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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유왕비초장성 (440)화 (439/1,192)

제440화

사병들은 순간 그들의 귀를 의심했다.

“왕야…….”

어떻게 붙잡은 적군의 수장인데, 이리 간단히 놓아준단 말인가. 당연히 북쪽과의 협상 도구로 쓸 수 있는 자였다.

“풀거라.”

묵용감의 매서운 눈빛이 병사들을 훑었다.

“그만 놓아 주거라.”

초왕의 명을 거역할 수 없었던 병사들은 포승줄을 풀고 백장간을 떠밀었다.

“인자하신 우리 왕야께서 풀어 주라고 하시니, 어서 가거라!”

백장간이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묵용감을 노려보았다.

“정말 날 놓아주는 것이냐?”

묵용감은 고개만 살짝 끄덕였다.

“내가 한 말은 잘 들었겠지. 복수하러 다시 찾아오고 말겠다.”

“그래, 기다리지.”

그는 변명조차 없이 명쾌한 대답을 내놓았다. 일말의 거리낌도 느껴지지 않는 답이었다. 결국 참지 못한 백장간이 불쑥 물었다.

“내 여동생을 죽인 장본인이라고 인정하는 것인가?”

묵용감이 눈망울을 내리깔았다가 다시 들어 올렸다. 이윽고 그는 고개를 틀어 먼 곳을 바라보며 답했다.

“그런 셈이지.”

그렇다, 자신이 그녀를 지켜주지 못해 그녀가 그런 일을 겪은 것이나 다름없다. 스스로를 용서할 수 없었는데, 백장간은 오죽할까.

* * *

백장간의 말은 빈말이 아니었다. 그는 호언장담했던 대로 몇 차례나 기습 공격을 퍼부었다. 초왕은 그의 체면을 봐서 매번 직접 전투에 나섰고, 매번 그를 생포했다가 풀어주길 반복했다. 결국 머리끝까지 화가 난 백장간은 초왕에게 삿대질을 하며 소리쳤다.

“이런 음흉한 놈, 죽일 수 있으면 단칼에 날 베란 말이다. 이 몸이 네 칼날에 눈썹 하나라도 까딱한다면 성을 갈고 말겠다!”

초왕은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서서 성을 내는 백장간을 바라보았다. 백장간은 그를 죽일 듯이 달려들었지만, 곧장 사병들에게 가로막혔다.

초왕이 천천히 나섰다.

“단둘이 싸운다 한들 넌 날 이기지 못한다. 전술을 쓴다 해도 내 적수가 되지 못하지. 한데 날 죽이겠다고? 시간만 낭비하는구나. 양쪽 군대가 전투를 벌이고 있고, 너와 난 그 군의 수장이다. 사적으로 만나선 안 되는 사이지.

설령 만난다 한들 서로 죽자 살자 달려들어야 하는 사이다. 한데 내가 무슨 이유로 널 이리 잡았다 풀어주는 줄 아느냐?”

“날 고통스럽게 하려고 하는 수작이겠지.”

“아니.”

초왕이 진중한 얼굴로 백장간을 응시했다.

“천범이 널 큰오빠라고 불렀으니까.”

그가 백천범을 언급하니, 백장간은 더욱더 화가 치솟았다. 백장간이 있는 힘껏 침을 뱉었다.

“감히 천범이를 입에 올리다니! 멀쩡하던 아이가 네게 가더니 이렇게 되었다. 심지어 네 아들도 낳아줬는데! 애를 그 지경으로 만들어 놓고 미안하지도 않단 말이냐? 내 여동생을 살려내란 말이다. 이 비열한 인간, 위선자 같은 놈, 내 여동생 살려 내!”

분노가 극에 달한 백장간은 상처 입은 짐승처럼 포효했다.

초왕은 묵묵히 그를 볼 뿐이었다. 백장간의 말이 다 맞았다. 그는 백천범에게 미안하고 또 미안했다. 그의 곁에 두는 게 가장 안전할 거라고 믿었는데, 그녀는 납치를 당했다. 그녀가 납치된 원인은 그에게 있었다. 그녀가… 그의 가장 큰 약점이므로.

그는 몸을 돌아 세우고 더는 백장간에게 시선을 주지 않았다.

“저자를 돌려보내거라.”

“예!”

사병들은 초왕의 명에 따라 백장간을 결박하고 말에 태운 뒤, 그의 군영까지 호송했다.

이날 이후로, 백장간은 더는 기습 공격을 하지 않았다. 그렇게 지리한 대치가 이어지며 겨울이 성큼 다가왔다. 펑펑 내린 눈이 산봉우리를 하얗게 뒤덮었다.

