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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유왕비초장성 (458)화 (457/1,192)

제458화

초왕은 태자와 똑같은 용포를 입고 있었다. 그러나 하늘을 날고 있는 용의 자수가 태자의 것보다 더 힘차고 위엄이 넘쳤다. 반짝이는 금빛 또한 더없이 눈부셨다.

화색이 만면하던 태자의 얼굴은 순식간에 잿빛이 되어 버렸다. 그는 단번에 상황을 파악할 수 있었다. 그러나 혀가 굳어 버린 듯, 아무런 말도 나오지 않았다.

초왕은 그 어느 때보다 홀가분한 모습이었다. 그가 미소를 머금은 채 태자에게 말했다.

“형님, 즉위식에 참관하러 오시면서 어찌 용포를 입으셨습니까? 금기를 어기시는 일입니다.”

손귀희가 큰소리로 호통쳤다.

“초왕, 어찌 이리 담이 크단 말입니까! 감히 황위를 찬탈하려 하다니요. 대인들은 어찌 보고만 계십니까? 수 대인, 어서 사람을 불러 초왕을 끌어내십시오!”

그러나 손귀희를 향한 시선에는 멸시와 조롱만이 담겨 있었다.

마치 광대가 된 느낌에 흠칫 놀란 손귀희가 문득 태자를 바라보았다. 태자는 꼭 혼이 나간 듯 창백해진 얼굴로 멍하니 서 있었다.

그때, 수민이 또랑또랑한 목소리로 말했다.

“길시이옵니다. 폐하께오선 금관을 착용하시고 옥새를 받으시옵소서!”

우렁찬 소리와 함께 편종이 울리고, 각종 악기가 연주되었다. 묵용감이 단폐 앞에 다가가 한쪽 무릎을 꿇었다. 명망 높은 노친왕이 그의 머리에 금관을 씌워 주었고, 대학사 수민이 다가와 옥새를 건네며 외쳤다.

“황제 폐하께오서 천하를 군림하시는 것은 만백성이 바라는 일이옵니다. 신하들과 백성들 모두 기쁜 마음으로 감축드리옵니다!”

묵용감은 두 손으로 옥새를 받아든 뒤, 머리 위로 높게 들어 올렸다. 잠시나마 정적이 모두의 머리 위에 내려앉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누군가가 묵용감을 부축해 일으켰다.

그때 수민이 또다시 목청을 높였다.

“황제 폐하께오선 제위에 오르시옵소서!”

다시 음악이 울려 퍼졌다. 새 황제에게 올리는 장엄하고 웅장한 연주였다. 용포를 입고 금관을 쓴 묵용감이 한 걸음 한 걸음 황제의 옥좌에 가까워지다, 마침내 옥좌에 앉았다. 그에 모든 문무백관과 태감, 궁녀들이 잇따라 절을 올렸다.

“황제 폐하 만세, 만만세! 황제 폐하 만세, 만만세…….”

이 모든 광경이, 태자에게는 악몽과도 같았다. 그는 도무지 받아들일 수 없었다. 그의 옥좌였다. 코앞까지 다가온 옥좌가, 순식간에 멀어져가고 있었다.

그렇게 오랜 시간 갈망하던 자리였으나, 현실은 그에게 번번이 패배를 안겨다 주었다. 그의 꿈과 함께 마음도 한없이 추락하기 시작했다. 절망이 입을 벌리고 있는 그 자리로……. 현실을 인지한 태자는 가까스로 숨만 붙어 있는 상태에 불과했다. 그의 명민한 눈이 잿빛을 띠었다.

신하들의 우렁찬 외침이 하늘을 가득 메울 듯이 퍼져 나갔다. 나무에 앉아 있던 새들마저 깜짝 놀라 푸드득 날아가 버렸다. 묵용감은 그 언젠가, 여유롭고 위엄 넘치던 선황처럼 용이 조각된 팔걸이에 두 손을 얹고 있었다.

그는 온 천지를 아우르는 천자의 눈으로 정면을 천천히 훑어보았다. 그 시선이 태자의 얼굴에 머물렀을 때, 묵용감의 얼굴에 옅은 미소가 떠올랐다. 완벽한 조소였다. 야유와 경멸이 담긴 조소……. 그 웃음에는 태자가 읽어낼 수 없는 다른 의미까지 담겨 있었다.

그 순간, 태자는 손끝까지 얼어붙는 듯했다. 가소롭기 짝이 없었다. 알고 보니 계략에 빠진 이는 초왕이 아니라 자기 자신이 아닌가. 이 지경이 될 때까지, 그는 옥좌의 달콤함에 눈이 멀어 있었다!

천하를 군림하겠다는 포부에 젖어 이곳을 찾았지만, 황제는커녕 신하들과 백성들의 조롱거리만 되었다. 그의 모든 자존심과 존엄이 모래탑처럼 무너져 내려, 흩날리는 바람을 타고 멀어져 가고 있었다.

