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가유왕비초장성 (453)화 (452/1,192)

제453화

태자가 손수 그를 일으켜 주었다.

“좋은 날 어찌 눈물을 보이느냐? 아직도 동궁의 총관리인이더구나. 이제 곧 승덕전으로 가게 될 것이다. 과인이 분명 복이 올 거라 하지 않았느냐? 그 말이 이제 실현된 셈이다.”

손귀희가 눈물을 훔치며 얼른 고했다.

“전하께서 복이 많으시기 때문이지요. 모든 게 다 전하 덕분입니다.”

태자는 장영전 안으로 들어가며 사방을 둘러보았다. 동궁은 황자들이 공부를 하는 장영전으로 바뀌었지만, 손귀희는 이날만을 기다리며 예전과 같이 유지해 두었다. 자단목으로 만들어진 커다란 병풍과 은 조각이 새겨진 구리 향로, 각지에서 수집한 자기가 놓인 장식장까지, 전부 예전 그대로였다.

물론 달라진 것도 있었다. 책꽂이에는 그의 책이 한 권도 남아 있지 않았다. 그가 썼던 글도 찾아볼 수 없었다. 글을 말아 담아 두던 청화 자기도 텅 비어 있었다. 그가 쓴 모든 글은 다 불태워 버린 듯했다.

새하얀 벽을 훑어보던 태자가 내관을 불러 붓과 먹을 가져오라고 분부했다. 이내 얼굴이 비칠 만큼 투명한 책상에 새하얀 종이가 펼쳐졌다. 족제비 털로 만든 붓을 집어 든 태자가 큼직하게 글자를 써 내려갔다.

「영욕불견榮辱不惊(영예와 치욕에 동요하지 않는다는 뜻)

원래는 그의 서재 벽에 걸려있던 글귀였지만, 지금은 산수화가 그 자리를 대신하고 있었다. 손귀희는 서둘러 소태감을 불러들였다. 태자가 쓴 글귀의 먹을 말리고 표구를 하여 벽에 걸어두기 위함이었다.

그때, 제갈겸유가 안으로 들어와 예를 갖추며 인사를 올렸다.

“노부, 전하께 경하 인사 올립니다.”

태자는 늘 그의 식견을 높이 샀기 때문에 이번에도 자신이 쓴 글씨를 보여 주었다.

“선생이 보기엔 어떠한가?”

진지하게 살펴보던 제갈겸유가 수염을 쓸어내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훌륭합니다. 전하의 글씨는 힘이 넘치고 기운이 드높아 한눈에 보아도 대가의 풍모임을 알 수 있지요.”

그러다 그가 잠시 머뭇거리더니, 말을 꺼냈다.

“금군은 한통이 관리하게 되었다고 들었습니다. 지금은 바로잡아야 할 일이 많습니다. 한 장군은 이번 공성의 부장이니, 그가 관리한다면 마음 놓으셔도 될 듯합니다.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초왕을 얻는 자가 천하를 얻는 법입니다. 초왕이 전하를 위해 이 천하를 지킬 테니 전하께서는 걱정하지 마십시오.”

태자가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선생의 말을 따른 덕에 오늘 같은 날을 맞았지. 선생의 말대로일세. 초왕이 황궁과 천하를 지켜 준다면야 과인은 마음을 놓을 것이네.”

* * *

백 승상은 손을 쓰기엔 너무 늦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이미 초왕의 군대가 저택을 빼곡하게 둘러싸고 있었다.

초왕의 군대가 쳐들어왔을 때, 그는 어디로든 도망칠 계획이 있었다. 그러나 밖을 살펴보니 은색 갑옷을 입은 사병들이 진을 치고 있었다. 만약 그가 식솔들을 이끌고 도망친다면 금세 잡혀가거나 죽을 게 뻔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궁 안에서 전투가 벌어지고 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그는 그제야 정원으로 나와 대문 밖 상황을 살피려 했다. 그때, 누군가 그를 다시 안으로 밀어 넣었다.

기개가 하늘을 찌를 듯한 초왕의 군대는 여전히 그의 저택을 지키고 있던 것이다. 한 젊은 청년이 백 승상을 보자마자 입을 활짝 벌리며 웃었다.

“백 승상, 그간 무탈하시었습니까?”

백 승상도 아는 얼굴이었다. 초왕의 호위무사, 가동이라는 자였다.

가동이 계속 히죽거리며 말했다.

“백 승상, 격렬한 전투로 혼란스러운 와중에 어딜 가시려는 것입니까?”

백 승상이 태연하게 웃음 지었다.

“어딜 가겠소? 그저, 잠시 상황을 살펴본 것뿐이지.”

