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50화
궁문 앞은 금군錦軍이 지키고 있었다. 임안성을 호위하는 부대인 만큼 훈련도 제법 잘 되어 있었고 충심도 강했다. 그들은 일찌감치 궁 문 앞에 대형을 펼치고 초왕을 기다리고 있었다. 창, 검, 방패를 든 대열이 방진을 이루었고, 궁수들은 활시위를 당긴 채 담벼락 위에서 진을 쳤다.
이곳까지 후퇴한 수성군은 금군의 대열을 보며 용기와 자신감을 얻었다. 서둘러 그들과 합류한 군은 물밀 듯 쏟아져 들어오는 초왕의 병사들을 노려보며 기회를 엿보았다.
금군 총령 원배림袁培林은 백 승상의 측근이었다. 만약 초왕이 성을 함락하면 그의 목숨은 떨어지는 나뭇잎보다 가볍게 날아갈 게 뻔했다. 그는 목숨을 걸고 필사적으로 싸우리라 다짐하며 정면을 주시했다.
그가 손을 들어 올리며 명령했다.
“활을 쏘거라!”
수많은 화살이 초왕의 부대 위로 둥근 곡선을 그렸다. 많은 병사들이 화살에 맞으며 대열이 서서히 흐트러졌다.
한통이 지지 않고 소리쳤다.
“백 보 뒤로 후퇴하라!”
초왕의 군대는 물 흐르듯 유연하고 날렵한 이동을 선보였다. 백 보 뒤로 후퇴한 뒤 두 군대의 대치 상황이 펼쳐졌다. 사방이 고요한 가운데, 팽팽한 긴장감이 길게 이어졌다.
황제는 금군이 초왕의 군대를 격퇴했다는 소식에 기쁨에 잠겼다. 미약하지만 희망을 맛본 기분이었다. 갑주를 입은 그는 등에 활을 메고 허리에 장검을 찼다. 극도로 흥분한 탓에 그는 좀처럼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다. 끊임없이 방 안을 서성이는 그는 언제든지 곧장 뛰쳐나갈 듯했다.
한참 서성이던 그의 시선이 앞에 앉아 있는 서 태비에게 닿았다. 문득 입꼬리를 올린 황제가 천천히 걸음을 옮겨 다가갔다.
“태비께서 짐을 기르셨으니, 짐도 태비의 아들이 아니옵니까. 열 손가락 깨물어 안 아픈 손가락 없다지만, 한번 말씀해 주시지요. 짐과 초왕 중에 누가 이기길 바라십니까?”
* * *
대치는 그리 오래 이어지지 않았다. 은색 갑옷과 투구를 걸친 초왕이 말을 타고 대열 앞으로 향하니, 사병들은 자연스레 길을 내어 주었다.
원배림은 위풍당당한 그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초왕의 몸에선 짙은 살기가 뿜어져 나왔고, 칠흑같이 어두운 두 눈이 원배림을 똑바로 응시하고 있었다. 상당한 거리가 있었음에도, 원배림은 그 시선을 마주하자 몸이 달달 떨리기 시작했다.
초왕은 누구의 보호도 없이 대열 가장 앞자리에 있었다. 그러나 화살로 명중시킬 자신이 있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반면 초왕은 행동은 거침이 없었다. 옆에 있던 호위병에게 활을 건네받더니 하얀 깃털이 달린 화살을 꺼내 들었다. 그가 전쟁터에서 사용했던 활이다. 화살촉은 철로 만들어졌고, 머리 부분은 평평하지만 가시가 돋아 있었다. 몸체는 백양나무, 깃은 흰수리의 깃털을 사용해 만든 활이었다. 예쁜 모양과는 달리 한번 쏘게 되면 그 위력이 어마어마했다.
활을 든 초왕이 앞으로 나아갔다. 한 발, 두 발, 세 발…….
그의 곁을 따르던 한통이 긴장된 표정으로 만류했다.
“왕야, 더 가시면 아니 되옵니다. 조금만 더 가면 사정거리에 들게 됩니다.”
하지만 초왕은 대답 없이 다섯 걸음이나 더 앞으로 향했다. 한통이 그를 막으려고 하자 그제야 그가 멈춰 섰다.
원배림은 더 이상 주저할 수 없었다. 그가 기치를 흔들며 명령했다.
“쏘거라!”
수만 발의 화살이 휘몰아치는 비바람처럼 초왕에게 날아들었다. 그러나 화살들은 끝내 닿지 못하고, 초왕과 한 걸음 떨어진 곳에 무수히 쌓이고 말았다.
초왕은 조소를 흘리며 활시위를 팽팽히 당겼다.
원배림은 그의 화살도 자신이 있는 곳까지 닿지 않을 거라고 믿었지만, 어쩐지 불길한 예감이 엄습해 왔다.
“방패를 들라!”
방형을 이루고 있던 방패진은 곧장 궁 문 앞에 일렬로 늘어서 금군을 엄호했다.
