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가유왕비초장성 (455)화 (454/1,192)

제455화

제사상에는 각종 공물이 뾰족한 탑처럼 쌓여 있었다. 향초 연기는 허공에서 흐트러지며 몽환적인 분위기를 자아냈다. 흰 천 뒤편에서는 도사와 스님들이 쉴 새 없이 경문을 외고 있었다.

비빈들은 어여쁜 자태로 빈전을 찾아 진심이 담긴 눈물을 흘렸다. 동월국의 규율에 따르면 이전 황제의 비빈들은 간택이 되지 않았거나 지위가 낮을 경우 궁 밖으로 내보내는 게 관례였다. 그렇지 않은 경우에는 황제와 순장되거나 궁에서 힘겹게 목숨을 부지하는 등 말로가 그리 좋지 않았다.

특히 아이가 있는 경우라면 불 보듯 뻔했다. 태자가 그들을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라는 건 너무나도 명백했다. 그러니 장례가 끝난 후, 그들은 언제 들이닥칠지 모르는 자신들의 차례를 기다리며 마음 졸이게 될 터였다.

빈전은 봉명궁의 유복이 관리를 맡아 대부분의 일을 처리했다. 태자와 초왕은 빈전에 한 번도 얼굴을 비치지 않았다.

태비는 병상에 누워 있던 터라 빈전을 찾지 않아도 될 명분이 있었다. 사실 황제에게 실망해서 찾고 싶지 않은 마음이 컸다. 게다가 그녀가 더 웃어른이니 빈전을 찾지 않아도 시답잖은 말이 떠돌지 않을 터였다.

태비가 다친 곳은 왼쪽 어깨였다. 밥을 먹거나 차를 마시는 데에는 큰 문제가 없었다. 다만 평생 호사스러운 생활만 그녀에게는 조금의 고통도 크게 다가왔다.

아침에 약을 발라주던 영 마마嬷嬷가 어젯밤 초왕이 곁채에서 묵었다고 일러주었다. 서 태비가 뜻밖이라는 얼굴로 물었다.

“왕야가 정말 이곳에서 묵었다고?”

“정말이고말고요.”

영 마마가 빙그레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소인이 어찌 마마를 속이겠습니까?”

서 태비가 얼떨떨한 표정으로 물었다.

“한데 어찌 애가를 보러 오지도 않는단 말이냐?”

“국면이 겨우 안정을 되찾았으니 왕야께서도 바쁘시겠지요. 짬이 나시거든 꼭 보러 오실 겁니다.”

서 태비는 푹신한 의자에 천천히 등을 기대며 중얼거렸다.

“왕야가 애가의 처소에서 묵다니, 생각지도 못한 일이구나.”

“왕야께서는 줄곧 마마를 걱정하셨습니다. 그저 표현을 잘 안 하시는 것뿐이지요. 어제도 마마를 뵈러 오셨지만 밖에만 서 있다 가셨습니다. 마마의 상처가 그리 깊지 않은 걸 확인한 후에야 돌아가셨답니다.”

영 마마가 그녀를 다독거렸다.

“우리 왕야께서 어떤 성격이신지는 마마께서도 잘 아시지 않습니까? 걱정이 되셔도 겉으로 드러내지 않으시지요. 듣기 거북하시겠지만, 애당초 마마와 제가 큰 잘못을 저질렀습니다. 초왕비가 어떤 사람이든 왕야께서 유일하게 마음을 연 사람이 아닙니까?

초왕비마저 떠났으니 왕야께서 근심이 크시겠지요. 마마께서도 왕야의 상태를 보셨잖습니까. 소인은 정말 옆에서 보는 것만으로도 괴롭습니다.”

서 태비는 한참이 지나서야 묵직한 탄식을 내뱉었다.

“예전 일은 언급하지 말게나. 이젠 앞일을 내다봐야지. 감이가 애가에게 한 번만 더 기회를 준다면 좋은 관계로 되돌리고 싶네. 황제가 떠났으니 애가가 의지할 사람은 그 애밖에 없네. 태자는……. 애가가 예전에 황제를 도왔으니 애가에게 거리를 두겠지.

그저 태자와 애가 사이에서 감이가 난처할까 봐 걱정이네. 애가가 보기에 태자는 계략을 꾸미는 데 능통한 사람이야. 그 속을 도통 알 수가 없지. 감이가 태자 곁에 있으니 애가는 늘 걱정일세. 사실 감이가 천하를 평정해 주지 않았나, 대체 무엇 하러 다른 이를 위해…….”

“태비 마마.”

영 마마가 서둘러 그녀의 말을 끊고 낮게 속삭였다.

“황태자이옵니다. 낮말은 새가 듣고 밤말은 쥐가 듣는 법이니 항상 조심하셔야 합니다. 만에 하나 엿듣는 자가 있거든 왕야께 성가신 일이 생길 것입니다.”

