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41화
그는 턱을 만지며 관웅에게 분부했다.
“궁지에 몰린 쥐는 고양이를 무는 법이니, 앞으로 며칠은 특별히 더 조심해야 한다. 초왕은 앉아서 죽을 날만 기다릴 사람이 아니니, 무슨 수를 써서라도 강을 넘으려 할 것이다.”
관웅이 다부지게 말했다.
“장군, 걱정하지 마십시오. 이미 잘 처리해 두었습니다. 초왕이 감히 강을 넘어오거든 절대 살아 돌아갈 수 없게 할 것입니다.”
금세 며칠이 지났다. 약한 눈발이 휘날리며 산봉우리를 하얗게 덧칠해가고 있었다. 수면에도 다시 얼음이 얇게 얼었으나, 밤사이 소금을 뿌린 덕분에 아침까지 단단히 어는 일은 없었다.
추운 날씨에 장병들은 몹시 괴로워했지만, 표정에는 여유가 넘쳤다. 강 건너의 적군들이야말로 지옥 같은 시간을 보내고 있지 않겠는가. 그들을 생각하면 이 정도쯤은 참아넘길 수 있었다.
긴장을 늦출 수 없던 관웅은 야간 순찰에 더 많은 병력을 투입했다. 시간이 지날수록 백장간의 얼굴은 하나의 예감으로 굳어갔다. 결전의 순간이 점점 더 가까이 다가오고 있었다.
어두운 달빛을 가르듯 바람이 세차게 불던 밤, 강에서 이상한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가볍고 느린 소리였지만 바람에 뒤섞이니 소리의 정체를 파악하기 어려웠다.
병사들이 이 사실을 고하러 막사에 들어갔을 때, 백장간은 부장들과 작전을 논의하고 있었다. 보고를 들은 그는 곧장 밖으로 나갔다. 강을 바라보니 수면에 검게 뭉쳐진 그림자가 보였다. 그와 함께 기괴한 소리가 점점 가까워지고 있었다.
솨아… 솨아…….
그때, 누군가 소리쳤다.
“노를 젓는 소리입니다. 적군이 쳐들어옵니다!”
백장간이 큰소리로 명령을 내렸다.
“당황하지 말고 계획대로 행동하라. 오늘 밤 적군과 마지막 결전을 치를 것이다!”
작전은 이미 세워두었다. 적군이 배를 타고 오긴 했지만, 백장간의 군대는 유리한 지형을 선점하고 있었다. 궁수를 충분히 배치하여 배를 표적으로 삼으면 그만이다. 밤이라 시야가 조금 흐릿하긴 해도 거리가 좀 더 가까워지면 조금 더 뚜렷하게 윤곽을 판별할 수 있을 터였다.
역시 얼마 지나지 않아 검은 그림자가 어둠 속에서 꾸물거리는 모습을 드러냈다. 예상했던 대로 남쪽의 수군이었다. 배에 가득 찬 수군들은 활을 당기고 있었다. 기선제압을 하려는 듯했다.
좋은 고지를 점하고 있던 백장간은 그들에게 기회를 넘겨줄 생각이 없었다. 그가 고수鼓手에게 명했다.
“시작하라!”
말이 떨어지자마자 격앙된 북소리가 구름 낀 하늘을 향해 울려 퍼졌다. 궁수들은 곧장 목표물을 향해 활을 쏘았다. ‘쉭쉭’ 하는 소리가 연이어 허공을 갈랐고, 화살은 비가 되어 내렸다. 어둠 속에서 참혹한 비명이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북소리는 곧 명령이었다. 북소리가 멈추지 않는 한 화살도 멈추지 않으리라. 맹공을 퍼붓자 배가 방향을 잃고 이리저리 움직이기 시작했다. 방향을 잡는 조타수는 이미 변을 당한 듯했다.가 이미 변을 당한 것 같았다. 백장간은 기쁨이 담긴 목소리로 연신 명령을 내렸다.
“더, 더 힘껏 치거라!”
북을 치는 고수는 곧장 팔을 크게 휘둘러 전고를 힘껏 쳤다. 그러나 적군은 중상을 입어도 후퇴하지 않는 끈질김을 보였다. 어느새 어둠 속에서 끝없는 선박의 행렬이 이어지고 있었다.
첫 공격을 맡은 궁수 대열은 뒤로 후퇴하고, 두 번째 대열이 자리를 잡았다. 수많은 화살이 하늘을 뒤덮자 모두 혼비백산했다. 화살을 피하려다 강으로 뛰어드는 이도, 도망가다 돛에 꽂히는 이도 있었다. 그중에서도 퍽퍽 소리를 내며 몸에 화살이 꽂히는 경우가 가장 많았다.
처참한 비명이 허공을 가득 메웠지만, 적군은 멈추지 않고 다가오고 있었다. 마침내 세 번째 대열까지 엄청난 양의 화살을 퍼붓고 나니 화살이 부족해졌다. 강에 빼곡히 들어선 배들도 더는 움직이지 않았다.
