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가유왕비초장성 (443)화 (442/1,192)

제443화

가동이 고개를 저었다.

“검을 배운 자가 그리 나약하게 굴며 무시당할 수는 없어. 다른 사람들은 물론이고 우리 아내부터 날 업신여길 거야. 뭐, 지아비가 공을 세우지 않길 바라는 사람이 어디 있겠어. 두고 봐, 전쟁이 끝나면 왕야께서 영구를 장군으로 봉하실걸.”

“장군이 뭐 그리 대단하고요.”

이소로가 코웃음을 치며 받아쳤다.

“칼에 피를 묻히며 다른 이를 위해 목숨을 바쳐야 하지 않습니까. 초왕야도 마찬가지입니다. 지위가 높으셔도 우리 태자 전하를 위해 전쟁을 치르시잖아요. 저라면 무관은 절대 하지 않겠습니다.

비바람을 피할 거처를 마련해서 매달 적당히 쓸 은자를 벌고, 부인과 아이들을 돌보며 사는 삶이야말로 진정 아름다운 삶이 아닙니까.”

가동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난 평생 이 일만 해 왔어. 다른 건 할 줄도 모른다고. 문관처럼 지내는 건 못해.”

가동을 지그시 바라보던 이소로가 가까이 다가왔다.

“알고 계십니까? 태자께서 황성사라는 관청을 만드신다고 합니다.”

가동이 의아하다는 듯 눈을 끔벅였다.

“내가 벌써 취했다고 생각하는 거야? 그 일은 딱히 비밀도 아닌데, 당연히 알지.”

“형님이 지원하신다면 태자 전하께서도 크게 기뻐하실 겁니다. 사독司督이 될지도 모르지요. 무려 정삼품의 자리입니다.”

이소로가 꿈을 꾸듯 말했다.

“왕야께서 임안성을 함락하시거든 태자 전하께서는 천자의 자리에 오르시겠지요. 사독이 되면 매일 삼품 조복을 입고 조정에 나가게 됩니다. 보는 사람마다 형님을 사독 나리라고 부르겠지요.

조회가 끝난 뒤에는 무수한 하인을 거느리는 저택으로 돌아가지 않겠습니까. 더욱이 어여쁜 처첩들과 귀여운 아이들까지 함께할 테니 즐거운 나날을 보내실 겁니다.”

가동은 두 눈이 휘둥그레진 채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상상만으로도 얼마나 아름다운 장면인가. 그는 완전히 매료된 듯했다.

이소로가 웃으며 슬쩍 물었다.

“어떠십니까?”

이윽고 가동이 긴 한숨을 내쉬었다.

“그럴 수만 있다면 참 좋겠지.”

그는 택도 없다는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그래도 첩은 필요 없어. 분명 녹하한테 내쫓길 테니까.”

이소로가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을 보였다.

“그건 형님이 알아서 할 일이고요. 어쨌든 그리되고 싶은 마음은 있으십니까?”

“다들 공명과 부, 편안한 삶을 위해 사는 건데 나라고 어찌 마음이 없겠어.”

가동이 고뇌하며 머리카락을 쥐었다.

“그래도 왕야께 죄송한 마음이 큰 거지.”

“죄송하다니요.”

이소로가 그를 다독였다.

“초왕야께서는 이미 형님을 믿지 않으십니다. 이런 상황에서 왕야를 따르는 게 무슨 소용입니까? 사람은 높은 곳으로 가고, 물은 낮은 곳으로 흐르는 법 아닙니까. 생각해 보십시오. 폐하를 위해 힘쓰는 것과 왕야를 위해 힘쓰는 것 중 어느 쪽이 더 체면이 서겠습니까?

게다가 태자 전하는 왕야보다 온화하고 상냥한 분입니다. 왕비께서 계셨을 땐 초왕야도 늘 웃고 계셨지만, 지금은요? 솔직히 말해서 전 지금의 왕야를 제대로 쳐다보지도 못합니다. 볼 때마다 어찌나 무서운지, 간이 오그라드는 기분입니다.”

그때 졸병이 안으로 들어왔다. 그가 가동에게 예를 갖추며 말했다.

“가 대인, 태자 전하를 모시고 즉각 북상하라는 왕야의 명입니다. 왕야께서 태자 전하를 위해 길을 여실 테니, 곧장 임안성으로 향하시랍니다!”

화들짝 놀란 두 사람은 자리에서 일어나며 이구동성으로 물었다.

“위수를 격파했는가?”

“위수에서 대승을 거두었습니다. 이미 초왕야께서 북진하고 계십니다.”

소식을 전한 졸병이 돌아가자 이소로가 가동을 향해 눈썹을 치켜세웠다.