산길을 걸을 수 없다면 백장간에게 좋은 일이었다. 그러나 강이 얼어붙는 건 불리한 조건이었다. 초왕의 주력군이 바로 맞은편에 있으니, 수면이 단단히 얼면 적들이 강을 건너와 곧장 임안성까지 쳐들어갈 수도 있었다.

“소금은 아직이더냐?”

그가 관웅에게 물었다.

“곧 도착합니다. 수송 마차가 흑목애黑木崖에 도착했다고 하니, 예정대로라면 내일 오후에 도착할 것입니다.”

“적군이 약탈해가지 못하도록 병력을 보내 길목을 지키거라.”

“산길이 눈으로 뒤덮였으니 넘어오지 못할 것입니다.”

“전쟁 중이니 모든 일에 방심은 금물이다.”

백장간이 칼끝으로 촛불 심지를 잘라냈다.

“그자의 손에 붙잡히면서 폐하께서 그를 군신으로 봉한 게 근거 없는 일이 아님을 깨달았다. 그자는 군신이 분명해. 그런 자와 겨뤄야 하는 우린 항상 신중을 기해야 한다.”

관웅은 백장간을 바라보며 조심스럽게 물었다.

“장군, 초왕이 장군을 잡았다가 풀어주는 게 무슨 의미일까요?”

백장간은 잠시 동작을 멈추었다. 그는 초왕의 말을 믿지 않았다. 천범이가 그를 큰오빠라고 불렀기 때문에 풀어주다니. 그가 본 초왕은 그런 것에 연연하는 사람이 아니다. 그저 그에게 수치심을 주기 위해, 그의 의지를 꺾기 위해 그런 짓을 하는 것이겠지.

백장간이 불쑥 물었다.

“이 얘기가 조정에까지 전해졌다더냐?”

관웅이 별수 없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어디든 쓸데없는 일을 하는 자들이 적지 않습니다. 매일 임안성으로 군보를 보내는데 언급이 안 될 리 있겠습니까?”

“폐하께서는 어떤 반응이시더냐?”

“폐하 곁에는 승상 대인께서 계시니 마음 놓으십시오. 폐하께서도 분명 장군을 믿으실 겁니다.”

관웅이 슬그머니 화제를 돌렸다.

“그보다 그 얘기 들으셨습니까? 폭설로 길이 막혀 초왕이 더는 군량을 받지 못한다고 합니다. 입에 풀칠도 못 하고 있다고 하니, 아무래도 오래 버티지 못할 겁니다.”

“남쪽은 산이 많고 북쪽은 평원이 많으니 지리적으로는 우리가 더 우세한 곳을 차지하고 있지. 하지만 이곳을 지키는 것도 그리 쉬운 일은 아닐 것이다.”

백장간이 자리에서 일어나 겉옷을 입었다.

“가자, 강변을 둘러봐야겠다.”

* * *

강 맞은편 기슭에서는 가동이 매서운 바람을 맞으며 반대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곧이다. 강에 얼음이 얼었으니 곧 쳐들어갈 수 있겠어.”

“얼지 않을 겁니다.”

옆에 서 있던 영구가 그의 말에 찬물을 끼얹었다.

“어째서?”

가동이 의아한 얼굴로 말했다.

“위수강이 매년 어는 강은 아니지만, 그래도 꽝꽝 얼어 버린 적이 많다고. 날씨가 아주 추울 땐 단단하게 얼어서 그 위를 건널 수도 있어.”

“백장간이 얼게 내버려 두지 않을 겁니다.”

영구가 단조롭게 말했다.

“각지에서 구한 소금이 곧 도착합니다.”

가동은 그제야 영구의 말을 이해했다. 강에 소금을 뿌리면 얼음이 잘 얼지 않는다. 설령 언다 해도 단단하게 얼지 않아 그 위를 건너는 건 위험천만한 일이었다.

그가 머리카락을 감싸 쥐며 한탄했다.

“전쟁이 시작된 지 한 달이 넘었는데 왕야께서는 왜 산으로 가지 않으시는 거야. 조금 힘들고 돌아가는 길이긴 해도, 여기서 발이 묶여 있는 것보단 나을 텐데.”

“유격전이 아닌 이상, 산은 전투에 적합하지 않습니다. 한 달은커녕 두 달이 지나도 앞으로 나아가지 못할 겁니다.”

영구가 저 멀리 이어진 능선에 눈길을 주었다.

“폭설에 산길이 모두 막혔으니 만약 그곳에 발이 묶였다간 죽음밖에는 방법이 없겠지요.”

“우리가 쳐들어가기에 불리한 시기라면, 왜 봄까지 기다리시지 않고…….”