문득 백장간이 손을 드니 북소리가 멎었다. 이내 화살 비가 멈추고, 참혹한 비명도 잦아들었다. 순식간에 사방이 쥐 죽은 듯 고요해졌다.
백장간은 어쩐지 이상한 기분에 사로잡혔다. 검은 천을 덮어놓은 듯한 짙은 어둠 때문에 수면 위의 상황을 제대로 볼 수 없었다. 그저 어렴풋한 그림자가 보이는 게 전부였다.
허공에는 마치 연무가 나부끼는 듯 기이한 분위기가 흘렀다. 대체 무엇이 잘못되었단 말인가? 그가 미간을 찌푸리며 생각에 잠기는데, 관웅이 다가와 말했다.
“장군, 뭔가 이상합니다.”
“그래. 무언가 잘못된 듯하구나.”
고개를 끄덕인 백장간이 별안간 눈을 번쩍 뜨더니 큰소리로 외쳤다.
“모두 퇴각하라!”
마침내, 백장간은 한 가지 사실을 깨달았다. 피비린내가 나지 않는다. 그렇게 많은 화살을 쐈고, 참혹한 비명이 끝없이 이어졌건만, 피비린내는 조금도 나지 않았다. 이 얼마나 기이한 일인가?
그의 말이 떨어지자마자 강가에서 엄청난 굉음이 터져나왔다. 이어 푸른 불길이 치솟으며 어둠을 밀어내었다. 다들 순간적으로 넋을 놓고 있는데, 불붙은 화살이 강에서 가장 가까운 막사에 명중했다. 곧 ‘쾅’ 하는 소리와 함께 막사에 불이 번져가기 시작했다.
불길이 하늘로 솟구치며 혼란스러워하는 병사들의 얼굴을 비추었다. 뒤이어 화살이 쉼 없이 날아오며 주둔지 곳곳에 꽂혔다. 백장간의 주둔지는 순식간에 만개한 꽃송이처럼 붉게 타올랐다.
“당황하지 말거라!”
백장간은 목이 터져라 소리치며 병력을 통솔하려 애썼다.
“말에 올라 강기슭에 포진하라! 철기 부대는 포진하라!”
그에 화답하듯 군마의 울음소리가 사방에서 울렸다. 철기 부대는 고된 훈련을 거친 뛰어난 부대였다. 적군의 술책에 잠시 당황하긴 했지만, 금세 냉정을 되찾고 일사불란한 움직임을 보였다. 어느새 강기슭에 진이 형성되고, 수비하는 형세를 이루었다.
적군의 움직임은 요란했다. 끝없이 이어진 배들은 강 위에서 진을 치려는 모양새였다.
백장간은 말에 뛰어올라 검 끝으로 수면에 떠 있는 배를 가리켰다.
“길목을 지켜야 한다. 적들의 배가 기슭에 닿게 하지 말거라! 궁수들은 엄호하라!”
마지막 말은 소용없는 명이었다. 적들의 배는 진을 치는가 싶더니 빠르게 다가왔다. 게다가 몇 차례에 걸친 맹공으로 이쪽은 화살이 거의 남지 않았다. 뒤늦게 그 사실을 깨달은 백장간의 얼굴이 새파랗게 변했다.
저절로 분노가 치밀었다. 묵용감은 그들이 활을 다 쓸 때까지 기다리고 있었다! 풀을 실은 배로 적군의 화살을 소진하는 수법은 병법서에도 있는 내용이었다. 백장간은 그간 수많은 병법서를 읽었지만, 정작 중요한 순간에 떠올리지 못했다.
그러나 백장간의 기세는 꺾이지 않았다. 그가 얼추 살펴보니, 한 배에 탄 인원은 그리 많지 않았다. 그의 머릿속이 빠르게 정리되었다. 우선 선두에 있는 배 한 척이 뭍으로 올라오면 서둘러 처리한 뒤, 숨 쉴 틈도 주지 않고 몰아붙여야 했다. 그리하면 적들은 공격을 이어가지 못할 테고, 결국 죽음을 앞두게 될 터였다.
배는 끊임없이 수면 위를 이동했지만, 뭍에 정박하려 하진 않았다. 기슭을 지키던 기병들은 어둠 속에서 이리저리 움직이는 배를 의아한 표정으로 지켜보았다.
어느새 지척까지 다가온 덕분에 배에 탄 이들의 그림자까지 아른아른 떠올랐다. 그런데도 정박하는 소리가 나지 않았다.
백장간이 미간을 찌푸렸다. 대체 무슨 수작이란 말인가? 강기슭까지 도착했으면서 어째서 뭍으로 올라오지 않는단 말인가? 적군이 배에서 내리지 않으면 전투가 어찌 더 이어지겠는가?
관웅이 고삐를 당겨 그에게 다가왔다.
“장군, 이제 어찌합니까?”
