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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유왕비초장성 (456)화 (455/1,192)

제456화

태자는 심장이 덜컥 내려앉는 듯했지만, 곧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 애 때문이 아니라, 대학사 때문이지. 어쨌든 내 스승님이 아니더냐. 한번 스승은 아버지와 같이 평생을 모셔야 하는 법이다. 어려서부터 스승님께 가르침을 받았으니 존경을 다 하려는 생각이었다.

게다가 백여름은 왕비에게도 못되게 굴지 않았더냐? 듣자니 저택에서 온갖 고충을 당했다던데, 난 당연히 네가 백여름을 증오할 거라고 생각했다.”

“왕비를 괴롭힌 자는 이미 죽였습니다.”

묵용감이 냉랭하게 말했다.

“황보 대학사가 둘째 형님께 어떤 사람이었든, 전 황보주아의 죄만 기억할 것입니다. 만 번을 죽인다 해도 부족합니다. 만약 황보 일가에 내렸던 판결을 시정해 그들의 명예를 회복시키려는 생각이시라면 절대 동의할 수 없습니다.”

그는 일말의 여지도 없이 직설적으로 생각을 밝혔다. 본래 초왕의 반응이 나쁘지 않으면 곧장 사람을 보내 백씨 일가를 몰살할 예정이었던 태자는 다소 당황했다. 몰살은커녕 황보 일가의 명예 회복에 반대한다는 어깃장만 듣지 않았는가.

백씨 일가의 몰살과 황보 가문의 명예 회복은 황권을 잡은 뒤 가장 먼저 하려던 일이었다. 그러나 초왕이 막아선 탓에 시도도 할 수 없게 되었으니 가슴만 답답해졌다. 안타깝게도 즉위 전이니 태자는 신분으로 묵용감을 억압할 수도 없었다. 즉위한 뒤였다면 황제의 신분으로 초왕의 입을 막고도 남았을 터였다.

그는 아쉬움을 감추고 차가운 방 안을 바라보며 화제를 돌렸다.

“이곳은 너무 적막하구나. 사람을 더 들이는 게 좋겠다. 궁 안의 일손을 다시 배정할 예정이니 손귀희에게 일을 잘하는 이들로 보내 주라고 하마.”

“아닙니다.”

묵용감이 담담히 말했다.

“이곳에서 오래 머물지 않을 것입니다.”

태자도 그를 떠보기 위해 한 말이었다. 초왕을 믿긴 했지만, 건국 이래 실권을 잡은 친왕이 황제와 함께 궁에 머무는 일은 없었다. 묵용감은 한 번 내뱉은 말은 지키는 사람이었으니, 분명 이곳에 그리 오래 머물지 않을 터였다.

그러나 태자도 일말의 죄책감을 느꼈다. 이렇게 곁채에 머물며 어머니의 곁을 지키는 것 또한 초왕의 효심이었다. 이 점은 그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네 어머니는 내 어머니이시기도 하다. 내가 잘 살필 테니 걱정 말거라. 매일 문안 인사를 올리고 극진히 모셔 편안한 노후를 보내게 해 드리마.”

묵용감이 옅은 미소를 머금었다.

“형님께서는 참으로 세심하십니다. 그래도 공무로 바쁘실 테니 이런 일은 마음 쓰지 마십시오. 제가 며칠간 궁에 머물며 잘 모시겠습니다. 문안 인사 같은 건 나중에 얘기하시지요.”

* * *

대행황제의 발인 전날이 되어서야, 초왕은 빈전에 얼굴을 내밀었다. 그는 바위처럼 굳은 얼굴로 오랜 시간 위패 앞에 서 있었다. 그가 서 있는 동안 빈전에선 울음소리조차 나지 않았다. 그는 소태감에게서 건네받은 향을 꽂은 뒤, 삼배를 올리고 빈전을 나섰다.

마침 제갈겸유와 대화를 나누던 태자는 초왕이 빈전에 다녀갔다는 소식을 접했다. 그가 코웃음을 쳤다.

“셋째는 언제나 마음이 물러서 문제다. 자기 마음이 편해지자고 그리한다지만, 다른 이들이 보기엔 사람을 죽여 놓고 초상을 치러주는 게 아니더냐. 어쨌든 성에 쳐들어와서 묵용한을 압박해 죽였으니, 그 애가 죽인 것이나 마찬가지다. 그 후에 화려하게 장례를 치러주다니, 남들이 보고 비웃을 테지.

더 큰 문제는 뿌리를 뽑으려 하질 않는다는 점이다. 묵용한의 자식들은 분명 화근이 될 터인데 가타부타 말이 없으니, 원. 왕비의 일로 심기가 좋지 않으니 나도 재촉할 수가 없구나. 좀 더 양보해서 마음을 다잡을 때까지 기다렸다가 말을 꺼내 봐야겠네. 어쨌든 처리해야 할 건 처리해야지.”

