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42화
별안간 하늘에서 눈발이 휘날리기 시작했다. 조금씩 휘날리던 눈발은 빠르게 춤을 추며 하늘을 수놓았다. 아름다운 광경이었지만, 이곳에서는 다른 의미로 다가왔다. 눈송이는 살육이 벌어지는 전장에, 죽은 사병들의 몸 위에 소리 없이 내려앉았다. 이 참극을 가리기 위해 하늘이 눈을 흩뿌리는 것 같았다.
백장간의 얼굴은 하얗게 질렸고 가슴은 마비된 것처럼 저려 왔다. 철기 부대에서 있던 시간이 길지 않은 데다 장교들도 그를 잘 따르지 않았지만, 사병들만큼은 그를 공경했다. 그가 말을 타고 순시를 돌 때마다, 연병장에서 우레 같은 함성이 터져나오지 않았던가.
“군신! 군신!”
분명 진정으로 우러나온 존경의 의미였을 터였다. 그는 일말의 두려움도 없이 늘 자신감이 넘치던 과거의 모습을 떠올렸다. 지금, 그때의 병사들과 그는 함께 무너져 버렸다. 참혹한 비명이 귓가를 끊임없이 때렸지만, 그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죽어가는 병사들 너머로 묵용감이 모습을 드러내었다. 말에 올라탄 그는 이 모든 장면을 조용히 지켜보고 있었다. 담담한 얼굴이 그 어느 때보다 편안해 보였다. 그의 얼굴만 보고 있으면 정원에 핀 꽃을 감상하는 듯했다.
백장간은 의아할 따름이었다. 어찌 저리 담담하고 무심한 반응인가. 자신들의 병사가 죽어가는데도 가슴이 아프지 않단 말인가? 정녕 심장이 돌로 만들어진 인간인 것일까?
그의 눈빛을 알아차렸는지, 초왕이 그가 있는 곳을 바라보았다. 흩날리는 눈을 사이에 두고 두 사람의 시선이 잠시 교차했지만, 묵용감의 눈빛은 한 점 흔들림도 없었다.
그 담담한 태도와 개의치 않아 하는 모습은, 백장간의 분노를 끌어올렸다. 아직 최후의 순간이 오지 않았으니 끝까지 겨뤄 봐야 승자가 정해질 터였다. 마지막 발악도 살길을 모색하는 방법 중 하나였다.
그가 자신의 호위병을 불렀다.
“왕 장군에게 지원 요청을 하거라. 조금도 지체되어선 안 된다.”
명을 받든 호위병은 어둠을 틈타 서둘러 말에 오른 뒤 밖으로 내달렸다. 안타깝게도, 그는 백장간의 시야를 벗어나기도 전에 적군에게 찔려 낙마했다. 그는 말에서 떨어지던 순간마저 그는 백장간을 바라보려고 애썼다. 자신의 사명을 다하지 못했다고 어떻게든 백장간에게 알려주려는 듯 애처로운 모습이었다.
백장간은 낙마한 호위병을 슬픈 눈으로 바라보았다. 절로 이가 꽉 악물렸다. 그가 낮은 목소리로 관웅을 불렀다.
“내가 엄호할 테니 병사들을 데리고 포위망을 뚫거라. 반드시 지원군을 요청해야 한다.”
관웅이 고개를 내저었다.
“제가 엄호하겠습니다. 장군께서 포위망을 뚫으십시오!”
백장간이 벌컥 성을 냈다.
“이런 상황에서도 양보하려는 것이냐?”
관웅이 손사래를 쳤다.
“저희 중 누구도 저 포위망을 뚫지 못합니다. 초왕이 장군의 목숨만은 해하지 않을 테니, 장군이 가실 수 있습니다.”
그의 말이 맞았다. 초왕은 백천범의 체면을 봐서 그를 죽이지 않을 거라고 했다.
백장간은 그 말에 저절로 분통을 터뜨렸지만, 지금은 많은 걸 따질 때가 아니었다. 그는 호위병들을 불러 모은 뒤 굳은 얼굴로 말했다.
“죽음이 두려운가?”
호위병들은 북쪽에서부터 그와 함께했다. 이곳에서 만난 병사들과는 친분이 남달랐다. 그들이 이구동성으로 답했다.
“두렵지 않습니다. 목숨을 걸고 장군을 따르겠습니다!”
“좋다.”
백장간이 단호하게 손을 뻗었다.
“말에 타거라. 나와 함께 포위망을 뚫자꾸나. 포위망을 뚫고 지원 요청을 전하는 자가 있거든 후한 보상을 내리겠다!”
“예! 장군!”
