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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유왕비초장성 (459)화 (458/1,192)

제459화

자리를 메운 신하들이 각양각색의 생각을 하고 있든, 묵용감은 이 자리에 없는 사람이나 다름없었다. 그의 눈은 어느새 말라 버린 우물처럼 공허했다. 몸은 연회장에 있었지만, 그의 마음과 기억은 과거에 머물고 있었다. 그녀와 춘계 연회에 참여한 그 날이 다시금 눈 앞에 펼쳐지고 있었다.

궁이 처음이었던 그녀는 커다란 눈을 반짝이며 이리저리 둘러보느라 정신이 없었다. 그때 그는 그녀에게 조금도 관심을 주지 않았기 때문에 궁에 들어오자마자 그녀를 내버려 두고 다른 이들과 어울려 술을 마셨다. 그녀는 혼자서도 의연하게 배를 채우고, 바람을 쐬러 밖으로 향했었다.

그녀를 신경 쓰지 않으려 해도, 어느새 시선은 자꾸 그녀를 좇고 있었다. 그때 그녀는 밖에서 백 귀비와 이씨 부인을 마주쳤다. 그 악랄한 여자가 그녀를 괴롭혔을 때, 그는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두 사람을 혼내지 않았던가. 어쩌면 그때부터였는지도 몰랐다. 다른 이들에겐 절대 가질 수 없는 남다른 감정이 피어났던 것은.

정작 자신만 모르고 있다가, 뒤늦게 깨달은 마음을 어쩌지 못해 우스운 짓만 실컷 하고 말았다.

아무리 생생하게 펼쳐져도, 돌아오지 않는 과거는 다시금 그의 앞에서 문을 닫아 버렸다. 이제 그는 그 시절을 추억하며 사는 수밖에 없었다…….

그가 자리에서 일어나 단폐를 내려갔다. 학평관이 얼른 나섰지만 그가 손을 내저었다. 홀로 측문을 빠져나가는 그의 뒤를 영구가 재빨리 쫓아 나갔다.

겨울밤의 찬바람은 얼굴을 스쳐가며 칼로 베어 내는 듯한 통증을 남겼다. 그러나 묵용감에게는 닿지 않는 통증인 듯, 그저 화단을 따라 천천히 걸어나갈 뿐이었다. 등불을 든 소태감은 그와 세 발짝 정도 거리를 두었다. 흔들거리는 불빛이 황제의 발 앞을 겨우 비추었다.

영구는 가장 뒤에서 조용히 황제의 그림자를 밟았다. 사실 그야말로 이런 날을 가장 고대하던 사람이었다. 그가 보기엔 대황자든 태자든 초왕만 못했다. 그의 주인인 초왕이야말로 이 천하와 사직을 다스릴 군주였다.

그렇게 고대하던 날이 왔지만, 영구의 기대만큼 기쁘지 않았다. 이 자리는 묵용감의 단 하나뿐인 행복과 맞바꾼 자리였다. 천하를 얻었지만 가장 사랑한 존재를 잃었다. 부인에게 온 마음을 쏟아부은 사내였기에, 그의 앞날은 갈 곳 없는 마음을 움켜쥐고 방황하는 나날에 불과할 터였다.

묵용감이 발걸음을 멈추자 영구는 자신이 장영전 앞에 서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문 앞에 서 있던 보초병이 곧장 무릎을 굽히고 예를 갖췄다.

“폐하.”

묵용감은 손을 내젓고 곧장 안으로 들어갔다. 내부는 고요하다 못해 스산했다. 창 앞에 서 있는 태자는 두 눈이 붉게 충혈되어 있었다. 한나절도 채 지나지 않아, 늘 고상하고 온화하던 태자는 다른 사람이 된 듯했다. 꼿꼿했던 허리는 살짝 구부러져 있었고 늠름했던 풍채와 기품도 찾아볼 수 없었다. 묵용감의 기척을 알아차린 그가 천천히 주먹을 움켜쥐었다.

“어째서 이런 짓을 한 것이냐?”

태자가 분을 못 이겨 소리쳤다.

“이유를 말해 보란 말이다!”

묵용감은 태자와 다섯 걸음 정도 떨어진 곳에 멈춰 섰다. 그는 여전히 텅 빈 듯한 표정이었다.

“알고 있을 텐데. 난 욕심이란 게 없는 사람이다. 이 상황도 내가 원하던 바는 아니었고…….”

태자가 그의 말을 끊고 소리쳤다.

“한데 왜 이런 짓을 했느냐! 대체 왜?”

“두 사람이 날 몰아세운 결과다.”

묵용감의 목소리는 한없이 건조하게 흘러나왔다.

