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가유왕비초장성 (445)화 (444/1,192)

제445화

고개를 숙인 태자는 한참 동안 묵묵부답이었다. 한참 후에야 겨우 혼잣말처럼 내뱉는 답이 돌아왔다.

“그날이 이렇게 빨리 올 줄은 몰랐네.”

“초왕이 성 외곽에 주둔하며 공성을 차일피일 미루고 있습니다. 전하께선 초왕의 의도를 알고 계시는지요?”

태자가 잠시 고민하다 입을 열었다.

“워낙 전투에 능하니, 이대로 있어도 저들에게 엄청난 압박이 된다는 걸 아는 것이겠지. 해서…….”

“대황자를 압박한다기보단 대황자의 반응을 기다리는 것입니다. 인간에게는 모두 저마다의 취약점이 있는 법입니다. 대황자는 나약하니 목숨을 보전하고자 모든 수단을 쓰겠지요. 초왕은 바로 그걸 기다리고 있습니다.

전하, 초왕을 얕보셔서는 절대 안 될 일입니다. 겉으로는 대황자가 왕비를 납치해 갔다고 믿는 척하지만, 암암리에 사람을 보내 낱낱이 조사를 하는 것도 모자라 단서까지 찾아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우유부단하게 행동하신다면 화살은 전하께 향하지 않겠습니까.”

태자가 손을 내저었다.

“선생이 말하지 않아도 잘 알고 있네.”

시간이 꽤 지났지만, 묵용감은 돌아올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점점 확신이 서지 않았던 태자가 막사 안을 서성였다. 차를 한 모금 들이켠 제갈겸유가 조심스레 권했다.

“전하, 우선은 마음을 가다듬으십시오. 경솔한 행동은 금물입니다.”

태자가 한숨을 쉬며 말했다.

“바람 좀 쐬어야겠네.”

오래 전에 결정한 일이었지만, 막상 그날이 오자 마음이 얼크러지고 있었다.

막사 밖으로 나와 보니 멀지 않은 곳에 서 있는 황보주아와 녹하가 시야에 들어왔다. 둘 다 서로를 무섭게 노려보며 당장이라도 달려들 듯했다. 옆에 있던 기홍이 무어라 타이르며 두 사람을 말리고 있었다.

미간을 찌푸린 태자가 급히 다가가 물었다.

“무슨 일이냐?”

황보주아의 옆을 지키던 채봉이 억울하다는 목소리를 내었다.

“태자 전하께 아룁니다. 이곳은 우리 아가씨께서 먼저 고른 막사인데, 녹하가 들어가지 못하게 막았습니다. 자신이 먼저 고른 막사라고 우기며 말입니다.”

태자는 채봉의 말이 끝나자마자 녹하의 따귀를 때리며 언성을 높였다.

“뻔뻔한 것! 노비가 감히 주인에게 싸움을 거는 것이냐! 누가 그런 규율을 가르쳤느냐? 초왕이 너희를 내버려 둔다고 해서 너희가 누구인지도 잊었느냐?”

온화한 성격의 태자는 시녀들에게도 늘 상냥하게 대했기에, 이토록 진노하는 모습을 보인 적이 없었다. 다들 처음으로 마주하는 태자의 분노에 놀라 무릎을 꿇었다.

어찌나 힘껏 내리쳤는지, 녹하의 얼굴에는 손자국이 선명하게 남았다. 녹하는 눈물을 그렁그렁 매단 채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고 있었다.

태자는 아직도 분이 풀리지 않았는지 녹하를 걷어차며 소리를 질렀다.

“과인이 초왕을 대신해 제대로 가르쳐 주마. 앞으로 네가 네 분수를 아는지 똑똑히 지켜보겠다!”

그는 황태자였다. 감히 그를 말릴 사람이 어디 있을까. 다들 아연실색하여 그 광경을 지켜보았다. 황보주아 또한 뜻밖이라는 시선을 보내고 있었다. 그녀가 녹하와 다투는 건 하루 이틀 일어나는 일이 아니다. 그간 태자는 의심을 받을지도 모른다며 나서지 않았건만, 지금은 무슨 생각이란 말인가?

녹하는 묵용감의 사람인 데다 가동과 혼인까지 한 부녀자다. 심하게 몰아세웠다간 수습이 어려워질지도 몰랐다. 황보주아가 서둘러 태자의 앞을 막아섰다.

“그리 큰일도 아닌데 어찌 화를 내십니까? 그저 막사일 뿐인걸요. 저 애가 이곳을 쓰고 싶다면 양보하겠습니다. 셋째 오라버니께서도 괜히 난처해지십니다.”