초왕이 손을 놓은 순간, 하얀 깃털이 허공을 가로지르며 날카롭게 쇄도했다. 이내 두꺼운 방패 진을 뚫고 궁수 한 명이 휘청거렸다. 궁수의 심장 한가운데에 화살이 꽂혀 있었다. 그는 신음을 흘리며 그대로 고꾸라졌다. 원배림은 창백해진 얼굴로 황급히 손을 흔들었다.
“물러나라, 모두 뒤로 물러나라!”
그들이 물러나자 초왕의 군대는 곧장 전진했다. 금군은 궁 문 앞에 바짝 붙었고, 담 위에는 궁을 지키는 금군禁軍이 대열을 정비했다. 궁수들은 각자 쇠뇌와 활을 들고 가장 높은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초왕의 군사가 천천히 다가오자, 그들의 눈빛에 서린 긴장감이 점점 짙어졌다.
한통은 초왕의 안위가 걱정돼 물러날 것을 권했지만, 초왕은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그는 대열의 선두 자리를 지키며 전진했다. 한통은 영구에게 도움의 눈빛을 보냈지만, 그도 초왕과 같은 완고한 표정을 보였다. 한통은 속으로 한숨을 내쉬며 내버려 둘 수밖에 없었다.
담벼락 위에서 진을 치고 있는 금군을 올려다본 초왕의 얼굴에 짙은 미소가 어렸다. 상대와 교전을 벌일 때 높은 고지를 선점하는 것은 유리한 조건이었지만, 자신을 상대로라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그들은 스스로 불리한 조건을 선택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초왕이 갑작스레 세 차례나 활을 쏘았다. 담 위의 궁수들부터 떨어뜨릴 생각이었다. 활보다 쇠뇌의 위력이 더 강했기 때문에 쇠뇌를 든 궁수부터 처리하면 다른 이들은 좀 더 쉽게 해결할 수 있었다.
금군禁軍 총령은 초자상이었다. 궁수들이 힘없이 쓰러지자 그가 서둘러 소리쳤다.
“다들 내려가 엄폐하라!”
그가 고개를 돌려 호위병에게 분부했다.
“어서 폐하께 고하거라. 초왕이 너무 강해 궁문을 지키지 못할 듯싶으니 대안을 생각하셔야 한다고, 어서!”
호위병은 재빨리 자리를 떴다. 궁 문을 지키던 금군이 활을 한 차례 쐈지만, 역시나 초왕에게 못 미치고 허무하게 바닥에 꽂혔다. 초왕은 성가셨는지 한통에게 명령했다.
“영구와 내가 엄호할 테니 병사들을 이끌고 진격하거라. 공격 속도를 늦추면 문제가 생기는 법이다.”
그가 말을 마치자마자 성벽에서 누군가 나타났다. 금사로 복福 자를 수놓은 붉은 윗옷에, 옅은 다홍색 주름치마를 입은 여인이었다. 단아한 차림과는 다르게 머리는 마구잡이로 헝클어져 있었다. 적잖이 곤혹스러운 듯, 얼굴이 하얗게 질린 그녀가 처참한 풍경을 마주했다. 그때 누군가 그녀를 담벼락 위로 올렸다.
한통이 낮게 소리쳤다.
“서 태비이십니다!”
그러나 초왕은 자신과 상관없는 사람을 마주한 듯, 어떠한 표정의 변화도 보이지 않았다.
오늘은 쾌청한 날씨였다. 정오에 가까워지자 높게 뜬 태양이 황제의 갑주를 밝게 비추었다. 투구에 가려 얼굴이 자세히 보이진 않았지만, 서 태비의 목을 겨누고 있는 검은 똑똑히 볼 수 있었다.
“묵용감!”
황제가 목청을 높여 소리쳤다.
“이 사람이 누군지 눈 크게 뜨고 보거라.”
서 태비로서는 난생처음 겪는 굴욕이었다. 궁 담벼락에 서서 협박을 당하다니! 더욱이 모든 이들이 그녀를 보고 있지 않은가. 차라리 머리를 박아 죽을지언정 이런 꼴을 보이고 싶지 않았다.
그녀의 눈동자가 세차게 흔들렸다. 그때 그녀의 시야에 익숙하고도 그리운 얼굴이 들어왔다. 2년 만에 다시 만난 아들이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나 한없이 시리고, 냉랭한 얼굴에 그녀는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왕야.”
한통이 나직하게 속삭였다.
“말장이 협상을 해 보겠습니다. 잘 얘기하면…….”
“그럴 필요 없다.”
묵용감이 그의 말을 자르더니 영구에게 손을 뻗었다.
“활을 내놓거라.”
영구마저도 잠시 주저했다.
“왕야, 어찌…….”
“정오에는 반드시 궁문을 부숴야 한다. 명령이다. 어떠한 변동 사항도 용납하지 않겠다.”
초왕은 천천히 팔을 들어 담 위에 있는 이를 조준했다. 황제는 망설임 하나 없는 그의 행동에 적잖이 당황했지만, 서둘러 자신의 앞에 서 태비를 내세웠다. 황제가 원망이 담긴 목소리로 말했다.
