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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유왕비초장성 (444)화 (443/1,192)

제444화

삵을 안은 채 조용히 앉아 있던 백 귀비가 슬픔이 가득한 얼굴로 황제를 바라보았다.

“폐하, 부디 그런 말씀 마십시오. 폐하께서 돌아가시면 신첩은 어찌한단 말입니까?”

“마음 놓으시오.”

황제가 그녀의 손을 꼭 쥐더니 옅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짐은 죽더라도 귀비만큼은 살길을 마련해 주겠소.”

그는 잠시 생각에 잠기는가 싶더니 다시 입을 열었다.

“백 장군이 항복한 뒤에도 초왕이 목숨은 살려 줬다더군. 보아하니 백씨 가문은 너그럽게 봐주려는 듯하오. 어쨌든 혼인으로 이어진 가족이질 않소? 초왕비가 세상을 떠나긴 했어도 체면은 봐주고 있더군. 그러니 두 사람은 그리 걱정하지 않아도 되오.”

황제가 백장간을 언급하자 백 승상의 표정이 어색해졌다. 기대를 걸었던 백장간이 결국 대패했다는 소식을 받은 후, 황제는 오랜 시간 침묵에 잠겨 있었다.

패전 소식에 백 승상도 불안하긴 마찬가지였다. 어쨌든 백장간은 자신의 아들이 아닌가. 뜻밖에도 초왕은 백장간을 죽이지 않았다. 백 승상은 절망 속에서 희미하게나마 희망을 찾아냈다. 어쩌면 황제의 말대로, 초왕은 백천범의 체면을 생각해 목숨을 살려 줄지도 몰랐다.

* * *

수민이 믿을 수 없다는 눈으로 황제를 바라보았다.

“폐하, 시, 신이 초왕을 만나라는 말씀이십니까?”

“맞네.”

황제가 의자에 등을 기댄 채 넋이 나간 표정으로 말했다.

“짐이 생각해 보니 수 경이 가장 적합하더군.”

“하, 하지만…….”

수민이 조용히 서 있는 백 승상을 힐끔거렸다.

“신의 생각으로는 백 승상을 보내는 게 더 적합하리라 사료됩니다.”

백 승상이 곧장 그의 말을 받아쳤다.

“대학사, 그게 무슨 말이오? 본 상을 보내는 게 더 적합하다니! 대학사는 초왕의 장인이 아니오? 초왕과 남다른 사이니 대학사가 가는 게 맞소.”

“내가 하려던 말이 그 말이오.”

수민이 코웃음을 치며 말을 이었다.

“승상의 딸은 초왕의 적비가 아니오? 승상이야말로 진정한 장인이지 않소.”

“나와 초왕이 원수지간이라는 걸 모르는 자가 어디 있소? 초왕이 언제 날 만나기나 하였소? 그저 잡아먹을 듯이 눈만 부라렸지. 본 상이 간다면 초왕을 만나기도 전에 목이 날아갈 수도 있소. 그렇게 되면 폐하의 일을 망치는 꼴이 아니오?”

수민은 그와 설전을 벌이지 않고 곧장 황제에게 예를 갖추며 아뢰었다.

“폐하, 제 딸은 초왕에게 시집을 가긴 했지만, 버려진 부인이나 다름없습니다. 초왕이 저택을 떠나던 날, 제 딸은 남겨졌습니다. 초왕은 제 딸을 부인으로 여긴 적이 단 한 번도 없는 게지요.

신이 초왕을 만난다면 백 승상이 말한 대로 얼굴을 비치기도 전에 참살을 당할 것입니다. 이 밀서는 다른 이에게 맡기는 것이 좋겠습니다.”

“폐하.”

백 승상이 지지 않고 맞잡은 손을 들어 올리며 말했다.

“대학사는 덕성과 명망이 높고 말솜씨가 뛰어납니다. 더욱이 신분도 높으니 폐하의 밀서를 전하기에 대학사가 가장 적합한 인물이라 사료됩니다.”

“승상!”

수민의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그가 성난 얼굴로 백 승상을 바라보았다.

“초왕이 처를 끔찍이 아꼈다는 사실은 모르는 이가 없을 정도입니다. 승상과 초왕이 원한이 있다고는 하나, 처를 대했던 태도를 생각하면 잊은 지 오래일 것입니다.

왕비가 떠났으니 초왕은 왕비를 사무치게 그리워할 테고, 승상에 대한 마음도 이제는 남다르겠지요. 그러니 백 승상이야말로 적임자라고 사료되옵니다, 폐하.”

“수민!”

결국 백 승상이 버럭 호통을 쳤다.

