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49화
여기까지 말하자, 가동은 또다시 자책하려 들었다.
“그런데 난 해가 중천에 뜰 때까지 잤으니…….”
월규가 가동의 말을 끊으며 나섰다.
“그래서 황보주아는 어디에 묻혔습니까?”
“뭐 하려고?”
월규가 이를 바득바득 갈며 말했다.
“시체를 찾아서라도 죄를 물어야겠습니다!”
“아이고, 제발 일을 키우지 마.”
가동이 월규를 다시 자리에 앉히자 이번엔 녹하가 일어났다.
“네 검 좀 빌려줘.”
가동이 놀란 얼굴로 올려다보았다.
“부인, 검은 왜?”
“아직 숨이 붙어 있을지도 모르니까 한 번 더 찔러야겠어.”
그가 펄쩍 뛰며 손을 내저었다.
“무서운 소리 하지 말고 얼른 앉아.”
가동이 한숨을 푹푹 내쉬었다.
“이럴 줄 알았어. 왕야를 위해서라도 그만둬. 왕비 마마께서 돌아가신 직후에 왕야께서 어떠셨는지 기억 안 나? 보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다 시큰거릴 정도였다고. 이제 와서 우리가 난리를 치면 왕야께서 어떻게 버티시겠어?”
녹하와 월규는 같은 모습을 떠올린 듯, 조용히 눈시울을 붉혔다.
잠시 뒤, 녹하가 잠긴 목소리로 물었다.
“태자 전하의 비밀 조직원이 저지른 일이라며……. 태자 전하께선 모르고 계셨던 거야?”
“나중에야 아셨나 봐.”
가동이 말했다.
“그래도 황보주아와는 어릴 때부터 함께한 사이니까, 황보주아를 죽이고 싶지 않으셨던 거야. 그만큼 왕야한테 미안하셨겠지. 예전에 왕비 마마께서 유산할 뻔한 것도 황보주아가 그런 거였다고 하니.
정작 왕야께서 태자 전하를 위해 전쟁을 벌이시는데, 계속 왕야를 속이려니 얼마나 죄책감이 크시겠어? 그래서 사실을 말해 주신 거야. 그 후에 왕야께서 황보주아를 죽이신 거고.”
“죽어 마땅하네요.”
월규의 목소리에는 시린 한기가 배어 있었다.
“천 번을 베어 죽여도 지나치지 않습니다.”
가동이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아침에 왕야를 뵈었는데 살기가 아직도 가시지 않았더라. 며칠 동안은 되도록이면 왕야를 피해 다녀. 왕비 마마께서 안 계시니까 왕야는 고삐 풀린 야생마나 마찬가지야. 지금 왕야를 제어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어.
태자 전하도 어찌 못하실 정도야. 어제 황보주아의 일로 두 분이 좀 다투셨나 봐. 왕야는 바로 막사를 나오셨고, 태자 전하가 황보주아의 시신을 수습해서 산에 묻어 주셨대.”
녹하가 코웃음을 쳤다.
“그런 사람은 묻었다 해도 들짐승들이 파먹을 거야.”
얼마 뒤, 기홍이 안으로 들어왔다. 눈물을 글썽이던 그녀가 억지로 입꼬리를 올렸다.
“다들 여기 있었구나. 무슨 얘기하고 있었어?”
심상치 않은 표정에 상황을 눈치챈 기홍이 조용히 말했다.
“다 알았구나.”
녹하가 고개를 끄덕이며 물었다.
“어쩐 일이야? 무슨 일이라도 있어?”
“왕야께서 토끼들을 데려오라셔.”
그 말에 다들 말을 잇지 못했다. 초왕비가 농촌 별장에서 도망쳤을 때도 초왕은 토끼들에 의지하며 천천히 견뎌 냈다. 그때와 같은 상황이 되풀이되려는 듯했다.
다행히 다들 토끼를 귀중히 여겼기 때문에 오는 길 내내 정성스레 돌봐 주었다. 특히 학평관은 토끼들이 탈이라도 날까 늘 품에 안고 따뜻한 온기를 나눠 주곤 했다.
더욱이 녹하는 토끼들을 담은 광주리를 침대 밑에 두고 살뜰히 돌봐 주기까지 했다. 기홍의 말을 들은 그녀가 얼른 토끼들을 데리고 왔다.
“다행히 다들 기분이 좋아 보이네. 어서 가져다드려.”
그러나 기홍은 월규를 가리켰다.
“네가 가져오라셨어.”
월규는 다소 놀란 듯 제 얼굴을 가리켰다.
“제가 가져오라고 하셨다고요?”
“응, 그렇게 말씀하셨어. 어서 가 봐.”
기홍은 광주리를 그녀에게 넘기고 윗부분을 천으로 꽁꽁 덮었다.
