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46화
황제는 한숨을 내쉬더니 황망한 표정으로 의자에 등을 기댔다. 그가 이번엔 백여름에게 물었다.
“승상, 알겠다는 말이 대체 무슨 뜻인가?”
백 승상이 고민하다 아뢰었다.
“노신이 보기에, 초왕은 밀서의 내용을 믿는 듯합니다.”
“하면 이제 어찌할 것 같은가?”
“분명 태자를 의심하겠지요.”
“성을 공격할 가능성은?”
“그것은… 적어도 당장 쳐들어오는 일은 없을 듯합니다. 진상을 파악하려면 시간이 필요할 것입니다.”
황제는 안도의 숨을 내쉬는 듯했다.
“그렇다면 다행이군. 시간을 벌면 우리도 방법을 더 생각할 수 있을 테니……. 만약 초왕이 태자에게 의심을 품는다면, 짐에게 돌아올 가능성도 있다고 보는가?”
그는 혼잣말을 하듯 말을 이어갔다.
“태자와 관계가 틀어지고 자신이 황제가 될 생각이 없다면, 이 천하는 짐이 계속 다스려야 하는 게 옳지 않은가? 그 애가 돌아오기만 한다면 예전 일은 묻어 두고 잘 대해 줄 걸세. 그 애와 짐의 사이는 예전엔 제법 좋지 않았는가? 태자가 그 애를 부추기는 바람에… 괘씸한 놈 같으니!”
“맞습니다. 초왕과 폐하께서는 우애가 남다르지 않으셨습니까. 초왕비의 일만 아니었다면 초왕이 북진할 일도 없었을 것입니다. 전부 태자가 꾸민 일 때문입니다.”
수민은 두 사람의 모습을 보며 탄식했다. 황제와 백 승상이 지금의 초왕을 보았더라면 저렇게 자신의 생각만 내세우지 못했으리라.
궁을 나선 수민은 집으로 곧장 돌아갈 생각이었지만, 이내 가마를 멈춰 세우곤 발을 들어 금성대로를 바라보았다. 그의 적녀이자 장녀가 굳게 닫힌 초왕의 저택에 여전히 머무르고 있었다. 한동안 그녀를 보지 못했건만, 갑자기 그녀가 무척 그리워졌다.
저택 대문과 측문은 모두 굳게 닫혀 있었다. 몇 차례나 문을 두드린 뒤에야 하인이 얼굴을 내밀었다. 수민을 알아본 하인이 활짝 웃으며 문을 열었다.
“수 대인이셨군요. 어서 들어오십시오.”
수민은 안으로 들어가 낮게 호통쳤다.
“이런 쓸모없는 놈. 또 어디에서 졸고 있었던 것이냐! 도둑이 문짝을 떼어가도 모르겠구나.”
문지기가 문을 닫고 웃으며 말했다.
“도둑이 어찌 이곳에 오겠습니까? 게다가 소인, 졸고 있던 게 아니라 잠시 자리를 비웠을 뿐입니다. 평소엔 최선을 다하는걸요.”
수민은 그의 말에 일일이 대꾸하기도 성가셨다.
“측왕비는 어떻게 지내느냐?”
“아주 잘 지내십니다. 끼니도 잘 챙겨 드시고, 잠도 편히 주무시고 기분도 제법 좋아 보이십니다.”
수민은 입을 꾹 다물었다. 그의 딸이긴 했지만 그조차도 수원상을 대단하다고 느낄 때가 많았다.
초왕은 그녀를 버리고 홀연히 떠났지만, 그녀는 원망조차 하지 않고 혼수를 팔아 가며 홀로 저택을 지켰다. 꽃도 심고 술도 빚으며 제법 잘 지냈다. 책을 읽거나 바느질을 하기도 했다. 그녀는 평온하고 알찬 하루하루를 만들어 나가고 있었다. 그가 상상했던 것만큼 원한에 사로잡혀 있는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날이 추워지면서 수원상은 꽃을 가꾸는 대신 경전을 쓰며 시간을 보냈다. 그녀를 보러 올 때면 이따금 속세를 초월한 곳에 온 듯한 느낌이 들었다. 다른 이들이 같은 일을 겪었다면 그녀처럼 지낼 수 없었으리라.
사실 그도 백여름처럼 딸을 궁으로 보내고 싶었다. 황후가 오래 살진 못 할 것 같았기에 언젠간 황후 자리에 오를 기회가 올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백여름의 딸이 먼저 궁에 들어간 뒤로, 황제는 그의 딸을 초왕과 맺어 주었다. 그간 심혈을 기울였던 일이 물거품이 되는 순간이었다.