“순순히 따르는 게 좋을 것이네. 초왕이 저택을 두고 도망쳤을 때, 어진 폐하께서는 자네를 책망하지 않으셨지. 하늘과 같은 폐하의 은혜를 입고, 폐하께서 어려운 상황에 처했을 때 이런 식으로 보답한단 말인가?”

“백여름! 이런 비열한 소인배 같으니. 죽음이 두렵단 이유로 노부를 보내려 하는가!”

그가 서둘러 황제에게 말했다.

“폐하. 초왕이 백장간을 죽이지 않았다는 것은 그가 백씨 집안사람들을 남달리 대한다는 의미입니다.”

화가 치솟은 백 승상이 그를 힘껏 밀쳤다.

“이런 모자란 자를 보았나, 입만 열었다 하면 허튼소리를……”

수민도 지지 않고 그를 밀쳐내며 목에 핏대를 세웠다.

“이 간신배 같은 놈, 남을 업신여기며 아첨할 줄만 알지…….”

일품 고관들이 서로 치고박고 싸우는 모습에, 황제는 머리가 지끈거리다 못해 터질 듯했다. 그는 힘껏 탁자를 내리치며 두 사람을 향해 손가락질을 했으나, 끝끝내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비틀거렸다.

백 승상과 대학사가 서둘러 그를 부축했다.

“폐하, 괜찮으십니까.”

황제가 두 사람을 뿌리치며 말했다.

“그대들 때문에 화가 치밀어서 사달이 날 것 같네. 재난이 닥쳤으니 살 길을 강구하는 것은 이해하네. 다만 누군가는 필히 해야 하는 일인데, 설마 짐이 직접 가라는 것인가? 정말 실망스럽군. 평소에는 유창한 말솜씨로 충심을 고백하더니, 진정으로 충심을 보여야 하는 지금은 온갖 핑계를 대며 회피하다니!”

황제가 한숨을 내쉬며 창문 앞으로 걸어갔다. 나지막한 목소리에 슬픔이 묻어 있었다.

“짐이 의지하는 중신들조차 이 꼴이니, 나라가 망하지 않는 게 더 이상하겠구나.”

수민과 백 승상은 침묵을 지켰다. 수십 년 동안 관직에 몸담은 두 사람은 누구보다 교활하고 영악했다. 늘 이익부터 따지고 신중하게 고민하는 데 익숙해진 지 오래었다.

젊은 시절의 강직함은 세월이 지나면서 닳아 없어졌고, 문제가 생기면 약삭빠르게 넘기기 일쑤였다. 그러나 황제가 이렇게까지 언급하니 두 사람 모두 부끄러움을 감추지 못해 얼굴이 달아올랐다.

한참 뒤, 수민이 어렵게 입을 열었다.

“폐하, 노신이 초왕을 만나러 가겠습니다.”

백 승상의 눈이 반짝였다. 황제가 몸을 돌려세우곤 담담하게 말했다.

“수 경이 그리 마음을 먹다니, 짐은 아주 기쁘네. 무리할 필요는 없네. 결국…….”

황제가 무거운 한숨을 내쉬었다.

“두 사람 모두 짐에겐 아주 중요한 존재이니.”

“폐하, 노신이 기꺼이 원하는 일이옵니다.”

수민은 이제 단호한 어조로 말하고 있었다.

“결과가 어찌 되든 노신이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좋네!”

비로소 황제가 입꼬리를 올려 미소를 지었다.

“수 경, 걱정하지 말게. 짐이 금군을 파견해 수 경을 호송하겠네. 아무리 전쟁을 치른다 해도 적군의 사신은 죽이지 않는 법이지. 초왕도 그간 수많은 전투를 겪어 그 점은 똑똑히 알고 있다네. 수 경은 곧바로 길을 떠날 채비를 하게.”

* * *

가동은 태자를 무사히 교외 주둔지로 데리고 왔다. 묵용감은 나무 말뚝 앞에 서서 태자 쪽을 응시하고 있었다. 태자는 말에서 내리자마자 감격스러운 얼굴로 묵용감에게 다가갔다.

“셋째야. 네가 세운 공이 아주 크구나. 이렇게 짧은 시간에 임안까지 도달하다니, 역시 네가 진정한 군신이다!”

“먼 길 오시느라 고생 많으셨습니다, 형님.”

묵용감이 공손히 예를 갖췄다.

“불편하시겠지만, 며칠만 막사에서 지내셔야겠습니다. 임안성을 점령하거든 그때 성으로 드시지요.”