“왕야께서 심기가 좋지 않으시니 부디 조심하고.”
월규는 소매로 눈가를 훔친 뒤, 광주리를 안고 서둘러 발길을 옮겼다.
월규의 뒷모습을 바라보다 코끝이 시큰해진 녹하는 가동의 품에 안겨 들었다.
“실컷 울고 싶어.”
가동이 그녀의 등을 천천히 토닥였다.
“울고 싶으면 울어. 다만 왕야 앞에서는 단 한 방울도 흘려선 안 돼. 알겠지?”
가동의 품에 얼굴을 묻은 녹하에게서 흐느낌이 흘러나왔다.
“응. 알겠어.”
가동은 눈시울이 붉어진 기홍을 돌아보았다.
“아가씨도요.”
기홍은 애써 미소를 지어 보였다.
“모처럼 영구 무사님과 같은 생각을 하셨네요. 영구 무사님도 저한테 신신당부했거든요.”
* * *
얼마 지나지 않아, 황제는 초왕의 답을 이해할 수 있었다.
사흘 뒤, 초왕이 성을 공격했다. 전고 소리가 천하를 울리며 전쟁의 시작을 알렸다. 우레와 같은 함성이 하늘을 찔렀고, 초왕의 군대가 용맹하게 밀려들었다.
그 소리에 황제는 소스라치게 놀라 잠에서 깨어났다. 볼썽사납게도 침대 위에서 벌벌 떠는 그의 이마는 땀으로 흥건했다. 잠시 마음을 가다듬은 후에야, 현실이 차갑게 밀려들었다. 그는 꿈을 꾸고 일어난 터였다.
주변은 쥐 죽은 듯 고요했고 함성 따위는 들리지 않았다. 옷깃으로 땀을 닦아낸 그가 다시 잠을 청하려는데, 밖에서 다급한 발소리가 들려왔다. 황급히 들어온 고승해가 두려움이 가득한 목소리로 고했다.
“폐하, 큰일 났습니다. 초왕이 성을 공격하고 있습니다!”
꿈이 아니었다.
그런데도 다시금 꿈에 빠져든 듯, 황제가 넋이 나간 얼굴로 물었다.
“성문을 부순 것이냐?”
“처음에는 초왕의 군대가 동문과 북문을 공격하는 바람에 진陳 장군이 주요 병력을 두 곳에 보냈는데, 알고 보니 병사를 유인하려는 계책이었습니다. 실제로는 길을 돌아 남문으로 쳐들어왔다고 하옵니다.
지금 초肖 장군과 양楊 장군이 맞서 싸우고 있지만, 상황이 좋지 않사옵니다, 폐하. 어서 대책을 세우셔야 합니다…….”
일이 이렇게 됐는데 대책을 세운다 한들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그러나 앉아서 죽음을 받아들일 없었다. 양탄자 위를 서성이던 황제가 어두운 목소리를 흘렸다.
“장군들에게 명을 전하거라. 반드시 끝까지 버텨야 한다고! 초왕을 성 밖으로 내보내기만 하면 높은 관직은 물론이고 녹봉을 후하게 주겠다고도 전하라! 또한 금군錦軍은 궁 문 앞을 지키게 하고, 궁 안으로 들어오려는 자는 전부 죽여도 좋다고도 이르거라.
궁문을 봉쇄하고 통나무를 놓아 단단히 막도록. 초자상肖子常에게 궁 안의 금군禁軍을 소집하여 전부 궁 문으로 향하게 하거라. 궁수들은 높은 곳에 배치하여 고지를 선점하게 하고, 초왕을 사살하는 자에겐 짐이 부귀영화를 누리도록 해 주겠다.”
그는 자신의 출운보검出雲寶劍을 고승해에게 건넸다.
“짐의 출운검을 가져가거라. 만약 명을 거역하는 자가 있거든 단칼에 목을 베어도 좋다.”
황제의 일사불란한 분부에 안정을 되찾은 고승해가 감격하여 검을 받아 들었다.
“폐하, 걱정하지 마십시오. 반드시 분부대로 하겠나이다!”
명을 받들고 나가는 고승해를 황제가 다시 불러 세웠다.
“장합전으로 병사들을 보내 서 태비를 포박하거라. 친모의 시체를 짓밟으면서까지 궁으로 들어올 수 있는지 짐이 똑똑히 지켜보겠다.”
뒤를 돌아본 고승해는 황제의 음침한 얼굴에 심장이 내려앉는 듯했다. 평소 고상하고 어진 군주를 표방했지만, 그가 독한 마음을 먹으면 악랄함과 잔인함이 초왕에 뒤지지 않았다. 황제를 길러 준 이가 서 태비이건만, 그의 명령에는 여차하면 그녀를 죽일 수도 있다는 의지가 담겨 있었다.
