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47화
초왕과 황제가 어떻든, 서북 지역 백성들에겐 머나먼 이야기였다. 얼마 뒤 다가올 정월 초하루를 준비하느라 거리는 명절 분위기로 가득했다.
집마다 창문에 전지剪紙를 붙였고, 춘권과 만두를 만들었다. 처마 밑 광주리에는 다홍빛 감이 잔뜩 담아 두었다. 감을 광주리에 담아 놓으면 다음 날 꽁꽁 어는데, 한 입 베어 물면 아삭아삭하고 달콤한 맛이 일품이었다.
사앵앵은 여전히 강남 지역의 풍습을 따랐기에 역참 곳곳에 등롱을 걸어 두었다. 초왕이 맡긴 역참은 확실히 규모가 엄청났다. 작은 건물 세 채는 하나의 긴 복도로 이어져 있었다. 덕분에 비가 오는 날 건물을 오가더라도 젖을 염려는 없었지만, 워낙 규모가 크니 등롱을 거는 것도 여간 어려운 일이었다. 고용한 직원도 많지 않아 대부분 그녀가 직접 해야 했다.
어느덧 해가 뉘엿뉘엿 기울었지만 아직도 등롱을 다 걸지 못했다. 잠시 허리를 두드리던 그녀가 고개를 들었다. 지붕 위에서 사장풍이 찬바람을 맞으며 앉아 있었다. 그녀의 입가에서 저절로 한숨이 흘러나왔다.
백천범의 소식을 들은 뒤로 그는 혼이 나가 버린 듯했다. 낮에는 늘 지붕에 앉아 시간을 보냈고 밤에는 달빛을 벗 삼아 검무를 연습하며 세속을 벗어난 사람처럼 굴었다.
역참 일은 전혀 관여하지 않으니 모든 일을 그녀가 신경 써야 했다. 그녀는 종일 건물을 오르락내리락 바쁘게 뛰어다니며, 마치 팽이처럼 쉴 새 없이 돌아다녔다.
덕분에 늘 허리와 등이 시큰거렸고 침대에만 누우면 곧장 잠들었지만, 사장풍은 그저 중생들을 굽어살피는 보살처럼 지붕에서 내려올 줄을 몰랐다.
달빛 아래, 한 사내가 긴 머리카락과 옷자락을 흩날리며 높이 날아올랐다. 반짝이는 검이 음산한 기운을 뿜어냈다. 사내의 앞에는 저 멀리까지 넓은 사막이 펼쳐져 있었고, 근방에는 나무 그림자가 아른거렸다.
검이 뿜어 내는 빛은 밝은 달을 향해 흩어졌고, 어느새 거센 바람과 구름이 밀려들었다. 오만 가지 생각에 사로잡힌 그는 그녀를 처음 만났던 날을 떠올렸다. 그녀는 마치 요정처럼 산길에서 불쑥 나타났다. 삐뚤어진 쪽머리를 하고 맑은 눈망울로 자신을 바라보며 성큼성큼 다가오던 그녀의 모습이 아직도 선명했다. 그녀는 그를 보고도 전혀 놀라지 않았다.
그녀를 성에 데려다줄 때, 안장에 쓸려 다리가 아팠을 텐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가느다란 허리를 곧게 세운 모습은 꼭 척박한 땅에 뿌리를 내린 묘목 같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녀가 주머니를 만들어 보냈다. 볼품없는 자수였지만 정성을 다해 만들었음이 느껴졌다. 서툰 바느질 한 땀 한 땀에 그녀의 진심이 담겨 있었다.
안타깝게도 그땐 사내의 체면을 중요하게 여긴 터라 주머니를 소중히 여기지 않았다. 결국 잃어버리고 말았으니, 지금 와서 후회해 봤자 소용없는 일이었다.
그리고 그 뒤에는…….