하나둘 말에 올라탄 호위병들이 그나마 적군이 적은 쪽으로 내달렸다. 관웅은 병사들을 이끌고 양쪽에서 적군을 베며 그들이 무사히 빠져나갈 수 있게 도와주었다.
포위망을 뚫을 지점은 백장간이 골랐다. 어두워서 시야가 제한되고, 그만큼 병력이 적은 곳이다. 재빨리 움직인다면 충분히 빠져나갈 수 있을 터였다. 그는 선두에 서서 코앞에 보이는 포위망을 향해 미친 듯 질주했다. 그러나 빠르게 달리던 말이 갑자기 몸을 낮췄고, 그는 그대로 떨어지고 말았다.
뒤에서 달려오던 호위병이 곧장 손을 뻗어 그를 끌어올렸다.
“장군, 타십시오!”
백장간도 민첩하게 손을 뻗어 호위병의 팔을 붙들었다. 그가 서둘러 말에 올라타려는 그때, 휙! 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백장간이 눈을 부릅떴다. 호위병의 가슴을 관통한 화살이 기다란 화살대를 비죽 내보이고 있었다. 호위병은 ‘장군!’이라는 단말마를 내뱉으며 굴러떨어졌다.
백장간은 땅 위에서 반쯤 무릎을 굽힌 채 본능적으로 그를 받아들었다. 화살이 날아온 방향을 살펴보니, 초왕이 있었다. 그는 손에 활을 든 채 날카로운 눈빛으로 그를 응시하고 있었다.
분노에 찬 백장간은 호위병을 내려놓고 검을 뽑아 들며 달려갔다. 다른 호위병들이 서둘러 그를 막아섰다.
“장군, 충동적으로 행동하시면 안 됩니다. 이렇게 가시면 죽음뿐입니다!”
그 틈에 적군들이 몰려와 포위망을 겹겹이 에워싸는 통에 기회는 날아가고 말았다. 백장간은 눈을 질끈 감았다 떴다. 여전히 아무런 감흥도 없다는 듯, 무심한 초왕의 시선이 그에게 머무르고 있었다.
그의 곁에 있던 이들은 목숨을 바쳐 초왕의 병사들과 싸웠다. 초왕의 명이 있었는지 적군 중 누구도 그를 베려 들지 않았다. 그는 천천히 손을 들어 자신의 목에 검을 가져다 댔다. 스스로 죽는 한이 있어도 초왕에게 항복하고 싶진 않았다.
하지만 초왕의 동작이 더 빨랐다. 빠르게 날아온 화살이 칭 소리를 내며 검신을 때렸고, 검은 그대로 바닥에 떨어져 뒹굴었다.
그는 비틀거리며 겨우 몸을 지탱했다. 화살에 부딪힌 충격으로 손아귀가 마비된 듯했다. 그가 절망에 가득한 얼굴로 초왕을 노려보았다.
초왕은 옆에 있던 영구에게 활을 넘기더니 말에 탄 채 병사들을 뚫고 앞으로 다가왔다. 검을 뽑아 든 그는 사병들이 쓰러지지 않게 적군을 막아 주기도 했다.
코앞까지 다가온 초왕이 백장간을 내려다보았다.
“지금부터 네 목숨은 내 것이다.”
주변은 전투의 소음으로 가득했지만 백장간은 그 말을 똑똑히 들을 수 있었다. 그가 마구 악을 쓰며 말했다.
“헛소리하지 마라!”
초왕은 뒤따라온 영구를 바라보며 턱을 들어 올렸다 내렸다. 영구는 품에서 기다란 물건을 꺼내더니 불을 붙여 공중으로 던졌다. 이내 번쩍이는 불꽃이 하늘로 치솟더니 유성이 떨어지듯 거대한 소리를 내며 사방으로 흩어졌다. 어둠 속에서 서로를 죽이던 병사들도 고개를 들어 불꽃을 바라보았고, 혼란스러웠던 상황은 갑작스레 안정을 되찾았다.
초왕이 느긋하게 입을 열었다.
“무기를 내려놓거라. 본왕이 너희의 목숨은 살려 주마!”
그는 다소 거만한 어조로 말했지만, 병사들은 그의 눈빛을 본 순간 두려움에 떨었다. 감히 입을 여는 자는 아무도 없었다. 눈발만 허공에 흩날릴 뿐, 사방은 함부로 움직이는 이들조차 없이 고요했다.
사병들의 눈망울에 망설임과 안도감이 교차했다. 그때 백장간이 큰소리로 외쳤다.
“철기 부대의 건아들이여! 차라리 목숨을 내놓거라. 우린 절대 투항하지 않는다!”
그의 곁에 남아 있던 호위병은 곧장 검을 들어 올리며 답했다. 그 순간, 대여섯 자루의 창이 호위병의 몸을 관통하며 온몸을 피로 물들였다.