그랬다. 초왕은 이 모든 일에 달관한 척하면서, 조용히 그를 가지고 논 셈이다. 장합전에 머무른 것도 계획된 일이었고, 상의감에서 태비에게 만들어 준 옷도 봉포가 분명했다. 초왕이 즉위하면 태비는 진정한 태후가 되지 않겠는가. 이미 정해져 있는 패배를, 그만 모르고 있었다. 온갖 방법을 다 썼건만, 또다시 패하고 말았다.

비로소 태자의 눈에 빛이 돌아오며, 묵용감을 향한 원망으로 번뜩였다. 그는 이 순간 자신이 짐승이길 바랐다. 날카로운 송곳니로 묵용감의 살갗을 물어뜯을 수 있다면, 더 바랄 것이 없을 듯했다. 그가 곧장 묵용감에게 달려들었다.

그러나 초왕의 군대가 한 발 빠르게 나섰다. 누군가 재빨리 달려오더니 그에게 발을 걸었다. 묵용감만을 노려보며 달려들던 태자는 그대로 바닥에 고꾸라지고 말았다. 몸을 일으켜 세우기도 전에 반짝이는 검 몇 자루가 족쇄처럼 사방에서 날아내렸다.

대학사 수민의 호통이 들려왔다.

“감히 폐하를 해하고 반역을 저지르려 했으니, 당장 저자를 끌어내라!”

옥좌에 앉아 있던 묵용감이 손을 휘휘 내저었다.

“그럴 필요 없네. 둘째 형님께서 이 즉위식을 얼마나 기대하셨는데, 어찌 끌어낸단 말인가? 계속 지켜볼 수 있도록 해 주시게.”

초왕의 군대가 그를 한쪽 구석으로 끌고 갔다. 그는 옴짝달싹하지 못한 채로 대신들이 절을 올리는 의식을 지켜봐야 했다.

그 순간, 태자는 능지처참을 당하는 기분을 알 수 있었다. 무자비한 현실은 한 번, 또 한 번, 무딘 칼로 끊임없이 그의 살을 후벼 파고 있었다…….

* * *

이제 서 태후가 되는 서 태비는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유심히 살피다 영 마마嬷嬷에게 물었다.

“어떠한가? 너무 화려하진 않겠지? 색이 좀 짙은 것도 같고.”

영 마마가 웃으며 말했다.

“이게 태후께서 입으시는 봉포입니다. 예전 방식 그대로 만들었으니 이 색이 틀림없습니다. 단정하면서도 기품이 넘치시니, 아주 잘 어울리십니다.”

서 태후는 감정이 벅차오르는 듯 중얼거렸다.

“젊을 땐 입고 싶어도 입지 못하였는데, 나이를 먹고 나서야 입어 보는구나.”

영 마마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세상일을 예측하기 어렵다고 하나 봅니다. 태자는 번번이 제위에 오르지 못하는군요. 역시 하늘도 우리 왕야께서 황제의 자리에 더 적합하다고 여기시는 게 분명합니다. 태후께서 정말 아들을 잘 두셨습니다.”

“그러게 말일세.”

태후의 두 눈이 점차 붉게 물들었다.

“애가는 부끄러움을 모르고 살던 사람이라 감이에게 관심도 주지 않았다네. 어디 그 애 덕에 이리 복을 누릴 거라고 상상이나 했겠는가. 이렇게 늘그막에 봉포까지 입어 보다니.”

영 마마가 손사래를 쳤다.

“아이고, 오늘처럼 기쁜 날 어찌 눈물을 보이십니까. 화장이 지워지니 조심하십시오. 조금 있으면 폐하께서 오실 텐데 눈물을 보이시면 아니 됩니다.”

서 태후는 고개를 끄덕이며 손수건을 꺼내 조심스레 눈가를 닦았다. 영 마마의 말이 옳았다. 오늘처럼 기쁜 날이 그녀의 인생에서 또 찾아오겠는가? 그녀가 문득 떠오른 듯 물었다.

“몇 시진이나 되었는가? 대전에서 치르는 의식은 얼추 끝나가겠지?”

때마침 황유도가 잽싸게 안으로 들어와 고했다.

“태후 노불야老佛爺(황태후 또는 태상황제에 대한 존칭), 어서 자리에 앉으시지요. 폐하께서 오셨습니다.”

그 말에 서 태후는 상기된 얼굴로 걸음을 재촉했다. 문 쪽을 바라보니 이미 황제의 어가가 도착해 있었다. 급히 의자에 앉은 그녀는 자세를 단정히 했지만, 도포 아래에 감춰진 다리가 미세하게 떨렸다.

