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54화
초왕은 아무 말도 없이 가만히 서 있었다. 방 안은 긴장된 침묵에 휩싸였다. 백씨 가문의 사람들은 쿵쿵 뛰는 자신의 심장 소리마저 똑똑히 들을 수 있었다. 두근, 두근, 두근, 두근! 다급하고 혼란스러운 소리였다.
결국 중압감을 이기지 못한 누군가가 천천히 쓰러졌다. 그 소리를 신호로, 초왕이 차디찬 목소리를 내뱉었다.
“다들 일어나거라.”
다들 벌벌 떨며 자리에서 일어났지만 누구도 감히 그의 얼굴을 볼 생각을 하지 못했다. 그때 초왕이 다시 입을 열었다.
“백 승상과 부인만 남고 나머지는 밖으로 나가도록.”
화들짝 놀란 이씨 부인이 전전긍긍하며 말했다.
“와, 왕야, 어째서 저희를 나누시는지요?”
나머지 식구들이 소리 없이 밖으로 나가자 불안한 기운이 그녀를 엄습했다.
백 승상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방 한가운데 꼿꼿이 서 있었다.
다들 밖으로 나간 후, 가동이 문을 걸어 잠갔다. 초왕은 팔걸이 나무 의자에 앉아 이씨 부인을 가리켰다.
“물어볼 말이 있으니 가까이 오너라.”
이씨 부인은 백 승상을 힐끔거리며 작게 중얼거렸다.
“승상…….”
그러나 백 승상은 그녀에게 눈길 한 번 주지 않았다. 죽음을 코앞에 두면 각자 자신의 살길만 궁리하는 법이었다. 어차피 백 승상은 그녀에게 아무런 감정도 남아 있지 않았다.
백 승상의 꼴을 본 이씨 부인은 이를 악물었다. 그마저도 자신을 외면했는데 누굴 믿겠는가. 그녀는 결국 덜덜 떨며 초왕의 앞으로 걸어갔다.
“와, 왕야, 무엇을 물으시려는 것입니까?”
초왕이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천범을 왜 그리 미워했는가?”
설마하니 그 질문을 던질 줄은 몰랐기에, 이씨 부인은 흠칫 놀랐다.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말을 더듬거렸다.
“저, 저는 미, 미워한 적 없습니다.”
“미워하지 않았다면 어찌 해하려 했단 말인가?”
이씨 부인이 털썩 무릎을 꿇으며 절규했다.
“왕야, 억울하옵니다. 아껴주기만 해도 부족한데 해하려 하다니요. 지난번 일도 명백하게 밝혀지지 않았습니까? 그 못된 하인들이 꾸민 일이었으니, 저와는 관계가 없습니다. 왕야, 그런 말씀은 부디 거두어 주십시오…….”
초왕은 뻔한 거짓말을 늘어놓는 그녀의 모습에 짜증이 났다.
“본왕이 마지막 기회를 줄 테니 솔직히 털어놓거라. 그렇지 않으면…….”
그가 말을 채 끝내지도 않았는데 옆에 있던 가동이 검을 뽑아 들었다. 서슬 퍼런 검날이 번쩍거리자 이씨 부인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순식간에 혼이 빠져나간 듯했다.
가동이 호통쳤다.
“말하지 못할까! 무슨 연유로 왕비를 해하려 한 것인가?”
무시무시한 호통에 깜짝 놀란 이씨 부인은 뒤로 발라당 나자빠졌다. 그녀는 바닥에 맥없이 엎드린 채 입술을 파르르 떨었다.
“왜, 왜냐하면…….”
백천범을 죽이려 한 걸 인정하면 목이 날아갈 것이 뻔했다. 그녀는 이 와중에도 머리를 굴리며 살길을 찾고 있었다. 그때, 검이 천천히 다가오더니 그녀의 목을 겨누었다. 차갑고 날카로운 검날이 피부에 닿으며 스산한 느낌을 전해 주었다.
초왕이 또박또박 숫자를 셌다.
“셋, 둘, 하나.”
이씨 부인은 결국 생각할 겨를도 없이 말했다.
“여우 같은 년이니까요!”
그 순간 백 승상이 그녀를 매섭게 노려보다 재빨리 자신의 신발 코로 시선을 옮겼다.
초왕이 다시금 물었다.
“천범의 모친에게 품고 있던 원한을 천범에게 갚았느냐?”
이씨 부인은 아무런 대꾸도 할 수 없었다. 그녀는 잿빛이 된 얼굴로 초왕을 바라보며 바들바들 떨기만 했다.
초왕이 가동을 향해 턱을 들어 올렸다 내렸다. 가동은 곧장 칼끝에 힘을 실었고, 칼날은 그녀의 목에 일직선으로 된 상처를 남겼다. 얇게 그인 붉은 선이 점점 더 벌어지더니 급기야 피가 울컥 솟구쳤다.