그가 검을 휘두르자 은색 빛이 파도가 되어 허공에 넘실거렸고, 오랜 시간 감춰 두었던 눈물이 얼굴을 타고 흘러내렸다. 이렇게 되리라는 걸 알았더라면, 산에서 내려올 때 그녀를 데리고 도망쳤을 텐데. 그녀를 안전히 숨겨 두고, 그녀의 아름다운 모습도 그만이 볼 수 있게 꽁꽁 감춰 두었을 텐데.
그러나 모두 덧없는 생각이었다. 이제 그는 이 길고 긴 인생을 홀로 걸어야 했다. 그녀가 없는 한, 영원히 잿빛인 하늘을 지고서.
마지막 동작에 검이 허공을 가르며 쇳소리를 냈다. 그의 움직임이 멈추자 어디선가 박수 소리가 들려왔다.
고개를 돌려보니 남제화가 걸어오고 있었다.
“훌륭한 검술이군요.”
사장풍은 대답 대신 입꼬리를 내리며 적당히 대꾸했다.
“술 한잔하겠습니까?”
남제화가 손에 든 술병을 흔들며 슬쩍 미소를 지었다.
“땅광에서 훔쳐 왔습니다. 내일 앵앵 아가씨가 찾아와 성가시게 하겠지요. 일단은 마시고 나서 생각해 보려 합니다.”
술만큼은 사장풍도 거절하는 법이 없었다. 비록 남제화가 자신의 땅광에서 훔쳤다지만, 상관없었다. 사실 그는 이 역참을 자신의 것으로 여기지도 않았다.
장사에는 원래 흥미가 없었던 데다 백천범의 죽음까지 겹치니, 역참을 돌보고 싶은 마음은 추호도 없었다. 그래도 장사 수완이 좋은 사앵앵이 혼자서도 능숙하게 꾸려가고 있었다.
두 사람은 지붕 위에 앉아 술을 나누어 마셨다.
남제화가 문득 질문을 던졌다.
“사 형은 어느 분께 검술을 전수받으셨습니까?”
“…….”
“앵앵 아가씨와는 정말 혼사를 치르신 겁니까?”
“…….”
“사 형은 장사꾼처럼 보이지 않는군요. 이쪽 업계에 계셨던 것 맞습니까?”
“…….”
남제화는 사장풍의 침묵에 익숙해졌는지 혼자서도 또랑또랑하게 말을 늘어놓았다.
“사 형은 초왕비와 서로 아는 사이였습니까?”
“…….”
“사 형이 이러시면 앵앵 아가씨가 상처받을 겁니다.”
“…….”
“사 형, 초왕비는 예쁘셨습니까? 어떤 분이셨습니까?”
“예뻤습니다.”
마침내 사장풍의 입이 열렸다.
“아주… 좋은 사람이었습니다.”
그가 갑자기 고개를 돌려 남제화를 바라보았다.
“누군가를 은애해 본 적이 있습니까?”
남제화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그를 떠보았다.
“설마… 사 형이 초왕비를 은애하신 겁니까?”
사장풍은 쓴웃음을 머금었다.
“저만 홀로 그리워했지요. 믿기지 않겠지만, 몇 번 만난 적 없는데도 그녀를 잊지 못했습니다. 그녀 때문에 제가…….”
그는 더 말을 잇지 못하더니 고개를 저었다. 그는 여전히 짙은 슬픔에 취해 있었다.
남제화가 술병을 그에게 넘겼다.
“연정이 무엇이기에 다들 그토록 목숨을 거는 것일까요? 사 형은 감정에 솔직한 사람이니 모든 감정을 다 쏟았겠지요. 전 부러울 따름입니다. 사 형의 말을 들어보니 그분은 은애를 받을 만한 분이셨나 보군요.
사 형뿐만 아니라 초왕도 그분 때문에 북진을 결정했다고 들었습니다. 이미 임안성 코앞까지 다다랐다는 걸 보니, 조만간 성이 함락될 듯합니다.”
