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52화
마침 어린 궁녀가 바삐 들어오다 그와 부딪힐 뻔했다. 그를 알아본 궁녀가 몸을 바들바들 떨며 고개를 숙였다.
“와, 왕야를 뵈, 뵈옵니다…….”
묵용감은 궁녀에게 눈길 한번 주지 않고 밖으로 향했다.
앞뜰로 향하는데 누군가 묵용감을 향해 빠르게 달려오고 있었다. 바람에 휘날리는 자색 겉옷은 꼭 커다란 나비가 바람에 휩쓸려 필사적으로 날갯짓하는 듯했다. 그가 손을 허리에 얹고 숨을 몰아쉬며 말했다.
“셋째 형님, 드디어, 돌아오셨군요.”
묵용감이 담담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돌아왔다.”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담담한 그의 태도에, 진왕의 낯빛이 조금 어두워졌다.
“형님, 혹…….”
“난 괜찮다.”
묵용감은 뒷짐을 지더니 눈을 가늘게 뜨며 그를 유심히 살폈다.
“여섯째 너는 무탈하였느냐.”
“잘 지냈습니다. 저야 늘 셋째 형님이 걱정이었지요.”
진왕도 그를 찬찬히 훑어보았다. 그러나 초왕의 모습이 눈에 담길수록, 그의 마음은 무겁게 가라앉았다. 더는 그가 알던 초왕이 아니다. 얼굴은 태연해 보였지만 몸에서는 범접하기 힘든 살기가 뿜어져 나왔다. 형제인 그마저도 절로 몸이 떨릴 정도였다.
그는 초왕과 초왕비를 오래전부터 지켜본 사람이었다. 초왕비의 비보를 전해 들었을 때, 그는 앞으로 일어날 일을 직감했다. 분명 큰일이 터지리라. 얼마 지나지 않아 초왕이 군대를 이끌고 북진했다.
다른 이들은 몰라도 그는 초왕비와 세자가 갑작스레 세상을 떠난 일을 수상쩍게 여겼다. 분명 배후가 있으리라고 확신했다. 결국 이번 전쟁에는 초왕비와 세자가 관련되어 있었다. 초왕이 갈 곳 잃는 분노를 발산하기 위함이 아니었던가.
이제 와 지나간 일을 언급할 필요는 없었다. 가슴만 아파질 따름이기에, 진왕이 그의 어깨를 툭툭 치며 말했다.
“돌아오셨으니 되었습니다. 이제 무얼 하실 계획이십니까?”
묵용감이 승덕전을 바라보았다. 태감과 궁녀들이 끊임없이 안팎을 오가고 있었다. 대행황제의 장례를 준비하는 지금, 승덕전은 더할 나위 없이 떠들썩했다.
“큰형님께 제대로 된 장례를 치러드려야지!”
묵용택이 그의 시선을 따라 승덕전을 바라보았다. 어느덧 슬픔이 그의 얼굴에 서렸다.
“셋째 형님께서 잘하신 겁니다.”
묵용감이 천천히 답했다.
“형님이 목숨을 끊지 않았다 해도 난 형님을 베지 못했겠지. 형님이 현명하셨다. 죽는 게 사는 것보다 낫다는 걸 아신 것이지.”
묵용택은 그의 말뜻을 곧잘 이해했다. 가장 높은 자리에 있던 사람이 가장 낮은 곳으로 추락하면 죽기보다 못한 삶이 기다리는 법이다. 본래 성공하면 왕이 되고 실패하면 도적이 되지 않는가. 선악은 언제나 일의 성패에 따라 결정되었다.
두 사람은 한동안 묵묵히 자리를 지켰다. 그때 묵용택은 무언가를 발견하고 낮게 말했다.
“태자가 오셨으니 전 이만 가 보겠습니다.”
묵용감이 말했다.
“무엇 하러 피하느냐, 영영 보지 않을 셈이더냐?”
묵용택은 그 말에 붙들린 듯 가만히 서 있었다. 태자가 가까이 다가오자 그가 예를 갖춰 인사했다.
“태자 형님을 뵈옵니다. 그간 잘 지내셨습니까?”
태자는 진왕을 보고 반갑다는 듯 어깨를 토닥였다.
“못 본 사이에 여섯째도 제법 나이가 들었구나. 네가 보고 싶었는데 만날 방도가 없었다. 결국 두 해나 더 지나서야 만났구나. 이렇게 다시 만났으니 형제들끼리 자주 보자꾸나. 그래, 어렸을 때처럼 말이다.”
묵용택이 웃으며 말했다.
“물론이지요.”
진왕이 두 형에게 예를 갖췄다.