“제가 한 말, 잘 생각해 보십시오. 왕야께서 북진하셨으니 머지않아 임안성을 함락하실 겁니다. 그리되면 태자 전하께서 새로운 군주가 되십니다. 부디 좋은 기회를 놓치지 마십시오.”

* * *

백천범은 벽에 새긴 표시를 바라보았다. 총 마흔세 개의 흔적이 있었다. 그녀가 이곳에 갇힌 지도 한 달하고도 보름이 다 되어 갔다.

아직도 이곳을 도망칠 방법을 찾지 못했다. 천장에 공기가 통하는 구멍이 있긴 했지만 너무 작았다. 그렇다고 흙을 더 팔 수도 없었다. 토질이 너무 단단한 데다 지금 파기 시작하면 엄청난 시간이 걸릴 터였다. 그녀는 그렇게 오래 기다릴 수 없었다.

하염없이 답답해질 때면, 그녀는 세자를 안고 문밖으로 나가 잠시 서 있곤 했다. 보초들은 그녀가 산굴 밖으로 나가려 들지 않으면 굳이 막아서지 않았다.

오랜 시간 관찰한 끝에 그녀는 문밖이 좁은 복도와 이어져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벽에 등이 아닌 커다란 구슬을 끼워 넣은 터라 복도는 늘 어두컴컴했다. 그녀는 끈질긴 탐색 끝에 보초가 둘이 아닌 여러 명이고, 시간이 되면 교대를 한다는 사실도 알아냈다.

복도는 위로 향하는 듯했다. 즉, 출구가 위쪽에 있다는 의미였다. 그녀가 찾아낸 공기 구멍과 같은 방향이었다. 도망칠 길은 위쪽에 있다고 확신했지만, 이런 출구로 몰래 도망치는 건 사막에서 바늘을 찾아야 일이나 다름없었다.

그나마 다행이었던 점은 갇혀 있는 것 외에 음식이나 옷가지 등은 제법 잘 챙겨 주어 편안한 생활을 누릴 수 있다는 점이다. 그녀는 이에 안주하지 않고 세자를 직접 안아 들며 손 힘을 길러 두었다.

또다시 며칠이 흐르자, 부인과 노파가 밥을 들고 안으로 들어왔다. 세자에게 줄 쌀죽도 놓여 있었다. 백천범은 절대 그들 손에 세자를 맡기지 않았다. 부인은 손짓으로 아이가 컸으니 모유뿐만 아니라 다른 음식도 먹여야 한다고 설명했다.

관저에 있을 땐 기홍이 만들어 준 미음을 먹이기도 했지만, 이곳의 음식은 절대 입에 대 주지도 않았다. 부인은 성품이 온화한 사람이었다. 그녀가 허락하지 않자, 차분히 손짓을 하며 그녀를 타일렀다.

부인의 권유가 성가셨던 백천범은 쌀죽이 담긴 그릇을 집어 들더니 입에 넣고 우물우물 먹기 시작했다. 이런 상황에서는 모든 일에 대비해야 한다. 쌀죽에 독을 탔을까 봐 염려한 게 아니다. 세자가 쌀죽을 먹기 시작하면 저들이 세자를 데려갈지도 모른다. 이런 상황에서 세자마저 빼앗긴다면, 그녀는 완전히 무너지고 말 터였다.

지금껏 부인과 노파는 낌새를 드러낸 적이 없었지만, 위기에 처할수록 감각이 예민해지는 백천범은 한 가지 사실을 알아차렸다. 두 사람은 늘 긴장한 채, 세자를 주시하고 있었다. 한번은 그녀가 불안정한 자세로 세자를 안는 바람에 떨어뜨릴 뻔한 적이 있었는데, 화들짝 놀란 부인이 달려오다 탁자에 발이 걸려 넘어졌다. 부인은 이를 악물며 고통스러워했다.

그녀는 그 모습을 똑똑히 새겨 두었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만큼 소중한 아들이었지만, 중요한 때에는 어쩔 수 없이 손을 쓸 수밖에 없었다. 그녀는 세자가 아픈 것처럼 보이게 하려고 엉덩이를 슬쩍 꼬집었다. 놀란 세자가 자지러질 듯 울음을 터뜨리자, 부인은 어쩔 줄 몰라 하며 연신 노파에게 눈짓을 보냈다.

노파는 침착하게 세자의 맥을 짚더니 이마에 손을 얹는 것도 모자라 혀까지 확인했다. 꼭 의술을 잘 아는 듯했다. 이내 노파가 부인을 향해 고개를 저었다. 별일 아니라는 의미였다.

