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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유왕비초장성 (439)화 (438/1,192)

제439화

이곳은 산길이 험해 전투를 하기에는 적합하지 않았다. 한쪽은 깎아지른 듯한 절벽, 다른 한쪽은 가파른 언덕이었다. 좁은 길에서 적을 만나면 결국 용감한 자가 이기는 법이었다.

초왕이 손을 내젓자 뒤쪽에 있던 병사들이 곧장 멈춰 섰다. 그는 눈을 가늘게 뜨고 맞은편에서 다가오는 이를 유심히 살폈다.

묵용감은 백천범이 늘 그리워하던 큰 오라버니라는 자를 궁금해했다. 더러는 질투가 나기도 했다. 큰 오라버니를 찾을 때면 백천범의 두 눈은 밝게 빛났고, 목소리에도 그리움이 잔뜩 실려 있었다.

그녀는 유모가 떠나던 그 날 밤, 큰 오라버니가 자신을 안고 밤새 위로해 주었다고 했다. 그가 그녀에게 온기를 나누어 준 그 차디찬 밤은 그녀가 영원히 잊지 못하는 시간이 되어 있었다.

자세히 살펴보니 백장간은 백여름과 그리 닮진 않았다. 백천범과도 닮지 않은 외모는 아무래도 어머니를 닮은 듯했다. 물론 준수한 외모를 자랑하고 있었다. 얇은 쌍꺼풀이 진 눈에 오뚝한 콧날, 약간 핼쑥한 볼까지. 갑옷을 입지 않았다면 고상한 서생으로 봤을 터였다.

백장간도 초왕을 유심히 살피긴 마찬가지였다. 처를 목숨처럼 아낀다는 소문과 달리 처자식을 죽게 한 사람이 어떤 면상을 가졌는지 보고 싶었다. 위에서부터 죽 훑어보니 체격은 나쁘지 않았다. 제법 위엄이 느껴지기도 했다.

그러나 백천범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았다. 초왕은 차갑고 매서운 분위기를 지닌 사람이었다. 그런 이는 누군가를 따뜻하게 대할 사람이 아니었다. 가여운 천범이는 분명 그를 두려워했을 것이다…….

묵용감이 차가운 목소리로 운을 떼었다.

“네가 백장간인가?”

백장간도 지지 않았다.

“네가 묵용감인가?”

묵용감이 냉소를 지었다. 참 가소로웠다. 그가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본왕을 불러들였으니 어찌할 셈인가?”

초왕에게 속셈을 들켰지만, 백장간은 의연하게 답했다.

“오랜 시간을 싸웠는데 서로 얼굴은 봐야지. 지난번 관저에서 만나지 못해 참 유감이었다. 해서 이번에 보자고 한 것이지.”

“역시 너였군.”

묵용감이 말했다.

“담이 크구나. 감히 내 관저에 발을 들이다니.”

“못 갈 것도 없지.”

백장간이 무표정한 얼굴로 그를 주시했다.

“여동생의 조문을 간 것인데, 가면 안 되었단 말인가?”

묵용감은 묵묵히 그를 응시했다.

일부러 백천범 이야기를 꺼냈지만, 초왕의 얼굴에는 어떠한 동요도 없었다. 이제는 슬퍼하는 척도 하지 않는단 말인가? 순간 분노가 치솟은 백장간이 검을 뽑아 들고 그에게 달려들었다.

“내 여동생을 돌려내라!”

영구가 병사들을 이끌고 묵용감을 지키려 했지만, 묵용감이 매서운 시선을 보내며 그를 말렸다. 다시 고개를 돌리자, 어느새 차가운 칼날이 코앞까지 다가와 있었다. 그는 몸을 뒤로 눕히며 검을 뽑아 들었다. 두 검이 맞닿으며 맑은 소리가 허공으로 흩어졌다.

영구가 손을 휘둘러 뒤쪽에 있던 병사들을 조금 더 후퇴시켰다. 초왕과 백장간이 맞붙을 수 있게 큰 자리를 내어줄 생각이었다. 사실 두 수장이 이렇게 좁은 산길에서 맞붙을 줄은 몰랐던 터였다.

백장간의 손놀림은 역시나 묵용감을 따라오지 못했다. 그러나 그가 목숨을 내놓을 각오로 싸웠기 때문에 대결이 생각보다 길어지고 있었다. 문제는 백장간이 탄 말이었다. 말이 겁을 먹고 발을 헛디디자, 말은 언덕 아래로 구르고 말았다.