영구의 눈빛이 서늘하게 가라앉았다.

“왕야께선 기다리실 수 없었던 것입니다.”

영구는 초왕의 마음을 누구보다 잘 이해하고 있었다. 초왕이 일각도 지체할 수 없는 건, 왕비의 복수 때문이 아닌가.

두 사람이 이야기를 나누는데 막사 안에서 차가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가동은 안으로 들거라.”

가동은 등골이 서늘해졌다. 그간 초왕은 그를 단 한 번도 부르지 않았다. 가동이 급히 답하며 걸음을 서둘렀다.

“소인, 여기 있습니다.”

그는 곧장 발을 걷고 성큼성큼 안으로 들어갔다.

묵용감은 책상 앞에 앉아 눈을 내리깔고 있었다. 그의 옆에 있던 한통은 가동을 보며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가동이 예를 갖추며 인사를 올렸다.

“왕야, 부르셨습니까.”

“그래.”

묵용감이 시선을 올리고 그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백장간의 소금 수송차가 곧 도착할 예정이다. 가서 강탈해 오거라.”

그 순간, 가동은 여느 때보다 벅찬 감격에 사로잡혔다. 마침내 초왕이 그에게 임무를 맡겼다! 더욱이 이리 중요한 임무를 맡기다니. 초왕은 아직 그를 신임하는 게 틀림없었다.

가동이 마음을 추스르며 곧장 무릎을 꿇었다.

“걱정 마십시오, 왕야. 소인이 반드시 임무를 완수하겠습니다. 소인이 좋은 소식을 가지고 돌아올 테니 조금만 기다려주십시오.”

“그럴 필요 없다.”

묵용감의 음성이 건조하게 이어졌다.

“정말 강탈하는 게 아니라 하는 척만 하면 된다.”

“그런 척이라면…….”

“우리가 소금을 강탈하러 왔다고 믿게 하면 된다. 그저 연극이면 족하지. 반드시 백장간을 속여야 한다.”

묵용감이 그를 힐끗 바라보았다.

“이런 건 네가 가장 잘하는 일이 아니더냐.”

조금 전만 해도 가슴이 벅찼었지만, 이제 가동은 울고만 싶었다. 가장 잘하는 일이라니! 초왕의 눈에 그는 그저 사기꾼에 불과하단 말인가…….

이해가 가지 않았던 가동이 조심히 물었다.

“왕야, 왜 강탈하는 척만 해야 합니까? 소금을 강탈해 오면 저들이 소금을 뿌리지 못해 수면이 얼 테고, 우리 군이 강을 넘을 수 있을 텐데요.”

그때 한통이 뜸을 들이다 입을 열었다.

“백장간이 강이 어는 것을 원치 않으니, 그자의 뜻에 따라주는 것이지.”

가동은 여전히 아리송한 표정이었지만, 묵용감은 별다른 설명도 없이 다른 명을 더했다.

“이 일을 마친 후에는 수성으로 돌아가거라.”

그 말에 가동은 울상이 되었다.

“왕야, 소인이 더는 필요 없으신 것입니까?”

묵용감이 그를 바라보며 또박또박 말했다.

“수성은 본왕의 집이다. 네게 그곳을 맡겼지만 네 직무를 다하지 못했지. 이번에는 본왕을 실망시키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가동은 그저 멍하니 초왕을 바라보았다. 초왕에게는 왕비와 세자가 있는 곳이 집이 아니던가. 지금 그를 돌려보낸다면, 무슨 의미가 있을까? 대체 무엇을 지키려고?

* * *

백장간은 이튿날 아침이 되어서야 소금을 수송하는 마차가 기습을 당했다는 사실을 전해 들었다. 다행히 대비를 해 둔 덕에 대기하고 있던 병력이 습격에 곧바로 대응했다. 격렬한 교전이 이어졌지만 피해가 그리 크진 않아, 병사들은 무사히 군영으로 마차를 수송할 수 있었다.

그는 강가에 서서 생각에 잠겼다. 그간 많은 눈이 내린 탓에 수면에는 얇은 얼음이 떠 있었다. 병사들이 밤새 강변을 지키며 창으로 얼음을 깨긴 했지만, 그걸로는 어림도 없었다. 마차가 오는 대로 굵은 소금을 뿌려야 그나마 마음을 놓을 수 있을 터였다.

그가 맞은편 기슭으로 시선을 옮겼다. 지금쯤 초왕은 몹시 초조할 터였다. 군량을 받지 못하면 사병들은 얼마 버틸 수 없다. 아무리 군대를 엄히 다스린다 해도 어쩌겠는가. 정신력만으로는 굶주린 배가 채워지지 않는 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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