“당신의 잘난 아들을 똑똑히 보십시오. 짐승만도 못한 자식, 친어미도 못 알아보느냐! 부디 짐을 원망하지 마십시오. 당신의 목숨을 앗아가는 자는 저놈입니다. 여한이 남거든 귀신이 되어 저놈에게 찾아가십시오!”
초왕은 활시위를 당겼지만 쉽게 쏘지 못했다. 사병과 금군 할 것 없이 모두가 초왕의 모습을 지켜보았다. 황제는 점차 표정을 누그러뜨리더니 초왕에게 야유를 퍼부었다.
“차마 쏘지 못하겠느냐? 친모를 시해했다는 오명이 따라다닐까 봐서? 묵용감, 너는 늘 마음이 나약했지. 평생 그 나약한 마음 때문에 일을 그르치지…….”
점점 신이 나서 떠드는 그의 말을 자르듯, 날카로운 소리와 함께 화살이 허공을 갈랐다. 그는 본능적으로 서 태비 뒤에 몸을 숨겼다. 섬뜩한 소리와 함께 화살이 그녀의 몸에 박혔다. 서 태비는 처량한 비명을 지르며 천천히 그 자리에 무너져 내렸다.
한순간 시간이 멈춘 듯했다. 모든 이들이 멍한 시선을 보냈다. 초왕이 황제를 쏠 거라고 예상했지만, 그의 화살은 서 태비에게 명중했다. 다들 어안이 벙벙해 있을 때, 한통이 쏜살같이 뛰어나가 금군을 치기 시작했다.
황제는 서 태비를 내버려 둔 채 허겁지겁 담 위에서 내려왔다. 얼굴이 하얗게 질린 그의 발걸음은 후궁을 향하고 있었다.
다시금 벌어진 전투는 더욱더 치열한 양상을 보였다. 하늘을 떨어 울리는 함성과 함께, 창과 검을 쥔 금군이 제법 뛰어난 실력을 선보였다. 초왕의 군대도 훈련이 잘되어 있었기 때문에 실력은 거의 막상막하였다.
초왕은 말에 앉아 전투 상황을 지켜보았다. 이따금 손에 든 검으로 금군을 막아서기도 했다. 그에게 공격당한 적군은 멀리 내동댕이쳐져 처참하게 바닥을 뒹굴었다.
전장의 열기와 따사로운 햇살이 그의 온몸을 감쌌지만, 초왕은 홀로 한겨울의 황야에 서 있는 듯했다. 모든 것이 메마르고, 다시는 살아나지 않을 듯 얼어붙은 그곳에, 그는 영원히 머무르게 될 터였다.
치열한 전투가 계속되고 있을 때, 별안간 궁 문이 열렸다. 초왕의 군대는 기세를 놓치지 않고 밀물처럼 쏟아져 들어갔다. 이미 전세가 기울어진 사실을 인지한 금군이 하나둘 도망치기 시작했다. 궁문 앞에서 벌어졌던 전투는 이제 궁 안으로 이어지고 있었다.
* * *
입구를 막아선 두 보초병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화가 머리끝까지 치솟은 백 귀비의 얼굴이 절로 벌게졌다. 그녀가 삿대질을 하며 소리쳤다.
“이런 못난 놈들! 폐하께서 본궁을 지키라 하셨지 본궁의 출입을 막으라 하셨더냐. 어서 비키거라. 본궁의 일을 그르치거든 네놈들의 하찮은 목숨이 무사하지 못할 것이다!”
초왕이 궁문 앞까지 쳐들어왔다는 소식은 백 귀비의 마음을 조급하게 만들었다. 그녀는 바깥 상황을 알아볼 하인을 내보내려 했지만 문 앞을 지키는 보초병들은 완강했다. 아무리 좋게 타일러 봐도 그들은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고 출입할 수 없다는 답만을 되풀이했다. 발을 한 걸음만 내딛어도 서슬 퍼런 검이 그녀의 목 앞에 놓일 기세였다.
말이 통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달은 그녀는 난지에게 금괴 주머니를 가져오게 해 두 보초병에게 나누어 주었다. 그러나 보초병들은 금괴에 눈길 한 번 주지 않았다. 꾀어낼 수조차 없자, 백 귀비는 또다시 성을 내며 소리쳤다.
“네놈들은 폐하의 사람들이 아니구나. 밖에서 섞여 들어온 첩자가 아니더냐? 여봐라, 여기 반란자의 첩자가 있다!”
아무리 목청을 높여도 그녀를 도와주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겁 많은 태감과 궁녀들은 몸을 덜덜 떨고만 있을 뿐 감히 나서지 못했다.
그때, 난지가 저 멀리서 말을 타고 달려오는 이를 보며 소리쳤다.
“폐하이십니다. 마마, 폐하께서 오십니다!”
백 귀비는 그제야 마음을 놓았다. 그날, 황제는 그녀에게만큼은 살길을 마련해 주겠다고 약속했다. 역시 그가 약속을 지키러 온 것이다. 황제는 절체절명의 순간에도 그녀를 버리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