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51화
황제는 한달음에 궁문 앞까지 달려와 급히 계단을 올랐다.
백 귀비는 두 보초 사이에서 눈물을 그렁그렁 매달고 그에게 말했다.
“폐하, 이놈들이 신첩의 앞길을 막고 있습니다.”
황제가 신경질적인 목소리를 내뱉었다.
“밖으로 나와 무엇 하려고?”
“신첩, 폐하가 걱정되어… 폐하를 찾으러 가려던 참이었습니다.”
“짐은 걱정할 필요 없소.”
황제가 마침내 옅은 미소를 지었다.
“짐이 이렇게 오지 않았소?”
황제는 그녀의 손을 붙잡고 안으로 들어섰다.
백 귀비가 물었다.
“궁문은 잘 지키고 있는 것이겠지요?”
황제가 태연하게 말했다.
“초왕이 서 태비까지 죽였으니, 곧 궁 안까지 쳐들어올 것이오.”
백 귀비가 화들짝 놀라 소리쳤다.
“궁 안까지 쳐들어오면 어찌해야 한단 말입니까? 어서, 도망치십시오, 폐하!”
황제가 기이한 웃음을 보이며 그녀의 손을 꽉 붙들었다.
“귀비, 그리 조급하게 굴 것 없소. 짐이 특별히 귀비가 가는 길을 배웅하러 오지 않았소.”
백 귀비는 ‘가는 길’이라는 말에 질겁하며 숨을 들이켰다.
“폐하, 그게…….”
어느새 두 사람은 고요한 침궁으로 들어섰다. 그때, 백 귀비는 하인들 중 누구도 따라 들어오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내전에는 그녀와 황제, 단 두 사람뿐이었다. 기이한 침묵 속에서 황제는… 음침한 얼굴로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꼭 원수를 바라보는 듯한 눈빛이었다.
백 귀비가 천천히 뒷걸음질 치며 말했다.
“폐하, 어찌 이러십니까? 신첩을 그런 표정으로 바라보지 마십시오. 무섭습니다…….”
“이제야 좀 무섭소?”
황제가 차가운 웃음을 흘리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황후의 약에 독을 탈 땐 어찌 무서운 걸 몰랐을꼬?”
이런 상황에 그가 황후를 언급할 줄이야. 백 귀비는 얼떨떨한 얼굴로 말했다.
“폐하, 그런 얘길 꺼내 무엇 하겠습니까? 초왕이 곧 당도할 텐데 어서 도망치셔야지요.”
“이제는 도망칠 수도 없소.”
황제가 고개를 들더니 긴 탄식을 내뱉었다.
“짐은 더 이상 가슴 졸이며 살고 싶지 않소. 떠날 것이오. 황후를 만나러 가고 싶지만, 도무지 볼 낯이 없소. 그러니 그대를 데려가려 하오. 그대를 황후 앞에 데려가 죄를 뉘우치게 할 것이오.”
막다른 길이었다. 백 귀비는 침대 옆에 털썩 주저앉으며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폐하, 폐하께서 이러실 수는 없습니다. 폐하를 향한 신첩의 충심은 하늘이 알고 땅이 알지 않습니까…….”
어느새 백 귀비의 앞에 다가온 황제가 보검을 뽑아 들었다. 보검은 서슬 퍼런 빛을 내며 백 귀비에게 향하고 있었다.
“그대를 용서할 수도 있었소. 하지만 황후를 건드리진 말았어야지. 안 그래도 병약했던 여인을 어찌 해할 수 있단 말이오…….”
침대 장막을 몸에 휘감으며 어떻게든 자신을 감추려고 애쓰던 백 귀비는 그 말에 붉게 충혈된 눈으로 그를 노려보았다.
“폐하, 정녕 신첩이 황후를 죽였다고 여기십니까? 황후를 죽인 사람은 폐하이십니다. 황후에게 절망만 주시어 병세를 악화시키지 않았습니까. 신첩은 그저 고통에서 조금 더 일찍 벗어나게 도와주었을 뿐입니다. 어찌 지금에야 신첩에게 그 책임을 전가하십니까!”
황제의 얼굴에 조소가 활짝 피어났다.
“귀비의 말이 맞소. 짐이 황후를 죽였지. 그러니 짐도 더는 구차하게 살지 않을 생각이오. 먼저 가시오. 짐이 곧 뒤따라갈 테니.”
마침내 보검이 백 귀비의 가슴을 찔러 들었다. 선홍빛 피가 조금씩 뿜어져 나오더니 얇은 장막을 층층이 물들였다. 꼭 봄바람에 퍼져나가는 붉은 꽃송이처럼 핏자국이 천천히 피어올랐다.