“나오지 않는 게 좋을 겁니다. 지금 밖은 전쟁이 한창이니까요. 원래 칼에는 눈이 달려 있지 않으니, 언제든 승상에게 날아올지도 모르는 법이거든요. 소인도 감당이 안 될 정도이지요.”

가동이 병사들을 가리키며 말했다.

“보셨지요? 우리 왕야께서 승상이 걱정되시어 특별히 소인에게 분부를 내리셨습니다. 병사들과 이곳에서 승상의 안전을 지켜 드리라고 말입니다.”

백 승상이 그의 말뜻을 못 알아들을 리 없었다. 초왕이 세력을 장악하면 백씨 집안은 그야말로 풍비박산이 나리라. 지켜 주는 것은 어디까지나 명목상의 허울이었고, 사실 그들은 감금되어 있었다. 전쟁이 끝나면 초왕이 직접 찾아와 그를 처단할 게 분명했다.

그러나 그가 무슨 수가 있으랴. 백 승상은 어쩔 수 없이 뒤로 물러났다. 초왕의 군대가 저택을 포위했다는 소식은 안채에도 전해졌고, 다들 얼굴이 하얗게 질려 벌벌 떨었다. 그중에서도 가장 겁에 질려 있던 이씨 부인은 백 승상의 소매를 놓을 줄 몰랐다.

“승상, 이를 어찌한단 말입니까? 초왕이 우리를 죽이려 할까요? 다섯째가 그자의 왕비 아닙니까? 그래도 왕비의 체면을 세워 주어야지, 이럴 수는 없습니다…….”

넷째 딸 백강연白江燕이 다가와 그녀를 위로했다.

“어머니, 걱정하지 마시어요. 초왕이 다섯째를 목숨처럼 아꼈었다잖아요. 다섯째는 떠났더라도 초왕은 아버지를 장인이라고 생각하고 있을 거예요. 그렇지 않으면 무엇 하러 병사들을 보내 우릴 지켜 주겠어요.”

그녀의 말에 몇몇은 마음을 놓았다. 셋째 딸 백강유白江柔가 손화로를 든 채 말했다.

“넷째 말이 맞습니다. 초왕이 다섯째를 끔찍이 아끼지 않았습니까? 우리에게 못된 짓을 하진 않을 것입니다. 아까 호위무사도 그러지 않았습니까? 초왕이 우리를 지켜 주라고 했다고요.”

그 모습을 지켜보던 둘째 도령 백장전이 음흉한 웃음을 지었다.

“백천범 얘기만 꺼냈다 하면 죽일 년이네, 천박한 년이네 욕만 퍼붓더니……. 지금은 목숨 하나 부지하겠다고 다섯째라는 말이 입에 붙었구나. 초왕이 정말 너희의 체면을 봐주긴 할까.”

백강유와 백강연은 눈을 부릅뜬 채 그를 노려보았다. 그때 염치 따위 없는 이씨 부인이 뻔뻔하게 입을 열었다.

“그게 무슨 말이냐! 다섯째가 저택에 있을 때 우리가 뭘 부족하게 해 줬다고. 시집을 갈 때에도 규율에 맞게 혼수를 잔뜩 실어 보내지 않았느냐? 내 친딸은 아니어도 승상의 피를 이어받은 한 핏줄이다.

초왕이 다섯째를 끔찍이 은애했으니 처가도 특별히 신경을 써 줄 테지. 죽이기는커녕 승상께 더 높은 벼슬을 내려 줄지도 모르니, 얌전히 있거라. 함부로 추측하지 말고. 초왕이 곧 이곳을 찾아 주실 것이다.”

백 승상은 수치심도 모르고 떠들어 대는 그녀를 어처구니 없다는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목숨이 날아갈 판이건만, 저리 헛된 꿈에 빠져 있다니. 백 승상은 그녀를 무시하며 초왕의 심중을 파악하려 애썼다.

가문을 몰살하려는 것인가? 아니면 유배? 한참을 고민한 끝에 결론을 얻었다. 아무래도 초왕의 증오심은 백씨 집안의 몰살에 닿아 있을 가능성이 컸다.

그는 식구들의 얼굴을 하나하나 훑었다. 이 자리에 없는 세 명의 얼굴이 떠올랐다. 큰딸 백강릉은 시집을 갔으니, 그녀의 시댁에까지 죄를 물을지 확신할 수 없었다. 둘째 딸은 궁에 있으니 아무래도 좋지 않은 최후를 맞이하리라. 그리고 큰아들 백장간은……. 백장간을 떠올리자, 갑작스레 희망이 샘솟았다.

이 저택에서 백천범에게 잘해 준 사람이 있다면 바로 큰아들 백장간이었다. 초왕이 은혜를 베풀어 백장간을 풀어 준다면, 백씨 가문이 몰살되어도 제사를 지낼 자손은 남는 셈이다. 그나마 조상들 볼 낯이 조금은 생기게 될 거라며, 백 승상은 희망을 위안 삼았다.

