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48화
그가 어색하게 입만 달싹이자 녹하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왜 그래? 귀신이라도 본 거야?”
가동은 대뜸 옷을 벗고 침대로 향해 녹하를 꼭 안았다.
“네가 걱정하던 일이 일어났어. 그런데 황보주아가 아니라 왕야께서 황보주아의 막사를 찾아갔어.”
녹하는 당장이라도 뛰쳐나갈 듯 몸을 일으켜 세웠지만, 가동이 그녀를 힘껏 안은 채 붙들었다.
“소란 피우지 마. 네가 가도 해결되는 건 아무것도 없어. 이번엔 태자가 아니라 왕야야. 왕야께서 널 혼내시면 나도 방법이 없다고.”
녹하는 차오르는 원망을 이기지 못해 내뱉었다.
“마마께서 떠나신 지 겨우 두 달이야. 두 달도 참지 못하신단 말이야? 그간 보여 주셨던 괴로움은 다 거짓이었던 거냐고? 왕야께서 황보주아를 처로 들이신다면 난 떠나겠어. 왕야한테서 최대한 멀리 떠날 거야. 넌? 너도 나랑 떠날 거야?”
“당연하지. 네가 어디를 가든 널 따라갈 거야. 어차피 왕야께서 날 믿지도 않으시는데 너 없는 곳에 남아봤자 아무 의미가 없어.”
“그래. 그럼 그렇게 하자.”
녹하가 비로소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내일 아침에 왕야께 말씀드리자. 오수진으로 돌아가겠다고. 거긴 집도 있고 가게도 있으니까 최소한 굶어 죽진 않겠지.”
* * *
침의로 갈아입은 황보주아는 잠을 청하려던 참이었다. 그때, 누군가 술상을 들고 안으로 들어왔다. 영문을 알지 못했던 그녀가 술상을 가지고 온 하인에게 물었다.
“대체 무슨 일이냐? 누가 이런 걸 가져오라 하였다고?”
“내가 그리했다.”
그때 묵용감이 발을 걷고 안으로 들어왔다.
“네가 깨어 있는 것 같길래 술 한잔하러 왔다.”
이렇게 늦은 시간 술을……? 당황스럽긴 했지만, 황보주아는 곧 기쁨에 잠겼다. 그녀는 깊게 고민할 겨를도 없이 활짝 웃는 얼굴로 초왕을 맞이했다. 그녀가 진심을 담아 두 눈을 반짝였다.
“오라버니께서 이리 준비해 주셨으니 마땅히 한잔해야지요.”
묵용감이 손을 내저어 방 안에 있는 이들을 모두 물렸다. 그가 황보주아의 술잔에 술을 가득 따라 주더니 자신의 잔을 채웠다. 이윽고 술잔을 들어 그녀와 잔을 부딪친 뒤, 고개를 젖히고 한입에 털어 넣었다.
일련의 과정에서, 그의 얼굴은 어둡기만 했다. 묘한 불안함을 느낀 황보주아가 어색하게 웃으며 말했다.
“저는 오라버니만큼 술이 세지 않으니 적당히 마시겠습니다.”
묵용감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가만히 그녀를 응시했다.
황보주아는 요즘 그의 행동 하나하나에 의미를 부여하며 눈치를 보고 있었다. 묵용감은 그녀의 얼굴을 빤히 바라볼 뿐 아무런 대꾸도 없었다. 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단 말인가? 아무리 해도 생각을 읽어낼 수 없었기에, 그녀는 억지로 술잔을 비웠다.
묵용감은 그녀가 술잔을 내려기를 기다렸다가 또박또박 힘주어 말했다.
“너와 안 지도 스무 해가 넘게 흘렀구나. 차라리 알지 못했으면 좋았을 것을.”
미소를 짓고 있던 황보주아는 마지막 말에 얼굴을 굳혔다.
“셋째 오라버니, 그, 그게 무슨 말입니까?”
묵용감이 입꼬리를 내렸다. 꼭 웃음 같았지만, 어딘가 비틀린 소리가 났다.
“황보주아, 널 배웅하러 왔다.”
그가 망설임 없이 허리춤에서 장검을 뽑았다.
등불 아래에서 검은 차디찬 빛을 뿜어내기 시작했다. 황보주아는 불길함에 몸서리를 치며 천천히 물러났다.
“아, 아니, 오라버니! 절 죽이면 아니 되십니다.”
묵용감은 한 걸음 한 걸음 가까이 다가가며 그녀를 압박했다. 그의 얼굴에 그녀가 알던 표정은 더 이상 없었다. 그저 포악한 짐승처럼, 그녀의 숨통을 끊을 기회만을 보는 듯했다.