때마침 소태감이 안으로 뛰어 들어오며 고했다.

“태비 마마께 고합니다. 태자 전하께서 오셨습니다!”

서 태비와 영 마마는 서로를 바라보며 흠칫 놀랐다. 영 마마가 급히 그녀의 옷매무새를 정돈해 주었다.

“태비 마마, 당황하지 마십시오. 왕야께서 계시는 한, 태자께서도 마마를 함부로 하지 않을 것입니다.”

서 태비는 짤막하게 대꾸하고 보석이 박힌 호갑투를 매만지며 말했다.

“안으로 뫼시거라.”

태자가 곧장 안으로 들어와 예를 갖춰 인사를 올렸다.

“태비, 상처는 많이 나아지셨습니까? 어제는 셋째가 경솔했습니다. 셋째 대신 태비께 사죄드립니다.”

태자가 허리를 숙여 다시 한번 인사를 올렸다. 어딜 보든 점잖고 예의 바른 모습이었다.

서 태비가 손을 들어 올리며 살포시 웃었다.

“그저 조금 다친 것뿐이라 입에 올릴 만한 것도 못 됩니다. 감이도 대의를 위해 그런 것이니 애가도 이해하지요. 태자께서 이토록 예를 갖춘 걸 감이가 알면 분명 애가를 책망할 겁니다.”

“그런 말씀이 어디 있습니까. 태비께서는 웃어른이십니다. 아랫사람은 응당 웃어른께 예를 다해야지요.”

태자가 의자에 앉아 미소를 지었다.

“성을 공격하는 와중에 다치신 것이 아닙니까. 이 아들들이 불효를 저지른 것이지요.”

자신을 아들이라 칭했으니, 태자는 서 태비에 대한 태도를 분명히 밝힌 셈이다. 앞으로 초왕처럼 그녀에게 효를 다할 것이며 묵용한 못지않게 부귀영화를 누리게 해 주겠다는 뜻이었다.

서 태비는 순간 큰 깨달음을 얻었다. 그녀는 대황자 묵용한을 길러 준 보답으로 윤택한 삶을 누렸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다시 생각해 보면 그게 아니었다. 그 또한 태자처럼 묵용감과의 관계 때문에, 묵용감이 자신들 대신 천하를 일궈 주었으니 그녀에게도 도리를 다했을 뿐이다.

사실을 깨닫고 나니 복잡한 감정이 밀려왔다. 그녀는 묵용감을 위해서 해 준 게 아무것도 없었다. 정작 좋은 아들이라고 여겼던 이는 은혜도 모르고 그녀를 사지로 내몰지 않았던가. 오히려 마음의 거리를 두었던 친아들 덕에 말년에 호사를 누리고 있었다. 안타깝게도 그녀는 이 사실을 너무 늦게 깨달았다.

태자는 참을성 있게 서 태비와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눈 뒤, 인사를 올리고 물러났다. 그는 이어 묵용감을 만나러 곁채로 향했다. 백여름 일가의 유배 소식을 막 접한 참이었다. 그는 늘 백씨 집안을 몰살할 생각을 해 왔다.

즉위식이 거행되는 대로 가장 먼저 백여름에게 교지를 내릴 계획이었다. 그해 대황자 묵용한이 즉위하자마자 황보 가문을 몰살했던 것처럼, 백여름에게도 똑같이 갚아 주어야 했다.

더욱이 황보주아에게 꼭 복수를 해 주겠노라고 약속하지 않았는가. 그녀의 최후를 생각하면, 그는 반드시 약속을 지켜야만 한다.

곁채는 그리 멀지 않았다. 좁은 담장을 지나 뜰을 지나면 바로 도착했지만 전전前殿과는 전혀 다른 분위기였다. 전전에는 불을 때어 따뜻하기도 했고, 궁녀와 태감들이 바쁘게 돌아다니는 터라 그래도 제법 북적였다.

그러나 곁채는 발을 들여놓자마자 음산한 기운이 온몸을 감쌌다. 더욱이 얼음덩어리 같은 영구가 문 앞을 떡하니 지키고 있으니 한기가 더욱더 짙게 뿜어져 나오는 듯했다.

그가 안으로 들어가려 하자 영구가 앞을 막아섰다.

“태자 전하, 조금만 기다려 주시지요. 왕야께서 잠시 다른 용무를 보시는 중입니다.”

태자가 그를 바라보았다. 예전에도 영구는 이런 식이었지만, 그는 그동안 불편한 심기를 드러내지 않았다. 그러나이제 곧 새로운 황제가 될 몸인데 그를 이런 식으로 대하다니……. 홧김에 목을 벨 수도 있거늘, 정녕 후환이 두렵지 않단 말인가?