무방비 상태였던 백장간도 말과 함께 몸이 기울었다. 그 순간 불쑥 몸을 날린 묵용감이 그의 옷깃을 낚아챘고, 영구가 백장간을 넘겨받았다. 포승줄을 준비해 둔 사병들은 잽싸게 그를 묶어 말에 태운 뒤, 단숨에 산을 내려가 버렸다.

백장간의 병사들은 잠시 얼이 빠져 서 있었다. 너무나도 물 흐르듯 일어난 일이 아닌가. 그러다 정신을 차린 병사들은 황급히 그들을 뒤쫓았다.

묵용감은 아랑곳하지 않고 전속력으로 질주했다. 앞으로 치고 나간 묵용감은 영구가 데리고 있던 백장간을 자신의 말에 옮기더니, 그대로 멀어져 갔다.

먼 곳까지 달려온 묵용감은 뒤쪽에서 들리는 난폭한 소리에 고개를 돌아보았다. 역시 격렬한 전투가 일어나고 있었다. 백장간의 부하들이 목숨을 걸고 자신들의 수장을 되찾으려는 듯했다.

영구를 믿었던 묵용감은 그다지 걱정하지 않았다. 그는 백장간을 데리고 빠르게 앞으로 내달리는 데 집중했다. 점점 싸우는 소리가 희미해졌지만, 그는 속도를 멈추지 않았다. 얼마나 달렸을까, 말이 별안간 울부짖으며 발을 높게 쳐들더니 솟아오른 밧줄에 걸려 그대로 넘어졌다.

묵용감은 빠르게 몸을 틀어 무사히 착지했지만, 숨어 있던 병사들이 우르르 튀어나와 그를 에워쌌다.

백장간을 묶고 있던 포승줄도 누군가 풀어준 뒤였다. 백장간은 뒷짐을 지고 서서 기세등등한 표정으로 묵용감을 바라보았다.

묵용감도 그를 빤히 응시했다.

“역시, 실력이 제법이구나. 스스로 미끼가 되어 날 낚아채다니. 백여름 그 여우 같은 작자가 여우 같은 아들을 길렀군.”

자신과 아버지를 함께 욕했지만, 백장간은 오히려 박장대소를 터뜨렸다.

“초왕이 전투에 능하다고 소문이 자자하던데, 내가 보기에는 같잖을 따름이구나. 전쟁에서는 속임수도 마다하지 않는 법인데 들어보지도 못했단 말인가?”

묵용감은 검을 움켜쥔 채 병사들을 천천히 바라보다 미간을 찌푸렸다. 한눈에 봐도 잘 훈련된 정예 병사들이다. 우람한 체격의 병사들은 검과 창을 들고 포위망을 좁혀왔다.

결국 초왕은 홀로 수많은 병사와 맞서 싸울 수밖에 없었다. 위험천만한 상황이었지만, 그는 동요하지 않고 화려한 검술을 뽐냈다. 그의 칼끝이 스친 곳엔 병사들의 참혹한 비명만이 남았다.

전투의 양상을 본 백장간은 적잖이 놀랐다. 그간 호사스러운 생활을 누리며 안일하게 지냈을 터인데, 이토록 굉장한 실력을 갖추고 있을 줄이야. 초왕은 수많은 적의 공격을 견디면서도 두려워하는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빠르게 병사들 사이를 누비는 모습은 교룡蛟龍을 연상케 했다. 비록 적이었지만 감탄이 절로 나왔다.

그러나 이자는……. 백장간은 마음을 굳게 먹고 손을 들어 올렸다. 숲속에 매복해 있던 궁수들이 곧장 자리에서 일어나며 묵용감을 향해 쇠뇌를 조준했다. 백장간이 입을 여는 순간, 화살이 묵용감의 온몸을 관통하리라.

백장간이 소리쳤다.

“물러나거라!”

묵용감과 뒤얽히던 정예병들은 우르르 흩어지자, 묵용감 홀로 살아 있는 표적이 되고 말았다. 그가 아무리 수많은 적과 맞서 싸운다 한들, 날아드는 화살까지 어쩌진 못하리라. 기대에 들뜬 병사들은 잔뜩 흥분한 기색을 보였다. 이곳에서 초왕을 죽일 수만 있다면 그보다 더한 영예가 없을 터였다.

덩그러니 남겨진 묵용감은 허리를 꼿꼿하게 펴고 거만한 표정으로 백장간을 바라보았다.

“이렇게 하면 날 죽일 수 있을 줄 알았느냐?”

“어째서 불가능하단 말인가?”

백장간이 자신감 넘치는 어조로 말했다.

“내 궁수들은 백발백중이라 산 표적이라 한들 쉽게 명중시킬 수 있지.”

묵용감이 그를 응시하며 담담히 말했다.