사장풍이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임안까지 쳐들어갔답니까?”
“모르고 계셨습니까? 며칠에 한 번꼴로 역관이 소식을 전하러 옵니다. 초왕의 대군이 임안성 바로 앞까지 도달했다더군요. 황궁의 황제도 어쩔 줄 몰라 한다던데… 다들 머지않아 초왕이 성을 무너뜨릴 거라고 합니다.”
사장풍은 전혀 모르고 있었다. 역참엔 전국 각지의 소식이 전해졌지만, 그의 마음은 굳게 닫혀 있었기 때문에 아무 말도 들어오지 못했다.
남제화는 사장풍이 연달아 술을 들이켜자 술병을 빼앗았다.
“다 마시지 마십시오. 제 차례입니다. 게다가 이 술은 제 장부에 적힐 거라고요.”
남제화는 고개를 젖히고 술을 한 모금 들이켠 뒤, 다시 입을 열었다.
“사 형, 그 초왕비라는 분이 참 궁금합니다. 얼굴은 어떻게 생기셨습니까? 성격은요?”
술기운이 조금 올라온 데다 백천범 이야기가 나오니, 사장풍의 말수도 조금씩 늘어나기 시작했다.
“예전에는 키가 작아서 그저 어린아이에 불과했습니다. 얼굴도 손바닥만 했지요. 그런데 눈은 어찌나 큰지, 눈동자도 새까맣게 반짝였습니다. 웃으면 얼굴에 보조개가 생겨서 정말 귀여웠지요.
길을 걸을 땐 쏜살같이 걸었고, 재미있는 말을 곧잘 했습니다. 허세 따위도 없었고요. 어쨌든 평범한 아가씨들과는 많이 달랐습니다.”
남제화가 기이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들을수록 앵앵 아가씨와 닮았습니다. 앵앵 아가씨도 아담한 체구에, 귀엽고 눈도 크지 않습니까? 웃을 때 보조개도 들어가고요. 성격도 호탕한 데다 말도 재미있게 하고, 가식 같은 건 전혀 없잖습니까.”
사앵앵 이야기를 꺼내자 사장풍은 차가운 얼굴로 코웃음을 쳤다.
“어디가 아담하고 귀엽습니까? 고개를 숙이면 턱살이 다 삐져나옵니다. 눈이 크다고요? 한 번도 그렇게 생각해 본 적이 없습니다. 그리고 호탕한 게 아니라 사나운 겁니다.
앵앵이와 오래 지내다 보면 알게 될 겁니다. 사납기만 하면 그나마 다행이지요. 얼마나 제멋대로 달려드는지… 뭐… 어쨌든.”
사장풍은 한마디로 다 표현할 수 없다는 듯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얼마나 무서운 여인인지 다 알게 될 겁니다. 초왕비와는 절대 비교할 수 없을 정도지요.”
남제화는 웃음을 참으며 맞은편에 난 창문을 바라보았다. 사앵앵이 묵는 방이다. 만약 사장풍의 말을 들었더라면 그녀는 꿈에서도 그를 죽이려 들 텐데.
서북 지역 백성들은 보통 큰 도자기 병에 술을 담아 마셨다. 묵직하고 커다란 병에는 술을 두세 근이나 담을 수 있었다. 그런데도 주거니 받거니 술을 나눠 마시다 보니 어느새 병이 텅 비었다.
사장풍은 마음이 번잡할 때 술을 마시면 금방 취하곤 했다. 그는 남제화에게 인사를 건넨 뒤, 몸을 비스듬히 숙여 창문을 통해 자신의 방으로 돌아갔다.
남제화는 술병을 뒤집어 흔들었다. 역시나 한 방울도 떨어지지 않았다. 그는 술병을 내려놓고 무릎을 감싼 채 하늘에 뜬 밝은 달을 멍하니 올려다보았다. 천천히 자그마한 얼굴이 떠올랐다. 커다란 눈, 맑고 까만 눈동자, 웃을 때 나타나는 깊은 보조개까지…….