여우 같은 백 귀비의 행실은 차마 눈 뜨고 봐줄 수 없는 수준이었다. 그러나 수원상은 달랐다. 수원상은 대범하고 단아할뿐더러, 누구보다 똑똑하고 집안일까지 완벽히 처리했다.
안타깝게도 그녀의 운이 영 좋지 못했다. 초왕의 저택에 들어가면 적비가 될 줄 알았더니만, 초왕은 초왕비만을 쫓아다니느라 그녀는 안중에도 없었다.
초왕이 임안성 외곽까지 쳐들어왔으니 그녀도 이 소식을 접했으리라. 그는 황제처럼 낙관적이지만은 않았기에 계획이 필요했다.
수민이 방 안으로 들어갔을 때, 수원상은 막 예불을 마친 뒤였다. 그녀는 늦은 시간에 찾아온 수민을 뜻밖이라는 표정으로 맞이했다.
“이 시간에 찾아오시다니, 제게 긴히 하실 말씀이 있으시지요?”
수민이 그녀를 바라보았다. 담담한 표정에 행동거지도 단정했고 예리한 통찰력마저 갖추고 있었다. 어디에 두어도 크게 될 아이가 이런 처지에 놓였으니, 참 딱할 따름이었다.
수민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 할 말이 있으니 보러 왔지.”
그가 책상 위에 있는 경문을 힐끔거렸다.
“서체가 날이 갈수록 더 좋아지는구나.”
수원상이 옅은 미소를 머금었다.
“매일 연습하는데도 좋아지지 않으면 시간만 낭비하는 것이지요.”
수민이 흘리듯이 말했다.
“네 여동생들도 글을 연습하고 있다. 모양새는 그럴싸한데 영 기품이 없더구나. 말을 해도 듣지를 않으니, 네 어미가 요즘 속을 좀 태운단다.”
수원상이 넌지시 물었다.
“어머니는 잘 지내십니까?”
“그래. 네 이름만 들어도 눈물을 훔치긴 하지만 말이다.”
수원상의 안색이 조금 어두워졌다.
“이 딸이 어머니의 가슴에 상처를 냈습니다. 전 처소에만 매여 있으니 동생들에게 언니 대신 효를 다해 달라고 전해 주시어요.”
수민은 그녀가 말을 꺼낸 김에 서둘러 화제를 돌렸다.
“이곳에 매여 있다는 걸 너도 알긴 아는구나. 오랜 시간이 흐르지 않았느냐. 아직도 나갈 생각이 없더냐? 네 어미는 네가 오기만을 기다리고 있다.”
수원상의 목소리에 불만이 깃들었다.
“아버지, 어찌 또 이 이야기를 꺼내십니까?”
수민이 거두절미하고 물었다.
“초왕이 성 외곽에 와있다. 알고 있느냐?”
초왕을 언급해도 수원상의 표정은 흔들리지 않았다.
“임안성에서 그 사실을 모르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테지요.”
“원상아, 대체 무슨 생각이냐? 초왕이 머지않아 성을 공격할 텐데, 너는 어디로 가려고?”
수원상이 고집스레 말했다.
“드릴 말씀은 똑같습니다. 전 이곳에 남을 것입니다. 아무 데도 가지 않겠어요.”
“전쟁이 나면 얼마나 혼란스러울 텐데. 네가 이곳에 혼자 있으면 나와 네 어미는 마음을 놓을 수가 없다.”
“초왕이 쳐들어온다 한들, 이곳은 초왕의 저택입니다. 감히 누가 공격하겠습니까?”
“양쪽에서 결전을 치를 때, 폐하께서 널 방패로 삼으실 수도 있다. 두렵지도 않더냐?”
수원상이 의미 모를 미소를 지었다.
“그리하신다면, 그것 또한 이 딸의 팔자인 것을요. 이 딸이 초왕에게 시집을 오긴 했지만, 초왕을 위해 해 준 일이 단 하나도 없습니다. 폐하께서 저를 이용해 초왕을 위협하신다면, 저는 스스로 목숨을 끊겠습니다. 절대 초왕을 성가시게 할 일은 없을 것입니다.”
수민은 화들짝 놀라 고개를 저었다.
“원상아, 어찌 그런 생각을 한단 말이냐! 네게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나와 네 어미는 어찌하라고?”
수원상은 방 안에 있던 이들을 모두 물리고 추문에게 밖을 지키라고 분부했다. 그녀가 목소리를 낮춰 물었다.
“아버지, 아버지께서 보시기에 초왕이 성을 공격할 가능성이 있습니까?”
충분히 가능한 일이었다. 지금 초왕의 상태를 생각하면, 그의 발목을 잡을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오늘 초왕을 만나고 왔다. 초왕은…….”