“널 죽이면 안 되는 이유를 말해 보거라.”
“제, 제가 오, 오라버니의 목숨을 구해 주었으니까요!”
황보주아는 결연하게 말하려 했지만, 어느새 목소리는 가늘게 떨렸고 두 뺨에는 눈물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전 오라버니를 구해 드렸는데, 그 은혜를 원수로 갚으시는 겁니까!”
“날 구해 줬으니, 내 목숨은 가져가도 좋다.”
이를 사려문 묵용감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그가 낮게 포효했다.
“하지만, 왕비의 목숨은 가져갈 수 없다!”
말을 마치기 무섭게, 그가 송곳니를 박아넣듯이 검을 내질렀다. 검 끝을 타고 부드러운 살결을 파고드는 감촉이 선명하게 다가왔다.
그녀는 믿을 수 없다는 눈으로 천천히 아래를 보았다. 그녀의 새하얀 침의에, 설원에 피어난 붉은 꽃 같은 핏자국이 번지고 있었다. 문득 몇 년 전, 그날 밤이 그녀의 머릿속을 스쳤다. 그녀의 동생이 떠날 때와 지금 제 모습이 천천히 겹쳐지고 있었다. 그래, 달빛이 비치던 밤, 장검은 동생의 몸을 관통했다. 그 뒤엔 이렇게 천천히 피가 흘러나왔었지…….
끝났다. 모든 게 끝나고 말았다. 마음을 다 쏟았지만, 그녀는 아무것도 지키지 못했고, 무엇도 이루지 못했다. 황보 가문의 마지막 핏줄마저 이 세상에서 사라지게 되었다.
그녀의 창백한 얼굴에도 붉은 피가 번졌다. 그녀는 핏물에 젖은 입술을 달싹여 힘겹게 말했다.
“셋째 오라버니, 은, 은애합니다……. 와, 왕비는 오라버니와 어울리지 않습니다…….”
묵용감이 검을 뽑자 그녀는 천천히 뒤로 허물어졌다. 둔탁한 소리와 함께 바닥에 쓰러진 그녀가 입술을 파르르 떨었다. 그녀의 빛이 꺼져가고 있었다. 그녀는 마지막까지 미련을 담아, 그 빛을 꺼트리지 않기 위해 애쓰고 있었다. 묵용감만이 다시 그 빛을 밝혀 줄 수 있다고 믿는 듯이 그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오, 오라버니를 위해서라면, 후, 후회하지 않…….”
그때 발이 걷히며 태자가 뛰어 들어왔다. 피로 얼룩진 황보주아를 발견한 그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주아야!”
그가 놀란 얼굴로 묵용감을 바라보며 더듬거렸다.
“네, 네가 주아를 죽인 것이냐! 어찌 이럴 수 있느냐!”
묵용감은 이 광경과 아무런 상관이 없다는 듯, 차가운 목소리를 낼 뿐이었다.
“제게 그 사실을 알려 주셨을 때, 예상하지 않으셨습니까.”
바닥에 쓰러진 황보주아가 숨을 헐떡였다. 묵용감의 말을 들은 그녀의 눈동자가 마지막 빛을 번득였다. 비통함과 분함을 담아, 태자를 바라본 그녀가 힘없이 입술을 달싹였다.
태자가 서둘러 그녀를 감싸안았다.
“주아야, 미안하다……. 내가 미안해!”
묵용감은 말없이 두 사람을 지켜보다 피로 물든 검을 든 채 밖으로 나가 버렸다.
발이 내려가자 태자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하지만 그는 황보주아를 품에서 놓지 않았다. 오히려 더욱더 힘주어 그녀를 품으로 끌어당겼다. 황보주아가 경련하듯 몸을 파르르 떨었다. 얼마 후, 그의 등을 붙들고 있던 흰 손이 맥없이 바닥을 향했다. 그는 무릎을 꿇은 채 눈을 감았다. 감긴 속눈썹이 천천히 젖어들었다.
“주아야.”
그가 그녀의 귓가에 나지막이 속삭였다.
“널 속이지 않았다. 이 오라비의 마음속에 넌 영원히 특별한 존재로 남을 것이다.”
그는 그녀의 창백한 얼굴을 자세히 들여다보았다. 어릴 적부터 그녀와 함께 자라났다. 그녀의 모든 희로애락을 지켜보고 함께했다. 한때는 천진난만하고 자유롭게 지내기도 했지만, 결국 운명은 그녀를 여기까지 몰아세우고 말았다.
그는 진지한 얼굴로 그녀의 입술에 가볍게 입을 맞췄다. 그녀에게 하는 처음이자 마지막 입맞춤이었다.