그는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며 옅은 미소를 지었다. 한 번도 본 적 없었지만 어디선가 본 듯한 얼굴이었다. 그는 흠칫 놀라며 정신을 가다듬었다. 자신이 본 얼굴이 초왕비인지 사앵앵인지 그조차 확신할 수 없었다…….
그때, 새 한 마리가 날아왔다. 그는 새 소리에 귀를 기울이는가 싶더니 이내 손을 입에 가져가 휘파람을 불었다. 잠시 뒤, 새는 그의 어깨 위에 자리를 잡았다.
남색과 회색빛이 감도는 비둘기였다. 밤인지라 색이 선명히 보이진 않았다. 남제화는 새의 다리에 걸린 둥근 고리에서 작은 쪽지를 빼내 천천히 펼쳤다. 달빛에 비춰보니 딱 세 글자가 적혀 있었다.
「화염산火焰山」
그가 좁혔던 미간을 풀며 옅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가 몸에 지닌 탄필을 꺼내 쪽지 뒤편에 몇 글자를 적어넣었다. 쪽지를 다시 비둘기의 다리에 매단 그가 낮게 읊조렸다.
“고생이 많구나. 조심히 돌아가야 한다. 자, 가거라.”
그가 손을 들자 비둘기는 날개를 펄럭이며 날아올랐고, 순식간에 어둠 속으로 녹아들었다.
* * *
깊어 가는 밤을 수놓듯, 눈꽃이 거세게 휘날리기 시작했다. 반짝이던 별마저 바람에 밀려난 듯 희미해졌다.
솜옷을 걸치고 침대 옆에 앉은 녹하가 탁자 앞에 앉아 정신을 놓고 있는 가동을 타일렀다.
“늦었어. 어서 자자.”
가동은 어두운 표정으로 탁자에 놓인 촛불을 멍하니 바라볼 뿐이었다.
“녹하야, 난 참 쓸모없는 사람 같지?”
녹하의 얼굴엔 아직 빨간 손자국이 선연했다. 그녀가 눈을 내리깔며 대수롭지 않다는 투로 말했다.
“속상해하지 마. 그분은 주인이시고 우리는 하인인걸. 하인을 때리고 화를 내는 건 예삿일이지. 그게 뭐 대수라고.”
그녀가 곧장 말을 이었다.
“난 황보주아가 왕야께 가까이 있는 게 싫었던 것뿐이야. 왕비 마마께서 돌아가셨으니 어떻게든 빈틈을 노리려는 게 뻔히 보이잖아. 참나, 꿈도 야무지셔. 황보주아가 좀 뻔뻔해야지. 예전에 왕야의 침소에 찾아간 거, 기억나지? 이번에 또 그런 짓을 할까 봐 걱정돼서 그런 거야.”
그제야 가동이 그녀를 바라보았다.
“원수를 갚는 데는 십 년이 걸려도 늦지 않는댔어. 두고 봐. 오늘 이 원한은 꼭 갚아 줄 테니까.”
늘 철없는 모습만 보이던 남편이었지만, 오늘따라 그가 믿음직해 보였다. 그녀를 지키기 위해서라면 가동은 저토록 결연해질 수 있는 사람이었다. 가슴이 뭉클해졌지만, 그녀는 괜히 투덜거렸다.
“바보, 원한을 갚긴 무슨 원한을 갚아. 그분이랑 네 신분 차이가 얼만데. 십 년은커녕 죽을 때까지 기회가 없을걸. 그래도 네 마음은 잘 알았으니까 이제 자자.”
가동은 여전히 시무룩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문 앞으로 다가가 발을 고정하려 했다. 그때, 발 틈으로 초왕이 황보주아의 막사에 들어가는 모습이 비쳤다. 가동은 황급히 고개를 돌려 녹하를 바라보았지만, 차마 입을 뗄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