“아우는 볼일이 있어 가 보겠습니다. 조만간 다시 뵙겠습니다.”
묵용감은 고개를 끄덕였지만, 태자는 그를 나무랐다.
“이 형들을 만나는 것보다 중요한 일이 뭐가 있다고. 오늘은 우리가 대승을 거둔 날이니 술 한잔해야 하지 않겠느냐.”
묵용감이 담담한 목소리로 태자를 제지했다.
“대행황제의 상중입니다. 술은 나중에 드시지요. 조만간 기회가 있을 것입니다.”
태자는 미간을 구겼지만 금세 표정을 풀고 맞장구를 쳤다.
“그래, 셋째의 말이 옳다. 대행황제의 상중이니 술을 마셔선 아니 되지. 하면 나중에 다시 만나자꾸나.”
묵용택은 다시 예를 갖춘 뒤 발걸음을 돌렸다.
태자가 그의 멀어지는 뒷모습을 바라보며 말했다.
“여섯째가 뭔가 불만이라도 있는 것이냐? 어찌 내가 오자마자 급히 자리를 뜬단 말이냐?”
묵용감은 침묵으로 대꾸했다.
태자가 씁쓸하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
“일손이 부족하니 여섯째도 조정에 들라 해야겠다. 어쨌든 묵용씨의 자손이니 책임을 다해야지.”
묵용감이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조정에는 관심 없는 아이입니다. 한가한 왕으로 지낸 지 오래니, 내버려 두시지요.”
어차피 진왕의 심중을 떠보려고 한 말이었다. 태자는 묵용감의 대답에 몰래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 * *
묵용감과 헤어져 발길 닿는 대로 걷던 태자는 어느덧 수석각壽石閣에 올랐다. 황궁에서 가장 높은 곳이었다. 예전부터 그는 석양이 질 무렵 이곳에 올라 경치를 바라보길 즐겼다. 이곳은 임암성이 훤히 내려다보이는 자리였다.
번화한 저잣거리에 하나둘씩 등불이 켜지는 모습을 바라보고 있으면 어느새 어둠이 내려앉았고, 반짝이는 달과 별이 그의 머리 위를 수놓곤 했다. 그 광경에 휩싸여 있노라면, 천하가 곧 그의 것이 되리라는 호기가 샘솟았다.
철이 든 후, 그는 자신의 신분이 다른 황자들과 다르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는 황태자였다. 훗날 그가 천하를 군림하며 위용을 떨쳐야 했다.
그는 선황이 용포를 입고 옥좌에 앉아 문무백관들의 절을 받는 모습이 유독 부러웠다. 그들은 선황께 ‘황제 폐하, 만세, 만세, 만만세!’를 끝없이 외쳐 댔다. 그들의 외침은 커다란 궁전에 오랫동안 메아리로 남았다. 듣고 있노라면 절로 가슴이 벅차오르곤 했다. 선황은 조용히 앉아 당당한 자세로 그들을 대했다. 그 여유로움과 고귀한 자태는 선황을 신처럼 보이게 만들었다.
그의 눈망울에 비친 옥좌는 참 신기한 자리였다. 평소의 선황은 한없이 자애로운 아버지였는데 옥좌에 앉기만 하면 눈이 부실 만큼 기백이 넘쳐흘렀다. 옥좌가 그에게 천자의 위엄을 선사하는 게 틀림없었다. 그는 자신도 그 옥좌에 앉으면 선황처럼 될 수 있다고 믿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대황자가 빈틈을 노려 그의 것이어야 했던 천하를 빼앗아 갔다. 늘 빈틈없이 방비했다고 생각했지만 그래도 허점이 있었던 것이다. 결국 그는 집 잃은 강아지처럼 도망쳐 몸을 숨겨야 했고, 증오만이 그와 매일 함께했다. 당장이라도 대황자의 살가죽을 벗겨 고기를 씹을 수 없는 게 한스러울 정도였다. 설령 그가 죽는다고 해도 그 증오는 선연하게 남았으리라.
다행히 묵용감만큼은 그를 실망시키지 않았다. 초왕이란 보물은 온전히 그의 것이었다. 역시 제갈 선생의 말이 옳았다. 초왕을 얻는 자가 천하를 얻을 수 있었다. 물론 그 천하를 굳건히 지키기 위해선 그를 통제할 수 있어야 했다.
대황자는 초왕을 손에 넣고도 그를 탐탁잖게 여겼고, 결국 패망하는 결과를 맞이했다. 하지만 그는 달랐다. 담력도, 식견도 남다른 그는 묵용감의 약점을 쥐고 그를 복종시킬 수 있었다.