백 귀비는 검이 천천히 자신의 몸으로 들어오는 모습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날카로운 칼날이 그녀의 살을 뚫는 기분이 섬뜩하리만치 생생했다. 고통에 몸을 움츠리던 백 귀비가 천천히 뒤로 넘어갔다. 넘어가는 그 순간에도 애절하고 고통스러운 눈빛이 황제에게 끈끈하게 머물러 있었다.
황제도 그녀의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그가 천천히 입꼬리를 올려 미소를 지었다. 그 미소는 그의 눈 밑까지 번지며, 기괴하고도 통쾌한 웃음을 만들어 냈다.
아주 오래전부터, 그는 이날을 기다려왔다. 숨이 막힐 듯한 감각에 잠에서 깨어나는 새벽이면, 그는 그녀의 목을 조르고 싶은 충동에 휩싸였다. 두 손으로 그녀의 숨통을 천천히 조이고 싶었다. 그는 그녀를 증오했다. 그럴수록 그녀는 자신에게 휘감겨 떨쳐 낼 수 없게 되곤 했다. 그는 그녀에게 현혹되어 허우적거릴 따름이었고, 그녀가 주는 쾌감에 깊이 빠져들 뿐이었다.
쾌락 뒤에 찾아오는 공허함은 또다시 그를 우울함에 빠뜨렸다. 그는 우울에서 벗어나기 위해 또다시 백 귀비를 찾는 흐름에 붙들려 있었다. 그는 이 끔찍한 굴레를 영영 벗어던지지 못할 것만 같았다. 그가 진정으로 원했던 삶은 이런 게 아니었다. 그는 그저 황후의 손을 놓지 않고, 현세를 살아가고 싶었다.
백 귀비는 장막에 파묻혀 널브러졌다. 활기 넘치던 삶이 생기를 잃은 순간이었다. 황제는 천천히 눈을 감았다 뜬 후, 더 이상 그녀에게 시선을 주지 않고 밖으로 나갔다. 등 뒤에서 궁녀가 겁에 질려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귀, 귀비 마마…….”
누구든 숙명을 피할 방법은 없었다. 백 귀비도, 황제도 마찬가지였다. 이제 그가 저질렀던 잘못을 마주할 때가 온 것이다. 그는 다시 말에 올라타 봉명궁으로 질주했다. 춘아의 혼이 아직 그곳에 있다면, 부디 그를 기다려 주기만을 바랐다. 그의 잘못으로 부부의 정을 다하지 못했으니, 저승에서라도 그녀와 다시 그 연을 잇고 싶었다.
전투 중에도 봉명궁은 평소처럼 조용했다. 치열한 전투는 봉명궁의 평화에 아무런 영향을 끼치지 않는 모양이었다.
유복이 문 앞으로 나와 그를 맞이했다.
“소인, 황제 폐하를 뵈옵니다.”
황제가 대꾸했다.
“그래. 초왕이 쳐들어왔으니 너희는 살길을 찾아 도망치거라.”
유복이 희미한 미소를 머금었다.
“소인이 궁에서 생활한 지도 수십 년이 흘렀습니다. 이곳이 소인의 집이나 다름없습니다. 도망칠 곳도 없으니 소인은 남겠습니다. 목숨이야 내려놓은 지 오래입니다.”
황제는 미소로 답하고 성큼성큼 침궁으로 향했다.
“짐이 침궁에 들면 문을 잠그고 아무도 들이지 말거라. 황후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다.”
유복은 그를 침궁 앞까지 모신 후, 허리를 숙인 채 대답했다.
“예. 아무도 들이지 않겠습니다.”
유복은 양쪽 문을 모두 닫고 조용히 그 앞을 지켰다.
하지만 그자가 나타났을 때, 유복은 막을 수 없었다. 서늘한 기세를 풍기며 나타난 초왕을 마주하자, 유복은 자진해서 문을 열어 주었다.
“왕야, 안으로 드시지요.”
초왕은 안으로 들어갔다. 어둡고 고요한 침궁이 그를 맞이했다. 어둠 속에서, 초왕이 천천히 시선을 돌렸지만 황제의 기척은 어디에서도 느껴지지 않았다. 뒤를 돌아보니, 유복이 말없이 침대를 가리켰다.
장막이 꼼꼼히 드리워진 침대는 꼭 어두운 강을 표류하는 배처럼 보이기도 했다. 초왕은 침대 앞으로 걸어가 그 자리에 가만히 서 있었다. 유복이 재빨리 다가와 한 겹 한 겹 드리워진 장막을 걷어 올리자 마침내 황제가 모습을 드러내었다.
그는 침대에 반듯하게 누워 있었다. 목에는 칼에 베인 커다란 상처가 나 있었다. 끊임없이 흘러내리는 피가 이불을 흥건하게 적셨다. 끔찍한 광경이었지만, 황제의 표정만은 온화한 평화에 잠겨 있었다. 핏물 속에서 잠든 그의 모습은 초왕에게 말로 형용할 수 없는 감정을 불러일으켰다.
