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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유왕비초장성 (457)화 (456/1,192)

제457화

장합전에 다다른 그는 곧장 곁채로 향했다. 문 앞에 서 있던 영구는 그저 공손히 예를 갖추며 안으로 들라는 손짓을 해 보였다. 마음이 급했던 수민은 옷자락을 흩날리며 안으로 들어갔다.

마침 붓글씨를 쓰고 있던 초왕은 다급한 인기척을 느끼고 고개를 들었다.

“이곳에 무슨 일인가?”

수민은 공손히 예를 갖춰 인사를 올렸다.

“태자께서 방금 소관을 국구로 삼겠다고 하셨습니다.”

초왕이 살짝 놀란 기색으로 말했다.

“경사가 아닌가? 본왕이 미리 축하 인사를 해 두지.”

“왕야, 소관은 걱정이 되어 죽을 지경인데 농을 하시다니요.”

초왕이 태연히 물었다.

“해서, 승낙은 했는가?”

수민이 울상이 되어 말했다.

“태자께서 소관을 몰아세우시니 승낙을 하지 않을 수 없었사옵니다.”

“승낙도 한 마당에 어찌 걱정을 하는가.”

수민은 좀처럼 초왕의 의도를 파악할 수가 없었다.

“소관이 그리해야 한다는 말씀이신지요?”

“맞네. 내일이 즉위식인데 태자 전하의 심기를 건드리지 말게나.”

수민의 입술이 들썩였다. 그제야 초왕의 의도를 파악한 듯한 표정이었다. 그가 다시 예를 갖춰 인사를 올렸다.

“그러시다면, 소관 더는 왕야께 폐를 끼치지 않고 물러가겠습니다.”

* * *

대행황제의 영구가 궁을 떠나니 태자는 숨 쉬는 것조차 더 편해진 기분이었다. 게다가 수민까지 끌어들이는 데 성공했으니 무관은 초왕, 문관은 수 대학사를 거느린 셈이었다. 이제 그의 눈앞에는 탄탄대로만이 놓인 듯했다.

뒷짐을 진 채 방 안을 서성거리던 그가 목청을 높여 손귀희를 불렀다.

“용포는 준비되었느냐?”

손귀희가 기뻐하며 말했다.

“예, 소인이 곧 찾아오려던 참이었습니다.”

태자가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강남 지역의 자수품이 훌륭하긴 하지만, 궁에서 만든 것보단 기품이 떨어지지. 꼼꼼히 확인하거라. 무늬 하나라도 부족함이 있어선 안 된다. 어깨에 새기는 아홉 마리 용 자수도 마찬가지다. 즉위식 때 입는 용포이니 한 치의 부족함도 용납할 수 없다.”

“예, 전하. 소인이 꼼꼼히 확인해서 가져오겠습니다.”

굽실대던 손귀희는 다른 소태감과 함께 재빨리 내무부로 걸음을 재촉했다.

상의감尙衣監에 도착하니 저마다 분주하게 일하는 일꾼들이 보였다. 어찌나 정신이 없어 보이는지, 손귀희를 쳐다보는 이가 한 명도 없었다. 저절로 손귀희의 심기가 불편해졌다. 이제 황제의 처소 총관리인이 될 사람인데, 어찌 이리 무례한 처사란 말인가!

그가 목청을 가다듬으며 몇 차례 헛기침을 했다. 그 소리에 상의감의 양 마마가 고개를 들었다. 그를 바라본 양 마마가 곧장 미소를 지었다.

“아이고, 손 관리인 오셨습니까? 어서 앉으십시오. 내일이 즉위식이라 준비해야 하는 것들이 많아 정신이 없었습니다. 부디 마음에 담아 두지 마십시오.”

모두들 큰일을 겪은 터라 궁 안 사람들은 며칠간 손을 멈추고 있었다. 궁에서 용포를 만들기에는 시간이 빠듯하리라 예상했던 태자는 남쪽에 머무를 당시에 미리 만들어 두었다. 다만 남쪽에서는 넣지 못하는 무늬가 있어 궁에서 추가적으로 손을 보는 중이었다.

수공들은 눈이 빡빡해질 만큼 공들여 작업해야 좋은 결과물을 얻는 법이었다. 그들은 이번 작업으로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듯했다. 주인을 위해 분주히 일하는데 어찌 마음에 담아둘 수 있을까. 그가 불진을 흔들며 웃었다.

“궁에서 이곳이 제일 바쁘다는 걸 어찌 모르겠나. 다 전하를 위해 일하느라 바쁜 것을. 용포는 다 되었는가? 좀 보고 싶은데 말일세.”