시종일관 담담한 태도를 유지하던 수원상의 눈이 희미하게 반짝였다.
“아버지께서 초왕을 만나셨다고요?”
“그래, 폐하께서 날 사절로 보내셨다. 해서 만나고 왔지.”
“왕야는 어떠십니까? 잘 지내십니까?”
아무리 태연하게 지내려 해도, 수원상은 여전히 지아비를 걱정하고 있었다.
“그래, 잘 지낸다.”
“왕야께서… 제 얘기는 하지 않으셨습니까?”
그녀의 아버지를 만났으니, 그래도 희미하게나마 그녀를 떠올려 주지 않았을까?
딸의 눈빛에는 또렷한 열망이 담겨 있었지만, 수민은 시선을 피하며 웅얼거렸다.
“이 아비는 초왕과 국사를 논했을 뿐이다.”
수원상의 표정이 금세 어두워졌지만, 그녀는 차를 마시며 표정을 감추었다. 찻잔을 내려놓은 그녀의 얼굴은 다시 태연한 빛으로 물들어 있었다.
“아버지. 초왕이 조만간 성을 공격한다면, 저는 아버지께서 거취를 고민하셔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수민도 사실 그 점을 고민하고 있었다.
“폐하께서 초왕에게 밀서를 보내시어 우호적인 뜻을 표하셨지만, 이 아비는 초왕이 조만간 성을 공격할 것 같구나. 그리되면 폐하께서 진노하시어 초왕과 관련된 이들을 모두…….”
그는 말을 잇지 못하고 목을 긋는 시늉을 해 보였다. 그 의미는 너무나 명확했다.
수원상이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아버지, 혼란한 시국일수록 주동적으로 움직여야 합니다. 초왕은 북진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임안성 코앞까지 점령했습니다. 임안성의 함락은 시간문제입니다. 차라리 이 기회에 초왕을 도와주시지요. 거취를 빨리 결정할수록 더 안전할 테니까요.”
그도 이런 생각을 해 보았지만, 줄곧 망설이며 결정을 유보하고 있었다. 그러나 수원상의 입에서 그 말을 들을 줄이야. 그는 한순간 심장이 덜컥 내려앉는 줄만 알았다. 그녀의 과감함이 너무나도 뜻밖이었다.
사리에 밝은 이들은 천자가 바뀌는 일을 필연이라 여긴다. 이런 때 대열을 고르는 것은 매우 중요한 문제였다. 그 당시 대황자의 대열에 섰던 그는 대학사에 올라 몇 년 동안 부귀영화를 누리지 않았던가. 그리고 지금, 또다시 선택의 때가 들이닥쳤다.
그의 경험에 비추어 볼 때, 양쪽의 실력 차이가 너무 컸다. 여기에 수원상과의 관계까지 고려하자 그의 마음속에 결정의 추가 기울었다. 다만 지난번과 다른 점이 있었다. 초왕은 아직 성 밖이었고, 대학사인 자신은 황제의 손아귀에 있다. 소문이라도 나는 날엔 황제가 언제든지 그를 죽일 수도 있었다.
“아버지, 망설이지 마십시오.”
수원상이 굳은 얼굴로 채근했다.
“우리 수가를 위해서 결정을 내리셔야 합니다.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서라도 서둘러 계획을 세워야 해요. 폐하께서 어떤 분이신지 저는 잘 모르지만, 폐하께서 저지르신 몇몇 황당한 일들은 익히 들었습니다. 대역무도한 말이지만, 그분은 마음이 굳건하지 못하니 황제의 자리에 어울리지 않습니다.”
수민도 그 점은 잘 알고 있었다. 황제는 어진 군주가 되고 싶어 했지만 능력 밖의 일이었다. 큰일을 겪을 때마다 결정을 내리지 못했고, 대부분 백여름 부녀에게 의존하지 않았던가.
그가 고민 끝에 입을 열었다.
“네 뜻은 아비도 다 안다. 다만 오늘 꺼낸 말은 누구에게도 발설하지 말거라. 지금은 그저 초왕이 서둘러 성을 공격하기만 바라야 한다. 폐하께서 당황하시면 우리를 신경 쓰지 못할 수도 있으니 그땐 살 방도가 있겠지.”
그가 다시금 생각에 잠겼다가 입술을 달싹였다.
“무술이 뛰어난 자들을 몇 명 골라 이곳으로 보내 주겠다. 앞으로 아무에게도 문을 열어 주지 말거라. 아무것도 하지 말고 네 몸을 우선하거라. 다른 일은 전부 이 아비에게 맡기고.”
수민의 결정을 알아차린 수원상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