이씨 부인은 목을 움켜쥔 채 허덕였다. 겨우 입을 떼려는데, 풍상風箱(불을 피울 때 바람을 일으키는 기구)을 돌리듯 가쁜 숨만 내뱉어질 뿐, 안으로 들이켤 수 없었다. 그녀는 뭔가를 말하려 애썼지만, 몇 차례 숨을 헐떡인 끝에 바닥에 쓰러지고 말았다. 곧 허덕이던 숨소리마저 잦아들며 잠잠해졌다.
어쨌든 자신의 본처였으니, 백 승상도 그 광경에서 눈을 뗄 수 없었다. 어느덧 백 승상의 머릿속도 하얗게 물들었다. 이제 곧 그의 차례였다.
가동은 문밖에 있던 병사들을 불러 이씨 부인을 밖으로 옮겼다. 문밖에 모여 있던 나머지 식구들은 이씨 부인의 시신을 보자 소스라치게 놀랐다. 그들은 서로를 부둥켜안고 잔인한 이 시간을 버티고 있었다. 그간 맺힌 원한은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시신을 내보냈지만 방 안엔 피비린내가 가득했다. 백 승상의 이마에서 땀방울이 천천히 흘러내렸다. 그는 소매를 들고 땀을 닦은 뒤, 천천히 심호흡을 했다. 누구보다 겁이 많고 목숨을 아끼는 백 승상이었지만, 막상 죽음의 물결이 턱밑까지 오니 오히려 오히려 평정심이 마음을 채웠다. 그는 초왕이 그를 부르기 전에 먼저 다가가 물었다.
“왕야, 죄신에게도 물어볼 게 있으십니까?”
물론, 있었다. 초왕이 느릿하게 입술을 움직였다.
“그때, 천범을 왜 본왕에게 보냈는가?”
백 승상이 선뜻 답했다.
“살길을 찾아 주고 싶었습니다. 저택에 남아 있었다면 목숨을 잃었을 테지요.”
“본왕이 죽일까 걱정되진 않았느냐?”
“왕야께서 죄신에게 원한을 품고 계시긴 했지만, 대인군자이신 것을요. 불쌍한 계집아이를 죽이지 않으실 거라고 확신했습니다.”
그는 초왕의 질문에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답했다. 그 모습이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말인 듯 결연하기까지 했다.
묵묵히 그를 응시하던 초왕은 자리에서 일어나 그대로 밖으로 나갔다. 백 승상은 깜짝 놀란 채 그 자리에 못박혀 있었다. 설마, 그를 살려 주려는 것인가…….
초왕과 가동이 밖으로 나오자 나머지 식구들은 영문을 모르겠다는 얼굴로 고개를 숙였다. 곧 모두들 방 안으로 밀려들어와 백 승상에게 질문을 퍼부었다.
“아버지, 대체 이게 무슨 일입니까?”
“아버지, 초왕이 우리를 풀어 준 것입니까?”
“아버지, 초왕이 뭐라 하였습니까?”
“아버지…….”
“되었다!”
백 승상이 큰소리로 호통쳤다. 영문을 모르는 건 그도 마찬가지였다. 쉴 새 없이 쏟아지는 질문에 마음만 심란해질 뿐이었다.
“다들 그 입 다물거라!”
그가 화를 내자 다들 잠잠해졌다.
어쨌든 죽음의 문턱에서 겨우 한 발짝 물러난 셈이었다. 순식간에 피로가 몰려온 백 승상이 손을 내저었다.
“다들 피곤할 테니 처소로 들어가서 쉬고 있거라. 복이든 화든 지금은 피할 길이 없다. 음식이 들어가거든 밥을 먹고, 잠이 오거든 자거라. 내일 일은 내일 다시 얘기하고.”
그의 말은 운명에 따르겠다는 의미였다. 백 승상이 의문을 풀어 줄 수 없다는 걸 깨달은 식구들이 하나둘 자리를 떴다. 백장전만이 남아서 피로 흥건한 바닥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백 승상이 다가가 그의 등을 토닥였다.
“네 어미가 갔다. 일찍 떠난 만큼 환생도 빠를 테니 복수 따위를 할 생각은 말거라. 천범이에게 했던 짓을 돌이켜보면 이럴 수밖에 없는 팔자였다. 복수를 하려 한들 목숨만 버리게 될 테니 어서 방으로 돌아가거라.”
물론 백장전도 자신의 실력으로는 복수할 수 없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계란으로 바위를 치는 일이나 다름없었다. 그는 다른 부잣집 도령들과 마찬가지로 안채의 일에는 관심을 두지 않았다. 다만 이씨 부인이 백천범에게 저지른 짓은 어느 정도 알고 있었다. 역시 불의를 저지르면 죽음을 자초한다는 말이 틀리지 않았다.
백장영은 우선 보석과 장신구를 챙겨 도망치기로 마음먹었다. 막상 담장 위로 올라가 보니 초왕의 군대가 저택을 빼곡히 둘러싸고 있었다. 병사들의 시선이 자신에게 쏠리자, 백작영은 지레 겁을 먹고 담장에서 굴러떨어졌다. 그 바람에 발을 접질리고 말았다.