“큰형님을 위해 천하를 평정했지만, 큰형님은 날 경계해 온갖 계략을 서슴지 않았다. 그리고 널 위해 다시 전쟁을 일으켰을 때, 넌 어찌하였느냐? 내가 유일하게 원하는 여인을 앗아가지 않았더냐. 왜? 대체 왜 날 그리 몰아세웠는가? 그저 내 가정을 꾸리고 편히 살아가게 내버려 두지 않고?”

태자의 안색이 하얗게 질렸다.

“그, 그걸 어찌 알았느냐…….”

“내 비록 마음이 약하다 해도 끌려다니기만 하는 멍청한 놈은 아니다. 금릉의 불도 네가 사람을 시켜 일부러 저지른 일임을 모를까. 남북을 나눠 통치하겠다고 약속했으면서 줄곧 임안성까지 쳐들어가길 원했지 않느냐.

해서 황보주아와 함께 내가 관저에 없는 틈을 타 왕비와 세자를 납치했지. 가동이 상대하기 쉬운 사람이라고 생각했나 본데, 크게 착각하였더군. 평소에는 실없어 보여도 지금껏 일을 제대로 처리해 냈다. 그렇지 않다면 내가 무엇 하러 그 애를 계속 곁에 둘 것 같더냐?

예리한 그 애가 이상을 감지하지 못했다는 건 결국 관저 내부에 범인이 있다는 뜻이지. 그자가 관저 보초병에 섞여 있었다면, 그날 밤 순시를 도는 척 당당히 후원에 들어올 수 있었을 터.

향을 써서 왕비와 세자를 기절시키고 밖에 있던 이에게 두 사람을 넘겨 간단히 관저를 벗어났을 테지. 외부인이 들어온 것처럼 보이려고 지붕 위와 창틀에 흔적까지 남겨놓고 말이다.”

태자는 당황스러움을 감출 수 없었다. 설마, 그가 이렇게까지 알고 있을 줄이야.

“가동이 맹렬히 뒤쫓으니 죽음을 불사한 병사가 그 높은 절벽 위에서 뛰어내렸지. 가동이 그 광경을 목격하고 내게 고하길 바랐을 테니까. 그래야 내가 믿으리라는 걸, 알고 있었겠지. 가동이 직접 본 게 아니라면 내가 모든 인원을 동원해 왕비와 세자를 찾는 데에만 열중할 게 뻔하니까.

어떻게든 두 사람이 죽었단 사실을 내가 믿게 해야 했어. 내 증오심을 이용해 임안성을 쳐들어가 묵용한을 끌어내려야 했으니. 이게 네가 세웠던 계획의 전말이다. 내 말이 틀렸나?”

태자의 공허한 시선이 묵용감을 향했다.

“진작에 다 알고 있었구나.”

“처음엔 의심에 지나지 않았지. 그래서 네가 원하는 대로 북진했고, 인력을 보내 비밀 조직을 조사했더니, 실마리를 찾을 수 있게 되더군. 역시 아주 뛰어난 군사軍師를 둔 데다, 목숨까지 바치는 병사들까지 두지 않았나. 겨우 찾은 실마리는 허사가 되어 버리더군. 일부러 소문을 퍼뜨려 제갈겸유에게 알렸다.

결국 넌 황보주아를 희생양으로 삼더군. 황보주아를 줄곧 곁에 두더니, 셈이 정말 빠르지 않은가? 오래 전부터 그 애를 희생 도구로 삼을 계획이었겠지. 그래도 네 증언 덕분에 정당한 명분으로 그 애를 해할 수 있었다.”

황보주아의 죽음을 꺼낸 순간, 태자와 묵용감의 얼굴은 상반된 감정이 교차했다. 묵용감은 일그러진 태자의 얼굴을 보고 조소를 머금었다.

“묵용한이 급히 담벼락을 뛰어오를 때, 서 태비를 끌고 올 거란 건 알고 있었다. 이 궁 안에서 날 압박할 수 있는 유일한 인물이니까. 그 때문에 화살을 쏜 것이다. 그리해야 궁에 남아서 매일 네가 무엇을 하는지, 누구를 만나는지 전부 다 알 수 있으니. 덕분에 장합전 곁채에 틀어박혀서도 해야 하는 일들을 놓치지 않을 수 있었다.”

빈정거리던 묵용감은 어느새 이를 악물고 있었다.

“내 고통을 어찌 알까. 아내를 죽인 원수가 매일 눈앞을 돌아다니는데도 참을 수밖에 없는 그 심정을. 널 죽이는 건 간단했지만, 절대 쉽게 보낼 수는 없었다. 죽는 것보다 고통스러운 게 어떤 건지, 어떤 심정인지 알려 줘야 했으니까!”

인고 끝에 모두 묵용감의 계획대로 흘러갔다. 황제가 된 묵용감. 모든 것을 잃고 비참한 모습으로 서 있는 태자.

“이날을 위해 오랜 시간을 참고 또 참았다. 또다시 천하를 다스릴 기회를 잃었을 때 네가 어떤 모습인지 보고 싶었으니까. 소중한 걸 잃었을 때의 고통을 똑같이 느끼게 해 주고 싶었다.