평온한 표정의 묵용감이 들어오더니 서 태후 앞에 섰다. 그는 학평관의 외침에 따라 서 태후에게 삼배를 세 차례 올렸다. 대례가 끝난 뒤, 태후가 직접 묵용감을 일으켰다.

“감축드립니다, 황상. 황상의 이름이 천추만대에 길이 남길 바랍니다.”

묵용감이 가벼운 웃음을 보였다.

“짐도 감축드립니다!”

태후에게 예를 다한 황제는 벽복전으로 향했다. 벽복전에는 연회 상이 차려져 있었다. 다시 한번 문무백관과 황실 종친들에게 축하를 받은 황제는 함께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금수교 주변에서 쉴 새 없이 축포를 터뜨리고 있었다. 어느덧 밤이 깊어오자 궁 곳곳에 수많은 등롱이 걸렸고, 폭죽을 터뜨리며 새로운 군주의 등극을 널리 알렸다.

* * *

정원에 서 있던 추문은 축포 소리를 듣자마자 들떠서 방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마마, 들리십니까? 궁에서 축포를 터뜨렸습니다. 우리 왕야께서 황제가 되신 겁니다. 경하드립니다, 마마!”

수원상은 붓글씨를 쓰고 있었다. 그녀의 표정은 평온했지만, 속으론 쓴웃음을 삼켰다. 묵용감이 공성한 지도 열흘이 다 되어 가는데 누구도 저택을 찾는 이가 없었다. 아무래도 그녀를 완전히 잊은 듯했다.

하지만 그녀는 평정심을 가지려 했다. 수 대학사가 황제의 최측근이 되었으니 그가 있는 한, 황제도 언젠간 그녀를 떠올릴 테지.

지난 두 해간 그녀는 홀로 저택을 지키며 심신을 다스렸다. 다른 건 몰라도 어지러운 생각을 정리하는 것만큼은 제법 할 수 있었다. 그러나 오늘 같은 날은 그녀도 기쁨을 억누르기 어려웠다. 당장이라도 궁에 찾아가 그에게 축하 인사를 건네고 싶었다.

지금쯤 궁은 얼마나 떠들썩할까. 그녀도 충분히 상상할 수 있었다. 악기 연주에 맞춰 무희들의 춤이 흥을 돋울 테고, 술에 취한 대신들은 붉게 물든 얼굴로 황제에게 쉴 새 없이 아첨을 해 대겠지. 가장 높은 자리에 앉은 그 사람은, 봄바람처럼 활짝 웃으며 대신들의 축하를 받아 줄 테고…….

그녀의 추측대로 벽복전은 그 어느 때보다 소란스러웠다. 불을 피운 덕에 내부는 봄날처럼 따뜻했고 끊임없이 이어지는 악기 연주는 더없이 흥겨웠다. 화려한 옷을 갖춰 입은 무희들은 나비와 같이 우아한 몸짓을 뽐내고 있었다. 술에 취한 대신들은 역시나 황제를 찬양하는 말을 쉴 새 없이 쏟아냈다.

가장 높은 곳에 앉아 있는 그 사람만큼은 그녀의 추측과 정반대였다. 그는 아무런 감정도 담지 않은 얼굴로 떠들썩한 연회를 내려다볼 뿐이었다. 꼭 그만이 다른 세상에 홀로 놓인 듯했다.

금관에 달린 긴 술이 그의 얼굴에 한 줄기 그림자를 드리웠다. 그림자 뒤에 가려진 그의 두 눈망울은 깊고 고요하게 가라앉았다. 미동도 하지 않는 그의 모습은 눈 덮인 산 정상에 홀로 놓인 바위처럼 보였다. 시린 고독과 쓸쓸함 속에서 억겁의 시간을 견딘 바위.

신하들은 술잔을 들어 아첨하는 말을 내뱉고는 고개를 젖혀 술을 들이켰지만, 누구도 그와 눈을 마주치지 못했다. 옥좌에 앉은 이가 자신을 바라보든 말든 그저 얼굴을 비친 데 의의를 두었다. 홀로 뒤처질 수 없었기에 신하들은 끊임없이 그를 찾아와 찬양을 늘어놓았다.

수민은 유일하게 자신의 처지를 아는 신하였다. 그도 마음 같아서는 기회를 봐서 수원상의 이야기를 꺼내고 싶었지만, 황제는 들은 척도 하지 않을 게 뻔해 보였다.

수민으로서는 황제의 행동이 이해가 되지 않았다. 초왕비를 위해 이렇게까지 할 수 있다니. 그는 넓은 학식을 갖췄지만 감정에 대해서는 그리 잘 알지 못했다. 그 때문에 부인과 부부의 정이 나쁘지 않았어도 첩을 두었다.

서로 존중하고 차별 없이 대할 수는 있어도 특정한 한 사람 때문에 무너져내리는 건 그에게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더구나 한 나라의 황제라면, 더욱더 그런 일로 무너지는 건 용납할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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