어려서부터 권력의 중심에서 자란 태자는 들은 것도 많았고, 권모술수에도 능했다. 사람을 다루는 건 어려운 일이지만, 초왕을 다루는 일은 더더욱 어려웠다. 그런데도 그는 결국 이루어내지 않았던가. 이것이야말로 군주가 마땅히 갖춰야 할 능력이었다.
어둠을 실은 바람이 선선히 불어오며 겉옷이 흩날렸다. 더는 피비린내가 나지 않았다. 심호흡을 내쉰 그의 입가에 천천히 미소가 번졌다.
드디어 대단원의 막이 내렸다. 황궁에 다시 발을 들인 이상, 두 번 다시 나가는 일은 없으리라. 한평생 이 화려한 황궁에서 자신의 공로를 쌓아갈 것이다.
대행황제의 장례가 끝나는 대로 길일을 골라 즉위식을 올리고, 문무백관의 절을 받으며 동월국의 진정한 군왕이 되리라. 훗날 그가 생을 마감한다면, 그의 황릉이 마련되겠지. 그의 위패는 역대 황제들과 한데 놓일 테고, 후세에는 성인으로 기억되지 않겠는가.
본래 그는 승덕전을 거처로 사용할 계획이었다. 그곳은 역대 황제들의 침궁이니 자연스러운 절차였다. 그러나 초왕은 대행황제의 영혼이 아직 멀리 떠나지 못했을 거라며 장례가 끝난 뒤에 들어갈 것을 권했다. 승덕전과 봉명궁에서 몇 차례 법사를 거행하여 잡귀를 깨끗이 물리고 사용하자는 것이었다.
그도 조금은 꺼림칙했기에, 예전에 사용하던 궁전을 정돈하라고 분부했다. 그곳에서 머물다가 즉위식이 끝나면 승덕전으로 옮길 예정이었다.
한참 동안 청소와 정돈이 이어진 끝에, 궁 안은 비로소 평소의 모습을 되찾았다.
태자는 느긋하게 발걸음을 옮겼다. 그때 그를 찾아온 이소로와 마주쳤다. 태자가 물었다.
“정돈은 다 되었느냐?”
“예, 전하. 모두 처리하였습니다. 역시 손孙 공공이 아주 노련합니다. 일사불란하게 이끄니, 다들 재빨리 움직일 수 있었습니다. 장영전長英殿은 이미 단장을 마치고 전하께서 드시기만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태자가 만족스럽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분주히 일하는 이들을 바라보았다.
“제갈 선생의 거처는 어느 곳으로 정했느냐?”
“편전으로 정했습니다. 괜찮으신지요?”
“제갈 선생은 과인의 스승이다. 응당 과인과 가까운 곳에 있어야지. 아주 잘했다.”
그가 재차 질문을 이어갔다.
“초왕은? 저택으로 돌아갔느냐?”
“아닙니다. 한 장군을 포함한 몇몇 장군들은 호위 군영에서 남은 일을 논의 중이고, 초왕은 장합전에 있습니다.”
장합전은 서 태비의 거처가 아니던가. 태자는 초왕이 화살을 쏜 일을 떠올리며 입꼬리를 살짝 치켜올렸다.
“장합전에 가 있다니, 걱정이 되긴 했나 보구나. 서 태비의 상태는 어떠하냐?”
“초왕이 곧장 의관을 보낸 덕에 상태가 심각하진 않다고 들었습니다. 치료를 받으면 별문제 없을 거라고 합니다.”
태자가 승덕전에 시선을 주었다. 승덕전은 천천히 어둠 속에 잠겨들고 있었다.
“대행황제의 영구는 장생전으로 옮겼느냐?”
“예, 이미 옮겨 장례를 준비 중입니다.”
일이 순조롭게 진행되니 태자는 더없이 기뻤다. 장영전으로 향하는 그의 발걸음은 한없이 가벼웠다. 태자가 온다는 소식에 손귀희孫貴喜가 잰걸음으로 달려나왔다. 무릎을 한껏 굽히며 인사를 올린 그가 흐느꼈다.
“소인, 전하를 뵈옵니다. 경하드리옵니다, 전하. 여섯 해나 뵙지 못하였는데 드디어 돌아오셨군요!”
손귀희는 태자가 어렸을 때부터 그의 시중을 들어왔다. 그래서인지 그는 주인에 대한 감정이 남달랐다. 여섯 해 전 목숨을 걸고 주인을 지키려다 하마터면 목이 날아갈 뻔했다. 그토록 큰 화를 겪었음에도 그는 언젠가 맞이할 이날을 꿈꾸었다. 그리고 마침내 오늘, 꿈에 그리던 일이 이루어졌다. 어찌 만감이 교차하지 않을 수 있으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