백장간이 고개를 돌려 뒤를 바라보았다. 막사는 거의 다 타 버렸고, 주변엔 다시 어둠이 깔리기 시작했다. 그가 강 위를 떠다니는 배에 시선을 주었다. 대체 저리 움직여서 무얼 하려는 것이란 말인가? 강에서 저리 진을 쳐봤자 아무 소용도 없을 터인데…….
그때 희미한 소리가 들려왔다. 그가 관웅에게 물었다.
“무슨 소리가 들리지 않느냐?”
관웅도 귀를 기울이며 미간을 찌푸렸다.
“꼭 쇠사슬이 움직이는 소리 같습니다.”
“젠장!”
백장간이 낭패라는 듯 큰소리로 외쳤다.
“기병은 후퇴하고 창병槍兵들은 전방으로 나서라!”
이미 늦은 결정이었다. 적의 수장이 명을 내리는 소리가 귓가에 또렷이 전해졌다.
“살수殺手들은 제 위치로! 말의 다리를 내리친다!”
어둠 속에서 도끼날이 스산하게 빛났다. 동시에 기슭과 가장 가까이에 있던 배에서 살수들이 달려 나왔다. 그들은 말이 보이는 족족 내리찍었고, 놀란 말은 사방으로 도망을 치는 소리가 요란했다. 그 와중에 병사들이 말에 밟히기까지 해, 질서정연했던 대열은 순식간에 난장판이 되고 말았다.
백장간이 목청을 드높이며 명령을 내렸다.
“창병들은 전방으로! 어서, 배의 정박을 막아야 한다!”
살수들은 수가 많지 않으니 그들의 병사들과 정면으로 맞붙을 수 없을 터였다. 빠르게 살수를 처리하고 배의 정박을 막으면, 아직 그에게도 승산이 있었다.
이번에야말로 진짜 비명이 길게 솟구쳤다. 그의 뒤에서 들려오는 소리였다. 놀란 군마가 미친 듯 날뛰기 시작했다. 결국 칼을 휘둘러 말을 베어넘기니 주변이 겨우 안정을 되찾았다.
그가 상황을 정리하기도 전에, 창공이 갈리는 소리가 귓가를 스쳤다. 적군이 쏘는 화살이었다. 마침내 초왕의 군대가 정식으로 공격을 퍼붓기 시작했다!
“방패병, 전방으로!”
관웅이 다급히 명을 내렸다.
발소리가 혼잡하게 엉키더니 방패병이 대열을 이루고 앞으로 나아갔다. 그들은 뒤에 있던 다른 병사들의 대열이 무너지지 않도록 막아 주었다.
적군의 화살 공격은 그리 길게 이어지지 않았다. 화살이 소나기처럼 쏟아지다가 멎고, 그것을 신호로 강 쪽에서 빠르게 다가오는 발소리가 들려왔다. 말을 탄 엄청난 규모의 병사들이 어둠 속을 뚫고 나오는 듯했다.
그들은 눈 깜짝할 사이에 기슭으로 올라왔고 손에 들고 있던 무기로 적군과 말을 보이는 족족 내리쳤다…….
백장간의 안색은 잿빛에 더 가까워졌다. 쇠사슬 소리가 들렸을 때, 그는 이번 전투의 흉조를 알아차릴 수 있었다. 묵용감은 배로 그의 대군을 데려온 게 아니었다. 노를 저어 배를 타고 오면 속도가 너무 느리다. 병력을 연이어 투입할 수 없다면 죽은 목숨이나 다름없으니, 쇠사슬로 배를 쭉 이어 잔교棧橋를 놓은 것이다.
잔교를 건너기만 하면 주력 부대를 이끌고 단번에 쳐들어올 수 있었다. 이렇게 된 이상, 두 군대는 직접 맞붙어 격렬한 전투를 벌여야만 했다. 우세한 고지는 백장간의 마지막 희망이었다. 만약 고지를 빼앗긴다면, 용병술이 귀신같은 초왕 앞에서 어떠한 결말이 펼쳐질지는 너무나도 뻔했다.
초왕의 대군은 무서운 기세로 적을 몰아붙였다. 또다시 불붙은 화살이 날아들어, 겨우 남아 있던 막사까지 불기둥이 솟구쳐 올랐다. 곳곳에 솟구친 불들이 치열한 주변을 비추며 일렁였다.
백장간은 마침내 공기 중에 섞인 피비린내를 맡을 수 있었다. 그는 불길이 비추는 참상을 똑똑히 목격했다. 수많은 장병들이 그의 눈앞에서 쓰러져갔다. 이어서 펼쳐지는 광경은 처참했다. 천지가 울릴 만큼 울부짖는 부상자들, 널브러진 시체들, 강이 되어 흐르는 핏물까지……. 불지옥이 있다면 바로 이곳이리라.
고대하던 대전이 발발했지만, 그가 생각했던 형태와는 정반대였다. 이번 전쟁에서 그는 패배했다. 초왕이 대군을 이끌고 배에서 내리는 순간, 그의 패배가 결정된 것이나 다름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