두려움에 가득 찬 시선들이 쓰러지는 호위병에게 향했다.
결국 누군가 손에 있던 무기를 바닥으로 내려놓았다. 하나, 둘, 셋… 점점 더 많은 무기가 바닥에 버려졌고, 병사들은 제자리에서 꼼짝도 하지 않았다. 결국 장교들마저 들고 있던 무기를 모두 내려놓았다.
얼굴이 창백해진 백장간이 천천히 눈을 감았다. 그들을 탓할 수는 없었다. 죽음이 두렵지 않은 자가 얼마나 있을까. 자존심은 목숨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다. 게다가 이 전쟁은 내전이다. 동포에게 굴복한다면, 그리 부끄러운 일도 아니었다.
전쟁 포로를 잡아들이는 일은 거쳐야 할 과정이 있기에, 주변은 다시 분주한 소음으로 가득 채워졌다,
초왕이 백장간을 바라보며 무미건조하게 말했다.
“원하는 일이라면 뭐든 해 줄 수 있다. 지원 요청도 이미 했다.”
그가 조금 전 쏜 신호탄을 두고 하는 말이라는 건 백장간도 알고 있었다. 백장간은 만일의 사태에 대비해 팔십 리 밖에 왕 장군이 이끄는 정예 부대를 주둔시켜 놓았다. 지원 요청만 하면 왕 장군이 곧장 지원병을 데려올 예정이었다. 두 진영은 거리가 가까우니 왕 장군도 신호탄을 보았으리라.
초왕이 병사들에게 분부했다.
“길 양쪽에 매복해 있다가, 저들이 가까이 오거든 잡아들이거라.”
백장간은 치솟는 분노로 몸을 떨었다. 그러나 학자 가문 출신인지라 아무리 분노가 치솟아도 심한 욕을 내뱉지 못했다.
“비열한 소인배 같으니!”
초왕은 들은 척도 하지 않으며 손을 내저었다.
“백 장군을 데려가 잘 보살피거라.”
동쪽 하늘에서 희끄무레한 빛이 퍼지기 시작했다. 어느새 눈은 그쳐 있었다. 곧 날이 밝을 듯했다.
초왕이 영구에게 물었다.
“정월 초하루가 얼마나 남았느냐?”
영구가 잠시 고민한 뒤 입을 열었다.
“오늘이 보름이니, 이제 보름 남았습니다.”
보름이면 족했다. 그들을 짓밟기에는 충분한 시간이었다.
초왕은 뒷짐을 진 채 어슴푸레하게 밝아오는 동녘 하늘을 바라보았다. 어둠을 지워나가는 햇살은 점차 찬란하게 하늘을 뒤덮으리라. 새벽이 지나면 늘 아침이 오기 마련이지만, 그의 빛은 영원히 떠오르지 않을 듯했다. 그는 늘 한밤중과 새벽, 그 어둡고도 쓸쓸한 경계선에 놓여 떠돌게 될 터였다.
“가동을 시켜 태자께 말씀을 전하거라. 북진할 때가 왔으니 본왕이 길을 열겠다.”
“예, 왕야.”
영구는 명을 받들고 곧장 앞으로 달려 나갔다.
초왕은 말에 올라타 해가 솟아오르는 곳으로 내달렸다. 장병들은 물 흐르듯 우르르 그를 좇았다.
* * *
소식을 전하러 온 졸병이 부윤 관저에 들어섰을 때, 가동은 이소로와 술을 마시고 있었다. 가동이 서글픈 얼굴로 투정을 부렸다.
“소로야, 너도 알지. 내가 무슨 힘이 있냐? 말이 좋아 왕야의 일급 호위무사지, 곁에 있지도 못하게 하시잖아. 늘 영구만 데리고 다니시고. 물론 날 원망하시는 건 잘 알지. 난 왕비 마마와 세자 아기씨를 지켜드리지 못했으니까.
하지만 소로야, 내가 무슨 수로 그런 고수를 막겠어? 그런 짓을 하면서 인기척도 전혀 내지 않는 자였다고. 게다가 그날 밤에는 우리 아내까지 소란을 피우는 탓에, 에휴. 말을 말자. 운이 없었다고 생각해야지.”
이소로가 담담히 대꾸했다.
“왕야 곁이 아닌 게 더 좋지 않습니까? 칼이 어디서 나타날지도 모르는데 말입니다. 혹여 부상을 입기라도 하면 평생 고생해야 하지 않습니까? 이렇게 돌아와 쉬시는 게 낫지요. 다들 전방에서 적을 무찌르는 동안 우리는 편히 먹고 마시니 즐거운 일이 아닙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