태자는 솟구치는 감정을 억누르고 옅은 미소를 지었다.

“네 왕야가 무엇을 하는 중이더냐?”

영구는 침묵으로 답할 뿐이었다.

태자의 심기는 더없이 어지러웠다. 이렇게 꽉 막힌 사람은 본 적이 없었다. 영구에게 주인이라고는 초왕밖에 없었다. 그러나 태자가 즉위만 하면 온 천하의 주인이 되지 않는가. 초왕조차 그에게 삼고구배三叩九拜(머리를 땅에 세 번 찧고 아홉 번 절하는 인사 방식)를 해야 하는데 일개 호위무사 따위가 뭐라고…….

그는 이 순간을 똑똑히 새겨 두었다. 천자의 자리에 오르면 제대로 갚아 주리라. 설령 초왕이 안다 해도 일개 호위무사 때문에 그에게 등을 돌리겠는가?

이런저런 생각에 잠겨 있는데 마침 광주리를 든 월규가 안에서 나왔다. 그녀는 태자에게 예를 갖춰 인사를 올린 뒤, 서둘러 뒤쪽으로 향했다.

알고 보니 초왕은 방 안에서 계집종과 함께 있던 것이었다. 태자는 빠르게 머리를 굴렸다. 설마 왕비의 수발을 들던 계집에게 의지하려는 것인가?

영구가 살짝 옆으로 물러나 예를 갖추었다.

“전하, 안으로 드시지요.”

태자가 안으로 들어가자 학평관이 무릎을 굽혀 인사를 올리더니 발을 걷어 주었다.

“태자 전하를 뵈옵니다.”

태자는 문 앞에 서서 안을 들여다보았다. 낮이었지만 창문을 다 닫아 놓으니 방 안은 저녁처럼 캄캄했다. 한참이 지나 두 눈이 어둠에 익숙해지니, 푹신한 의자에 반쯤 기대어 있는 초왕이 보였다. 아무래도 잠이 든 것 같았다.

태자가 학평관을 바라보자 학평관은 고개를 저었다. 잠든 게 아니라는 의미였다.

태자가 박장대소를 터뜨렸다.

“궁 안에 분주하지 않은 곳이 없거늘, 셋째 너는 조용히 숨어 있으니 아주 편해 보이는구나.”

그의 목소리에 초왕이 몸을 일으켜 세우더니 무덤덤한 얼굴로 물었다.

“무슨 일 있으십니까, 형님?”

“일이 없으면 만나러 오지도 못한단 말이냐?”

태자는 학평관이 직접 내어온 차를 받아들고 뚜껑으로 찻잎을 건져 냈다.

“너와 의논할 일이 아주 많다. 한데 네 사람을 통 만날 수가 있어야지.”

초왕이 입꼬리에 힘을 주며 옅은 미소를 지었다.

“전 공성에만 관여할 뿐입니다. 제 임무는 모두 완수했으니 남은 건 형님의 몫입니다.”

태자가 수척해진 그의 얼굴을 바라보며 말했다.

“네가 고생했다는 거 잘 안다. 물론 자질구레한 일에 관여할 필요 없지. 그래도 대행황제의 발인이 끝나면 즉위식을 거행해야 하지 않느냐. 나라의 군주는 단 하루도 자리를 비워선 안 되는 법이지.”

초왕이 짧게 물었다.

“날짜는 정해졌습니까?”

“그래. 제갈 선생은 정월 초파일이 즉위식을 올리기에 아주 길한 날이라더구나. 네 생각은 어떠하냐?”

“예. 좋습니다. 그날로 하시지요.”

초왕은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대꾸하고는 차를 한 모금 들이켰다.

“다른 일은 형님께서 알아서 하시지요. 전쟁이나 출전 말고는 제가 도와드릴 일이 없습니다.”

태자가 그를 힐끔 바라보며 용건을 꺼냈다.

“백씨 일가를 유배 보냈다고 들었다.”

“예, 그리하였습니다.”

태자가 조심스레 그의 의중을 떠 보았다.

“그간 백여름 그 작자를 몹시 성가셔하지 않았느냐? 한데 유배를 보내다니. 네가 그자의 목을 칠 줄 알았다.”

초왕은 잠시 침묵하다 천천히 입을 열었다.

“어쨌든 천범의 아버지이니까요. 죽일 수 없습니다.”

“하지만 주아에게 복수를 해 주겠다고…….”

태자는 해선 안 될 말을 내뱉었다는 생각에 황급히 말을 끊었지만, 초왕의 얼굴은 이미 어둡게 침잠하고 있었다.

“제 처를 죽인 여인을 위해 복수를 해 줄 생각이십니까?”

어둡고도 고요하게 타오르는, 짙은 분노였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