제갈겸유가 고개를 끄덕였다.

“마음이 약한 자는 큰일을 할 수 없는 법이지요. 이 점이 초왕과 전하의 차이입니다. 어린 황자들을 남겨두면 호랑이 새끼를 키우는 일과 다름없으니 일찍 없애는 게 가장 좋습니다.”

“걱정 말게나. 과인이 이미 계획을 세워 두었네. 내년 이맘때까지 그놈들이 살아 있을 일은 없네.”

“전하, 초왕과는 즉위식에 대해 얘기해 보셨습니까?”

“했네. 초왕도 선뜻 그리하자고 하더군.”

태자가 말했다.

“그 애도 군주 자리가 비어선 안 된다고 생각했겠지. 과인을 얼른 황제의 자리에 앉히고 싶어 할 테고.”

“근래에 대신들을 자주 만나지 않으셨습니까, 그중 믿을 만한 이가 있으십니까?”

“예전의 신하들은 묵용한에게 쫓겨난 지 오래네. 조정에 있는 이들은 중신重臣들도 아니니 개국 초기에 그들에게 의지할 수 없지. 과인이 생각한 사람이 하나 있는데, 바로 수민일세. 선생은 어찌 생각하는가?”

제갈겸유가 무언가를 생각하다 물었다.

“전하, 무슨 연유로 그자를 점찍으시었습니까?”

“수민은 백여름과 필적하는 대학사 출신일세. 그날 그자가 궁 문을 열어 준 덕에 초왕의 군대가 순조롭게 궁에 진입할 수 있었지. 큰 공을 세우지 않았는가? 또한 그자의 장녀가 초왕의 측왕비라네. 초왕비가 세상을 떠났으니 측왕비만 남은 셈이지. 수민은 초왕의 장인이니 응당 과인의 편에 서야지.”

제갈겸유가 수염을 쓸어내리며 망설였다.

“수민에게는 혼기가 찬 딸이 더 있는 것으로 압니다. 전하께서 직접 혼인을 맺으시어 수민을 국구國舅로 삼으시는 게 어떠신지요? 그 편이 믿음직스러울 것입니다. 혼인은 군주와 신하들의 사이를 더욱더 굳건히 하는 수단입니다. 오래전부터 모든 군주가 그리하였지요. 믿을 수 있는 대신들의 도움을 받아야 전하의 천하가 비로소 안정될 것입니다.”

태자가 놀란 얼굴로 그를 바라보았다.

“수민의 딸을 황후로 맞이하란 뜻인가?”

“전하께서 더 적합한 이를 정해 두셨다면야 어쩔 수 없지만요.”

태자가 잠시 고민하다 입을 열었다.

“군주가 바뀌면 신하도 바뀌는 법이지. 과인은 황보 가문을 다시 조정으로 부르고 싶었네. 그러나 가문이 몰살되어 직계는 남은 이가 없고, 방계엔 출중한 인물이 없음이 아쉬울 따름이야.

근래 몇 년간 수민이 수많은 인재를 길러 냈다고 들었네. 지금은 수민만큼 적합한 자가 없으니 수민을 국구로 들이는 게 좋겠네. 과인과 초왕도 연이 더 깊어지는 셈이 아닌가. 형제인 데다 동서지간의 연까지 이어진다면 이보다 굳건한 관계는 없으니. 대행황제의 발인이 끝나거든 수민을 궁으로 불러 얘기해 보겠네.”

제갈겸유가 맞장구쳤다.

“지극히 옳으신 말씀입니다. 모레가 전하의 즉위식이니, 이런 일은 일찍이 처리하는 편이 좋습니다. 또한, 경계심을 늦추시면 아니 되옵니다. 즉위식이 거행되는 날, 비밀 호위무사도 좋고 친위병도 좋으니 꼭 곁에 사람을 두십시오. 만일을 대비하기 위함입니다.”

태자는 그리하겠다고 대꾸하면서도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초왕이 있는데 감히 즉위식에서 소란을 피울 자가 있을까.

* * *

이튿날 아침, 황제의 시신이 담긴 영구가 동화문을 통해 궁 밖으로 나갔다. 조기弔旗를 든 예순네 명의 기수가 선두에 섰다. 하얀색 깃발들은 허공을 수놓는 눈송이처럼 나부꼈다. 그 뒤로 천 명이 넘는 의장대가 각종 무기와 깃발, 형형색색의 장의용품을 든 채 전진했다. 엄청난 인파가 물밀 듯 나아가는 모습이 그야말로 장관이었다.