네가 내 몸에 고통을 남겼으니 나도 똑같이 깊은 상처를 새겼을 뿐이다. 긴긴 시간을 들여 이런 일을 꾸민 게 이날을 위해서였단 말이다!”

태자는 머리를 얻어맞은 듯한 표정이었다. 아무것도 모르고 날뛰는 사람은 자신이었다. 제 것이라 생각했던 천하는, 이미 묵용감이 쥐고 있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는 정말 묵용감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이었다.

“넌 내가 아는 사람 중에서 가장 똑똑한 사람이었다. 그 똑똑함이 네 일을 그르친 걸 모르는가? 네가 그토록 갖고 싶어 하던 천하는 지금 내 발밑에 있다. 이번 생에 네가 천하를 다스릴 일은 없을 것이다. 이게 내 계획이자 복수다.”

태자의 몸이 살짝 휘청였다. 더는 몸을 지탱할 힘도 남지 않은 듯, 그가 탁자 끝을 짚었다. 허탈한 읊조림이 흘러나왔다.

“황제가 되는 게 그리 싫었다면 왜 굳이 이렇게까지…….”

“아니, 이제는 되고 싶어졌다.”

한없이 어두운 시선이 태자에게 쏟아졌다.

“그간 아주 바보 같았다는 걸 깨달았기 때문이지. 권력의 정상에 다다라야만 진정으로 내 것을 지킬 수 있는 법. 황제가 되어 너희를 전부 내 발밑에 두고 날 우러러보게, 날 두려워하게 만들겠다. 천하를 군림하는 군주가 되어 너희의 생사를 결정하는 권력을 갖겠단 말이다!”

지난 두 달을 다 합쳐도 지금 그가 늘어놓는 말수가 더 많았으리라. 그는 말을 삼키고 침묵하는 대신 이날을 위해 칼을 갈아 왔다. 드디어 할 말을 다 끝내고 나니, 묵용감은 이 자리에 서 있는 것조차 진저리가 났다. 그는 밖으로 향하며 영구에게 눈짓을 보냈다.

황가는 원래 가족 간의 정이 깊지 않았다. 다들 피도 눈물도 없이 부모와 형제를 죽였다. 하지만 묵용감은, 그는 마지막까지 제 손에 형제의 피를 묻히고 싶진 않았다.

고개를 끄덕인 영구가 성큼성큼 앞으로 다가갔다. 태자는 몸을 흠칫 떨며 자신도 모르게 감춰둔 말을 불쑥 내던졌다.

“넌 날 죽일 수 없다. 왕비는 아직 죽지 않았으니까!”

그때, 묵용감이 발걸음을 멈추고 몸을 돌려세웠다. 깊이를 알 수 없는 눈동자가 태자의 표정을 천천히 훑어내렸다.

“왕비가 어디 있는지는 나밖에 모른다. 그러니 날 죽여선 안 된다.”

묵용감은 그를 빤히 바라보다 기이한 웃음을 터뜨렸다.

“죽는 게 싫다면 그리해 주지.”

그가 영구에게 말했다.

“천하제일의 방으로 데려가거라.”

천하제일의 방은 경비가 가장 삼엄한 옥사를 뜻했다. 보통은 황족을 수감하는 용도로 사용되었기에 다른 옥사보다 환경이 나은 편이었다. 태자는 한순간 마음을 놓았으나, 도착하자마자 그의 기대는 산산이 부서졌다.

굵은 쇠사슬 두 개가 그의 어깨뼈를 내리쳤다. 극심한 고통은 몇 차례나 정신을 앗아갔지만, 차라리 그대로 정신을 잃는 편이 나았으리라. 매번 끼얹어지는 차가운 물이 그의 정신을 번뜩 들게 했다. 어두운 시야에 흐릿한 형체가 흔들거렸다. 그가 쉰 목소리로 몇 글자 내뱉었다.

“언젠가, 네 업보로…….”

“이미 업보를 받아 죗값을 치르고 있지 않나. 형제의 정에 휘둘려 다닌 죗값을.”

묵용감이 옥감사獄監司에게 말했다.

“모든 형벌을 매일 하나씩 시행하거라. 근육을 적당히 풀어 주되, 죽게 해선 안 된다.”

그의 뒤에 서 있던 옥감사는 귀신도 벌벌 떨 만큼 무시무시하다는 유정량劉呈亮이었다. 그가 허리를 숙이며 공손히 답했다.

“마음 놓으십시오, 폐하. 쇳물을 부어서라도 반드시 저자의 입을 열겠나이다.”

태자는 힘없이 벽에 기댄 채 중얼거렸다.

“헛된 망상일 뿐이다. 과인은 절대 말하지 않을 것이니…….”

입을 여는 순간, 그는 곧장 죽은 목숨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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