* * *
이튿날, 녹하가 짐을 싸고 있는데 월규가 헐레벌떡 뛰어 들어왔다. 그녀는 반쯤 혼이 나간 얼굴로 말했다.
“언니, 들으셨습니까? 왕야께서 황보주아를 죽이셨답니다.”
“뭐?!”
녹하의 눈이 자연스레 휘둥그레졌다. 난데없이 이게 무슨 일이란 말인가?
“왜?”
설마 어제 그녀와 막사를 두고 다툰 일 때문에?
“이유는 저도 모릅니다.”
월규가 목소리를 낮추었다.
“저도 지나가다가 영구 무사님과 기홍 언니가 하는 말을 들은 것뿐입니다.”
녹하가 발 틈으로 바깥을 내다보니, 황보주아가 차지했던 막사는 어느새 철거한 듯 공터가 되어 있었다. 눈이 제법 쌓인 걸 보니 시간이 꽤 흐른 듯했다. 그녀는 어젯밤 가동이 했던 말을 떠올렸다. 설마… 황보주아의 막사를 찾아간 이유가 그녀를 죽이기 위해서였단 말인가?
그때 자신은 초왕을 얼마나 원망했던가. 복잡한 감정에 휩싸인 녹하는 일단 탁자 앞으로 돌아와 물을 따라 마셨다.
월규가 턱을 괴고 착잡한 얼굴로 한숨을 내쉬었다.
“어제까지만 해도 언니랑 막사를 놓고 다퉜는데, 하룻밤 사이에 떠나다니요. 싫어하긴 했지만 갑자기 그리되었다니, 조금…….”
그녀가 곧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왕야께서 왜 죽이신 걸까요?”
때마침 가동이 발을 걷고 안으로 들어왔다. 그는 녹하가 싸고 있던 짐에 시선을 주었다.
“떠날 필요 없어졌어. 황보주아가 죽었거든.”
녹하가 고개를 끄덕였다.
“들었어. 왕야께서 죽이셨다며. 어떻게 된 거야?”
가동이 대충 얼버무리려는 듯 손을 내저었다.
“내가 어떻게 알겠어. 왕야께선 지금 내게 말도 안 거시는데. 영구한테만 말씀해 주시지.”
“그럼 영구한테 물어봐.”
녹하가 힘주어 말했다.
“왕야께서는 이유 없이 사람을 죽이실 분이 아니야. 게다가 눈에 거슬렸으면 진즉 죽이셨겠지……. 무엇 하러 지금까지 기다리셨겠어?”
“영구가 입이 얼마나 무거운데, 나한테 알려 주겠어?”
가동이 막사에 난 작은 창으로 시선을 돌렸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자신의 시선을 피하려고 한단 말인가. 녹하가 눈을 번득이더니 탁자를 세게 내리쳤다.
“날 속일 생각하지 마. 얼른 사실대로 말해!”
옆에 있던 월규가 몸을 흠칫 떨었다. 정작 가동은 익숙하다는 듯 입을 삐죽거렸다.
“황성사에 여인을 뽑아야 한다면 네가 제격일 텐데.”
그녀의 시선이 점점 더 험악해지자, 가동은 하는 수 없이 탁자 앞에 앉았다. 그가 월규를 힐끔 바라보았다.
“부인이랑 얘기 좀 할 테니까 자리 좀 비켜줘.”
그러나 월규는 애처로운 얼굴로 녹하에게 매달렸다.
“언니, 저도 듣고 싶어요.”
“그럼 앉아 있어.”
녹하가 가동을 재촉했다.
“뜸 들이지 말고 빨리 말해.”
가동이 목청을 가다듬었다.
“마음의 준비를 좀 해야 할 거야. 내 말을 듣고 화가 끓어오를 수도 있어. 제발 바보 같은 짓은 하지 말고.”
녹하가 눈썹을 찌푸렸다.
“이미 황보주아가 죽었는데 뭘 하겠어? 아무리 원한이 크다고 해도 죽은 사람인데, 뭐.”
잠시 주저하던 가동이 입을 열었다.
“왕비 마마와 세자 아기씨를 납치한 게 황보주아래.”
“뭐?”
녹하와 월규가 동시에 소리쳤다.
“정말이야?”
“응. 태자 전하의 비밀 조직에 있던 고수를 사주해서 한 일이래. 뭐, 황보주아를 계속 사모하고 있었다나 뭐라나. 황보주아를 위해서라면 물불 가리지 않고 나설 수 있다고 했었대. 그러니래서 관저의 상황도 잘 알고 있었던 거야. 보초들을 피하는 방법이랑 관저에서 빠져나오는 방법까지 전부 꿰뚫고 있던 거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