백성들은 궁의 내부 모습을 볼 수 없었기에 운구 행렬을 본 뒤에야 장례가 얼마나 성대하게 치러지는지 체감했다. 며칠간 두문불출하던 백성들은 대문 뒤에 서서 까치발을 들고 숨을 죽인 채 대열을 지켜보았다. 엄청난 대열이 교외로 떠나고 있었다. 그들은 차마 수군댈 수도 없어서 눈빛만 주고받았다.

수민도 옛정을 쉬이 잊는 사람은 아니었다. 공공연히 모습을 드러낼 수는 없었지만 백성들처럼 정원 대문 옆에 서서 운구 행렬이 멀어질 때까지 지켜보았다. 어쨌든 그가 황제에게 은혜를 입은 것은 부정할 수 없었다. 만약 황제가 아니었다면 그는 아직도 문화전文華殿의 수서처에서 일하고 있을지도 몰랐다.

얼마 뒤, 운구가 임안성을 벗어나지도 않았건만 태자가 수민에게 사람을 보냈다. 성이 함락된 이후, 그는 병을 핑계로 집에만 머물렀기 때문에 초왕과 태자를 만난 적이 없었다. 더군다나 태자는 개인적으로 적지 않은 대신을 만났다고 들었던 터라 확신이 서지 않았다.

어쨌든 그는 선황제의 측근이 아닌가? 태자가 무슨 연유로 저를 부르는 것인지 몰라 궁으로 향하는 내내 수민은 불안감에 떨었다.

오랜만에 만나는 것이었지만, 태자는 기억 속 모습 그대로였다. 그의 온화함과 고귀함은 절대 빛이 바래지 않는 듯했다.

태자는 관례에 따라 그에게 몇 마디 인사치레를 건네더니 곧장 혼사 이야기를 꺼냈다. 규율대로라면 황제의 혼사는 태후가 정해야 했다. 하지만 궁에 태후가 없으니 황태자가 직접 혼인 상대를 고르고 있었다. 수민의 입장에서는 상당히 신선한 모습이었다.

아직도 겁이 가시지 않은 수민은 곧장 무릎을 꿇어 감사 인사를 올렸다.

“부족한 노신이 전하의 귀한 보살핌을 받으니 그저 감읍할 따름입니다. 슬하에 혼기가 찬 여식이 있긴 합니다. 하나는 열일곱, 하나는 열다섯이지요. 다만 둘 다 용모가 평범하고 우둔한 면이 있어 전하께는 어울리지 않을 듯합니다…….”

태자는 수민의 거절을 예상하지 못한 듯, 안색이 어두워졌다.

“내일은 과인의 즉위식일세. 그대의 여식이 나와 혼사를 치르면 황후가 되는데 원치 않는다니, 퍽 궁금해지는군. 수 학사의 여식은 황제조차 거부하고 누구와 혼사를 올릴 계획이란 말인가? 설마 신선은 아닐 테지?”

“그럴 리가요.”

수민이 서둘러 고개를 조아렸다.

“아뢰옵기 황송하오나, 신의 여식이 황후의 자리를 지키지 못해 백성들의 비웃음을 살까 걱정이 되는 것이옵니다…….”

“감히 누가 과인을 비웃는단 말인가.”

태자가 미간을 찌푸렸다.

“대학사, 설마 과인과 연을 맺는 일이 싫단 말인가? 과인이 즉위를 하고 나면 대학사의 도움을 받아야 할 일이 아주 많네. 대학사가 국구가 된다면 더욱 존귀한 신분이 되지 않겠는가. 수가 또한 천하에서 제일가는 권문세가가 될 터인데, 기쁘지 아니하단 말인가?”

태자가 이렇게까지 나오는데, 수민은 어쩔 도리가 없었다.

“전하께서만 괜찮으시다면, 신도 바라는 바입니다.”

그제야 태자는 만족스러운 얼굴로 직접 수민을 일으켰다.

“얼마나 좋은 일인가? 앞으로 과인이 수 대인을 많이 의지하겠네.”

수민이 황송함에 어쩔 줄 몰라 하며 말했다.

“신, 전하와 나라를 위해서라면 목숨을 아끼지 않고 온 힘을 다하겠나이다!”

“좋네!”

박장대소를 터뜨린 태자는 재차 확답을 받은 뒤 그를 돌려보냈다.

동궁을 나온 수민은 앞뜰을 몇 바퀴 돌다가 후궁으로 발길을 옮겼다. 수민이 보기에 태자는 믿을 만한 사람이 아니니, 마땅히 초왕을 찾아 의견을 구하는 게 옳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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