가 바닥에 쓰러졌다.
그사이, 다른 보초 한 명은 계속 앞으로 달려갔다. 초왕비의 목숨은 그렇다 쳐도 세자에게는 어떤 일도 생기게 둘 순 없었다.
백천범은 검을 들고 달려가며 소리쳤다.
“린아 어서, 나쁜 사람이 쫓아가니 어서 가!”
복도는 그녀의 예상보다 훨씬 더 길었다. 끝이 보이지 않는 복도를 내달리는 동안 가슴이 바짝 타들어 갔다. 묵용린은 어디로 갔단 말인가? 비틀거리며 달려가는데 아이 울음소리가 그녀의 가슴에 비수처럼 파고들었다.
더 빠르게 달려가던 그녀는 울퉁불퉁한 바닥에 발이 걸려 앞으로 고꾸라지고 말았다. 얼굴에 흙먼지를 뒤집어쓴 데다 온통 얼얼했지만, 그녀는 통증을 온전히 느낄 틈도 없었다. 백천범이 다시 잽싸게 몸을 일으켰다. 요대에 칼을 꽂고 숨이 턱끝까지 차오를 때까지 그저 달려 나갔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녀는 아이 울음소리가 멀지 않은 곳에서 들린다는 걸 알아차렸다. 또, 희미하게 싸우는 소리도 들려왔다. 누군가 기합을 넣는 듯한 소리와 칼이 부딪치는 소리가 틀림없었다. 그녀는 갑작스레 가슴속이 부풀었다. 설마 묵용감이 이곳을 찾아냈단 말인가? 틀림없다. 묵용감이리라. 그녀는 정신을 단단히 붙잡으며 큰소리로 외쳤다.
“저 여기 있습니다. 저 여기 있어요!”
그때 앞에 있던 보초가 달려들어 그녀에게 검을 휘둘렀다. 어둠 속에서 검날이 반짝이자 백천범은 재빨리 몸을 숙였고, 그 바람에 몸을 벽에 힘껏 처박다시피 했다. 이마를 세게 부딪혀 퉁퉁 부어올랐지만 그녀는 곧장 무릎을 꿇고 칼을 꺼내 앞을 향해 찔렀다.
보초는 서둘러 피했지만 그래도 다리에 상처를 입고 말았다. 수치심과 분노에 휩싸인 보초는 그녀의 팔을 있는 힘껏 짓밟았다. 팔이 부러지는 듯한 통증에 백천범은 검을 떨구고 말았다. 그제야 보초가 그녀의 목을 잡고 들어 올렸다.
여전히 앞쪽에서는 싸우는 소리가 들렸다. 하지만 싸움의 열기는 조금씩 가라앉았고, 어느샌가 아이의 울음소리도 들려오지 않았다. 보초에게 목이 졸리는 와중에도, 백천범은 오직 아이 생각에 속이 타는 듯했다.
보초는 그녀의 목을 붙잡은 채 위쪽으로 걸음을 내디뎠다. 얼마 지나지 않아 탁 트인 공간이 드러났고, 오랜만에 보는 햇살이 스며들었다. 그때, 그녀는 묵용린이 누군가의 품에 안긴 채 헤벌쭉 웃고 있는 모습을 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