고승해는 알겠다고 대답한 뒤, 검을 들고 밖으로 향했다.
한참이나 방 안을 서성이던 황제의 걸음이 우뚝 멎었다. 긴 한숨이 흘러나왔다. 결국 초왕이 성을 공격하다니……. 초왕비가 누구 손에 죽었든, 초왕은 그에게 빚을 갚으려 하고 있었다.
생각에 잠겨 있던 그가 목청을 높여 태감을 불렀다. 근처에 있던 소태감이 서둘러 문 앞으로 다가왔다.
“폐하, 부르셨습니까.”
“병사들을 귀비의 서복궁에 배치하거라. 누구의 출입도 불허한다.”
“예, 바로 가서 전하겠습니다.”
소태감이 명을 받들고 문을 나섰다.
황제는 궁녀들의 시중을 받아 세안을 하고 옷을 갈아입었다. 궁녀들이 상복常服을 가져다주었다. 그간 조회에 나가지 않았기 때문에 늘 편안한 상복 차림으로 지냈지만, 오늘의 그는 손을 내저었다.
“오늘은 상복을 입지 않겠다. 금룡갑주金龍甲胄를 가져오너라.”
초왕을 곁에 두었을 때는 거의 입어 본 적 없는 갑주였다. 그러니 오늘 입지 않으면 더는 입을 기회가 없으리라는 예감이 스쳤다.
갑주를 입으려면 꽤 오랜 시간이 필요했다. 양쪽 어깨, 소매, 앞판, 측판 등 부위별로 보호구가 나뉜 데다, 전부 걸친 후에는 검은 모직으로 테를 두르고 금색 단추를 다는 과정이 이어졌다.
황제가 걸친 갑주는 그 어떤 갑옷보다 아름다웠다. 금실로 수놓은 용이 양옆에서 승천하고 있었고, 그 주변으로 넘실거리는 구름무늬에는 붉은색과 녹색, 금색 테가 둘려 있었다. 아래쪽에는 녹색과 파란색, 달빛을 연상케 하는 흰 실로 수놓은 산과 바다, 진주, 산호 등이 장식돼 있었다. 양쪽 어깨에는 작은 금룡을 수놓은 뒤, 보석과 진주로 멋을 더했으니 이보다 멋진 갑주가 어디 있을까.
착용이 수고스럽긴 했지만 거울 앞에 선 황제는 마침내 늠름한 모습을 마주할 수 있었다. 그 모습이 더없이 마음에 드는 데다, 호승심이 차올랐다. 그는 늘 군신으로 명성이 자자한 초왕을 두려워했지만, 오늘은 달랐다. 목숨이 걸린 전쟁인 만큼, 그는 두려움을 이겨 내고 초왕과 결판을 내야 했다!
* * *
혼란에 휩싸인 임안성의 문은 빼곡하게 잠겨 있었다. 가게뿐만 아니라 주루며 객잔도 문을 걸어 잠갔고, 창문으로 밖을 내다보는 이도 없었다. 자칫 눈먼 화살이라도 맞아 목숨을 잃을 수도 있었다. 백성들은 땅속으로 숨지 못하는 현실을 한탄하며, 두려움에 떠는 수밖에 없었다.
황제는 일찌감치 각지의 대군을 도성으로 불러들였지만, 수가 턱없이 부족했다. 그들은 현 상황에 어떠한 확신도 가질 수 없었다. 급기야 어떤 이들은 꾸물거리며 나서려 하지 않았고, 어떤 이들은 변명거리만 찾았다. 황제가 오래전부터 암암리에 키워온 세력이었지만 전쟁 경험은 전무한 이들이었다. 무엇보다 그들에게 있어 군신 초왕과의 전쟁은 듣기만 해도 몸서리가 쳐질 만큼 두려운 것이었다.
초왕이 쳐들어오니 황제의 병사들은 지레 겁부터 먹었다. 사방에서 들려오는 참혹한 비명과 하늘을 찌를 듯한 전고 소리가 어우러져 그들의 불안감을 부채질했다. 목숨의 위협을 느낀 이들은 잽싸게 머리를 굴렸다. 누구든 생사의 갈림길에 서면 셈을 따지는 법이었다.
충심이 깊은 이들은 황제를 지키기 위해 궁문으로 후퇴했고, 몸을 사리는 이들은 혼란을 틈타 성 밖으로 줄행랑을 쳤다. 사태가 안정되면 그때 계획을 세우겠다는 허망한 믿음을 품은 채로.
그 덕에 초왕은 수월하게 궁 문 앞까지 다다랐다. 초왕이 성안에 들어오자 병사들은 그를 막기 위해 처절하게 저항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