양 마마는 옆에 있던 궁녀를 불러 용포를 가져오라고 분부했고, 궁녀는 곧바로 용포를 가져와 탁자 위에 올려놓았다. 탁자에 있던 등불이 노란색 용포를 은은한 빛으로 물들였다. 절로 위엄이 느껴지는 자수 하나하나가 감탄이 나올 만큼 정교했다. 아름다운 자수 사이에서도 용 자수는 강한 힘을 내뿜으며 위용을 자랑했다.

용의 발아래 새겨진 구름은 하늘을 떠다니듯 생동감이 넘쳐흘렀고 바다와 강물, 절벽, 해, 달, 별, 도끼, 보병寶甁 등 어느 것 하나 정교하고 아름답지 않은 게 없었다. 몇 번을 살펴도 흠잡을 데 없는, 완벽한 용포였다.

“아주 훌륭하네. 고생 많았네, 양 대인.”

손귀희가 웃으며 말했다.

“태자 전하께서 이 용포를 입고 즉위식을 치르시면 눈이 부실 만큼 위용이 넘칠 걸세. 전하께 상을 내려 달라고 청해 볼 테니 조금만 기다리시게.”

양 마마는 무덤덤한 얼굴로 답례할 뿐이었다.

“그렇게 봐주셨다니, 감사합니다. 소관이 해야 할 일을 한 것뿐인걸요. 즉위식 전에 무사히 마칠 수 있어서 천만다행입니다.”

그녀는 궁녀에게 용포를 잘 담으라고 분부한 뒤 손귀희가 데려온 소태감에게 건넸다.

손귀희는 소태감과 함께 급히 문을 나서다 하마터면 안으로 들어오던 이와 부딪힐 뻔했다. 두 사람은 몇 차례 몸을 움직이며 길을 양보했지만 자꾸만 방향이 겹쳤다. 손귀희가 불편한 심기를 드러내려는 순간, 상대방이 발걸음을 멈추더니 조금 놀란 얼굴로 인사를 건넸다.

“손 관리인이셨군요. 먼저 나오시지요.”

그제야 손귀희가 상대의 얼굴을 제대로 바라보았다. 문 앞에서 마주친 이는 다름 아닌 학평관이었다. 두 사람은 젊은 시절부터 알고 지냈지만, 각자 다른 주인을 모시게 되면서 그간 한 번도 보지 못했다. 학평관이 초왕을 따라 궁 밖에서 지냈으니 오랜만의 재회였지만, 서로의 존재를 이미 알고 있었기 때문에 두 사람 모두 크게 놀라진 않았다.

초왕의 사람 앞에서 어찌 속내를 드러낼 수 있을까. 손귀희도 활짝 웃으며 반갑게 대할 수밖에 없었다.

“학 관리인이었군요. 오랜만입니다. 이곳에는 어인 일인지요? 볼일이라도 있으십니까?”

“예, 내일이 즉위식이지 않습니까. 태비 마마의 예복이 다 되었는지 확인하러 왔습니다.”

학평관이 말하는 태비가 서 태비라는 건 손귀희도 모를 리 없었다. 궁의 어른인 서 태비는 중요한 손님이었기에 필히 예복을 갖춰 입어야 했다. 손귀희가 고개를 끄덕였다.

“오, 그렇습니까? 태비 마마께서는 많이 좋아지셨는지요?”

“예, 많이 좋아지셨습니다. 피부만 상하였기에 새살이 돋으면 문제없을 듯합니다.”

“다행입니다. 이번 일로 태비 마마께서 고생이 심하셨겠군요.”

“그러게 말입니다. 저희 왕야께서도 어찌나 마음 아파하시는지, 날마다 곁을 지키며 마마를 모시고 계십니다.”

손귀희는 학평관과 시답잖은 말을 더 나눈 뒤 서둘러 걸음을 재촉했다. 그러나 모퉁이를 돌려던 순간, 그는 무언가 떠올린 듯 걸음을 멈췄다. 이내 벽에 바짝 붙은 손귀희가 안을 들여다보았다. 거리가 멀어 확실하진 않았지만, 양 마마가 예복 한 벌을 탁자 위에 올려놓으며 학평관에게 보여 주고 있었다. 남색 바탕에 봉황과 모란이 수놓인 예복이었다.

그는 궁에서 오랜 시간을 보낸 내관이다. 서 태비의 신분으로는 봉황이 수놓아진 예복을 입을 수 없음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이제 궁 안에는 서 태비보다 더 높은 어른이 없는 데다 초왕의 생모였기 때문에 태후와 버금가는 위치로 봐도 무리는 아니었다. 어쨌든 규율이야 융통성을 발휘하여 조금씩 바뀌기도 했고, 시기마다 변하기도 했으니.

장영전으로 돌아온 그는 태자에게 용포를 입혀 주면서 학평관이 서 태비의 예복을 가지러 온 이야기를 꺼냈다. 태자가 대수롭지 않다는 듯 말했다.