숨을 몰아쉬던 태자는 천천히 화를 가라앉혔다. 너무 충동적이었다. 가동을 자신의 편으로 끌어들이려고 하던 차였건만, 하필이면 그의 부인에게 손찌검을 하고 말았다. 가동은 어수룩해 보여도 우직한 구석이 있으니, 한번 수틀리면 좀처럼 고집을 꺾지 않았다. 아무래도 이소로의 노력은 물거품이 될 듯했다.

고개를 들고 주변을 둘러보던 태자는 두 사람이 다투던 막사가 묵용감의 막사와 가까이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황보주아의 마음은 그도 모르는 바가 아니었다. 분명 하늘을 봐야 별을 딸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을 테지. 녹하는 황보주아를 막으려다가 다툼이 생겼으리라.

그가 채봉과 은옥에게 분부를 내렸다.

“아가씨의 짐을 안으로 옮기거라. 막으려는 자가 있거든 과인에게 데려오거라.”

의기양양해진 채봉과 은옥이 사병들에게 짐을 옮겨 달라고 했다.

일을 해결한 태자는 뒷짐을 진 채 앞으로 향했다. 황보주아가 서둘러 그를 뒤쫓았다.

“고맙습니다, 태자 오라버니.”

뒤를 돌아본 태자의 얼굴엔 어느새 미소가 떠올라 있었다.

“내게 어찌 예를 차리느냐.”

그는 사방을 둘러보며 느릿느릿 걷다가 막사로 돌아왔다. 여전히 묵용감은 돌아오지 않은 채였다. 걱정이 된 그는 하인에게 뜨거운 차를 가져오라고 분부한 뒤, 천천히 차를 들이켰다.

이미 임안성이 코앞이다. 한 발짝만 더 내디디면, 그간 그토록 고대했던 일을 이룰 수 있었다. 그는 부디 이 상황을 아무 일 없이 넘길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랐다.

한참 애를 태우고 있는데 마침내 묵용감이 돌아왔다. 그가 발을 걷고 들어오는 순간 찬바람이 훅 불어와 막사 안을 가득 채웠다. 태자는 하인에게 차를 가져오라고 분부하고는 직접 묵용감의 두봉을 받아 벽에 걸었다.

“어찌 이리 오래 있었느냐?”

묵용감이 손을 만지작거리며 말했다.

“그래도 사람을 보냈으니 인내심을 갖고 끝까지 들어야지요.”

묵용감은 하인이 가져온 찻잔을 손에 쥐고 의자에 앉았다.

태자는 그의 얼굴에서 뭐라도 읽어 내려 했지만, 헛수고였다. 묵용감은 표정을 짓는 법을 잊어버리기라도 한 것 같았다. 태자는 손을 내저으며 주변을 물리곤 아무렇지 않은 척 운을 떼었다.

“수민은 대학사다. 말주변이 좋아 죽은 사람도 산 사람으로 만들 정도니, 백여름과도 우열을 가리기 힘들지. 그런 자의 말을 믿을 수 있겠느냐? 황궁에 있는 그자가 겁에 질려 온갖 방법을 짜내 날조하려는 게 아니겠느냐. 셋째 너도 쉽게 믿지 말거라.”

“형님께서 밀서에 날조한 내용이 담겨 있을 거라는 걸 어찌 아십니까?”

묵용감이 차를 한 모금 들이켜더니 비로소 의아하다는 표정을 내보였다.

“설마, 무언가를 알고 계신 것입니까?”

태자가 무거운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 인정하마. 내가 잠시 사심을 품었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네게 알려 줘야 했었다. 우리가 잘못된 판단을 내렸더구나. 묵용한이 왕비와 세자를 납치한 게 아니라…….”

“누구입니까?”

금방이라도 그를 꿰뚫어 버릴 듯한 시선이 쏟아졌다.

태자는 시선을 떨구고 찻잔만 내려다보았다. 여느 때보다 곤란해하는 표정이 그의 얼굴 한가득 떠올라 있었다. 묵용감은 조용히 그의 대답을 기다렸다.

한참 뒤, 태자가 이를 악물며 내뱉었다.

“주아다.”

그녀의 이름을 내뱉는 순간, 날카로운 무언가가 가슴을 관통하는 듯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통증이 가시며 서서히 후련함이 그 자리를 메웠다. 오히려 개운해질 정도였다. 그래, 애당초 이렇게 하기로 계획했던 일이다.

* * *

한겨울이었지만, 초왕의 주둔지를 떠나는 수민의 등에는 땀이 흥건했다. 수민은 초왕을 다시 만나리라고는 예상치 못했다. 더욱이 오늘 만난 초왕은 그의 기억 속에 있던 초왕과는 다른 사람이라 불러도 좋을 정도였다.