그 모습에 잔뜩 성이 난 넷째 부인이 삿대질을 하며 욕을 퍼부었다.
“이런 쓸모없는 놈! 위험이 닥치니 아버지와 어머니, 누이들까지 다 버리고 홀로 도망치려 하는구나, 발이 다쳐도 싸지!”
이 소식을 접한 백 승상은 쓴웃음을 삼켰다. 콩 심은 데 콩 나고 팥 심은 데 팥 나는 법이었다. 그가 훌륭한 사람이 아닌데 어찌 자식이라고 제대로 된 사람일까. 단 한 명… 백천범만은 예외였지만……. 이 순간, 그는 진심으로 자신의 딸이 보고 싶었다…….
저녁이 되자 가동이 초왕의 교지를 받들고 다시 저택을 찾았다. 백씨 집안 식구들은 다시 한데 모여 불안한 눈빛으로 가동을 바라보았다.
초왕은 황제가 아니었기 때문에 정식 교지가 아닌 구두 명령이었다. 그러나 정식 교지만큼 백씨 집안 사람들을 두렵게 만드는 위력이 있었다. 가동이 큰 소리로 말했다.
“백씨 집안의 모든 이들을…….”
‘모든 이’라는 말에 다들 얼굴이 하얗게 질렸고 눈가에 눈물이 차올랐다. 분명 그 뒤에는 몰살하라는 내용이 적혀 있을 게 뻔했다.
가동은 일부러 뜸을 들이며 한 사람 한 사람의 얼굴을 훑어보았다.
모두들 울 듯한 표정으로 가동을 빤히 바라보았다. 가동이 뒷말을 내뱉는 순간 무너질 돌탑처럼 위태로운 모양새였다.
그러나 가동이 내뱉은 말은 그들의 고개를 갸우뚱하게 했다.
“백씨 집안의 모든 이들에게 유배형을 내리노라!”
의아함도 잠시, 안도의 숨이 흘러나왔다. 심지어 환호성을 지르는 사람도 있었다. 목숨만 부지할 수 있다면 뭐든 상관없었다.
백 승상이 털썩 무릎을 꿇으며 눈물이 그렁그렁 맺힌 얼굴로 소리쳤다.
“죄신, 목숨을 살려 주신 초왕의 은혜에 감읍할 따름입니다!”
* * *
이튿날은 섣달그믐이었다. 전날과 마찬가지로 화창한 날씨가 이어졌지만, 임안성 거리 곳곳은 여전히 문을 굳게 잠그고 있어 스산한 분위기를 자아냈다. 어젯밤 내린 눈이 길목마다 소복하게 자리 잡았다. 대열을 갖춰 이동한 사병들의 발자국을 제외하면, 대부분이 새하얀 양탄자처럼 깨끗하고 도톰한 형태를 갖추고 있었다.
그때, 갑작스레 조종이 울렸다. 길게 울려 퍼진 조종 소리는 잠시 뒤에 한 차례 더 길게 이어졌다. 아무도 알려 주지 않았지만, 백성들은 누구의 죽음인지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다.
새 주인이 성을 공격했으니 옛 주인은 죽음을 맞을 수밖에.
황제가 승하하면 집마다 흰 천을 매달고 소복을 입는 게 관례였다. 또한 향을 피우고 절을 올려 황제에 대한 애도를 표해야 했다. 그러나 이번에는 그 누구도 소복을 입거나 흰 천을 달 수 없었다.
애당초 새해를 맞아 준비해 두었던 새 옷도 입지 못했고, 각자 자신의 집 마당에서 까치발을 든 채 이웃들과 눈빛을 주고받을 뿐이었다. 결국 눈치만 보던 백성들은 평소의 차림새를 갖추고 멍하니 하늘만 올려다보았다.
황제의 관은 장생전에 놓였다. 엄숙하게 꾸민 빈전의 문머리에는 상을 알리는 하얀 천과 흰색 등롱을 매달았다. 빈소를 찾는 이들은 많지 않았다. 후궁의 비빈들과 태감, 궁녀들이 전부였고 문무백관은 단 한 명도 발길을 하지 않았다. 이런 때 눈에 띄었다가 자칫하면 대행황제의 뒤를 따를 수도 있었다.
빈전 가장 왼편에 무릎을 꿇은 고승해는 눈물 콧물 범벅이 되도록 울고 있었다. 그러나 그 눈물은 황제가 아닌 자신을 향한 애도였다. 황후가 세상을 떠날 때 그는 백 귀비를 도와주던 하수인이었다.
초왕이 그를 벼르고 있다가 칼을 뽑아 들 게 분명했다. 아직 목이 붙어 있는 걸 보면 처리할 일이 너무 많아 신경을 쓰지 못하기 때문이리라. 하지만 대행황제의 장례가 끝나면 분명 그의 차례가 돌아올 터였다.
심지어 도망은 꿈도 꿀 수 없었다. 초왕에게 걸린 자들은 제아무리 용하게 도망친들 결국엔 붙잡혀 죽음만 앞당기곤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