“초왕에게 서 태비를 내 어머니로 여기겠다고 했건만, 그 말을 확실하게 하려는가 보구나. 서 태비는 과거 황후와 총애를 다투었다. 늘 봉황이 수놓인 옷을 입고 싶어 했지만, 결국 그리하지 못했지. 이제야 그 꿈을 이루려나 보구나.”

그러나 옆에 있던 제갈겸유는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정말 봉포鳳袍였단 말인가? 공작이 아니고?”

손귀희도 차마 단언할 수는 없었기에 공손히 말했다.

“거리가 멀어서 소인도 확실치 않습니다. 봉황이 아니라 공작이었을 수도 있지만, 어쨌든 소인의 눈에는 봉포처럼 보였습니다.”

제갈겸유는 잠시 침묵을 지키더니 발걸음을 돌려 밖으로 향했다.

* * *

정월 초팔일은 매우 길한 날로, 모든 일을 거행하기에 제격이었다.

태자는 아침 일찍 태묘太廟와 조정에 관원들을 보내 제사를 올리라고 분부했다. 그는 용포를 입고 동궁에서 대기하다가 길시가 되면 천단天壇에서 제사를 올릴 예정이었다.

손귀희는 화색이 만면한 얼굴로 아침 일찍부터 분주히 움직였다. 벌써 어가御駕도 준비해 두었다.

태자가 용포를 어루만지며 방 안에 있던 소태감에게 물었다.

“제갈 선생은?”

소태감이 공손하게 아뢰었다.

“제갈 선생은 먼저 천단에 가셨을 것입니다.”

태자는 짤막하게 대꾸하고는 서양 시계를 바라보았다.

“길시가 되었구나. 가자.”

손귀희는 불진을 흔들며 카랑카랑하게 소리쳤다.

“황제 폐하 납시오!”

태감들이 태자를 모시고 천단으로 향했다. 황금빛 줄기가 드넓은 대지로 쏟아지고 있었다. 어가에 탄 태자는 들뜬 기분에 취해 먼 하늘을 바라보았다. 유난히도 파란 하늘이 그를 맞이하고 있었다. 그는 용포에 수놓아진 금룡을 어루만지며 천천히 깊은숨을 내쉬었다. 긴긴 인고의 시간 끝에, 드디어 이날을 맞이했다.

오늘부터 그가 천하에 군림하는 것이다!

막상 천단에 도착하니 어찌 된 일인지 썰렁한 분위기만 감돌았다. 더욱이 내부는 텅 비어 있었다.

손귀희가 어리둥절한 얼굴로 사방을 둘러보았다.

“어찌 아무도 없는 것이냐? 다들 어디에 있는 것이야?”

기간이 짧았던 만큼 즉위식 준비를 마치지 못한 것들이 많았다. 이에 수민은 몇 가지 과정의 생략을 제안했고, 태자도 동의했다. 그렇다고 해도, 설마 천단 제사까지 생략했단 말인가?

태자는 어가에 앉아 잠시 망설이다 입을 열었다.

“상보대전常保大殿으로 간다!”

상보대전은 금란전이자 황제의 즉위식이 거행되는 곳이다. 결국 손귀희는 다시 목청을 높여 방향을 틀었고 행렬은 상보대전으로 향했다.

상보대전에 도착하니 저 멀리 대전 밖을 지키는 초왕의 군대가 보였다. 병사들의 은빛 갑옷이 햇빛을 받아 눈부시게 반짝였다. 다들 천단이 아니라 이곳에 모인 듯, 대전 안이 북적거리고 있었다.

어가를 들던 이들은 정신을 바짝 차리고 발걸음을 재촉했다. 대전 앞에 도착하자, 태자가 손귀희의 부축을 받으며 어가에서 내렸다. 그는 허리를 꼿꼿이 세우고 당당한 걸음을 내디디며 대전으로 향했다.

대전 안은 많은 이들로 붐볐다. 문무백관이 새로운 관복을 입고 기쁨의 미소를 띤 채 모여 있었다. 이내 태자를 발견한 신하들은 일제히 웃는 얼굴로 그를 바라보았다.

태자는 붉은 깔개 위를 성큼성큼 나아갔다. 걸음을 내디딜 때마다 가슴이 벅차오르는 탓에 절로 입꼬리가 올라갔다. 정작 손귀희는 의아하기만 했다. 태자 전하를 보고도 어찌 다들 아무런 말이 없단 말인가? 즉위식을 거행하기 전이라고 해도 이미 황제나 다름없었다. 한데 웃기만 할 뿐 아무 말이 없다니… 무언가 이상했다.

태자는 아직도 낌새를 알아차리지 못한 듯 자신을 위한 길을 걸어나가고 있었다. 그러나 저 멀리 앞에 서 있는 사람을 발견한 순간, 그의 위풍당당함은 순식간에 무너져 내렸다.

“셋째, 네가 어찌…….”

어찌, 용포를 입고 있단 말이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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