태자는 감회가 남달랐다. 군사를 이끌고 임안성을 공격하던 그해, 황궁을 점령하기 직전 황제를 구하러 온 초왕에게 대패하지 않았던가. 그때, 그는 전쟁만큼은 평생 묵용감을 이길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역시 궂은 일이 있으면 좋은 일도 오는 법이었다. 그땐 초왕이 묵용한을 도와 그를 쳤지만, 지금은 그를 도와 초왕이 묵용한을 쳤다. 제갈 선생의 말이 옳았다. 초왕을 얻는 자가 천하를 얻을 수 있었다. 묵용한은 귀한 패를 제 손으로 부숴 버렸지만, 그는 절대 그런 실수를 범하지 않으리라.

황보주아는 금박을 입힌 빨간색 외투를 입고 있었다. 하얀 눈이 소복이 쌓인 땅 위에 서 있으니 마치 한겨울에 피어난 매화 같았다. 그녀는 묵용감에게 다가가 인사를 건네고 싶었지만 어쩐지 망설임이 앞섰다.

그녀는 가냘픈 자태로 서서 입을 가리고 몇 차례 기침을 했다. 그러나 초왕은 그녀에게 눈길 한 번 주지 않고 태자와 함께 막사 안으로 들어갔다.

그녀는 원망이 담긴 눈으로 초왕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초왕비의 발인 전날 밤, 마지막으로 본 그의 모습은 거의 무너지기 직전이었다. 온몸을 잠식한 비통함이 눈에 선연했다. 그러나 지금의 초왕은 어떠한가. 냉랭한 얼굴에, 행동 하나하나가 위엄이 넘쳤다.

차마 다가가 말을 걸지도 못할 만큼 날이 선 모습이었지만, 그 모습이야말로 그녀의 기억 속에 있는 초왕이었다. 모든 이들이 두려워하고 공경하는 진정한 군신, 그 자체였다.

태자는 늘 초왕이 길을 잃었다고 말했다. 예전의 모습을 되찾아 줘야 한다며 열을 올리던 그가 마침내 목적을 달성한 모양이었다.

백천범도 떠났겠다, 이제 묵용감을 두고 그녀와 다툴 사람은 없었다. 아무리 깊이 파인 상처라 한들, 시간이 지나면 자연스레 아무는 법이다. 조용히, 하지만 꾸준히 그의 곁을 지키다 보면 언젠가 그의 시선이 그녀에게 향하리라.

한편, 태자와 막사 안으로 들어간 초왕은 자리에 앉아 하인에게 차를 내오라고 분부했다. 막 태자와 대화를 나누려는데 영구가 들어와 고했다.

“왕야, 궁에서 보낸 사절이 뵙기를 청합니다.”

더는 황제라 칭할 수도, 이름을 부를 수도 없는 이였다. 영구는 그저 궁에서 보냈다고 고하는 수밖에 없었다.

묵용감이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무슨 일이라고 하느냐?”

“왕야께 밀서를 전하겠답니다.”

영구가 망설이다 마저 고했다.

“수 대학사 말이, 왕비 마마와 관련된 일이라고 합니다.”

태자와 제갈겸유가 은밀하고 빠르게 시선을 주고받았다. 묵용감이 살짝 놀란 듯한 목소리로 물었다.

“수민 대학사가?”

“예. 수민 대학사가 직접 찾아왔습니다.”

묵용감은 잠시 고민하는 듯하더니 자리에서 일어났다.

“여기까지 오느라 피곤하실 텐데, 우선 좀 쉬십시오. 잠시 다녀오겠습니다.”

초왕이 밖으로 나가자, 태자는 주변을 물렸다. 그가 목소리를 낮췄다.

“선생이 보기엔 어떠한가?”

제갈겸유가 희끗희끗한 수염을 쓸어내리며 미간을 찌푸렸다.

“지금 사절을 보냈으니, 좋은 일은 아니겠지요. 하지만 치밀하게 계획을 세웠으니 절대 문제가 생겼을 리는 없습니다. 노부의 추측대로라면, 대황자가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증좌를 날조해 냈을 겁니다.

초왕도 이미 저희를 의심하고 있을 테지요. 노부가 지난번에 비둘기를 보내 말씀드렸으니, 전하께서도 생각해 둔 게 있지 않으십니까.”

태자의 안색이 심상치 않은 빛으로 물들었다. 그가 긴 한숨을 내쉬었다.

“준비는 일찍이 해 두었지만, 마음의 준비가…….”

“전하.”

제갈겸유가 나직하게 고했다.

“큰일을 하시는 분은 어느 때든 마음이 약해지시면 안 됩니다. 초왕을 보시지 않았습니까. 전하께서도 아시다시피, 모든 감정은 약점이 되기에 십상입니다. 노부가 간청하건대, 부디 초왕의 전철을 밟지 마시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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