“그럼 그리해 보든가.”

백장간은 수치심에 화가 치밀었다. 이런 상황에서도 저 고귀한 머리는 꺾이지 않았다. 정녕 활이 자신을 뚫지 못할 거라 여긴단 말인가?

“그래, 내 매부였으니 유언을 남길 기회는 주지. 하고 싶은 말이라도 있는가?”

묵용감이 입을 열려는데 백장간이 갑자기 말을 채갔다.

“만약 내 여동생과 합장을 논할 생각이라면 그 입 다무는 게 좋을 것이다. 내가 절대 용납하지 않을 것이니.”

그 짧은 순간, 묵용감은 모든 걸 내려놓았다. 이곳에서 숨을 거둔다면 황천길로 떠난 그의 천범이 아직 멀리 가지 못했으리라. 그럼 금방 뒤따라갈 수 있었다. 그래, 저승에서 그녀와 함께 있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행복할 터였다.

그의 침묵에 백장간은 천천히 손을 들어 올렸다. 백천범을 죽게 한 자를 절대 용서할 수 없었다.

“쏘아라!”

수많은 화살이 한 사람을 향했다. 곧 그의 온몸에 화살이 꽂히리라. 그러나 묵용감은 냉정한 표정으로 검을 휘둘렀고, 검신으로 자신을 지켜냈다. 화살촉이 칼에 튕겨 나가며 팅탕거리는 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백장간의 얼굴이 굳어졌다. 설마 첫 번째 화살을 죄다 쳐낼 줄이야. 과거 초왕이 서한西汗을 칠 때, 상대 병사들로 가득한 진영에서 군주의 목을 베어 왔다던데, 지금의 몸놀림을 보면 헛소문이 아닌 듯했다.

물론 그렇게 대단한 자라 한들 두 번, 세 번 연이은 공격까지 피하긴 어려울 터였다. 그의 궁수들은 이미 두 번째 화살을 매기고 있었다.

마지막 한 발마저 검에 맞아 땅에 떨어지자, 묵용감은 검을 내리고 약하게 숨을 내쉬었다. 그가 다시금 태연한 얼굴로 백장간을 바라보았다.

“또 보여 줄 게 남았느냐?”

백장간이 손을 들어 올리며 소리쳤다.

“다시 쏘거라!”

그의 명이 떨어졌지만, 궁수들은 아무도 활시위를 당기지 못했다. 의아함에 고개를 돌린 백장간의 눈에 은색 갑옷을 입은 사병들이 나타났다. 그들이 쥔 검은 이미 궁수들의 가슴을 관통해 핏빛 안개를 일으키고 있었다.

백장간은 순간 멍해졌다. 대체 어찌 된 일이란 말인가? 저들은 어디서 나타난 자들이란 말인가? 아무 소리도 없이 그의 병사들을 해치우다니, 정예병들은? 그가 급히 주변을 둘러보았다. 저 멀리 수풀 곳곳에 수많은 시체가 널브러져 있었다…….

그는 서둘러 몸을 돌려세웠다. 판세가 완전히 뒤바뀌고 말았다. 이번에는 초왕의 병사들이 그를 에워쌌다. 그는 곧장 허리춤에서 검을 뽑아 들고 비웃음을 흘렸다.

“그래, 내 목숨을 빼앗으려거든 어서 덤비거라.”

묵용감은 초연한 얼굴로 그를 바라보다 명령을 내렸다.

“저자를 잡아 오거라.”

이윽고 말에 올라탄 그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내달렸다.

백장간이 이를 갈며 소리쳤다.

“묵용감, 네가 날 죽이지 않는다고 해도 내가 널 죽일 것이다! 반드시 여동생의 복수를 하고 말겠다!”

순간 묵용감은 고삐를 힘껏 당겨 말을 멈춰 세웠고, 그 자리에서 잠시 생각에 빠져들었다. 그가 말을 돌려세워 백장간 앞에 섰다.

백장간은 사병들에게 붙잡혀 이미 포승줄에 묶인 상태였다. 사병들이 그를 말에 태우려 했지만, 죽어도 타지 않겠다며 있는 힘껏 저항했다. 전쟁터에서 전사하는 한이 있어도 포로가 되고 싶진 않았다.

만약 이 상황이 소문이라도 난다면 선조들의 명예에도 제대로 먹칠을 하는 셈이다. 이제 막 전쟁을 시작했는데 수장이, 그것도 이런 철천지원수에게 생포되다니! 수치심이 하늘을 찌르는 일이 아닌가.

묵용감은 몸부림치는 백장간을 차가운 눈빛으로 바라보다 입을 열었다.

“저자를 놓아주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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