묵묵히 그 모습을 내려다보던 초왕이 눈을 질끈 감았다. 이내 나지막한 목소리가 유복에게 분부를 내렸다.
“대행황제大行皇帝(황제가 붕어했을 때의 칭호)의 옷을 갈아입혀 드리거라.”
* * *
궁 안의 전투는 여전히 치열하게 이어졌다. 초왕은 검날이 섬뜩하게 빛나는 전장에 있어도 담담한 기색을 유지했다. 이 모든 전투와 생사를 넘나드는 치열함이, 그와는 아무런 상관도 없는 듯했다. 묵용한이 죽었으니 이제 그와 관련된 모든 것들이 역사 속으로 사라질 터였다. 이후 새로운 황제가 즉위하면 동월국은 더욱더 강하고 번성한 나라로 발돋움하리라.
황제가 봉명궁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는 소식이 빠르게 퍼져나갔다. 사투를 벌이던 금군들은 하나같이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소식을 접했다. 주인이 없는데 무엇 하러 목숨을 바쳐 싸운단 말인가. 차라리 목숨을 부지할 방법을 찾는 게 나았다. 어느새 하나둘 무기를 버리고 투항했고, 피비린내 나는 전쟁은 슬픈 통곡의 배웅을 받으며 사그라들었다.
정리를 하는 이들은 따로 있으니, 이제 초왕이 할 일은 없었다. 그는 문득 고개를 들고 하늘을 바라보았다. 태양이 머리 꼭대기에서 찬란하게 빛나고 있었다. 정오였다. 음침하고 추한 것들을 내리쬐는 햇빛은 잔인하리만치 눈부셨다.
초왕은 속으로 한숨을 내쉬며 멀지 않은 곳에 있는 장합전을 바라보았다. 잠시 망설이던 그가 걸음을 옮겼다.
문 앞을 지키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모두 피바람을 피해 도망간 지 오래였다.
고요한 정전과는 다르게 뒷전에선 인기척이 들렸다. 영 마마嬷嬷의 목소리였다.
“태비 마마, 괜찮으십니까?”
서 태비의 힘없는 흐느낌이 이어졌다.
“괜찮겠느냐? 죽기 직전인데. 애가가 초왕비의 목숨을 해하려 했던 일로 그 애가 복수를 하러 온 게야.”
영 마마가 말했다.
“태비 마마, 어찌 왕야를 못 믿으십니까? 왕야께서는 마마를 구하려고 하신 것입니다. 활을 쏘지 않았다면 폐하께서 마마의 목을 베었을 것입니다. 어찌 왕야의 마음을 그리 몰라주십니까.”
옆에 있던 황유도가 거들었다.
“맞습니다, 태비 마마. 왕야께서 부득이하게 그런 선택을 내리신 겁니다. 궁 안이 쑥대밭이 되어 다들 정신이 없는데 누가 마마를 걱정해 주었습니까? 왕야가 즉시 위 의관을 보내지 않았습니까? 왕야께서 힘 조절을 잘하신 덕분에 살갗은 다쳤지만 다른 곳들은 무사하니, 조금 쉬시면 괜찮아지실 겁니다.”
위중청이 맞장구를 쳤다.
“태비 마마, 황 공공의 말씀이 맞습니다. 마마께서 다치시지 않도록 왕야가 계획을 세워 두셨습니다. 아직 군대가 성을 들어오기도 전에 왕야께서 영 대인에게 소관을 데리고 성안으로 들어가라고 분부하셨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소관이 어찌 이토록 빠르게 궁에 들어왔겠습니까.”
잠시 생각에 잠겼던 서 태비가 천천히 한탄을 늘어놓았다.
“그래도 가슴이 아프네. 황상은 어려서부터 애가의 궁에서 자라지 않았는가. 애가가 그리 박하게 대한 적도 없거늘, 절박한 순간이 오니 애가를 인질로 삼고…….”
황유도가 나지막하게 아뢰었다.
“마마, 폐하는 떠나셨습니다. 이미 이승을 떠난 분을 그리 깊게 생각하지 마십시오.”
서 태비가 흠칫 놀라며 물었다.
“황상이 떠났다? 대체 언제?”
“한 시진이 조금 안 되었습니다.”
“대체 어찌, 어찌…….”
“봉명궁 황후 마마의 침궁에서 스스로 목을 베셨습니다.”
서 태비는 할 말을 잃은 듯 멍하니 앞만 바라보았다.
어둠 속에 서 있던 묵용감은 넋을 잃은 그녀의 표정을 바라보며 쓴웃음을 삼켰다. 직접 기른 자식이니 감정이 남달랐을 테지. 제 몸으로 낳았지만 늘 멀게만 느껴지는 그와는 엄연히 다르게 다가오리라.
그는 조용히 몸을 돌려 밖으로 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