자신을 납치한 자는 아주 주도면밀한 자였고, 치밀한 계획을 세웠다는 사실이 피부로 다가왔다. 이곳의 하인들은 몇 가지 일을 동시에 할 줄 알았다. 왕비와 세자의 시중을 들면서 두 사람을 감시하고, 몸 상태를 확인하기도 했다. 그녀를 납치한 자는 그녀의 머릿속을 훤히 꿰기라도 한 듯, 그녀가 생각할 법한 일들은 다 대비해 두고 있었다.

백천범이 얼추 헤아려 보니 곧 정월 초하루였다. 바깥은 엄동설한이겠지만 굴속은 따뜻한 봄이었다. 추위를 잊고 지낼 때면, 무슨 수를 쓴 건지 신기할 따름이었다. 그러나 이곳을 탈출해 몸이 얼어붙는다고 해도 두렵지 않았다.

이곳에 있는 옷은 전부 얇은 옷뿐이었다. 도망칠 땐 몇 벌은 껴입어야 추위를 막을 수 있을 터였다. 그간 자질구레한 무기를 몰래 만들어 둔 그녀는 무기를 쓸 수 있는 날만을 간절히 바랐다.

고작 이 정도 공간에서 그녀가 살펴볼 수 있는 건 모두 살펴보았으니, 이젠 무엇이든 시도를 해야 한다. 올해는 세자가 태어난 첫해가 아닌가. 이 특별한 해를, 특별한 명절은 온 가족들과 함께 보내고 싶었다.

다만 그녀가 꿈에도 모르는 일들이, 바깥에서 펼쳐지고 있었다. 그녀의 큰 오라버니와 묵용감은 교전을 벌이고 있었고, 한두 달 만에 세상은 완전히 뒤집혀 버렸다.

* * *

신호탄을 본 왕 장군은 곧장 병사를 이끌고 지원에 나섰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매복해 있던 적군에게 포위되었다. 사방에서 쏟아져 나오는 초왕의 병사들 앞에서, 왕 장군의 병사들은 아무런 대항도 하지 못했다. 왕 장군이 황망한 얼굴로 적진을 살펴보니, 백장간이 고개를 숙인 채 초왕 옆에 서 있었다.

수장까지 항복한 마당에 장군인 그가 어찌 반항할 수 있을까? 묵용씨 형제들이 천하를 두고 다투는 일에 자신의 목숨까지 바칠 필요는 없었다. 누가 옥좌에 앉든 그의 목숨을 부지하는 일이 더 중했다.

결국 초왕의 군대는 파죽지세로 성과 토지를 점령했고, 급기야 정월 초하루를 닷새 남긴 날 임안성의 코앞에 이르렀다.

대경실색한 황제는 복귀가 가능한 모든 병력을 동원해 도성을 수호했다. 그는 조정에도 나가지 않고 승덕전에 숨다시피 하며 불안한 나날을 보냈다.

백 승상도 두렵긴 마찬가지였지만, 신하 된 도리로 황제를 타일렀다.

“폐하, 노신이 말씀드렸던 대로 하셔야 합니다. 복수를 하려거든 당사자에게 해야 하는 법이지요. 초왕이 판단할 기회를 주심이 어떻습니까. 적어도 우리 쪽이 숨 돌릴 틈은 줄 수 있을 것입니다.”

“그다음은?”

팔걸이 의자에 앉아 있던 황제가 창백해진 얼굴로 이마를 쓸어내렸다.

“짐은 그 애를 잘 안다네. 군대를 일으켰을 때 반년이나 강남을 배회한 것은 그 애가 이 형을 생각했기 때문이지. 어쨌든 제 혈육이니, 천하를 둘로 나눠 태자와 나에게 각각 통치할 기회를 준 것이네.

하지만 이번엔 달라. 황궁에 앉아 있어도 그 애의 포악함이 느껴지는군. 두 달도 채 되지 않아 임안성 턱밑까지 쳐들어왔으니, 짐의 목을 베겠다는 뜻이 분명하지 않은가.”

백 승상이 절로 탄식을 내뱉었다.

“이렇게 된 이상, 방도가 없습니다. 폐하, 도망치시지요.”

“어디로 도망친단 말인가?”

황제가 허탈하게 물었다.

“짐을 외방外邦으로 보낼 생각인가?”

“안 될 이유도 없지요.”

백 승상이 선뜻 답했다.

“목숨만 부지하면 다시 기회가 찾아올 것입니다. 최근 들어 몽달국과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했으니 그곳에서 휴양을 한다고 생각하십시오.”

황제의 얼굴이 굳어지며 차디찬 그림자를 드리웠다.

“짐은 묵용씨의 자손이네. 외방으로 도망치는 것도 모자라 숨겨 달라고 굽실거리다니……. 선조들을 무슨 낯으로 뵈란 말인가? 그 말은 두 번 다시 꺼내지 말게. 짐은 죽는 한이 있어도 황궁을 떠나지 않을 걸세.”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