시간이 흐를수록 백씨 집안사람들의 두려움은 짙어져 갔다. 둘째 부인이 수건으로 눈물을 닦았다.

“장간이가 어찌 되었는지 모르겠습니다. 죽어야 한다면 가족이 같이 죽어야 황천길도 함께 갈 텐데 말입니다. 장간이가 우리를 찾지 못해 그 길을 쓸쓸히 가기라도 하면 어찌한단 말입니까……”

셋째 딸 백강유가 조용히 그를 타일렀다.

“그런 생각은 하지 마시어요. 큰 오라버니를 죽일 거였으면 초왕이 진작 손을 썼겠지요. 무엇 하러 지금까지 기다리겠습니까? 초왕이 큰 오라버니를 죽이지 않았으니 우리도 죽이지 않을 것입니다.

작은어머니께서 큰 오라버니와 큰언니를 보고 싶어 한다는 거 잘 압니다. 저도 작은어머니의 딸이니 앞으로 큰 오라버니와 큰언니를 대신해 효를 다하겠습니다.”

옆에 있던 다섯째 부인이 입을 삐죽거렸다. 노랫가락보다 더 듣기 좋은 말이었다. 자신이 낳은 자식인데 어찌 속내를 모르겠는가. 백장간과 백천범의 사이를 생각해 지금이라도 그 틈에 끼어들려는 것이었다.

죽는 순간이 다가오니 다들 치열하게 셈을 따지고 있었다. 그러나 이렇게라도 해서 목숨을 부지할 수 있다면 그것도 복이 아니겠는가.

넷째 부인이 싸늘하게 코웃음을 쳤다.

“셋째가 이렇게 말을 잘하는 줄 처음 알았구나. 그리 작은 입에 꿀이라도 바른 게냐? 나는 딸이 없으니 셋째 네가 내게도 효를 다해 주었으면 좋겠구나.”

백강유가 경멸이 담긴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넷째 작은어머니, 셋째 오라버니가 앞에 있는데 오라버니의 체면을 구기시는 것입니까? 누가 들으면 셋째 오라버니가 작은어머니께 효를 다하지 않는다고 생각하겠습니다.”

그때, 줄곧 귀를 쫑긋 세우고 있던 셋째 도령 백장영白長英이 손을 들고 낮게 호통을 쳤다.

“다들 조용히 하십시오! 누가 왔습니다.”

모두의 긴장된 시선이 백 승상에게 향했다.

백 승상도 두렵긴 마찬가지였으나, 한 집안의 가장으로서 식구들의 간절한 눈빛을 저버릴 순 없었다. 어차피 도망칠 방도도 없었다. 그는 마음을 가다듬고 앞으로 향했다.

역시나 초왕이 저택을 찾았다. 그는 가동만 곁에 둔 채 방 안으로 들어왔다.

두 해 만에 초왕과 재회한 백 승상은 순간 이상한 기분에 휩싸였다. 눈앞에 있는 이 사람은 누구란 말인가? 아무리 봐도 원한을 갚으러 온 염라대왕의 형상이었다. 어두운 안색과 심연 같은 눈망울을 마주했을 뿐인데,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그는 온갖 풍파를 겪어온 데다, 초왕에게 목을 졸려 질식할 뻔하기도 했다. 그러나 지금처럼 그가 두려웠던 적이 없었다.

그도 승상으로서 나름의 기개를 보여 주고 싶었으나, 이미 다리는 힘이 풀려 버렸다. 다리를 후들후들 떨던 그가 결국 털썩 무릎을 꿇었다.

“초왕야께서 행차하시는 줄 몰라 죄신이 마중을 나가지 못하였습니다. 죽어 마땅하옵니다!”

그는 스스로를 죄신이라 칭했다. 태도와 입장을 분명히 밝혔으니 이제 초왕의 처분을 기다리면 될 일이다. 그 와중에도 백장간이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이 그를 조금이나마 위로했다. 이 자리에 데려오지 않았다면, 풀어줬을 가능성이 컸다. 백 승상은 이 자리에서 몰살당하더라도 겸허히 받아들이리라 마음먹었다.

그의 뒤로 나머지 식구들이 우르르 걸어와 무릎을 꿇었다. 초왕에게서 뿜어져 나오는 기개는 실로 대단했다. 따뜻했던 방 안이 그가 들어오자마자 한기로 가득 찼다. 그야말로 모골이 송연해지는 한기였다. 덕분에 제대로 꿇어앉은 사람은 몇 없었고 거의 다 바닥에 납작 엎드려 초왕의 처분을 기다릴 뿐이었다.

그들의 생사가 초왕의 말 한마디에 좌우되는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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