어디가 이상한지 한마디로 짚어 낼 순 없었다. 생김새는 그때의 초왕과 별반 다를 게 없었으므로. 다만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음산한 냉기가 피에 굶주린 늑대를 연상시켰다. 오랜 시간 굶주리고 굶주려, 먹이를 본다면 산봉우리를 열여덟 개도 더 넘어 쫓아갈 듯한 늑대가 도사리고 있었다.

초왕은 방 안에 있던 이들을 모두 물리고 수민과 단둘이 대화를 이어 갔다. 그때의 기분이란… 역시나 이곳에 오겠다고 한 선택을 후회하고 또 후회할 정도였다.

대학사까지 오르며 수많은 풍파를 이겨 낸 수민이지만, 이번처럼 위험천만했던 순간은 처음이었다. 초왕을 보기만 해도 숨이 턱턱 막혀 왔다. 사냥감에 바짝 다가간 늑대처럼, 초왕은 언제든 그를 베어 물 수 있을 듯했다. 그 분위기에 압도된 수민은 말하는 내내 신중을 기했다. 혹여 한 마디라도 잘못했다간 참혹한 죽음을 맞이하리라는 예감이 그를 사로잡고 있었다.

그는 문관이었기에 몸을 사리며 말하는 법을 누구보다 잘 알았다. 오는 길 내내 머릿속으로 되뇌며 할 말을 정리했지만, 초왕 앞에 앉으니 그 말들은 눈 녹듯이 사라지는 듯했다. 그는 갓 말을 배운 사람처럼 더듬거리며 겨우 할 말을 전했을 뿐이었다.

의자에 앉은 초왕은 밀서를 훑더니 화절자를 켜서 곧장 불태웠다. 그는 수민이 말을 다 끝낼 때까지 아무런 대꾸도, 아무런 반응도 하지 않았다. 심지어 입꼬리 한번 움직이지 않았다. 두 사람은 그렇게 한참을 가만히 앉아 있었다.

기회가 된다면 수원상을 언급할 생각이었지만, 수민은 깊은 침묵 속에서 끝없이 땀만 흘리고 있었다. 숨이 턱턱 막히는 와중에 아무런 생각도 떠오르지 않았다. 설령 떠올랐다 한들 입에 올리지도 못했으리라.

아무리 생각해도 초왕이 왜 이렇게 오랜 시간 그와 독대하고 있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수민은 온몸을 감싼 두려움에 사로잡힌 채, 두 번 다시 이런 짓은 하지 않으리라고 다짐했다.

성으로 들어온 뒤에야 그는 잔뜩 졸였던 마음을 내려놓을 수 있었다. 옷매무새와 삐뚤어진 관을 가다듬자 그제야 명망 높은 대학사의 모습을 갖출 수 있었다.

궁에 들어서니 소태감들이 가마를 들고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를 발견한 소태감들이 서둘러 다가와 예를 갖춰 인사를 올렸다.

“수 대인, 폐하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가마에 오르시지요.”

그도 황제가 얼마나 애태우고 있을지 잘 알기에 곧장 가마에 올랐다. 흔들거리는 가마에 몸을 실은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승덕전에 도착했다.

고승해가 직접 발을 걷어 올리며 그를 맞이했다.

“수 대인, 고생 많으셨습니다. 안으로 드시지요. 폐하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수민은 성큼성큼 안으로 들어갔다. 푹신한 의자에 등을 기댄 채 쉬고 있던 황제는 그의 모습을 보고 곧장 몸을 일으켰다.

“어찌, 초왕은 뭐라 하던가?”

옆을 지키고 있던 백 승상도 긴장된 눈빛을 보냈다.

수민은 예를 갖춰 인사를 올린 뒤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초왕과 오랜 시간 앉아 있긴 했지만 아무런 말도 하진 않았다. 이걸 대체 어찌 전해야 한단 말인가?

수민이 머뭇거리다 말했다.

“폐하, 초왕이 폐하의 밀서를 보더니 알겠다고 하였습니다.”

황제는 기대에 가득 찬 얼굴로 다음 문장을 기다렸다.

“그리고?”

“그 후로 아무 말이 없었습니다.”

“아무 말이 없었다?”

황제가 믿을 수 없다는 듯 눈을 깜박이다 되물었다.

“그렇게 오랜 시간 있었으면서 고작 그 세 글자만 들었다는 건가?”

“예. 노신, 폐하께서 하신 말씀은 낱낱이 전했습니다.”

수민이 솔직하게 털어놓았다.

“하지만 초왕은 평온해 보이는 얼굴로 그렇게만 대꾸하였습니다.”

“초왕이 짐의 밀서를 제대로 보긴 한 것인가?”

“예. 한 자 한 자 똑똑히 보았습니다.”

“그런 뒤에는?”

“다 읽은 뒤에는 화절자로 밀서를 불태웠습니다.”

“불태웠다?”

“예. 재가 될 때까지 전부 불태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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